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7
정용준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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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스토리 자체는 흥미를 끌만한 것이 전혀 없었다. 아마 작가님도 그걸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뭔가 ‘금기’라고 하기엔 너무 극단적이지만 뭔가 얇디 얇은 피부아래 거대한 인간의 생명을 움직이는 조직(系)이 있는 것처럼, 죄의 결과로 드러난 ‘살인’이라는 구체적 행위 ‘악’ 혹은 ‘죄’를 들여다보게 하는 소설이다. 피부 아래를 보려는 자 교도관 ‘윤’을 통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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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보 신자가 처음 설교를 들으면서 살인,절도, 음주운전 등의 일종의 ‘범죄’에 대한 해석을 넘어선 부분이 있었다. 모든 것에서 자기자신이 주인이 되려고 하는 것이 바로 ‘죄’라는 것에 대한 부분이었다. 얼핏 들어보면 이거 그냥 욕심, 탐욕에 대한 거 아냐? 하고 무슨 궤변인가 싶긴 하지만 아마도 기독교적 배경을 갖고 있는 분들이라면 단순히 문자 그대로 자기 자신이 주인이 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범죄’를 저지르는 행위의 주체가 되는 것, 거기서부터 시작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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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림받은 기억, 부모로부터의 학대(성적학대를 포함한) 등 여러 가지 환경, 특히 어린 시절의 성장배경이 개인 삶의 뿌리가 되어 그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 그렇기에 아동기의 성장은 무엇보다 보호되고 보장되어야 함을 자명하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죄의 결과로 나타난 일에 대해 참작의 여지는 될 수 있으나 면죄부가 되기는 어렵다. 같은 환경이라도 얼마든지 다르게 자라기도 한다는 그것 또한 우리가 알기 때문이다.–하지만 여전히 다르게 자라는 사람이 소수에 불과하다는 것, 그러니 나는 이것을 쉽게 이야기해서는 안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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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그렇다면 왜 여기서 이미 많은 사람을 죽였고, 교화의 과정에서 드러난 그간의 여러 죄악에도 불구, 모든 혐의를 인정한 ‘474호’를 묻지마 살인마인 것으로 끝내지 않고 더 긴 이야기를 만들어냈을까? 소설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사형선고를 받는 ‘474’호의 가족이 나타나고 그 가족의 이야기도 함께 드러나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가 다시금 쓸쓸하게 맞이하는 수형자 ‘474호’의 불행했던 과거에 초점을 맞추기에는 소설이 너무 진부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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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읽고 난 후 하루이틀 틈틈이 청소하고 설거지를 하는 동안에도 생각을 해봤다. 그래서 오히려 소설은 저주와도 같은 능력(?)을 대를 이어 흘러내려온 한 가지, 내가 과연 그 능력을 통제할 수 있는가 하는 괴로움을 갖고 살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다시 그 모습을 발견했을 때의 말할 수 없는 절망감만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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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인지 소설의 스토리 보다는 장면장면 인상적인 부분들이 무척 많았다. 잘은 모르지만 [474호]라는 단편을 경장편으로 다시 쓰면서 그러한 부분에 조금 더 공을 들였는지, 아님 이정도 인상적인 부분이라면 원작 단편에 포함되어 있었을 것도 같은데, 단 하나의 장면으로 작가는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가장 중요한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달한 듯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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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준 작가님의 그간의 작품보다는 다소 평이하다는 생각을 하였지만 그럼에도 부분부분 묘사의 장면들과 문장들, 주의해야 할 내 몸과 마음에 대하여 들여다보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들은 무척이나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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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로 하여금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1
편혜영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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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나온지 벌써 2년 6개월정도가 지났다. 나왔을 당시 바로 읽었다. 도서관에서 먼저 책을 발견하고 읽고 난 후 구매를 하고 갖고 있다가 수정님께 드렸는데 핀 서포터즈를 하면서 다시 갖고 싶은 책을 말하라고 하여 그 사이 많은 책이 나왔지만 다시금 이 책을 선택했다. 그리고 처음 읽었을 때도 한 달음에 읽었는데 어제도 새벽 1시에 시작해서 3시 조금 너머까지 한달음에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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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반 전에 읽었고 당시 리뷰를 남기지 않아 어렴풋했는데 역시 두번째 읽어서일까. 그 때는 그다지 눈에 보이지 않았던 대목들이 다시 읽으니 여러 부분에서 보였다. 그 당시 충격적이었던 장면은 체납한 환자를 무심하게 병실에서 복도로 쫓아내는 장면이었는데 다시보니 시작부터 이석을 고발하기로 한 무주의 결심부분이 상당히 의외로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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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병원에서 근무하던 무주가 조선산업으로 한 때 절정을 누리던 지방의 소도시였으나 지금은 사양의 길로, 쇠퇴의 길로 들어선 ‘이인시’의, 이제 막종합병원으로 승격한 병원으로 오게된 데에는 이전에 있던 직장에서 과장과 함께 ‘관행’처럼 여겨지던 부적절한 일들이 발각되어 스스로 꼬리가 되어 잘려졌기 때문이다. 그의 상사가 언젠가는 다시 불러주리라는 희망으로 이곳으로 내려왔지만 이곳에서 자신을 따듯이 맞이해준 ‘이석’을 만난다. 서울의 큰 병원에 입원한 이석의 아들 ‘율’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한 벌이, 아내의 고시원 비용 등 이석의 삶에 드는 온갖 비용이 턱없이 많음을 알았지만, 첫장에서 그럼에도 무주는 이석의 비리를 고발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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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 책을 읽었을 때 보지 못했던 부분이었지만 다시 보니 보이는 것은 누구보다 이석의 비리를 가장 먼저 감지해 낼 수 있었던 것은 ‘무주’역시 과거 그와 유사한 비리를 저질렀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가 비리를 발견한 순간 해결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었지만 일정부분 ‘공명심’에 의한 방법이었고, 그 후 이석은 병원에서 잘리게 된다. 물론 이야기의 전개 과정을 보면 이일로 인해 직선적으로 이석이 나가게 되는 것은 아니다. 작가님께서 그 부분은 이후 진행되는 이야기속에서 무주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여러가지 일들이 있음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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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무주는 자신이 직장을 그만둔 것만으로 자신의 잘못한 댓가의 잘못을 받았다 생각했지만 여전히 과장이 자신을 예전처럼 챙겨줄 것이라는 것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그의 인생이 어긋난 것은 어쩌면 그때부터가 아니었을까. 책을 읽는 동안 이번에는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두번을 읽어도 여전히 이 책의 제목인 ‘죽은자로 하여금 죽은자를 장사케 하라’는 그 메시지는 잘 모르겠다. 심지어 마태복음 8장을 통째 읽었는데도 잘 모르겠는것이다. 예수님이 제자들로 하여금 너는 나를 따르라는 것인데, 이 소설에서 그의미는 무엇인지 사실은 이번에도 이석이 해석하는 그말 이상을 넘지는 못했다. 왠지 이 소설에서는 나를 따르라가 아니라 말그대로 이석이나 무주의 삶이 각자의 아이를 다른 방식으로 잃은 이들의 삶이 ‘죽은자’ 같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소설의 핵심은 무주가 새로 간 병원에서 첫 상사였던 ‘송’이 마지막에 던졌던 메세지가 아니었을까. 누군가는 시키는 일이라고 해서 그 일이 부당하면 자리를 걸고라도 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는 것. 그것이 무주가 걸어온 삶과는 다른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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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어도 여전히 재밌다. 핀 시리즈 중 단 한권을 추천하라고 한다면 난 여전히 이 책을 추천할 것이다. 이석과 무주라는 두 인물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 도시의 몰락이 그 도시의 사람들의 삶터에 미친 여러 이야기, 그리고 병원경영 전반에 흐르는 비리와 묵시적 분위기, 사람들의 수근거림, 이 모든 것들이 아주 소설 전반에 잘 드러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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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스틱맨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28
백민석 지음 / 현대문학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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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민석 작가님은 그의 소설보다 클래식 클라우드 ‘헤밍웨이’편을 통해 먼저 만났다. 그의 소설로는 이번에 처음 만난게 된 것이다. 제목만 들었을 때에는 인공지능을 가진 로보트도 아니고 그렇다고 인형도 아닌 구지 생각을 했을 땐 마네킹이라고 해야할까.. 그런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작가님은 소설을 시작하기 전에 책을 집은 독자라면 한번 즘 궁금해 할 그 플라스틱맨에 대한 설명을 하고 본격적으로 소설에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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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에 따르면 플라스틱의 어원은 ‘플라스티코스plastikos, 틀에 넣어 만들다라는 뜻의 고대 그리스어에서 출발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여기선 ‘틀’이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 질료가 달라도 같은 형상으로 보이는 그런 의미가 담겨져 있다고 할 수 있다. 분명 질료가 다른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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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2016년 말 대한민국 역사 이래 가장 많은 사람들이 집회에 참여했던 대통령 탄핵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벌써 횟수로는 5년이 넘게 지났고, 우리는 직간접적으로 많은 정치적 의사를 표명하지만 이 때만큼 삶속에 깊이 들어와 있는 일에 모두가 나선일은 드문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소설의 시작이 이러하였기에 절반 정도 넘어가기까지 과연 우리가 아는 이 사건을 소설에 끌어드린 이유는 무엇인가 하고 생각할 즈음 반전이 나온다(스포일러가 될수 있으므로..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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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에서 다루어지는 자살, 살인, 사고, 테러 등은 내가 직접적으로 겪지 않았다는 이유로 한 개인에게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뉴스기사로 전락한 ‘사고’로 만나게 되는 일이 흔하다. 그것은 결과론적으로 보자만 분류화되고 통계수치가 되어 하나의 현상, 하나의 데이터가 될 뿐이다. 때문에 이 소설에서도 협박범이 예고한 사건이 예고 후 일어난 사건과 구분하여 찾아내기가 쉽지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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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전면에서는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화자가 있기는 하나 모든 것이 모호하다. 일어난 사건도 모호하고, 선과 악에 대한 구분도 모호하다. 소설에서는 한 사람이 신부님을 찾아가 ‘악이 그토록 선과 구분이 선명하게 가능했다면 사람들은 악을 덜 저지르지 않았을까요’하고 반문하는 부분이 있다. 악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과 선에 대하여 생각하는 일, 사람들은 어떤 부분을 더 깊이 생각할때 악을 멀리하고 선을 가까이 하게 될까. 악을 깊이 생각함으로서 악에서 멀어지는 것인지. 선을 깊이 생각함으로서악에서 멀어지는 것인지, 둘다 맞는 말이겠지만 선과 악의 기준이 적용이 개개인의 삶의 배경과 연관되어 억울함, 원통함, 감사함, 분함, 나만 왜 라는 여러 상황 때문에 그렇게 모호해 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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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큰 일을 겪고 나면 사람들은 변한다고 한다. 삶이 소중한걸 알게 되고, 투표참여와 같은 정치적 의사결정에 참여를 하기도하고 좀더 민주적으로, 좀더 행복한 방향으로 삶이 지속되기를 희망한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혁명을 이루고도 삶이 얼마든지 행복하지 않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소설에서 플라스틱맨에 대한 사람들이 고발이 그러하다. 익명의 댓글이 그러하다. 사람들은 누군가 잘못하면 노골적이고 적나라한 댓글을 익명이란 이름으로 단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한 두 사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그러하다면 우리의 삶의 기쁨과 애환을 이루고 있는 그 근본적인 틀이 인간모두에게 공통적인 모습이라 그런게 아닌가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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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대한 기대치를 낯춤으로서 행복에 이를 수있다는 이 역설적인 진리만큼 지금까지 살면서 와닿은 적은 없다. 나에 대한 존재를 크게 하기 보다 낮추는 것이 오히려 더 상처를 덜 받는다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나는 이러한 마음으로 살아간다. 그럼에도 여전히 삶에서 상처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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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 주요 화자의 직업은 경찰이다. 같은 시민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자 때로는 시민의 집회에서 충돌이 일어나지 않도록 역할을 하는 민간인이 아닌 경찰(?)의 신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녀가 나중에 경찰을 그만두어도 일상엔 큰변화가 없다. 혁명을 이루고 나서도 시간이 지나면 큰일이든 사소한 일이든 모두가 분노하고 화를 안고 산다. 그것은 지속되는 화가 아니라 금방 일어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것과 같다. 삶이 행복할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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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물론 ‘행복’에 관한 것은 아니다. 플라스틱맨과 더불어 플라스틱 세상,인생을 드러한 현상을 통해 보여주는 것이다. 마네킹 처럼 감정이 없어 보이는 것, 그것은 마네킹을 향해 우리가 아무리 소리쳐도 반응을 보이지 않는 어떤 사람, 어떤 세계와 같은 것이다. 소통이 불가능 할 것 같은. 그러다가 스스로 제갈길을 찾는 것처럼 말이다. 마지막 작가의 말에서 언급한 시민사회의 일체감은 겪고도 우리는 여전히 당혹감, 불안감, 일이 잘못될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안고 살아간다. 삶의 방향을 완전히 달리할 수 있는 변곡점, 그 아슬아슬한 꼭대기를 지나고 나서 완전히 달라질수 없는 일은 계속된다. 결국 우리의 삶이 그렇게 생겨먹었다면 삶에 대한 긴장감을 피할 수는 없고 다만 우리는 내공을 쌓아가며 견디고 살아갈 뿐이다. 이 책은 그렇게 작가의 이야기를 듣고 난 이후 일주일 내내 그런 내 삶을 돌아보게 했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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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벨트 게임
이케이도 준 지음, 이선희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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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케이도 준의 루스벨트 게임을 읽었다. 4부작 한자와 나오키’, ‘일곱개의 기둥모두 페이지가 400-500페이지를 넘지만 순식간에 읽어진다. 그렇다고 이 책이 킬링타임용 책은 아니다. 거품경제가 빠지기 전까지 종신고용이라는 말로 대변되던 일본의 기업문화는 언제부터인가 구조조정파견이라는 일터의 조건이 완전히 바뀌어져 버렸다. 그런 가운데 그간 읽었던 이케이도 준의 소설은 기업경영에서 사람을 대하는 방식, 하나의 이즘에 대하여 이야기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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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에는 몇 개의 기업이 등장하는데 핵심은 기술개발을 중심으로 성장하는 이소미아 제작소라는 중소기업과, 중소기업보다는 규모가 큰 마쓰다전기가 나온다. 이야기는 두 회사의 사장이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는 과정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적자로 인하여 대기업에 하청기업으로서 살아나기 위한 방법을 두 회사의 사장, 그리고 이소미아 제작소의 부장급 이상의 임원진을 중심으로 회사가 다시 성장을 도약하는 모습을 작가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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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서 알다시피 루스벨트 게임이란 야구에서 스코어 8:7의 스코어서 경기가 끝나는 마지막까지 지켜보는 상황을 말한다. 이는 과거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이 한 말로 그야말로 승부가 엎치락 뒤치락 하는 상황속에서 팀협력이 어떻게 발휘되어 끝내 승리는 어디로 가게 되는지, 아니 승리와 상관없이 최선을 다한 모습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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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나처럼 야구에 대해 잘 몰라도 이 소설을 보는데는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다. 생산라인의 축소로 직원까지 구조조정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회사에 매출액으로는 확인할 길이 없은 기업야구팀을 계속 유지할 것인가 말 것인가는 하나의 딜레마가 된다. 경영논리로만 보자만 당연히 해체의 수순을 밟는 것이 맞지만 그 과정에서 이소미아 제작소의 총무부장이자 야구부장인 미시카가 그 가운데서 사람과 사람, 그리고 기업을 바라보는 모습은 매우 인간적이다. 숫자와 그래프, 그리고 절감에 매우 사리가 깊을 것 같은 일반적인 기업의 총무 회계의 모습과는 달리 구조조정의 과정에서 고뇌를 하고 이후 매출의 확대로 인해 재임용을 하는 과정에 이르는 모습은 현실과는 다를지언정 가고자 하는 방향을 보여주니 나쁠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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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생활을 하다보면 실력도 필요하고 정치력도 필요하다. 둘 다 잘하는 사람도 있고 둘다 못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 각자의 길을 가는 것도 같다. 이 책에서 이소미아 제작소의 호소카와 사장은 컨설팅 회사를 다니다가 이소미아 제작소의 영업부장으로 오게 된다. 임원진 12명 가운데 서열은 아래에서 3번째에 해당하지만 이소미아 사장이 물러나면 차기 사장으로 지목한 사람은 사내 누구라도 사사키부장이 사장이 되리라 생각했지만, 나이도 경력도 어린 호소카와가 사장이 된다. 호소카와는 정치력으로 사장이 되었다고는 보기 어려운 사람이다. 그는 어떻게 보면 후발주자임에도 변화하는 시장의 환경속에서 자신의 기업이 성장할 수 있는 부분을 다른 사람들과 달리 꿰뚫어본 안목을 갖고 있었다. 당시 영업부장의 사외 영입이라는 내부적으로는 불만의 씨앗을 키울 수 있는 환경이 되었으나 그는 실력으로 당당히 모두의 의심스럽고 곱지않은 시선을 날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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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인자가 된 사사키는 어떠할까? 그는 사내 전무로 지내면서 호소카와 사장을 궁지에 몰거나 하지 않는다. 그저 냉철하게 판단하고 기업이 살아날 길을 찾는데 사사키 또한 이 회사의 총무부장으로 자리매김 하기까지 최선을 다해 일한 모습은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오늘 북판다님의 리뷰에서도 보았지만 서로를 성장하게 하는 관계에 없어서는 안 될 것은 사리사욕에 관한 부분일 것이다. 사사키는 자신이 왜 사장이 될 수 없었는지에 대한 판단이 명확하고 호소카와는 겸손하다. 급감하던 매출을 오로지 기술력으로 다시 일으키게 된 배경에는 약간의 불협화음은 있을지언정 전반적으로는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일하던 사람들의 모습이다. 호소카와 사장은 말한다. ‘단지 그것 뿐이었는걸요...’라고, 그런데 세상에는 이소베 지점장이 말한 것처럼 단지 그것뿐인 것을 못해서기업이 망하는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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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시작하면 그 자리에서 다 읽을 정도로 재미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현실과 얼마나 괴리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나는 이런 이야기가 좋다. 무엇보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스스로가 자신의 한계와 타인의 장점, 내가 아닌 저 사람이 그 일을 하게 된 모습을 정확히 이해한 모습들이다. 이케이도 준의 소설은 아무리 내가 읽을 책들이 산재해 있어도 종종 읽고 싶은 책이다. 읽고 나면 환기가 된다. 이 소설을 일고 나서 야구이야기는 많이 적지 않았지만 다이소 감독의 이야기나 더는 이어가지 못할 자신의 야구인생을 포기하지 않고 감독으로 매니저로, 다시 투수로 서는 장면들도 빼놓을 수 없는 자신의 인생에서 좋아하는 것을 놓지 않은 모습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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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메시스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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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메시스를 읽고 나서전락을 연이어 읽었다. 그런 다음 예전에 쓴에브리맨울분의 리뷰를 다시 살펴보았다. 너무 못썼더라는.. 다시 보니 남는 건 옮겨 적은 소설 속 그의 명문장 밖에 없었다. 이 네 소설이 네메시스 시리즈라고 하지만 작가가 소설의 제목을 네메시스로 한 후 소설쓰기에 대한 절필을 선언한 것을 보면서, 이는 그가 평생 마음에 품고 살았던 질문이고, 그의 소설들은 질문을 어떻게 하게 되었는지를 탐색하는 과정이라 볼 수 있다. 평생을 그렇게 심각한, 그의 이야기에서는 행복과 기쁨은 저 세상의 이야기인 듯, 전면에 나서는 주제로 등장하지 않는다. 적어도 지금까지 읽은 소설에서는. 그래서 정말 그런가 싶어 작가의 에세이인 사실들을 당장 봐야겠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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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들은 자서전이라는 부제가 있고 로스의 작품 중 국내에서 가장 최근에 출간된 책이여서 그의 작품과 세계, 그 자신의 이야기가 주를 이룰거라 생각했는데 1991년 그가 쉰을 조금 넘은 나이에 쓴 것이다. 그 후미국의 목가를 시작으로 제2의 전성기를 펼치게 되니 이 작품은 로스의 모든 것을 보여주기 보다는 소설이 아닌 에세이로 그가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한 것이고 그의 소설인생의 전후를 가르는 즈음 쓰여진 작품이지만 그 후의 작품을 보는데 조금은 이해를 돕는 여러 이야기들이 나온다. 여기서는 우선 이러한 배경을 안고네메시스와 관련된 이야기만 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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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의 글쓰기는 잘 알려져 있듯이 글을 쓰면서 구도를 잡고 완성해 가는 것이 아니라 소설이 진행됨에 따라 이야기가 완성되어진다. 목적지야 제목에서부터 알 수는 있겠으나 그 끝에 이르는 길은 책이 끝나기 직전에서야 만나기 때문에 앞서 나오는 이야기들은 끝내 마지막에 이르면 다시 살아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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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표면적으로는 감염병이 돌던 시기, 신체와 정신이 강건하고 올바른 한 체육교사켄터가 아이들을 돌보는 일에서 자신의 신념과 가치그 가운데 의무감이 삶에 드리워질 빛을 모두 앗아가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로스는 자신이 발표한 대부분의 소설에서 종교로서의 유대교보다 민족으로서의 유대인의 역사와 삶의 방식을 한 인간의 성장, 삶의 배경으로 한다. 실제 로스의 유년시절 배경이기도 한 뉴어크 지역이 소설의 첫 번째 배경이 되는데 유대인이 집중 거주하는 곳에서 외지인들은 그들을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말도 안돼게 전염병의 근원이라 하기도 하고, 유대인에 대한 편견으로 막말을 일삼기도 한다. 그러나 동시에 소설속에서 호러스라는 발달장애 청년의 등장을 통해, 스스로 차별의 대상이 댄 유대인들이 호러스를 막 대하고 전염병 유발자라고 하는 행동을 묘사하면서 유대인이 아닌 차별과 그에 따른 폭력도 글속에서 놓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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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의 주배경인 뉴어크는 폭염으로 인한 불쾌지수와 폴리오라는 전염병이라는 공포가 더해지는 가운데 전염병과 관련된 원인, 해결책이 모두 미궁으로, 사람들은 비이성적 사고와 히스테리로 서로를 대한다. 평소 평정과 자제력이 삶의 태도였다 하더라도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그럼에도 켄터는 건강한 체력으로 면역을 유지하고, 아이들을 위해 차라리 안전하게 보호하고자 하였다. 그는 불안이 고조되는 이곳에서 교사로서의 의무감을 다하고자 했지만 어느 순간 학교를 그만두고 그의 연인이 있는 곳, 폴리오가 없는 인디언 힐로 떠나기로 한다. 그의 의무는 그 곳 캠프에 참여한 아이들을 안전하게 보호하면 되는 것이라고..그러나 자신은 아름다운 풍경의 낙원과도 같은 곳(파리가 아닌 나비가 날아다니는)에 와 있지만 떠나온 곳의 아이들이 점차 죽어나가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자신은 그곳에 남아서 아이들을 계속 보호해야 했음을 되뇌며 괴로워 한다. 그러나 자신이 인디언 힐에서 지금 누리고 있는 최상의 이 모든 것, 자신의 연인, 미래, 가르치고 보호해야 할 안락한 가정의 아이들과의 삶을 버릴 수가 없다. 그런데 정작 인디언 힐에서 머릿속 뇌관이 터지듯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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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메시스는 인간의 주제넘은 행위에 대한 신의 복수라는 의미가 있다. 켄터는 오랫동안 전쟁과 전염병, 자라는 아이들의 죽음을 신의 무책임, 무자비로 생각하곤 했지만 이후 자신에게 일어난 이 모든 비극적 전후 사건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았다. 원인을 규명하기 어려운 불행한 일은 (행운 혹은 비운)’이라는 우연의 관점에서 생각하기보다 신에 대한 원망, 존재에 대한 의문으로 돌리기도 한다. 도덕성 과잉은 타인에겐 몰라도 자신에게는 너무도 가혹하다. 로스는 3장이 시작되면서 읽는 동안 의식하지 못했던 화자를 전면에 등장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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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때로 자신이 어렵게 세운 신념, 가치가 상황에 따라 변하는 것을 절대 수용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지식이든 신념이든 가변성에 대한 수용이 없다면 한발만 움직여도 나락으로 빠질 수 있는 우리의 삶을 다시 이어나가는 일은 불가능할 일일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이 소설처럼 사회적 비극개인적인 비극으로 간주하여 남은 생을 후회의 반복으로 살아가게 될지 모를 일이다. 이처럼 우리는 이상적으로는 그렇게 살면 안된다는 것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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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모든 것이 그토록 자명할까? 우리는 이상적으로는 안다 그렇게 살면 안된다는 것을.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은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그러니 완전히 새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그러나 그랬더라면 로스는 그동안 그토록 오랫동안 소설로 자신이 형성한 경험을 이야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현실적으로 그러기에는 얼마나 긴 시간이 걸릴지, 영원히 회복되지 못할지 알 수 없다. 그가 말한 대로 시간이 갈수록 불행을 강화하고 치명적으로 확대되는 일로 인생을 망칠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는사실들에서 자신은 문학 속에서 절대로 웃음을 전하고 싶지 않았다고 썼다. 그는 네메시스 시리즈를 통해 그동안 삶은 노화라는 자연적 현상으로도 서서히 무너지기도 하지만 외줄타기를 하듯 잠깐의 실수와 방임으로도 그렇게 될 수 있음을 이야기 했다. 삶의 희극적, 비극적 이야기는 결국 현대소설이지만 여느 비평가들이 말한대로 그의 소설은 그리스적 비극의 선상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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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든 인생이 가장 빛나는 시기가 있다고 한다. 내게 켄터는 그가 아이들을 교육하고 훈련하며 스스로 창던지기 시범을 보이던 그 때, 자신의 노력, 헌신, 결단, 규율을 지키며 살아가며 아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준 그 시절, 한 폭의 필름 같았던 그 시절이었다고 생각한다. 로스는 자신의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를 한편의 짧은 소설처럼 우리에게 남겨주고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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