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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애, 타오르다
우사미 린 지음, 이소담 옮김 / 창비 / 2021년 8월
평점 :
「‘최애가 불타버렸다’. 팬을 때렸다고 한다」.. 소설의 첫 문장을 이해하지 못 한 채 읽기 시작했다(뭐지 프라이팬을 때렸다는 건가??).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즈음에는 아.. 도저히 읽을 수 없을 것 같은 책이 읽는 동안에 이렇게 마음이 서서히 여기에서 저기로 옮겨지기도 하는 구나... 하고 느꼈던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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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나니 몇해 전 읽은 ‘편의점 인간’ 생각이 났는데 두 작품 다 아쿠타가와상 수상작품이다. 류노스케 아쿠타가와의 소설을 읽은 후로 괜히 이 작품상 수상작들에 대한 신뢰가 조금 더 생겼다고 할까. 조금 더 좋아진 것도 사실이다. 이 소설도 띠지에 이쁘게 적혀 있는 것처럼 19세에 등단한 신예작가가 21세 두 번째 소설로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그리 길지 않은 장편소설, 두통이 사라진 후 집어들었던 이 책을 다 읽고 난 후 누워서 베개에 기대어 잠시 뒤척이며 이것저것 생각하게 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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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무엇엔가 덕후인 적도 없었고(이 정도의), 주변에서도 이정도의 덕후로 살아가는 사람이 없다보니 사실 이렇게 세밀하게 이야기 되어지는 부분들이 처음엔 마냥 신기하다. 그리고 이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을지 하는 마음도 있었는데 조금씩 조금씩 어디론가 데려간다. 아주 오래전 김애란이 이십대에 쓴 소설이 사십대의 마음까지 아울렀다는 그 말처럼, 뭔가 어린 소녀의 이야기를 읽는데도 그게 무엇인지 알 것 같은 그런 느낌이 있다. 이 소설은 어딘가에 기대어 버티며 살아온 나름의 이유가, 한순간 완전 ‘뚝’ 하고 단절되는 그 순간이 마디가 되어 비로소 성장의 문턱을 넘은 그 이야기가 끝내 울컥하게 만드는 그런 무언가가 있었다. 그러니까 이건 볼테르가 그의 소설에서 말한 것처럼 우린 우리 자신만의 정원을 가꾸어야 합니다라고 할 때 그 정원으로 치환되기 어려운 무어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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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보통, 일반적으로 자기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게 좀 신기하기도 하고 그랬는데, 우리 언니들만 봐도 그러한데.. 나는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내가 막 좋다고 생각한 적이 거의 없다. 그렇다고 나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맘에 들지 않을 때가 많다고 할까), 스스로에 대한 만족이나 칭찬은 드문 편이기도 하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런 것보다 그냥 이렇게 물어보고 싶다. 나는 나에게 따듯한 사람일까? 나는 나에게 관심이 많나? 좋고 싫음을 분명히 아는 것과 달리 그냥 좋을 수는 없나. 돌이켜보면 정한아 작가의 소설에서 본 글처럼 불리함을 겪어본 적도 내쳐짐을 겪어본 적도 잘 없었고, 그냥 나를 지켜줄 사람은 나뿐이라는 당연하지만 뭔가 이상한? 그런 생각은 한 적이 있다. 이것은 자주적 인간인가 의무적 인간인가...문제는 다른 사람을 대할 때도 이런 면이 없지 않아 있다는 것이 문제인 듯 하다.
단순한 취미와 좋아하는 감정을 넘어 내가 아닌 바깥의 무언가에 중심을 두고 버티듯 살아가는 삶에 대한 이야기가, 나의 존재조차 모르는 사람을 좋아하는 일이, 그 백일몽 같은 삶이 어떻게 살아가는 힘이 될 수 있었는지, 그것은 언제까지 유효 한 지.. 그 세계에 속한 사람들은 그 세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는 도저히 접점이 없을 것 같은 그 이야기가 소설속에서 한 소녀의 삶으로, 지극히 개인의 삶에서 바라 보고나니 이 이야기가 그저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중심이 아니라 전체로 살아온 결과를 보여주는 동안, 그 이야기가 아주 조용히 이미 각인으로 마음에 새겨지는 듯 했다.
그래서인지 지독히도 현실세계에서 많은 이들이 어쩌면 저마다의 최애가 다를 분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도 같았고, 왜 그렇게 살아가는지도 구지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가 된다. 내 속에 내가 너무 많은 것과 내가 없는 것의 차이라고 해야 하나.. 결론은 왜 이 소설이 수상작으로 선정되었는지도 충빈히 이해가 되었다고 할까. 마지막 한 두 페이지가 무척이나 맘에 들었던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