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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왕
마자 멩기스테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5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그림자 왕』은 나이가 든 히루트의 시점에서 시작해 이탈리아-에티오피아 2차 전쟁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다시 나이 든 히루트로 돌아와 마무리된다.
성별과 계층에 따라 '전쟁'은 너무나도 다른 경험을 제공한다. 특히 약자에게 가장 잔인하게 굴면서도 그들의 이름은 가장 깨끗이 지워 버린다는 점이 가장 고약하다.
세상이 지운 이름을 다시 회복할 것. 오늘날 그들의 이름을 기억할 것. 그들의 비참했던 현실을 잊지 말 것. 마자 멩기스테가 전하려고 하는 바가 소설을 읽는 내내 느껴진다. 그리고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즉 시작과 끝에 히루트의 입으로 책의 주제를 명확히 짚어 준다. 독자는 덕분에 어떤 마음으로 이 다음을 읽어 나가야 하는지 독서의 방향을 잡을 수 있고, 또 이 방대한 이야기의 끝을 단단히 마무리할 수 있다. 마무리한다 함은 지워진 이름을 호명해야 한다는 책의 이야기를 단지 소설로만 남기지 않고, 현실로 불러오려는 마음을 먹는다는 것이다.
『그림자 왕』은 에티오피아의 역사를 기반으로 했지만, 작품이 전하는 메시지가 에티오피아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가까운 예로 우리나라에도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가 허다한데, 심지어 그중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이 정말 많이 잊혀졌다. 각 나라의 역사에서 너무나 중요한 순간을 만들어 낸 이를 기리는 일도 분명 중요하지만, 미처 드러나지 않은 수많은 이가 존재했음을 의식하고 또 그들에게 집중하는 시도가 필요함을 다시 체감할 수 있는 책이었다.
세상이 감춘 것은 이름뿐만이 아니다. 그 이름이 가진 삶까지다.
히루트나 다른 여성들, 또 권력자들을 위해 일종의 방패..로 쓰였던 말단 병사들이 그 시기에 어떤 취급받았는지가 책을 통해 다시금 드러난다. 물론 우리가 읽는 것은 실제의 아주 일부일 뿐일 거라는 것조차 잘 알고 있어서 마음이 너무 끔찍했다. 마자 맹기스테는 작품으로 약자를 호명함과 동시에 강자의 잘못과 패악을 드러내고 비판한다. 강자들의 삶은 약자를 제물 삼아 영위한 나날이다.
무자비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면서도 한편에서는 다양한 형태로, 자신만의 방식으로 싸우는 여성들을 만날 수 있어 반가웠다. 아스테르, 히루트, 피피, 요리사 등 책 속 여성들은 마냥 영웅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이기적으로 굴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남들은 하지 못할 행동을 용기 있게 해낸다. 남들에게 인정받지 못해도 각자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싸움을 계속하는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또 그들의 그런 행동이 옳았다거나 혹은 틀리다고 함부로 단정 지을 수 없음을, 완벽하게 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가 한 일이 축소되거나 사라지지는 일은 옳지 않음을 일러 주려는 저자의 의지가 느껴졌다.
강자와 남성에게만 집중된 역사 너머에 존재하는 여성과 약자들을 주목하고 그들을 호명하자는 멩기스테의 뜻을 600쪽이 넘는 책을 읽는 내내 느낄 수 있었고, 에티오피아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역사를 비롯해 지금 현실에서도 지워지고 잊혀지는 많은 이들을 기억하자고 다시금 마음먹는 계기가 되었다.
또 내용이 시사하는 바 외에도 한국이나 영미가 아닌 다른 문화권의 이야기를 접할 수 있었다는 점이 가장 좋았다.
등장인물이 에티오피아인이라 사실 초반에 머릿속에 책의 세계관을 구축하고 상상하는 데 평소보다 많은 시간이 들었다. 내가 이렇게나 좁은 시야로 세상을 보고 있구나 하는 반성과 함께 영미권 말고 다른 나라가 배경이 되는 책도 많이 읽어야겠다는 다짐을 할 수 있었던 귀중한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