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세트 - 전3권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김희숙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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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은 전체를 다 읽고 난후 후기를 적어 내려가는 것보다는 개별적 한권 한권에 대한 후기를 남기는 것이 조금은 부담이 덜하다. 그 이유는 나는 이 책을 읽는 동안 일부의 이야기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독립단편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야기의 전체 흐름을 결정짓는 사건은 단 3일이라는 시간이지만, 도스토옙스키가 다루고자 하는 것은 한 시대가 저물고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고자 하는 러시아의 미래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갖는 이 에피소드들-대심문관, 조시마 장로의 설교, 일류사의 이야기, 검사의 논고와 변호사의 변론 등- 이야 말로 어쩌면 도스토예프스키가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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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은 만나기까지 어려웠을 뿐 내가 읽기 전에 든 생각 이상으로 잘 읽혔다. 책 중간 중간의 유머와 소설을 읽어나가는 동안 느낀 긴장감은 그간 내가 이 고전을 귀동냥으로 들어왔던 것 이상의 풍부한 이야기가 들어있음을 알게 되었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은 가장 위대한 세계적 작가의 평생의 사상과 신념이 응축된 책이다. 이 책의 배경이 되는 러시아의 1870년대는 정치적, 사회적으로 개혁의 바람이 분 이후 여러 혼란이 있었던 시기이고, 그 혼란은 고스란히 민중들의 삶으로 전해지던 때였다. 이러한 시대를 카라마조프가라는 한 가족을 둘러싼 친부 살해라는 사건을 중심으로 이야기는 흘러가고 있지만 단순히 범죄소설로 한정되어 보지는 않는다. 그것은 아마도 등장인물들의 저마다의 인간이 가질 수 있는 특성을 지니면서도, 그 특성이 단순한 소설 속 캐릭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사상으로 대변되어 심리소설, 가족소설, 사회소설에 이르기 까지 종합적 소설로서의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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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의 본격적인 시작에 앞서 화자는 먼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과 주요 인물에 대하여 많은 장을 할애하여 설명한다. 첫 시작인 아버지 표도르에 대한 묘사 부분을 읽다보면 그림을 그릴 수 있을 정도의 외모, 그리고 작가가 말 한대로 주름과 주름사이에 스며든 인간적 물욕, 정념, 비열함, 그리고 신을 조롱하는 듯한 모습을 보게 되고, 그의 아들들은 그런 아버지가 가진 면면들의 일부를 갖고 있음을 소설을 읽다보면 찾아볼 수 있게 된다. 물론 소설을 처음 읽으면서 바로 파악을 했던 부분은 아니다. 그리고 소설은 초반에 표도르가 아내들을 잃고 난 후 아이들에게 어떻게 대했는지, 그들의 존재조차 잊어버린 부분들을 밝혀둠으로써, 이는 가족안에서 자라나는 아이에게 미칠 수 있는 영향을 이후 변호사의 변론을 통해 다시금 확인을 시켜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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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듯 흩어져 있던 가족들이 아버지와 형의 재산문제로 다 모이게 되고, 이야기는 결국 단 3일이라는 시간 속에서 친부살해라는 사건으로 번지게 된다. 표면적으로는 아버지와 아들이 한 여자를 두고 벌이는 질투로 인한 것이지만, 이면적으로 존재하는 이야기 속에서는 한 마리의 독사가 한 마리의 독사를 죽이는 꼴이라고 언급되는 이반의 모습, 툭하면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말하는 장남 드미트리의 말처럼 여기저기서 살의를 느끼는 부분들이 언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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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살의, 어쩌면 악의 결정체로서 나타나는 살의를 도스토엡스키가 언급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왜 이들이 이런 악의를 갖게 되었으며, 이것이 어떤 방식으로 실현이 되는지를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대부분의 등장인물이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비롯하여, 자신의 도덕을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오만하기까지 한 카체리나, 출세지향주의 라키친, 아버지와 아들을 다 농략하는 그루센카, 그리고 표도르의 사생아 스메자르코프를 보다보면 어린 시절 성장과정에서 부모들에게 미친 영향, 혹은 불운한 가정이 미친 영향이 비치곤 한다. 물론 알료사를 바라볼 때 모든 아이가 가정환경 때문에 비뚤어진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에게 적절한 선의를 지킬 수 있는 장치가 없을 때 결국 인간이 가고자 하는 길에서 멀어진다는 것을 알려준다. 더군다나 소설 속 드미트리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삶의 방황이 끝이 날 것을 예상하는 서른이 다 되지 못한 여전히 삶에서 배운 것이 적은 세대들이 아닌가..도스토예프스키는 3권에서 나온 콜랴의 이야기를 통해서 어린시절 삐둘어진 세계관이 성장한 이후 어쩌면 이반과 같은 사람으로 커질 수도 있을 것임을 내비침으로써 이를 뒷받침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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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라는 이 종합소설이 어린시절 가정환경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소설가가 스스로 언급을 한 것처럼 대심문관부분이나 조시마 장로의 선종 전 행해진 담화에 대하여 알료사가 정리한 그의 생애와 설교를 읽다보면 좀 더 심오한 이야기에 이르게 된다. 그것은 한 인간이 신앙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회의에 대한 깊고도 긴 생각을 나타낸 부분을 통해 인간에게 신이 말한 진리,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그 진리에 도달하지 못한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게 되는지를 보여준다. 대심문관 이야기에서 핵심은 그리스도가 인간에게 준 자유.. 성경적으로 말하면 그 자유의지로 인해 오히려 더 불행한 삶을 초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후 검사의 논고에서 언급이 되는데 인간에게는 가장 높은 곳을 지향하는 마음과 가장 낮은 곳을 지향하는 마음, 이 두 가지의 심연을 다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가면서 직면하게 되는 선택의 귀로에서 그리스도처럼 시험에 들지 않은 자가 많지 않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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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 인하여 인간은 그 자유를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런데 이반은 그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변론을 알료사에게 펼칠 때는 만약 신이 없다면, 만약 인간에게 불멸이 없다면이라는 것으로 이야기함으로써 그가 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 것은 아님을 알게 된다. 그럼에도 그의 대심문관 이야기는 이성적인 인간이 듣기에는 매우 합리적으로 들린다. 죄없는 아이가 고통을 당하는 이야기를 통해 그는 정의는 없으며, 신이 외면한 인간세계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는 듯하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그렇게 아이와 인류에 대한 사랑을 논하는 이반이 정작 자신의 가족에게는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는 모습을 통해 얼마나 그가 말하는 사랑이 실체가 없는지 이야기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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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대심문관을 중심으로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첫 번째 꼭지 이후 조시마 장로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사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들이 대심문관 vs 조시마 장로의 설교로 보지는 않았다. 어느 정도는 그것이 이성 중심 혹은 인간이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다는 신이 된 인간의 이야기에 모든 것이 허용된 인간이 결국 선택한 것은 불필요한 욕망과 이기적이고 오만한 의지를 가진 인간에 대하여 우회적으로 반응하고는 있지만, 그리스도가 인간에게 준 자유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정면으로 혹은 소설의 전체를 통해서 언급된 부분은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 부분은 내가 어쩌면 내가 좀더 읽고 나면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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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시마 장로의 설교 이야기는 대심문관의 이야기에 이어 나오긴 했으나, 이후 양파 한 뿌리에 대한 이야기와 맞닿아 있다. 인간이 한평생 살면서 겨우 행하는 선행이 그 뿐이라는 것은 비단 양파뿌리 할머니의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다. 다만 알료사도 그루센카도 자신들은 그저 양파 한뿌리의 선행만을 겨우 한 것뿐이라고 하지만 이후 알료사와 그루센카가 서로에게, 그리고 장남 드미트리에게 보여주는 사랑은 그 이상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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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서는 이후 드미트리가 아버지의 집으로 찾아가게 되는 배경과 시간적 흐름, 그리고 그리고리에 대한 타격 등의 이야기를 통해 장남 드미트리가 어떠한 인물이지에 대한 본격적으로 접하게 된다. 책 서두에 군인 시절 있었던 그의 행적이나 이등 대위 스네기료프에게 준 모욕, 아버지를 두들겨 패는 부분에서의 드미트리는 망나니도 그런 망나니가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그가 그리고리에 대해 타격을 가한 후 자신은 더 이상 구원받을 수 없는 인간임을 알고 삶을 파멸되었음을 느끼는 부분, 그리고 그랬던 그리고리가 다시 살아났다는 말에 대해서 안도감과 용서받기를 원하는 장면을 통해 드미트리는 선과 악의 경계를 넘나드는 그야말로 인간의 가장 보편적인 모습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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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 소설은 최후에는 공판을 앞둔 시점에서 이반이 겪게 되는 내적갈등, 그것이 너무도 심하여 섬망증에 이르는 병으로 나타나게 되는 부분을 통해 이반 역시 결국 양심을 가진 인간임을 드러내게 해준다. 그리고 검사의 논고를 통해서 우리가 맞이하게 되는 부분은 카라마조프의 이야기는 온 러시아를 떠들썩하게 한 사건이고, 그것은 소설 속 배경이 되는 시대의 모습이며, 결국 까라마조프가를 통하여 러시아의 현재의 얼굴을 보여주는 것임을 알려준다. 또한 법정심문 장면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죄형법정주의증거법정주의와 같은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검사는 많은 이야기를 정황과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통해 논거를 펼쳐나가고 있는데, 이 부분의 경우 사실 오늘날 분명한 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많은 이들이 법망을 빠져나가는 것을 보면 어쩌면 그 부분이 다소 나아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검사가 고골의 소설 죽은혼에 등장하는 트로이카의 이야기를 통해 앞으로의 러시아를 위해 드미트리에게 선처를 하지 말아달라는 이야기를 마치자마자 사람들은 검사의 심리분석에 치우진 이 논거에 대한 의견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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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도스토옙스키가 하고자 하는 말은 결국 변호사의 변론을 통해서 드러난다. 증거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해야 할 법정이 심리분석으로 일관되게 주장하는 하는 모습을 통해서 그것을 다른 끝에서 바라볼 경우 완전 정반대의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도스토엡스키는 이 부분을 얼마나 살 떨리게 들려주는지 사실상 소설을 읽는 내내 이 부분에서 가장 강렬한 인상을 받기도 하였다. 인간은 그 죄에 해당하는 벌(형량)을 받는 것만으로 그가 저지른 죄에 대해서 진정한 회심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한 부분에서 사회재판이 갖는 한계는 오늘날 사회에서도 여전히 제기되는 문제이다. 어쩌면 법이라는 것은 테두리를 갖는 것으로 가장 최소한의 것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드미트리는 아버지를 죽이지 않았지만 유형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카체리나에게 용서를 빌기 위해서 용기를 내어 마무리가 되고, 소설의 전체 이야기는 일류사의 죽음으로 마무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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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결국 412편을 이야기 이후 에피소드라는 한 장을 통하여 열린 결말로 마치는데 이는 도스토옙스키가 앞서 언급한 대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1,2,3권에 해당하는 이야기는 작가가 구상한 소설의 절반에 해당되기 때문인 듯하다. 결국 나는 이로서 위대한 소설가가 쓰고자 하는 이야기를 이제야 접했을 뿐이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사상, 각각의 인간들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그의 사상들에 대해서 좀 더 생각을 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소설에서 언급한 개개인이 자신의 성을 지키고 무너뜨리지 않은 부분은 오늘날의 모습과도 너무도 닮아 사실 뜨금하기도 하였다. 올 한해 내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었다는 사실만으로 내 독서인생에 기념할 일을 했다는 것에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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