그 남자 264 : 아름다운 저항시인 이육사 이야기
고은주 지음 / 문학세계사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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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4

 

수인번호를 그대로 음역해서 쓰다가 냉소적인 글자로도 바꾸어 보고 식민지의 역사를 베어내려는 뜻도 담아 보았을 때, 그의 눈빛은 사납게 빛나고 있었으리라 (p.40)

 

이육사, 그는 본명보다는 필명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첫 번째 옥살이때의 수인번호를 필명으로 사용해 저항시인의 대표주자로 교과서적으로 알고만 있었다. 실존인물을 소설화한다는 건 참 쉽지 않는 일이다. 특히나 민족사적으로 촉망받는 위인의 행적에 허구를 더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넣을 수 있을지, 빼야할지 많은 고심을 했을 것이다. 고은주 작가의 장편소설 <그 남자 264>는 소설이되, 소설이 아니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가슴 졸이며 읽었다. 광야, 절정, 청포도과 같은 이육사 시인의 대표 시는 사실 해석하기도 어렵거니와 읽으면 읽을수록 쓸쓸한 맛이 감돈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데 그는 펜을 들어 시를 썼고 의열단의 단원으로서 총을 들었다. 이육사 시인이 의열단의 행동단원으로는 활동하지 않았다지만 모든 굳은 일을 처리하며 열일곱 번이나 옥고를 치렀으니, 그의 강인한 정신력은 어지간한 행동대원들 못지않았으리라 싶다.

 

<그 남자 264>는 이육사 시인과 동해책방의 여주인과의 우연한 만남으로 시작된다. 청포도를 발표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가난 때문에 생활전선에 뛰어든 책방의 여주인은 이육사 시인의 열렬한 독자로 자신의 책방에 들른 그를 바로 알아본다. ‘청포도를 읽으며 아름다움을 느꼈다는 그녀를 힐난하자 신여성의 행태를 비난하기 위해 그가 번역한 보들레르의 모멸의 서를 인용하여 그의 편협함을 꼬집는다. 이육사를 흠모했던 그녀는 짧은 만남에도 자신도 모르게 그에게 빠져든다. 그 남자, 이육사가 나의 골방에 들어설 때부터 그 방은 내게 감옥이 되었다(p9)는 그녀의 감상은 정녕 사실이었으니. 그가 책방에 올 때까지 언제고 기다린다.

 

육사 시인이 위험한 일에 가담했다는 건 다음 방문에서 알 수 있었다. 한 밤중, 대뜸 서점으로 찾아와 몸을 숨겨달라는 그와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며 그녀의 마음은 점점 더 깊어진다. 큰일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으나 처남의 고발로 손발이 묶여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식인의 고뇌를 함께 나누며 사랑과 우정사이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사이로 발전한다. 그녀가 그의 소식을 들을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그의 작품 뿐, 그의 애독자로서, 또 한 사내를 마음의 품은 여인이 되어 그의 소식만을 오매불망 기다린다.

 

그는 투사 이전에 시인이었다. 투쟁이 끝난 이후엔 예술가로 살아가기를 꿈꾸는 (p127).

 

조부에게 중용과 대학을 배우던 소년이 학교에서 물리니 화학이니 하는 것을 배우고 멀리 나아가 공리주의, 실용주의, 자본주의, 공산주의, 또 무슨 주의들을 알게 되면서 얼마나 많은 혼란과 갈등을 겪었을지 그대는 짐작이나 할 수 있겠소?(p56).

 

퇴계의 후손으로 정도를 하늘처럼 생각했으나 시대는 그의 혼란만을 가중시켰다. 그의 재능은 시대를 빗나가 오직 예술가가 아닌 저항시인으로 후세대에 기억되니, 참 박복하다 싶다. 더욱이 안타까운 건 광복이 오기 전 차가운 감옥 속에서 생을 달리한 것이 어쩌면 분열된 한반도를 보지 않아 더 다행이란 생각이 들 때 인 것 같다. 정체성의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는 시기에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했고 오로지 예술가로서만 살 수 없었던 시대가 아쉬울 따름이다.

 

동해서점의 여주인과 육사는, 서로의 고민을 들어주며 연애라고 단정짓기엔 참 애매모호한 감질 맛 나는 사랑을 키워나간다. 당시 조혼풍습이 성행했던지라 도시로 나온 남자들은 대부분 이미 처가 있는 몸이었다. 육사 시인도 마찬 가지, 미혼의 신여성과 고향에 처가 있는 남자의 연애가 유행처럼 흔한 시대였지만 그들은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서로의 마음을 인정한다. 육사 시인은 그대의 마음에만 발표하련다는 말과 해후란 시를 남기며 영영 이별을 맞았다.

 

이 소설의 특징은 시점이 과거와 현재를 오간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이육사 시인과 동해책방의 주인의 이야기가 주가 되었다면 현재에 이르러서는 동해책방 주인의 조카딸과 이육사 시인의 외동딸이 만난다. 오랜 세월이 흘러서야 동해이모가 쓴 원고를 손에 넣은 여인은 시인의 외동딸에게 원고를 건네며 육사 시인에 대해 더 알게 된다. 아버지 이육사라는 색다른 모습을 들으며 육사 시인에 더 빠져든다. 엄마는 딸이 글쟁이가 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원고를 숨겼으나 자식을 잃고서 그녀의 손에 들어온 육사와 동해이모의 원고는 그녀의 마음에 새로운 울림을 준다. 그 깨달음이 무엇일지 참척의 슬픔을 겪은 그녀 앞에서 감히 알 수 없지만, 이제 그녀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게 된다. 여기까지 오게 되었던 그 이유를 말이다.

 

칼날처럼 서늘하고 차갑기 그지없는 이육사만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도 인간이지 않았을까, 이 책을 읽으며 상상해본다. 왜 이런 시를 발표했을까 궁금해 하지 않았던 그의 시를, 그가 어떤 마음으로 이 시를 썼을지 생각해 볼 수 있게 한다. 어디까지 허구이고 어디까지 진실일지 독자는 알 수 없지만 저항시인 그 이상의 육사를 만날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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