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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메시스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5월
평점 :
「네메시스」를 읽고 나서「전락」을 연이어 읽었다. 그런 다음 예전에 쓴「에브리맨」과 「울분」의 리뷰를 다시 살펴보았다. 너무 못썼더라는.. 다시 보니 남는 건 옮겨 적은 소설 속 그의 명문장 밖에 없었다. 이 네 소설이 네메시스 시리즈라고 하지만 작가가 소설의 제목을 ‘네메시스’로 한 후 소설쓰기에 대한 절필을 선언한 것을 보면서, 이는 그가 평생 마음에 품고 살았던 질문이고, 그의 소설들은 질문을 어떻게 하게 되었는지를 탐색하는 과정이라 볼 수 있다. 평생을 그렇게 심각한, 그의 이야기에서는 행복과 기쁨은 저 세상의 이야기인 듯, 전면에 나서는 주제로 등장하지 않는다. 적어도 지금까지 읽은 소설에서는. 그래서 정말 그런가 싶어 작가의 에세이인 ‘사실들’을 당장 봐야겠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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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들」은 자서전이라는 부제가 있고 로스의 작품 중 국내에서 가장 최근에 출간된 책이여서 그의 작품과 세계, 그 자신의 이야기가 주를 이룰거라 생각했는데 1991년 그가 쉰을 조금 넘은 나이에 쓴 것이다. 그 후「미국의 목가」를 시작으로 제2의 전성기를 펼치게 되니 이 작품은 로스의 모든 것을 보여주기 보다는 소설이 아닌 에세이로 그가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한 것이고 그의 소설인생의 전후를 가르는 즈음 쓰여진 작품이지만 그 후의 작품을 보는데 조금은 이해를 돕는 여러 이야기들이 나온다. 여기서는 우선 이러한 배경을 안고「네메시스」와 관련된 이야기만 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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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의 글쓰기는 잘 알려져 있듯이 글을 쓰면서 구도를 잡고 완성해 가는 것이 아니라 소설이 진행됨에 따라 이야기가 완성되어진다. 목적지야 제목에서부터 알 수는 있겠으나 그 끝에 이르는 길은 책이 끝나기 직전에서야 만나기 때문에 앞서 나오는 이야기들은 끝내 마지막에 이르면 다시 살아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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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표면적으로는 감염병이 돌던 시기, 신체와 정신이 강건하고 올바른 한 체육교사켄터가 아이들을 돌보는 일에서 자신의 ‘신념과 가치’ 그 가운데 ‘의무감’이 삶에 드리워질 빛을 모두 앗아가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로스는 자신이 발표한 대부분의 소설에서 종교로서의 ‘유대교’보다 민족으로서의 ‘유대인’의 역사와 삶의 방식을 한 인간의 성장, 삶의 배경으로 한다. 실제 로스의 유년시절 배경이기도 한 뉴어크 지역이 소설의 첫 번째 배경이 되는데 유대인이 집중 거주하는 곳에서 외지인들은 그들을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말도 안돼게 전염병의 근원이라 하기도 하고, 유대인에 대한 편견으로 막말을 일삼기도 한다. 그러나 동시에 소설속에서 ‘호러스’라는 발달장애 청년의 등장을 통해, 스스로 차별의 대상이 댄 유대인들이 호러스를 막 대하고 전염병 유발자라고 하는 행동을 묘사하면서 ‘유대인’이 아닌 ‘차별’과 그에 따른 ‘폭력’도 글속에서 놓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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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의 주배경인 ‘뉴어크’는 폭염으로 인한 불쾌지수와 ‘폴리오’라는 전염병이라는 공포가 더해지는 가운데 전염병과 관련된 원인, 해결책이 모두 미궁으로, 사람들은 비이성적 사고와 히스테리로 서로를 대한다. 평소 평정과 자제력이 삶의 태도였다 하더라도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그럼에도 켄터는 건강한 체력으로 면역을 유지하고, 아이들을 위해 차라리 안전하게 보호하고자 하였다. 그는 불안이 고조되는 이곳에서 교사로서의 의무감을 다하고자 했지만 어느 순간 학교를 그만두고 그의 연인이 있는 곳, 폴리오가 없는 ‘인디언 힐’로 떠나기로 한다. 그의 의무는 그 곳 캠프에 참여한 아이들을 안전하게 보호하면 되는 것이라고..그러나 자신은 아름다운 풍경의 낙원과도 같은 곳(파리가 아닌 나비가 날아다니는)에 와 있지만 떠나온 곳의 아이들이 점차 죽어나가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자신은 그곳에 남아서 아이들을 계속 보호해야 했음을 되뇌며 괴로워 한다. 그러나 자신이 인디언 힐에서 지금 누리고 있는 최상의 이 모든 것, 자신의 연인, 미래, 가르치고 보호해야 할 안락한 가정의 아이들과의 삶을 버릴 수가 없다. 그런데 정작 ‘인디언 힐’에서 머릿속 뇌관이 터지듯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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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메시스는 인간의 주제넘은 행위에 대한 신의 복수라는 의미가 있다. 켄터는 오랫동안 전쟁과 전염병, 자라는 아이들의 죽음을 신의 무책임, 무자비로 생각하곤 했지만 이후 자신에게 일어난 이 모든 비극적 전후 사건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았다. 원인을 규명하기 어려운 불행한 일은 ‘운(행운 혹은 비운)’이라는 우연의 관점에서 생각하기보다 신에 대한 원망, 존재에 대한 의문으로 돌리기도 한다. 도덕성 과잉은 타인에겐 몰라도 자신에게는 너무도 가혹하다. 로스는 3장이 시작되면서 읽는 동안 의식하지 못했던 ‘화자’를 전면에 등장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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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때로 자신이 어렵게 세운 신념, 가치가 상황에 따라 변하는 것을 절대 수용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지식이든 신념이든 ‘가변성’에 대한 수용이 없다면 한발만 움직여도 나락으로 빠질 수 있는 우리의 삶을 다시 이어나가는 일은 불가능할 일일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이 소설처럼 ‘사회적 비극’을 ‘개인적인 비극’으로 간주하여 남은 생을 후회의 반복으로 살아가게 될지 모를 일이다. 이처럼 우리는 이상적으로는 그렇게 살면 안된다는 것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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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모든 것이 그토록 자명할까? 우리는 이상적으로는 안다 그렇게 살면 안된다는 것을.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은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그러니 완전히 새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그러나 그랬더라면 로스는 그동안 그토록 오랫동안 소설로 자신이 형성한 경험을 이야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현실적으로 그러기에는 얼마나 긴 시간이 걸릴지, 영원히 회복되지 못할지 알 수 없다. 그가 말한 대로 시간이 갈수록 불행을 강화하고 치명적으로 확대되는 일로 인생을 망칠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는「사실들」에서 자신은 문학 속에서 절대로 웃음을 전하고 싶지 않았다고 썼다. 그는 네메시스 시리즈를 통해 그동안 삶은 노화라는 자연적 현상으로도 서서히 무너지기도 하지만 외줄타기를 하듯 잠깐의 실수와 방임으로도 그렇게 될 수 있음을 이야기 했다. 삶의 희극적, 비극적 이야기는 결국 현대소설이지만 여느 비평가들이 말한대로 그의 소설은 그리스적 비극의 선상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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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든 인생이 가장 빛나는 시기가 있다고 한다. 내게 켄터는 그가 아이들을 교육하고 훈련하며 스스로 창던지기 시범을 보이던 그 때, 자신의 노력, 헌신, 결단, 규율을 지키며 살아가며 아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준 그 시절, 한 폭의 필름 같았던 그 시절이었다고 생각한다. 로스는 자신의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를 한편의 짧은 소설처럼 우리에게 남겨주고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