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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리버 여행기 ㅣ 을유세계문학전집 94
조너선 스위프트 지음, 이혜수 옮김 / 을유문화사 / 2018년 7월
평점 :
[걸리버 여행기]는 근대 초입으로 들어서는 18세기에 쓰여 진 소설로 이 시기는 정치적, 종교적으로는 신구의 논쟁, 과학과 기술의 획기적 발전, 밖으로는 제국주의의 팽창으로 해양 국가들의 식민지 개척이 한창인 시기에 쓰여진 소설이다. 많은 철학적 논쟁이 일어나고 철학자들의 냉소적 풍자적 소설 봇물 터지듯 나온 시기이기도 하다. 어제 언급한 볼테르의 소설도 그 중 한편이었는데 이들의 소설적 특징은 신비의 세계로의 종횡무진 등 환상성을 기반으로 하지만 실제 일어나고 있는 여러 현상을 다시 보게 하는 형식으로 소설을 통해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 것으로 보인다. 즉 스위프트는 이 책의 서문에서도 소설의 형태로 밝혔듯이 나름의 목적을 갖고 이 여행기를 출판한다고 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많은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 여행의 내용을 나라별로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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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릴리퍼트로의 향해
여행을 떠난 후 폭풍우로 인해 난파되어 그해 11월경 릴리퍼트 도착한다. 앞으로도 알겠지만 걸리버는 방문하는 곳의 언어와 관습을 습득하는데 적응력이 매우 뛰어나다. 릴리퍼트 민족은 자신의 1/12분만한 크기로 이들을 만나고 친밀해지까지의 이야기가 여느 이야기보다 재밌다. 릴리퍼트의 군주는 자신의 토지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생활하는데 그 나라에서 관직, 정계의 진출은 줄타기 대회를 통해서 높은 기교를 보여준 사람에게 기회가 열린다. 또한 의회는 〈높은굽당〉과 〈낮은굽당〉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이는 당시 영국의 휘그당과 토리당에 비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릴리퍼트인들은 사물이나 매사를 매우 정확히 보지만 멀리는 보지 못한다. 이 나라의 몇 가지의 독특한 관습들 중 무거운 죄로 다스려 지는 부분은 무고죄, 사기죄, 배은망덕과 같은 것이다. 또한 보상과 벌을 중심으로 한 사법제로 일반적으로 벌을 중심으로 다스려지는 법체제와의 다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곳에서 환대를 받고 최고의 대신직함을 받지만 결국 왕의 적대국에 대한 욕심에 동조하지 못해 걸리버는 그곳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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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브롱딥낵으로의 향해
1702년 6월 다시 여행길에 오른다. 몇 번의 폭풍우 끝에 그는 낯선 곳에 또 남게 된다, 이곳은 브롭딩낵으로 걸리버가 밀밭에서 거인농부로부터 붙잡힌다. 모든 조건이 벌레와 다름없이 거인들의 세상으로 들어온 걸리버, 그곳은 모든게 다 너무 잘 보이고, 아주 미미한 냄새까지 맡게 되는데 그가 받은 충격적 묘사를 읽은 것은 앞서 릴리퍼트에서 경험한 것과 일맥으로 재밌다. 우여곡절 끝에 이번에도 이곳의 통치자와 만나게 되는데 이 나라의 특징은 세계의 다른 지역들과 어떤 교류도 하지 않는다는 것. 걸리버는 왕에게 자신의 나라의 역사, 정치제도, 법제도를 설명하는데 이를 귀기울여 들은 후 국왕의 질문은 원론적이고 원칙적이다. 상원의원이 귀족출신이라면 귀족은 무슨 자격으로 되며, 선출된 의원 역시 자신이 뽑히도록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았는지, 법을 만드는 사람들은 자신의 지식을 이용해서 유리하게 만드는 건 아닌지에 대한 질문을 한다. 이에 대한 성실한 걸리버의 답변에도 불구하고 그가 내린 결론은 자연이 땅위를 기어다니도록 허락한 작고 흉측한 벌레 중 가장 악독한 종이라는 결론을 차분하게 명증하게 내린다(p.190). 그러나 릴리퍼트와 마찬가지로 이 나라에도 문제가 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내전이다. 귀족은 권력을, 백성은 자유를, 왕은 절대적 지배를 놓고 이곳에서도 역시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던 것. 결국 우연한 계기로 그 나라를 나오게 되지만 다시 바다에서 만난 자신과 같은 사람들을 만났을 때 걸리버는 그들이 너무도 왜소하고 하찮은 존재로 보였다. 거대한 사물에 익숙해진 생활을 해온 자신과 그들을 비교하면서 스스로를 지독히 경멸하게 되었다는 것.
3.라퓨타, 발니바비, 럭낵 등 향해
1706년 다시 향해를 떠나게 되는데 이번에도 해적을 만나고 외딴섬에 버려지게 된다. 그곳은 라퓨타라는 곳으로 인간들의 외모에 대한 묘사가 그 특징을 드러낸다. 이 곳은 수학과 음악이 가장 중심이 되고 지배층들은 오로지 모든 생각이 여기에 다 바치고 있다. 이들은 그 학문에 매몰되어 백성이 외치는 소리에 아무런 관심도 없다. 이 부분은 영국이 아일랜드를 지배하는 상황에 대한 묘사가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난 부분이라고 한다. 라퓨타에서는 ’라가도 학술원‘이라는 영국의 왕립학술위원, 당시 과학주의와 과학자에 대한 에 빗댄 신랄한 비판을 볼 수 있다. 결국 라퓨타를 떠나기로 한 걸리버는 영국으로 돌아가기 전 몇몇 섬을 방문하게 되는데 마법의 섬이라 불리는 곳에서 과거의 역사 속 시대를 주름잡던 철학자, 정복자 등을 소환하여 이야기를 들으면서 현대역사에 대한 혐오, 과거로부터 발전은커녕 퇴보를 하고 있음을 말한다. 그리고 럭낵민족이 사는 곳에 들렀을때는 불사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아마도 이 부분이 걸리버가 분변학과 마찬가지로 죽음이란 화두 즉, ’불로‘와 그의 전제조건으로 영원한 젊음과 건강 활력을 전제로 한 ’불로‘에 관한 이야기로 인간존재를 대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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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후이늠국의 방문과 돌아온 걸리버
선장으로 다시 떠나지만 선상의 반란으로 낯선 곳에 버려진다. 그곳에서 현생인류와도 같은 〈야후〉라는 종들을 만나는데 이곳은 말이 지배하는 나라이다. 이 곳에서 인간은 ‘야후’라고 불리는데 이들이 원시인지 외부인지 처음엔 잘 알지 못하지만 이후 그 전말이 언급된다. 이곳에서도 걸리버는 앞선 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주인님이라 부르는 후이늠의 말과 오랜 기간 이야기를 나누지만 결국 자신이 알게 된 것은 그간 인간 사이에서는 약점 축에도 들지 않던 수천가지 잘못을 날마다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p.376). 후이늠의 지배층이 보는 인간에게 이성이란 단지 우리의 타락한 천성을 악화시키거나 자연이 부여하지 않은 새로운 타락을 획득하도로만 쓰는 것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걸리버는 이곳에서 오랫동안 그들의 사상과 생각을 들으면서 겸손한 청자로 남는 것에 대한 무한한 기쁨과 유용성을 확인한다(p.405) 결국 그는 그곳의 지배층으로부터 추방을 당하게 되고 다시 바다에서 배를 만나 구조되지만 그가 오랫동안 후이늠에서 살면서 얻게 된 인간에 대한 혐오는 인간을 차마 바라보지도 곁에 가지도, 만지지도 못하게 하는 상태에 까지 이르고 만다. 심지어 자신의 가족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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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의 책에서 언급한 걸리버가 여행한 네 나라에 대한 이야기의 요약부분이다. 사실 걸리버 여행기에 대한 요약에 내가 많은 지면을 할애한 것은 걸리버가 네 나라의 군주와 지배계급과 나눈 이야기 자체가 갖는 상징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실 이건 어디까지나 뼈대일 뿐이다. 맛깔나는 이야기는 이 책을 통해 직접 확인을 하기를. 걸리버는 그가 속한 세계에서 외부자의 시선으로 이 책에서 많은 이야기를 한다. 여기서 바로 외부자의 시선이란 네 나라의 군주들이 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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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리버는 네 개의 나라를 여행하는 동안 다각도에서 다면적으로〈비교〉를 하거나경험하게 된다. 신체적으로는 거인에서, 소인으로, 외면적 추악함의 모습을 통해 인간의 내면을 보기도 하고 심지어 마지막에는 인간이 아닌 동물의 지배를 받는 야만인이 바로 인간인 ‘야후’라는 종족을 통해서. 스위프트는 신체적인 비교를 통해 아주 우회적으로 인간을 드러낸 것 같지만 어떻게 보면 매우 직선적이기도 하다. 그는 〈2.브롭딩댁으로의 향해〉에서 밝혔듯이 ‘비교에 의해서가 아니면 어떤 것도 크고 작음이 없다는 철학자들의 말을 언급하였다. 결국 자신이 자신의 나라에서 벌레와 같은 존재가 되었음을 확인하는 부분이나, 이로 인해 그간 자산이 느낀 아름다움이란 단지 우리와 크기가 같기 때문에 아닌가 하고 생각(p.130) 하는 부분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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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프트는 하나의 나라가 아니라 네 나라를 통해서 이렇듯 많은 비판과 풍자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작정하고 한듯하다. 각각의 나라에서 중심이 되는 이야기하고자 하는 몇몇 주제가 있지만 결국 그는 인간에 대한 혐오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알지 못했을 때의 세상과 알고 난 후의 세상이 이전 같지 않음을 다시는 예전처럼 살아갈 수 없다하는데 그가 이 책의 마지막을 장식한 결론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세상에는 혁명가도 있고 혁명가가 있게 한 사상가도 있지만 스위프트는 정치적인 야먕도 있었으나 이를 이루지 못했다. 그랬던 그가 이 책을 5년동안 집필을 했고 지금 읽어도 이럴진대 당시의 사회적 반향을 생각하면 그 시절 누군가는 한번은 해야 할 말을 한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물론 이소설은 식민지에 대한 이중적인 입장, 여성에 대한 견해, 정치를 꿈꾼자가 현재의 정치인이 담근 진흙탕 세계에 대한 생각에서는 비판의 소지에 대해서는 따로 토론이 있을 정도로 짚어볼 부분이 많다. 그럼에도 이 소설의 백미는 소설의 마지막부분이다. 볼테르가 말 한대로 우리는 우리의 정원은 우리가 가꾸어야 합니다와 마찬가지로 많은 부분을 함축하고 있다. 다소 모순적으로 표현한 것 같으면서도 그의 삶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고 일급수에 사는 물고기 같은 느낌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스스로가 만든 고립무원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 소설이 내게 준 재미와 생각거리는 매우 크다. 조지 오웰이 사랑한 책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