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283 인간이 일등칸에 타고 문학을 화물칸에 싣게 된다면, 이 세상은 개떡같이 끝장나고 말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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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신 마르케스 할배의 [백년의 고독]이라는 책중에 마꼰도로 찾아온 집시서커스단의, 매일 같은 시간에 머리가 잘리는 운명을 타고난 여자가 아주 짧게 언급돼.

내 상상으로는 아마 이럴거야. 멈췄던 시계추가 갑자기 똑딱거리는 소리에 깜짝 놀란 고양이의 눈동자처럼 신기하고 무시무시한 광경을 보기 위해 관중들이 꾸역꾸역 모여드는 거야. 웅성대는 좌중을 둥 둥 북소리로 제압하고는 앞머리는 소녀시대, 뒷머리는 석기시대인 한 미친 눈빛의 여인네가 나타나는 거지. 수 천 번 이상 목이 잘려봤기 때문에 이제 두려움 따위는 없고 오히려 이번엔 제 목을 어디로 튀게 해야 집어 가기 편할까라는 여유로운 생각을 숨긴 채, 거짓으로 공포심에 온몸을 떠는 척하며 제 피로 온통 쵸콜릿색으로 변색된 단두대에 목을 거는 거야.

뎅.강.

목이 잘리면 벌떡 일어나 목에 달린 입의 익숙한 지시대로 더듬는 척 목을 찾아 겨드랑이에 끼고는 사라졌다가 잠시 후-피를 다 뿜어냈기에-곰표밀가루처럼 창백한 얼굴을 하고 아주 온전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거야. 사람들은 그 고통을 매번 겪어야하는 여인의 운명에 잠시 비통해하다가 돌아갈 때 쯤 자신들의 목을 한 번 훑어내리고는 제자리에 붙어있는 걸 확인하며 안도의 한숨을 쉬겠지. 좀 전의 비통따위는 다 잊은 채 말야.

오늘 점심으로 3인분을 시켰는데 중량으로는 2인분이 될까말까한 대패삼겹살을 심사 뒤틀린 채 먹고 나와서 하나로마트에 사무실에 필요한 간식거리를 사러 갔어. 입구계단에서 제 몸을 가누기도 힘들어 보이는 할머니가 소아마비성인지 심하게 뒤틀어진 다리를 끌며 계단 난간을 간신히 짚어가며 한 발 한 발 떼는 한 사내를 부축하고 있더군. 그렇지. 여기 이렇게 잡을까? 옳지. 마치 아기를 다루는 엄마처럼. 머리를 빡빡 깎은 작은 체구의 사내는 그 보다 더 작은 어미의 손을 잡고 자꾸만 땅에 달라붙으려는 신발과 싸우며 평생 제 어미 눈을 못맞춰봤을 사시의 눈동자를 위 아래로 굴려 어미를 바로 보려했어.

평생 흔들리는 어머니였고. 평생 흔드는 아들이었겠지. 평생을 사내의 어그러진 얼굴을, 다리를, 인생을 바라봤을 노파의 죄책감과 썩어 터지고 갈라지고 말라붙은 가슴팍이 느껴지더라. 삶은 치사하고 신은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었어. 선택이란 게 없었을 태생적 기형과 태생적 고난은 도대체 무엇에 대한 형벌인걸까. 그는 기억도 못하는 전생의 무슨 죄악에 대한 댓가인걸까. 혹시 신은 다트판에 아무렇게나 다트를 던져 10점 나온 운명은 억만장자로 1점 나온 운명은 천형을 안고 일생을 살게끔 만들어 놓은 건 아닐까. 인류를 포함한 생물의 수가 너무 많아서 이제 하나하나 설계하기가 귀찮아진거야. 고깃집의 부정은 차치하고서라도- 고작 대패삼겹에 심사뒤틀린 나. 대패삼겹살 일억톤이 와도 바꾸지 못할 저 비틀린 삶. 돌멩이와 우주만큼 커다란 차이 아닌가.

몇가지 물품을 사서 나왔어. 낮인데도 어둑스런 잿빛사위는 몹시 불안해보였고 차갑게 목덜미를 쑤시는 칼바람이 홱홱 날라다녔어. 한 두 방울 떨어지던 빗방울이 어느새 촘촘해지더니 요즘들어 가뜩이나 나빠진 시야를 빗살치듯 흐뜨러트렸어. 아, 겨울의 반항이군. 그래 겨울은 어쩌면 서커스단의 그녀를 닮은 것일지도 모르겠어. 매년 3월이면 늘 이렇게 탄식의 눈물을 흘리며 잠시 앙칼지게 대들어보지만 결국 거부할 수 없는 기요틴에 목을 내밀어야 하는 신세니 말이야. 시간보다 더 먼 옛날, 지구가 태양을 돌기 시작한 바로 그 때부터 소멸과 부활을 반복하는 계절의 지긋지긋한 순환처럼.

그래도 겨울아, 봄아, 여름아, 가을아, 너흰 부활이라도 하잖니. 그것이 목숨을 끊고싶을 정도로 지긋지긋하더라도, 그렇더라도 너흰 그 새 삶을 살아보기라도 하잖아. 뒤틀리고 흔들린 한번 뿐인 쩨쩨한 삶은 아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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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역따윈 나도 한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19 파리대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은 `무엇보다도` 중역이나 축역을 완전히 배제한, 원문에 충실한 번역을 자부하였습니다. 특히 해당 언어와 문학을 공부한 전공자들이 번역을 맡아, 저자의 의도를 충분히 살려 냈다는 점에서 다른 문학번역서와 차이가 있습니다˝

XX!! (내가 얼마나 화가 났으면!)
위는 민음사카페에서 본 2009년 어느 독자(들)의 빗발치는 재개정 요구에 자동응답식 댓글의 내용이다.
발번역으로 지탄을 받은게 몇년이 지났는데 오탈자말고 번역기수준의 번역이 아직도 그대로다. 와~ 내가 정말 인내심가지고 읽어보려했는데...

친구끼리 지나가는 말로 What are you doing?(뭐하냐?)하면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는중입니까?˝ 식으로 번역하는게 원문에 충실한건가? 초등1학년 번역만도 못하다. 지금은 쓰지 않는 듣도보도 못한 고어들, 지금 날개나 배따라기같은 근대문학 읽는건가. 뜻만 간신히 통하는 뜬금없는 단어들. 상황, 주변묘사는 얼마나 개떡같은지 머릿속에 그림이 거의 그려지지가 않는다. 번역에 왠 사투리.. `나는`을 `내는` 이라하질 않나...갱상도분이신가...12살짜리가 이게 무어냐라는 말투를 쓰나? 또 , 어렵쇼!는 뭐지. 어렵쇼!가..심지어 어처구니 없는 일본어 잔재들까지.

심지어 2014년 판인 내 책. 약 60페이지 읽다가 도저히 읽어낼 수가 없어 이상하다 싶어 찾아보니...햐... 민음사에 이런 번역이 있다는게 믿기지 않는다. 민음사는 세계문학번역으로 유명했고 지금까지 읽은 책들은 거의 문제 없었다. 그런데.... 이유가 있는것 같다. 이 책 번역자가 민음사 편집위원중 한 명이네? 절대 그럴일은 없겠지만, 민음사직원님들아, 지금 높으신 편집위원 눈치보기하시나요? 뭔 배짱으로 이 책을 계속 팔아먹는 거죠? 공부는 많이 한 분인데 미안하지만 번역은 안했으면 좋겠다. 제발. 동일인이 번역한 제인에어 읽을 때도 약간 갸우뚱한 부분이 있었지만 큰 문제없이 읽은 기억이 나는데.. 이건 도저히 못봐주겠다. 이래서 번역은 제2의 창작이라고 하나보다.

민음사도 마찬가지지만 역자는 자신의 커리어에 오점 남길까 두려워 재개정도 안하고 다른 역자로 변경도 안하는건가 솔직히 의심이 든다. 돈 주고 책 산 독자들은 골탕먹어도 되나? 번역에 문제없다고 말하는 거 너무 뻔뻔하다. 이 책을 세계문학의 첫권으로 만난 사람은 아마 원래 세계문학은 이렇게 뭔말인지 모르는 고상한 거구나 하며 다른 명작들 볼 기회를 자진박탈할지도 모르겠다.


* 참조
http://blog.jinbo.net/anonymous/i/entry/%EA%B6%8C%EB%A0%A5-%EA%B4%80%EA%B3%84%EC%9D%98-%EC%A0%84%EB%B3%B5%EC%9D%84-%EA%BF%88%EA%BE%B8%EB%8A%94-%EC%99%9C%EA%B3%A1%EB%90%9C-%EC%96%B8%EC%96%B4%EC%9C%A0%ED%9D%AC%EB%A5%BC-%EB%84%98%EC%96%B4-1#_post_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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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 1977

- 자작 150228

1977, 담과 담이 붙어있고
어른키만한 골목을 사이에 둔
집과 집이 마주한 녹먹은 철문들
끼이익, 한겨울 아침을 열면
건너 집 대문액자속, 쥐슬은 마루아래
찌그러진 양은대야 펄펄 끓는 물,
찬물로 간을 맞춘 세숫물이 대령됐고
대야에 얼굴 담근, 청춘 간 아버지들
파아파아 푸루루 새벽잠을 씻어냈다

노란 다이알비누 허멀거니 녹은,
더운 김 모락모락 세숫물
액자밖으로 *쫙 매몰차게 끼얹였다

더러운 물벼락에 깜짝 놀란 마당
막막한 공간 너머 미지의 세상을 향해
지렁지렁 세계전도로 번져나갔고
아버지들보다 더 부지런했을,
새벽잠 설친 노인들의
저마다의 무기력을 거부한
빈틈없는 싸리빗자국으로
수치스럽게 핥아져있었다

출구를 잃어 덩어리진 아침먼지
집집마다 뜸드는, 느글거리는 밥냄새를
올라타고 길다란 골목을 탈출했다

*********

오늘 아침에 아이를 방과후 학습에 데려다주고 컷트클럽에서 칠천원 주고 머리를 오린 후 문득 생각난, 유년의 기억을 더듬었다.

*김사인의 [겨울 군하리]라는 시의 싯구에서 모티프를 얻었다. `이발소 자리 옆 정육점 문이 잠시 열리고
누군가 물을 홱 길에 뿌리고 다시 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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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군하리]

-김사인

쓰다 버린 집들 사이로
잿빛 도로가 나 있다
쓰다 버린 빗자루같이
나무들은 노변에 꽂혀 있다
쓰다 버린 담벼락 밑에는
순창고추장 벌건 통과 검정 비닐과 스티로폼 쪼가리가
흙에 반쯤 덮여 있다
담벼락 끝에서 쓰다 버린 쪽문을 밀고
개털잠바 노인이 웅크리고 나타난다
느린 걸음으로 어디론가 간다
쓰다 버린 개가 한 마리 우줄우줄 따라간다
이발소 자리 옆 정육점 문이 잠시 열리고
누군가 물을 홱 길에 뿌리고 다시 닫는다

먼지 보얀 슈퍼 천막 문이 들썩 하더니
훈련복 차림의 앳된 군인 하나가
발갛게 웃으며
신라면 다섯개들이를 안고 네거리를 가로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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