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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으로부터,
정세랑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6월
평점 :
주인공 심시선은 한국전쟁 중에 하와이로 이주한 여성으로 하와이에서 세계적인 화가를 만나 독일 유학길에 올랐다가, 다시 서울로 돌아와 작가로서 명성을 떨친 1세대 페미니스트이다. 『시선으로부터,』는 이런 심시선의 딸들, 그리고 딸들의 딸과 아들 들이 심시선의 제사를 지내기위해 하와이로 떠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우리의 시선이 필요한 문제들
『시선으로부터,』의 대전제인 모계 사회는 이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이기도 하다. 심시선 가족의 중심은 '딸'이다. 중요한 일은 딸들이 맡아 처리하고, 아들과 남편 등 가족 내 남성 구성원은 현대 사회에서 여전히 여성의 일이라고 인식되는 집안일을 담당한다. 전형적인 성 역할이 전복된 가계도가 독자들에게 큰 쾌감을 가져다준다.
그러나 이런 통쾌한 가모장제를 따르는 가족들에게도 사회의 여성 차별과 혐오는 여전히 존재한다. 크리처 디자이너로 활동하는 우윤은 구직 과정에서 '여자인데 징그러운 것도 잘 다룰 수 있겠냐'는 편견을 마주하기도 하고, 화수는 근무하는 회사의 협력업체 사장(남성)이 여직원들 사이로 던진 염산병 때문에 얼굴을 다치고 유산을 한다. 그 남성에게 피해를 준 사람들은 따로 있는데도 사회적 약자인, 쉽게 피해를 입힐 수 있을 거라 판단한 여성 집단이 남성의 타겟이 된 것이다. 이 외에도 규림의 일화를 통해 남성 청소년들이 딥페이크 포르노를 범죄라는 의식 없이 그저 유흥거리로 소비하는 현실을 드러내는 등 정세랑은 현실의 구체적 사건을 가공하여 소설에 담아 독자가 사건을 떠올리며 사회의 문제를 다시금 인식하게끔 한다.
독자의 시선이 닿아야 하는 수많은 사회 문제가 인물의 상황, 말, 행동으로 녹아들어 우리에게 전달된다. 작가의 소설로 독자들은 여성 차별과 혐오 문제뿐 아니라 동물권, 기후위기의 현실과 심각성을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우리의 시대가, 또 우리가 더 멀리까지 닿기를
"어찌되었던 사람은 시대가 보여주는 데까지만 볼 수 있으니까."(182쪽)
그가 쓴 문장처럼 정세랑은 소설이라는 수단으로 우리가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도록, 우리 시대가 더 멀리 나아가도록 최선을 다해 돕고 있다. 이명혜, 심명은, 김난정, 홍경아, 박화수, 박지수, 이우윤, 정규림, 정해림… 이들의 눈과 입을 빌려 정세랑이 전한다. 유해한 남성성이 우리를 얼마나 가로막고 있는지 깨닫기를, 그리고 그 유해함을 함께 부순다면 우리가 얼마나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는지 기대하기를.
누군가의 부인이란 설명이 먼저 오는 것에 아연함을 느꼈었다. - P15
"다시 태어난다면 새나 물고기처럼 아주 가벼운 영혼이고 싶어." - P66
나는 특별히 용감하지도 않지만 겁쟁이도 아니야, 스스로에게 증명할 필요가 있었다. - P95
21세기 사람들은 20세기 사람들을 두고 어리석게도 나은 대처를 하지 못했다고 몰아세우지만, 누구든 언제나 자기방어를 제대로 할 수 있는 온전한 상태인 건 아니라고 항변하고 싶었다. - P111
어찌되었던 사람은 시대가 보여주는 데까지만 볼 수 있으니까. - P182
어느 대륙 어느 문화권에서건 투척자는 99퍼센트 남자였다. - P322
전 세계의 탐조가들이, 새의 숫자를 세는 사람들이, 학자들이, 관련인들이 충격과 공황에 빠져 있었다. 곤충이 사라지고 있고, 따라서 다음은 새였다. 그 생각만 하면 아득해져서 자다가도 깼다. 또래의 환경운동가들처럼 학교를 그만두고 나서야 할 판이었다. 그리고 아무도 새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관심이 있는 사람들만 종종거리고 있고, 정말 아무도. 안 그래도 죽어가는데 그깟 방음벽에, 유리창에 스티커 하나 붙여주지 않아서 더 죽이고 있었다. - P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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