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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술, 낭독 - 토요일에도 보고 싶은 동료들과 읽고 울고 웃는 관계 맺기
이정화.이한솔.신새벽 지음 / 세미콜론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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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들이 낮술 하며 낭독 하는 이야기라.’ 이 책의 출간 소식을 접했을 때 제목만 보아도 내용을 어느 정도 알 것 같아 과연 재미있을까 하는 의문이 먼저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간 유튜브 〈민음사 TV〉로 보아왔던, 내가 닮고 싶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쓰여 있다니 궁금하기도 했다.

서점에서 책을 펼쳐 들고는 의외라는 생각을 했다. 세 명의 편집자가 술과 책, 낭독이 함께 하는 낮술낭독회에 참여한 경험을 자신의 시선에서 기록해 나간 글은 예상했던 대로 책 이야기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타인과, 그중에서도 동료와 관계 맺기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었다. 특히 나를 사로잡은 분은 바로 신새벽 편집자였는데, 종종 유튜브 영상에서 뵈었던 그와 이 글을 쓴 그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이 놀라웠다. 내향적으로 보였던 신새벽 편집자는 실은 혼자 있는 것을 싫어하지만 타인과 관계 맺는 일에는 서툰 사람이었다. 내 멋대로 구성한 그의 이미지가 부서지는 가운데 서툴고 부끄러웠던 순간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그의 글은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의도치 않게, 때로는 의도했던 것보다 과하게 타인에게 뾰족하게 날을 세우던 신새벽 편집자는 낮술낭독회를 통해 매번 진중하게 자신의 낭독을 듣는 청자의 존재를 경험하고, 동료들과 의견을 교환하고 다투고 화해하며 내가 아닌 타자를 이해하려는 노력에 다가간다.


회사 사람과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좋은 책을 소개하고 낭독의 이점을 나열하리라는 예상을 뛰어넘어 이 책은 직급도, 나이도 다른 동료와 친구가 되는 과정을 담은 책이었다. 그러니까 이 책의 방점은 낮술도 낭독도 아닌 '관계'에 있었으며, '직장에서는 진정한 친구를 만들 수 없어.' '회사 동료는 친구가 아니지.'라는 고정관념을 넘어선 회사 동료이자 친구들의 이야기였다. 처음에는 서툴렀을지언정 점점 서로를 이해하고자 하는 낭독회 멤버들의 노력과 의지가 인상 깊었다.

왜냐하면 낮술낭독회 안에서도 아이가 있고, 결혼을 했고 안 했고, 혼자 살거나 혼자 살지 않는 등의 차이가 드러나고 불거져 서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절실해졌기 때문이다.

아이가 없는 친구들끼리였다면 아마 어깨를 으쓱하며 멀리했을 엄마들의 에세이를 한번 읽어봤다. 아이가 있는 다른 친구와 대화하며 한솔은 어땠을지 생각했다. 그러면서 결혼한 내가 비혼인 친구들을 내 식대로만 판단하고 있는 걸 알아채기도 했다. (203쪽)

책과 낭독을 매개로 동료-친구와 서로의 생각과 고민을 건강하게 나누고, 또 그 관계 속에서 다시 성장하는 스스로를 발견한 사람들의 기록은 회사에서는 친구를 만들 수 없다 선을 그었던 독자들에게 그 선을 넘어보자는 의지를 불어넣어 준다.


책에서 책으로, 뜻밖의 연결과 도약

더불어 『낮술, 낭독』은 타인과 함께 낭독을 해보고 싶게 만드는, 예상된 기대 또한 확실히 만족시켜 준다. 혼자 독서를 하다보면 분야를 불문하고 이전에 읽었던 책들과 지금 읽는 책이 이어지는 묘하고 재밌는 경험을 종종 한다. 이런 우연이 공동체적으로도 발생할 수 있다니!

'동학도 김개남의 배를 갈라보니 간이 과연 커서 한 바가지더라'는 엽기적인 이야기가 다음 책인 『소년이 온다』의 국가 폭력과 호응하면서 다음 책으로, 그다음 책들로 연결 고리가 계속 이어지는 데 놀라움을 표했다. 낮술낭독회는 정말로 그렇다. 앞서 상의하고 계획을 짜지 않아도 책들은 뜻밖에 통하고 낭독자는 우연한 만남에 설렌다.(220쪽)

세영 | (…) 이렇기 자기 얘기로 넘어간다고? 이 책으로 연결시킨다고? 이런 지점이 늘 신기했달까. 그렇게 이야기가 이어지는 짜릿함이 낮술낭독회의 큰 즐거움 중에 하나야. 가령 내 이야기에서 한솔, 정화, 기현, 새벽 이야기로 또 그 반대로 넘어갈 땐 도약이 필요한데 그때 늘 책이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 들어.(255쪽, 「우정 대담」)

너무나 상관없어 보였던 두 책에서 비슷한 말들을 발견할 때, 나는 그 우연이 신기하고 좋아서 두고두고 생각한다. 그런데 오늘 처음 본 누군가가, 오늘 처음 본 책이 내가 낭독하고자 고심 끝에 선별한 책과 이어지는 지점이 있다면, 나는 아마 그 순간 또한 오래도록 잊지 못할 테다. 낮술낭독회가 무려 8년이나 지속되고 있다고 하는데 책과 책이, 자신의 경험과 타인의 경험이 뜻밖에 연결되는 신기함과 쾌감에 그들은 중독되어 버린 것은 아닐지! (ㅋㅋㅋ)


"낭독은 관계를 불러오는 일"

재밌을까 의심했던 첫인상이 무색하게도 페이지를 넘기면 넘길수록 이 책이 점점 마음에 들어서 펼쳐 보지도 않고 쉽게 판단해 버렸던 일이 약간 미안해졌다. 발문을 쓴 조은 편집자는 "낭독이 관계를 불러오는 일"이라 말한다. 부디 기회가 닿는다면 언젠가 낭독과 함께 동료를 친구로 만들어 가기를, 『낮술, 낭독』은 그런 막연한 기대를 품게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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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노동자들 - 경계 없는 노동, 흔들리는 삶
이승윤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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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더 불안정해지는 노동자들

기술은 발전하고, 세상은 더 편리해졌다는데 일터와 노동자의 삶은 어째서인지 점점 더 불안정해진다. 복지국가와 노동시장, 불안정노동을 연구하는 저자 이승윤은 급변하는 노동시장 속에서 비정규직, 새벽 배달노동자, 플랫폼노동자, 프리랜서, 유튜버 등 사회 제도 바깥에 놓여 보호받지 못하는 불안정노동 계층의 구체적인 삶을 들여다본다. 그는 이 책을 통해 노동자 개인이 노동의 위험과 결과의 책임을 떠맡도록 내모는 사회구조의 불합리를 지적하고, 보이지 않는 노동을 분명하게 인식하도록 사회와 주류집단, 그리고 우리의 성찰과 대응을 요구한다.


철저히 '남의 일'로 여겨지는 노동 문제

1~3부에서 제시하고 분석하는 다양한 계층의 노동문제를 접하며 이 문제들의 기저에는 '철저한 타자화'가 자리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불안정노동자들을 포괄하지 못하는 제도와 공적 인정을 받지 못하고 평가절하되는 노동들은 주류집단에게 내 일이 아닌 '남 일'로 여겨지리라 짐작해 본다. 배달노동자, 급식조리사, 보조교사 등 우리의 일상은 불안정노동자들의 노동으로 유지되고 있음에도 그 일들과 자신의 삶이 무관하다 선을 긋고 무시하는 사회 전반의 태도가 씁쓸할 따름이었다. 더불어 이런 타자화가 노동자 간 연대의 어려움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이 가장 안타까웠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본질적으로 다른 성격의 시간빈곤을 경험한다는 연구 결과는, 저임금노동자가 과도한 노동시간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이에 대항하는 노력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연대가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27쪽)

청년노동시장의 불안정한 청년노동자와 불안정하지 않은 청년 노동자가 이루는 U자형 분포는 청년노동시장 내 불안정성의 양극화를 보여주고, 이것은 청년집단 내 연대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 또한 암시한다.(140쪽)


청년 집단의 양극화

특히 내가 청년 당사자이기 때문인지 3부 「청년노동, 누가 무엇을 말하는가?」에 드러난 청년 집단 내의 타자화 사례가 인상 깊다. 인천국제공항공사의 비정규직 정규직화 정책을 두고 발생한 청년 내부의 갈등과 저자가 청년정책조정위원회의 초대 부위원장으로서 산재로 사망한 청년노동자들을 언급하며 이를 개선하기 위한 활동을 해나가자는 의지를 담아 건넨 인사말에 "청년들이 힘들고 어렵다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며 행복한 청년도 많다고 답하는 한 청년 위원의 대답이 기억에 오래 남았다.

자신의 일자리에는 영향이 없고 설사 영향이 있다 하더라도 노동문제가 제로섬이 아닌데도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정책들에 대해 '언론에 드러난' 청년들은 분개했다.(127쪽)

이처럼 한쪽에서는 공정한 경쟁을 통한 기회를 요구하는 반면, 다른 한쪽에서는 오랜 기간 불안정노동에 시달린 현실을 호소했는데 후자의 목소리는 배제되었다. 그리고 ‘공정’을 요구한 목소리는 실상 기존의 불평등한 사회구조를 묵인하는 결과를 낳았다.(129쪽)

공존과 연대를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개인의 문제에만 집중하는 청년 집단의 현실은 암울했지만 그래도 저자가 하나의 부를 할애할 만큼 청년의 노동 문제를 주요하게 살펴주고 있다는 사실에 청년으로서 감사했다.


내 신뢰를 가져가려 온 나의 연구자

그래도 가장 감사했던 순간이 있다면 저자가 이 연구가 의미가 있는지, 탁상공론에 불과하지는 않은지, 내가 이 연구를 할 자격이 있는지 … 끝없는 회의에 갇혔다가도 매번 이를 극복하고 약자에게 필요한 연구를 이어 나가기로 결심했던 때이다. "권력에 대항하여 진실을 외치는 이, 금기를 깨는 이, 목소리가 없는 자에게 목소리를 부여하는 이"인 학자의 책임을 되새기고, 연구대상자를 그저 '타자'로만 여기지 않기 위해 의식적으로 성찰하는 모습을 보며 연구자를 향한 신뢰가 무한히 쌓여만 갔다. 사회에서 타자화된 노동자들을 가시화하고 호명해 주는 이승윤이라는 연구자, 이렇게 내 신뢰를 아낌없이 드릴 수 있는 학자를 또 한 명 알게 되어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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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왕
마자 멩기스테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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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그림자 왕』은 나이가 든 히루트의 시점에서 시작해 이탈리아-에티오피아 2차 전쟁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다시 나이 든 히루트로 돌아와 마무리된다.

성별과 계층에 따라 '전쟁'은 너무나도 다른 경험을 제공한다. 특히 약자에게 가장 잔인하게 굴면서도 그들의 이름은 가장 깨끗이 지워 버린다는 점이 가장 고약하다.
세상이 지운 이름을 다시 회복할 것. 오늘날 그들의 이름을 기억할 것. 그들의 비참했던 현실을 잊지 말 것. 마자 멩기스테가 전하려고 하는 바가 소설을 읽는 내내 느껴진다. 그리고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즉 시작과 끝에 히루트의 입으로 책의 주제를 명확히 짚어 준다. 독자는 덕분에 어떤 마음으로 이 다음을 읽어 나가야 하는지 독서의 방향을 잡을 수 있고, 또 이 방대한 이야기의 끝을 단단히 마무리할 수 있다. 마무리한다 함은 지워진 이름을 호명해야 한다는 책의 이야기를 단지 소설로만 남기지 않고, 현실로 불러오려는 마음을 먹는다는 것이다.

『그림자 왕』은 에티오피아의 역사를 기반으로 했지만, 작품이 전하는 메시지가 에티오피아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가까운 예로 우리나라에도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가 허다한데, 심지어 그중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이 정말 많이 잊혀졌다. 각 나라의 역사에서 너무나 중요한 순간을 만들어 낸 이를 기리는 일도 분명 중요하지만, 미처 드러나지 않은 수많은 이가 존재했음을 의식하고 또 그들에게 집중하는 시도가 필요함을 다시 체감할 수 있는 책이었다.

세상이 감춘 것은 이름뿐만이 아니다. 그 이름이 가진 삶까지다.
​히루트나 다른 여성들, 또 권력자들을 위해 일종의 방패..로 쓰였던 말단 병사들이 그 시기에 어떤 취급받았는지가 책을 통해 다시금 드러난다. 물론 우리가 읽는 것은 실제의 아주 일부일 뿐일 거라는 것조차 잘 알고 있어서 마음이 너무 끔찍했다. 마자 맹기스테는 작품으로 약자를 호명함과 동시에 강자의 잘못과 패악을 드러내고 비판한다. 강자들의 삶은 약자를 제물 삼아 영위한 나날이다.

무자비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면서도 한편에서는 다양한 형태로, 자신만의 방식으로 싸우는 여성들을 만날 수 있어 반가웠다. 아스테르, 히루트, 피피, 요리사 등 책 속 여성들은 마냥 영웅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이기적으로 굴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남들은 하지 못할 행동을 용기 있게 해낸다. 남들에게 인정받지 못해도 각자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싸움을 계속하는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또 그들의 그런 행동이 옳았다거나 혹은 틀리다고 함부로 단정 지을 수 없음을, 완벽하게 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가 한 일이 축소되거나 사라지지는 일은 옳지 않음을 일러 주려는 저자의 의지가 느껴졌다.

강자와 남성에게만 집중된 역사 너머에 존재하는 여성과 약자들을 주목하고 그들을 호명하자는 멩기스테의 뜻을 600쪽이 넘는 책을 읽는 내내 느낄 수 있었고, 에티오피아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역사를 비롯해 지금 현실에서도 지워지고 잊혀지는 많은 이들을 기억하자고 다시금 마음먹는 계기가 되었다.
​또 내용이 시사하는 바 외에도 한국이나 영미가 아닌 다른 문화권의 이야기를 접할 수 있었다는 점이 가장 좋았다.
등장인물이 에티오피아인이라 사실 초반에 머릿속에 책의 세계관을 구축하고 상상하는 데 평소보다 많은 시간이 들었다. 내가 이렇게나 좁은 시야로 세상을 보고 있구나 하는 반성과 함께 영미권 말고 다른 나라가 배경이 되는 책도 많이 읽어야겠다는 다짐을 할 수 있었던 귀중한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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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으로부터,
정세랑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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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심시선은 한국전쟁 중에 하와이로 이주한 여성으로 하와이에서 세계적인 화가를 만나 독일 유학길에 올랐다가, 다시 서울로 돌아와 작가로서 명성을 떨친 1세대 페미니스트이다. 『시선으로부터,』는 이런 심시선의 딸들, 그리고 딸들의 딸과 아들 들이 심시선의 제사를 지내기위해 하와이로 떠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우리의 시선이 필요한 문제들

『시선으로부터,』의 대전제인 모계 사회는 이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이기도 하다. 심시선 가족의 중심은 '딸'이다. 중요한 일은 딸들이 맡아 처리하고, 아들과 남편 등 가족 내 남성 구성원은 현대 사회에서 여전히 여성의 일이라고 인식되는 집안일을 담당한다. 전형적인 성 역할이 전복된 가계도가 독자들에게 큰 쾌감을 가져다준다. 

그러나 이런 통쾌한 가모장제를 따르는 가족들에게도 사회의 여성 차별과 혐오는 여전히 존재한다. 크리처 디자이너로 활동하는 우윤은 구직 과정에서 '여자인데 징그러운 것도 잘 다룰 수 있겠냐'는 편견을 마주하기도 하고, 화수는 근무하는 회사의 협력업체 사장(남성)이 여직원들 사이로 던진 염산병 때문에 얼굴을 다치고 유산을 한다. 그 남성에게 피해를 준 사람들은 따로 있는데도 사회적 약자인, 쉽게 피해를 입힐 수 있을 거라 판단한 여성 집단이 남성의 타겟이 된 것이다. 이 외에도 규림의 일화를 통해 남성 청소년들이 딥페이크 포르노를 범죄라는 의식 없이 그저 유흥거리로 소비하는 현실을 드러내는 등 정세랑은 현실의 구체적 사건을 가공하여 소설에 담아 독자가 사건을 떠올리며 사회의 문제를 다시금 인식하게끔 한다.

독자의 시선이 닿아야 하는 수많은 사회 문제가 인물의 상황, 말, 행동으로 녹아들어 우리에게 전달된다. 작가의 소설로 독자들은 여성 차별과 혐오 문제뿐 아니라 동물권, 기후위기의 현실과 심각성을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우리의 시대가, 또 우리가 더 멀리까지 닿기를

"어찌되었던 사람은 시대가 보여주는 데까지만 볼 수 있으니까."(182쪽)


그가 쓴 문장처럼 정세랑은 소설이라는 수단으로 우리가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도록, 우리 시대가 더 멀리 나아가도록 최선을 다해 돕고 있다. 이명혜, 심명은, 김난정, 홍경아, 박화수, 박지수, 이우윤, 정규림, 정해림… 이들의 눈과 입을 빌려 정세랑이 전한다. 유해한 남성성이 우리를 얼마나 가로막고 있는지 깨닫기를, 그리고 그 유해함을 함께 부순다면 우리가 얼마나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는지 기대하기를. 

누군가의 부인이란 설명이 먼저 오는 것에 아연함을 느꼈었다. - P15

"다시 태어난다면 새나 물고기처럼 아주 가벼운 영혼이고 싶어." - P66

나는 특별히 용감하지도 않지만 겁쟁이도 아니야, 스스로에게 증명할 필요가 있었다. - P95

21세기 사람들은 20세기 사람들을 두고 어리석게도 나은 대처를 하지 못했다고 몰아세우지만, 누구든 언제나 자기방어를 제대로 할 수 있는 온전한 상태인 건 아니라고 항변하고 싶었다. - P111

어찌되었던 사람은 시대가 보여주는 데까지만 볼 수 있으니까. - P182

어느 대륙 어느 문화권에서건 투척자는 99퍼센트 남자였다. - P322

전 세계의 탐조가들이, 새의 숫자를 세는 사람들이, 학자들이, 관련인들이 충격과 공황에 빠져 있었다. 곤충이 사라지고 있고, 따라서 다음은 새였다. 그 생각만 하면 아득해져서 자다가도 깼다. 또래의 환경운동가들처럼 학교를 그만두고 나서야 할 판이었다.
그리고 아무도 새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관심이 있는 사람들만 종종거리고 있고, 정말 아무도. 안 그래도 죽어가는데 그깟 방음벽에, 유리창에 스티커 하나 붙여주지 않아서 더 죽이고 있었다. - P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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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새의 이름을 아는 슬픈 너 위픽
문보영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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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여행으로 포르투갈 한달살이를 떠난 경섭과 효진은 주함부르크 영사관으로부터 경섭의 이모인 고길자가 사망했다는 연락을 받는다. 길자는 22세에 고향 제주도를 떠나 독일에 정착한 인물로 자유롭고 단순하게, 원하는 대로 살아간다. 

언젠가 연락이 안 되어 독일까지 찾아온 조카 부부에게 미안함이나 감동을 느끼기보다 그저 신기함과 재미로 기뻐하던 이모는 독일 자택의 욕실에서 쓰러진 지 2주만에 발견되었다는 비보로 돌아온다.


그저 각자의 것인 슬픔

소설은 이모의 사망 소식으로 시작되었지만 침울하지 않다. 단정하고 독립적인 고양이 같은 길자의 삶은 아쉬울 것도 없다는 듯 마무리된다. 마치 한 가지에 앉아 있다가 내킬 때면 가볍게 날아가 버리는 새처럼. 슬퍼하는 사람은 조카인 경섭이나 조카며느리 효진 혹은 독자인 우리일 뿐이다.


굳이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도 괜찮은 이야기, 있는 그대로 충분한 이야기

어쩐지 묘한 이모의 삶과 함께 끝난 소설 뒤에 수록된 〈문보영 작가 인터뷰〉를 읽으며 소설 내용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었는데, 편집자가 작가에게 던진 질문들이 큰 역할을 했다. 『일기시대』부터 시작해 작가의 에세이나 소설, 시집을 읽어왔던 나로서는 추상적인 문보영 화법이 익숙하기는 했지만 동시에 항상 그 속에 담긴 이야기가 궁금했는데 편집자님이 구체적으로 질문을 던져 주신 덕분에 작가가 표현하고자 했던 마음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던 것 같다. 특히, 길자 씨는 왜 한국에 가고 싶었을지, 길자 씨에게도 한국은 '돌아가는' 곳이었을 지(81쪽)에 대한 대답(82쪽)이 기억에 남는다. 한국에 가고 싶다는 말은 길자가 뱉은 무수한 말 중 하나일 뿐이니 큰 무게를 지니지 않기를 바란다는 말 덕분에 길자가 어떤 인물인지 조금 더 명확해진다. 문보영 작가님의 에세이 『삶의 반대편에 들판이 있다면』에 나왔던 '방수 영혼'이라는 단어가 떠오르기도 한다. 남의 의견보다는 자신의 마음에 귀 기울였던 어떤 새의 영혼은 외부 물질을 흡수하지 않고 흘려보내는 방수 영혼을 지니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직관을 어떻게 타인에게 전달할 것인가? - P23

당시 이모가 가장 많이 들은 말은 독일 사람 다 됐네, 였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경섭은 그 말이 조금 슬프게 들렸다. 이모는 제주를 떠나기 전에는 특이하고 유별나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는데, 그 말이 독일 사람 다 됐네,로 대체된 것은 아닐까. - P30

그녀는 자신이 걱정되어 독일까지 날아온 조카 부부에게서 감동을 받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재미를 느끼는 사람이었으니까. - 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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