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덮친다. 어느 순간 사랑은 문득 당신 속으로 들어오고, 그러면 당신은 도리 없이 사랑을 품은 자가 된다. 사랑과함께 사랑을 따라 사는 자가 된다. 사랑하는 자는 자기 속으로 들어와 살기 시작하는 어떤 사람, 즉사랑을 속수무책으로 겪어야 한다.
그때 숲 속에서 홀연 파파야 한 묶음을 들고 침팬지 한 마리가 나타났다. 지는 해를 발견한 그 침팬지는 쥐고 있던 파파야를 슬그머니 내려놓더니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노을을 15분 동안이나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해가 완전히 사라지자 터덜터덜 숲으로 돌아갔다. 땅에 내려놓은 파파야는 까맣게 잊은 채. 침팬지의 삶도 피안의 순간에는 까마득한 저 영원의 바깥으로 이어지는가? 그 순간에는 그도 생명 유지에 필요한 먹을 것 그 이상의 무언가를 찾고 있었나보다.
그런데 이렇게 명당조차도 병든 땅을 명당이라고 얘길 한다면, 풍수에서 아름다움이라는 게 도대체 뭘까?아무래도 조금 모자라는 것이 아름다움의 본질이 아닐까, 땅의 아픈곳, 그것을 고치려는 시도가 자생풍수의 기본 사상이라고 말씀드렸는데, 이렇게 아름답다고 느끼는 정감 뒤에는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시선, 뭔가 부족한 것을 채워가려는 정성, 뭐, 이런 연민의 정이 뒤에 깔린게 아니냐, 감춰져 있는 게 아니냐,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만약, 지구에서 인간이 멸종한다면 그간 인간이 아름답다 여겨왔던대상의 그 아름다움도 다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즉, ‘아름다움‘이란인간의 생존과 번식의 세월 동안, 인간에게 유용함을 끼친 대상에 붙인 이름일 뿐, 인간과 무관한 본질적인 ‘아름다움‘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름다움에 대한 이러한 과학적 통찰은, 그것이 개인의 주관적 해석이어서가 아니라 객관적인 증거에 의해 뒷받침되는 진실이기에, 아름답다.
나는 티티카카 호수나 티베트의 암드록초 호수 같은 고지의 호수에 갔을 때를 떠올려봅니다. 내가 그곳에 갔을 때 하늘에 닿은 높은 호수는마치 누군가의 귓속 같았습니다. 그 높은 고도 속에서 내 귀는 점점 난청이 되어갔지만 호수의 표면은 내가 들을 수 없는 음역대를 통과하는아주아주 거대한 사람의 고막같이 파르르 떨고 있었습니다. 어느 순간하늘과 맞닿은 짙푸른 호수의 귓바퀴가 열리고 내 몸이 마치 그 둥글고파랗게 주름진 귓속에 드는 것 같았습니다. 그 거대한 귀가 희박한 공기로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 속에서 나는 짙푸른 하늘을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