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과 바닐라
정한아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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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일 년 이내 한 정한아 작가님의 책을 다섯 권 보았다. 이전 작품들이 준 여운이랄까? 몇 달 전 작가의 단편집 애니를 읽고 난 후, 계속 단편이 이어져도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디선가 본 듯한 사람들.. 그 사람들의 마음의 목소리들이 특별한 설득이나, 이해를 바라듯 쓴 글이 아님에도 뭔가 정화되는 듯한, 화자가 가만히 물거울에 무언가를 비춘 듯 보여 지는 것을 찬찬히 바라보듯 하게 하는 단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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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번 소설에도 총 7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미발표작도 포함되어 있고, 의외로 시간이 지난 작품도 포함되어 있다. 퇴근 후 한 편씩 읽어서인지 늦은 저녁에 어울리는 책이랄까... 다 읽고 나니 고단함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마주치고 싶지 않은 일과 사람, 피하고 싶었던 일과 대화, 해결해야 할 일들 등으로 하루를 보낸 후 밀려오는 고단함에는 무언가를 통과한 것과 같은 마음, 그래서 이 시간에는 내가 나를 좀 돌아보게 되는 그런 필요의 고단함 속의 쉼이 느껴지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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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단편의 경우 화자를 포함한 두 부부의 과거와 현재와 관련된 이야기를 듣다보면, 그리고 그 중 남편 친구의 아내이자 자신과도 결혼 전부터 연을 맺은 등장 인물과 지내온 과정이 낯설지 않은 모습이다. 그런데 이걸 소설로 보고 있자니 나만큼 상대도 느꼈을 다름에 대한 다르지 않음을 느끼게 했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읽었을지 모르겠는데 보기에 달랐을 것 같은 두 사람의 성향이나 대화가 그저 표면적으로만 그랬던 것은 아니었는지 생각하게 하는 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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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두 번째 단편의 경우에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출산하며 일과 병행하면서 겪게 되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인생의 중요한 시기를 건너오면서, 그리고 건너오고 난 후 비로소 돌아보니 그 땐 보지 못했던 마음과 관련된 부분인데, 세상이 얼마나 많은 우연에 의해 좌우되는지, 불리함도 내쳐짐도 겪어보지 못했던 사람들이 그런 일들을 종내 받아 들여서 예상치 못했던 삶에서 다시 시작하는 이야기가 오래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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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단편을 비롯해서 뒤이어 나온 몇 몇 단편은 종종 그녀의 소설에서 볼 수 있는 할머니의 등장. 현대에 들어서서 집안 가장이란 남녀를 불문하고 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하지만, 그녀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할머니들의 모습만 보면 현대가 아니라 어쩜 아주 오래전부터 이렇게 살아온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말은 많지 않고 그저 일 자체가 삶인 것 같은, 그 모습으로 자신의 삶을 보여주는 모습들과 자식을 넘어 자식의 자식에까지 자신의 손을 뻗쳐야 했고, 그 안에서 성장했던 나의 이어지는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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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소설, 그렇게 배잡고 웃고 깔깔대며 읽은 소설을 떠올려 보라하면 세 개도 꼽을 수가 없는데 약간은 가라앉고, 쓸쓸한 그런 소설을 떠올리라 하면 거의 많은 소설들이 떠오르는 것을 보면 아마도 내가 이런 소설들을 좀 좋아하는 것 같다. 이번 소설을 포함하여 정한아 작가의 소설에서 내가 그동안 느꼈던 것들은, 책 뒷표지에 정소현 작가님이 언급한 대로 결국 그녀가 어떠한 결론에 이르는 과정이 무척 맘에 들어서 인지 모른다. 고단함에도 피하거나 멈추지 않고, 씩씩하지 않지만 무기력 한 것도 아니며, 낙관적이지도 않지만 비관적이지도 않는, 그저 담담하게, 담담하게 다음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자체가 조금은 위로가 되기도 하고 위안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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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삶은 내가 처한 환경과는 다르다. 우리는 모두 다르면서 같은, 같으면서 다른 삶을 살기에 이런 말은 사실 적절한 표현은 아니지만, 한 때 친구가 나에게 했던 말이 기억이 났다. ‘너는 언제부터인가 우리와는 좀 다른 삶을 살고 있더라’... 특별한 반응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소설 속처럼 그 때의 상황, 마음, 뉘앙스 이 모든 것들이 시간이 지나고 나서 지금 되돌아보면 그 말이 그 때와는 조금 다르게 와 닿는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시간, 사후적으로 깨닫는 한 순간이지만 그 이후 우리는 다시 그 때를 넘어 그래도 우린 여기서 같이 서 있다는 것을.. 정한아 작가의 소설은 내게 그런 이야기를 삶을 들려주는 그런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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