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하나의 이야기..
표지를 벗겨보면 이렇게 원제가 나온다. 단 하나의 이야기는 하나, 둘, 셋 쳅터로 구성되어 이야기는 전개된다. 그리고 책의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이야기는 자신이 첫사랑, 연애의 기억에 관한 이야기이다. 단 한명의 목소리로 들려주는.. 소설은 현재에서 시작되어 과거로 거슬러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시점은 1인칭 나에서 2인칭 너의 시점이 가끔씩 마디마디로 나타난다. 처음 소설의 도입부를 보았을 때는 영화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이란 영화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영화가 사랑에 관해 직접적이고 파괴적인 방식으로 현실을 보여주었다면, 반즈의 소설에서는 어딘지 모를 성숙함으로, 사랑에는 기술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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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 무심한 폴에게 그의 부모는 사교장이라고 할 수 있는 테니스클럽이라도 나가서 또래들처럼 젊고 발랄한 여자라도 만나길 바라지만 이렇게 떠밀려 나간 폴의 눈에 처음 들어온 여자는 폴 또래의 자녀가 둘이나 있는 중년의 여인이다. 30여 년간 그녀(수전)는 이 테니스클럽 정회원이었고, 폴과 우연히 복식조가 되면서 그들의 만남은 시작된다. 시작은 강렬하지도 않았고, 뭔가 극적인 것이랄 것도 없지만, 폴은 그녀의 테니스복장이며 특별히 호들갑스럽지 않으며 드라이하지만 호탕한 모습 속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그렇다. 흔히들 생각하면 보통 설레임으로 시작되는 그 사랑의 이야기가 이 이야기 속에서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애초 사람 그 대상보다 사랑하는 마음이 먼저 시작되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 환상 속에 시작되지는 않지만 분명 그것은 폴의 또래들의 삶과는 다르다. 첫사랑이여서 사랑에 관해 이론적인 것에는 현실성이 없다는 사실을 안 폴이지만 그를 전적으로 수용하는 수전의 삶 또한 무척 독특하다. 그녀의 사랑을 독차지 하고 싶었던 폴에게 수전은 사랑은 결코 희석되는 것이 아님을 알려주는 것이다. 나는 처음에는 그 말을 무한 증식하는 사랑의 속성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지 알았지만 막상 읽고 나서 뒤늦게 폴을 부를 땐 ‘내 평생’이라는 말에서 그녀가 얼마나 폴을 사랑했는지 알 수 있었다. 자기의 삶이 파괴되어 버릴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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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뜬구름 위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하루하루라는 일상이 있다. 일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매우 강력한 것이다. 소설의 말미를 통해서 나는 작가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그래서 의외로 결말에 놀라지도 않았다). 때문에 결혼이라는 현실, 일상에 완전히 빠졌을 경우 그토록 사랑했던 한 사람이 때로는 차라리 몰랐다면 더 좋았을 그런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나 또한 사랑에 관한 속성에서 정말 이것만큼 아이러니 한 것이 없다는 생각을 늘 하곤 한다. 그런데 폴과 수전에게는 두 사람이 함께 하게 되는 순간 이런 일상이 아니라 언제나 그 상황을 응시하고 마음속으로 되내이고 행동이나 말은 정제되어 최소한으로 나온다. 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앞에서 언급되지 않은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들이 결정적으로 매클라우드의 가정을 떠나기로 한 것에는 수전이 시달리고 있는 가정폭력문제가 존재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와 끝끝내 이혼을 하지 않는다. 결국 그 과정에서 폴에게 가해질 데미지를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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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어디까지는 폴이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고 때로는 폴을 바라보는 한 시선으로부터 이야기가 되고 있기에 수전이 왜 알콜중독에 이르게 되었는지 그런 과정은 나와 있지 않다. 물론 그렇다고 폴의 이야기가 무척 불충분하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가 왜 그렇게 되었을지, 어쩌다 그렇게 되었을지..결국 사랑이란 온전히 자신을 내어주는 재난이라는 것, 너무도 마음이 아파 머리보다 가슴으로 먼저 저릿함을 느끼게 된다. 그녀와 함께 있음으로 인해 그녀를 구한 것이었지만, 그녀와 함께 있음으로 인해 그녀의 삶이 파과되는 것을 지켜보는 폴의 심정이 너무도 애잔하고 어른스러웠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의 열렬하고 진지한 사랑이라 할지로도 이처럼 삶에서 정확한 공격을 받으면 그 사랑이 연민과 분노의 혼합물로 응고 되어버릴 수 있다는 소설 속 문장이 보여준 바와 같이 사랑에 관한 각자의 이야기는 이렇게 다르고도 똑같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녀의 삶을 바라보며 그가 느끼는 공감과 반감의 마음의 공존을 알게 된다는 것은 사랑에 관한 달콤한 속삭임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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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보면서 셋 이야기가 시작되는 첫 장에서 눈물을 흘렸다, 행복한 기억과 불행한 기억가운데 어느 게 더 진실할까? 너무도 평범한 질문 같은데 소설을 한참 읽은 다음 맞이한 이 문장은, 폴이 처음으로 누군가를 만나고 그 사랑에 투정부리지 않으면서 자신이 사랑에 관해서는 잘 모른다는 것을 인식하며 그 후에도 지속되어 온 그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서였을 것이다. 여자는 두 사람의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한 후 헤어지기 전 그 사건이후 라고 생각하지만 남자의 경우 처음부터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폴은 다른 방식을 택한다. 그녀와 결국 떨어져 살게 되고, 그녀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그는 그녀와의 사랑을 지금 다시 기억속으로 들어가서 회상을 한다. 어쩌면 좋은쪽으로 혹은 나쁜쪽으로 왜곡된 기억이라 할지라도 둘 다 모두 편향의 가정을 두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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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힘들고 고된 사랑을 돌이켜보면서 이렇듯 왜곡이나 편향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 기억속에서 그는 결국 그녀와의 첫만남, 인생에서 함께한 그 첫해의 모든 것들을 올바르게 기억하고자 한다. 그것이 그녀와의 사랑에 대한 마지막 의무라는 것. 폴은 수전을 사랑한 것을 절대 후회하지 않았고, 그저 자기가 너무 어렸다는 것, 너무 무지했다는 것을 그 때가 아닌 지금에서야 비로소 알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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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래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왔기에 이후 폴의 삶이 다를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부모들처럼 언제나 자제와 평정을 소중하게 여겼기에 그것을 수전과의 관계에서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 그의 산호처럼 내부의 느린 성장으로 남은 나날을 사는 동안 흔들림 없이 웬만큼 불어대는 큰 바람, 큰 파도도 막아낼 수 있었다. 이것은 언제나 관찰과 기억(혹은 기록)으로 이루어진 삶을 통해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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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련된 문장, 아포리즘의 결과가 아니라 그 과정에서 건져올린 그 문장들의 무게감을 더없이 느끼게 해준 작품이다. 그리고 누군가와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에서의 어떤 태도를 하나 배운 것도 사실이다. 행복하건 불행하건 그것은 엄연히 나를 존재하게 했던 사실들이기 때문이다. 사랑과 진실에 관한 이야기..진부하지 않고 지적인 문장으로 오늘도 줄리언 반즈의 소설을 사랑하게 만들어준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