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날 아버지는 과한 지출을 했다. 4월30일 구천오백원(식대 4,000X2=8,000. 소주 한병 1,500원). 생의 마지막 날, 아버지는 누군가와 사천원짜리 마지막 만찬을 즐겼다. 아마도 메뉴는 된장찌개였을 것이고 상대는 십중팔구 박선생이었을 것이다. 교원 연금으로 그럭저럭 살 만한 박선생이 만류했을 것이나 빚지고 못 사는, 치매 걸려서도 그 성정 버리지 못한 아버지는 호기롭게 만원짜리한장을 꺼내들었을 것이다. 하염없이,라는 말을 나는 처음으로 이해할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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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에 우두커니 앉아 동생의 모진 말을 묵묵히견뎌내던 아버지는, 이번에도 타는 속을 소주로 달래며,나는 모르는 씁쓸한 인생의 무언가를 되새기지 않으려나하면서 아버지의 영정사진을 보았는데, 아버지는 당연히그거사 니 사정이제, 모르쇠로, 나는 어딘지 모를 어딘가를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게, 아버지의 사정은 아버지의 사정이고, 작은아버지의 사정은 작은아버지의 사정이지, 그러나 사람이란 누군가의 알 수 없는 사정을 들여다보려 애쓰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아버지는 그렇게모르쇠로 딴 데만 보고 있으면 안 되는 것 아닌가, 뭐 그런 생각도 드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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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머라니. 유머는 우리 집안에서 일종의 금기였다. 그렇다고 유머가 없었던 것은아니다. 누가 봐도 유머일 수밖에 없고 유머여야 하는 순간에도 내 부모는 혁명을 목전에 둔 혁명가처럼 진지했고, 그게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냈다. 그러니 우리 집안에유머가 있었다기보다 혁명을 목전에 둔 듯 진지한 그들의어떤 행위나 삶의 방식이 유머일 수밖에 없었다는 게 더 정확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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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던 그때도 지금도 나는 저러한 급작스러운 전이가 도무지 이해되질 않는다. 사상이란 저렇듯 느닷없이 타인을 포용하게 만드는 대단한 것일까. 내부모에게는 그랬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저 느닷없는친밀감과 포용이 퍼스트클래스에 탄 돈 많은 자들끼리의유대감과 별반 다르게 느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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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촌은 진정으로 행복한 일이벌어지고 있을 때 그것을 모르고지나쳐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삼촌은 사소한 일들을 두고 말한 것입니다.위대한 승리를 말한것이 아니지요.
뜨거운 오후 그늘에서 레모네이드를 마신다든지,근처 빵집의 향기를 맡는다든지,고기가 물리든 말든 개의치 않고낚시를 한다든지, 옆집에서 누가혼자서 피아노를 즐기는데 정말로 잘 치든지 하는 일들 말입니다.
앨릭스 삼촌은 내게 그처럼 예기치 않은 행복의 현현(epiphanies)을 당해서는 이렇게 소리치라고 했습니다. "이보다 더 좋은 일 있음 나와 보라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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