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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와 칼 - 일본 문화의 틀
루스 베네딕트 지음, 김윤식.오인석 옮김 / 을유문화사 / 2019년 8월
평점 :
혹시 여러분들은 어떤 대상을 이해하기 위해 직접적으로 경험을 해야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아니면 사유와 조사, 그리고 분석만으로도 최대한 객관적으로 어떤 현상과 대상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대다수의 경우 우리는 전자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예외적인 경우가 문화인류학에 존재하고, 여전히 이해관한 저서는 전세계 지성인들에게, 인류학자들에게, 그리고 일본에 대해 알려는 일반 독자들에게 경종을 울립니다. 바로 루스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이 그것입니다.
20여년만에 다시 만난 <국화와 칼>의 '온'
문화인류학자 루스 베네틱트의 <국화와 칼>은 아주 오랜만에 만난 소설입니다. 제가 10대 중반에 만났으니 이미 20여년이 지난 인류학 서적입니다. 당시는 아무것도 모를때지만, 가장 기억 나는 것은 일본인이 가지고 있는 문화의식 '은'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개정판인 <국화의 칼>에서는 이를 '온'(恩)이라고 표현합니다. (온은 일본어표기, 은은 한자식 표기이니 예전에는 한자식 표기를 했을 것입니다
'온'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일본인의 특유의 문화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때로는 무한한 헌신을 얘기하기도 하고, 은혜를 잊지 않는 발로도 표현하기도 합니다. 부모에게서 온을 친구에게서도 온의 은혜를 입었다하기도 합니다. 일본의 한 지하철역에 있는 강아지의 동상(아마 하치일 겁니다)은 일본 특유의 정서인 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온'을 지킬것
하지만 때로는 배려로 표현되기도 하는 윤리적인 채무이기도 한 '온'은 그것이 일본인 개인이 아닌 단체가 집단이 '온'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는 무섭게 변신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천황의 은혜를 갚기 위해서, 그리고 사회가 나에게 해준것에 대한 '온'을 보답하기 위해서는 전쟁도 불사르지 않고 '각자의 위치에 서서 최선을 다하는'것이 왜곡되기 때문입니다. 예전 신오오쿠보에서 사고가 났을때 그 누구도 달려가지 않고 한국인 이수현이 희생했던 상황을 보면 어떤 사고가 일어났을시 수수방관하는 것은 무관심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혀서는 안된다는 '온'의 정신이며, 희생한 이수현님을 기리는 것 역시 또한 일본인들이 가지고 있는 '온'의 감사함이 반영된 것이기도 합니다.
루스 베네딕트는 이와 함께 일본인들의 '스미마셍'에 대한 말을 통해 정말 한번도 일본에 가보지 않은 학자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촌철살인을 합니다. 일본에 거주해본 경험이 있는 저로서는 그들의 스미마셍이라는 표현은 감사합니다. 혹은 죄송합니다라는 한국인 특유의 직3설적인 표현과는 다른 내용입니다. 그보다는, 특히 모르는 사람이 길거리에서 부딫치면서 하는 스미마셍은 영어의 Excuse me롸는 다른 우리는 모르는 사이니까 조금이라도 마음의 빚을 상대방에게 지기 싫기 때문에 하는 방어적인 말에 가깝습니다. 마음속의 괴로움을 갖지 않기 위한 하나의 방편인 것입니다
그렇게 오명을 씻어낸다, 라는 정신
이런 '온'의 정신과 함께 일본에 있어 기리(義理)라는 것은 자신의 명성에 오점이 없도록 하는 의무입니다. 이는 어쩌면 앞서 말한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과도 일맥상통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들이 가진 이름에 대한 기리의 훼손이 되었다는 것, 예를 들면 누구덕분에 누가 큰 피해를 입었거나 가족의 명예를 실추했다는 것은, 혹은 집단에 있어 기리를 지키지 못했다는 것은 온과는 대척점에 서서 그들이 주창하는 덕이 되었고 지금의 일본적인 가치의 중심이 된 사상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그들이 가장 싫어하는 수치와도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국화와 칼>은 앞서 말한 '온'과 '기리'에 대한 것을 본격적으로 탐구하면서 일본인도 모를 수 있는 일본과 일본인에 대해 탐구하는 서적입니다.
국화와 칼, 부드러움속의 날카로움을 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일본문화에 대해 이야기 하는 서적의 제목이 <국화와 칼>이 된 이야기는 무엇일까요? 국화는 일본의 황실을 상징합니다. 백성들이 칭송하고 떠받들여야 하는 그런 존재이면서도 수그리는 겸손함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칼은 날카롭습니다. 루스베네딕트는 문헌조사와 이야기를 통해 부드러움속에 날카로움을 품고 있는 일본의 이중적인 모습을 본 서적을 통해 기술하고 싶었을 것이고, 이는 서적의 저술을 시작한 1944년에 일본의 진주만 공습과 그리 먼 시기가 아니었다는 것도 서적의 제목의 이유가 될 것입니다.
본질을 아는 것은 물리적 거리에 따르지 않습니다.일본인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합니다. 그것은 일본을 여행하지 않고 '거주'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느낄 수 밖에 없는 사실입니다. 오랫동안 일본어를 써왔았었고 많은 일본 지인들이 있던 저 역시 여전히 일본과 일본사람, 일본문화의 호불호를 떠나 이해하기 어려울때가 많습니다. 특히 요즘같이 민감한 시기에 우리는 일본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저는 이러한 시기야 말로 <국화와 칼>이 더욱 빛을 내는 서적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나의 문화를 이해한다는 것은 많은 사유와 고민, 그리고 담론을 통해서 나온 것입니다. 70여년전 쓰여진 고전을 읽고 또 읽으며 다시 만나게 된 고전의 진리의 대단함을 깨달으면서, 다시 한번 문화와 이를 연구하는 목적은 결국 다른 세상에 조금 더 다가가기 위한 교두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