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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 멍거의 말들 - 투자, 경제, 비즈니스 그리고 삶에 관하여
데이비드 클라크 해설, 문찬호 옮김 / 워터베어프레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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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노마드 투자자 서한>, <워렌 버핏 투자 서한>, <스노볼>(워렌 버핏 전기) 등을 유심히, 그리고 깊이 있게 숙독하고 있습니다. <스노볼>-앨리스 슈뢰더 는 처음 읽은 게 2010년, 그리고 그 이후에 재독한 게 2021년이었던 거 같은데, 투자, 내지는 돈을 활용하는 데에 있어 읽을 때마다 여러가지로 많이 배우게 되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에게 일정량의 돈이 주어진다고 가정하면, 많은 사람들이 그 돈의 쓰임에 대해 다양한 방식으로 고민할 것입니다. 하지만, 워렌 버핏이나 찰리 멍거 같은 버크셔해서웨이 회장과 부회장에 있는, 그리고 있었던 사람들은, 그에 대한 용도를 사전에 이미 생각해 두었거나, 어느 정도 용도가 확실할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게 해줬던 책들이었습니다.

<찰리 멍거의 말들> 이라는 책은 편집이 굉장히 라이트하게 되어 있지만, 이 책에 쓰인 내용들은 정말 가벼이 여기기 어려웠습니다. 제가 평소에 돈을 어떻게 벌고, 어떻게 모으고, 어떻게 소비하는지에 대해 생각하고, 느끼고, 고민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지금까지의 저의 소비가 너무 바람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닌가, 이성, 내지는 어느 정도 계획과 신중한 판단으로써 이루어졌어야 할 소비가 지나친 감성에 의해 좌우된 것이 아니었나, 그런 생각을 크게 하며 스스로를 반성했습니다.

많은 분야, 부문에 대해 끊임없이, 나이가 들어도 항상 배우려고 하고, 공부하려고 하는 찰리의 자세와 태도가 너무 멋있었습니다. 저도 끝없이, 열심히 공부하고, 배워야겠다는 자기반성을 했던 것 같네요.

꼭 이 책을 투자에 대한 책으로 국한해서 바라볼 것이 아니라, 찰리가 돈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의 사고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정도로 이 책을 읽는 것도 괜찮은 것 같습니다.

적지 않은 분들이 투자, 내지는 돈에 혈안이 되어있는 분들에 대해 많은 복잡한 생각과 감정을 품고 있는 것을 저도 잘 알고 있고, 그런 상황이 많이 유감이긴 합니다.

워렌과 찰리가 말하는 것은, 투자에 목숨을 걸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들이 말하는 사람이 가장 행복할 수 있다고 느낄 수 있는 것은 돈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사람이 나이가 들었을 때, 내 주변의(가족들, 친구들 그리고 그보다 더 넓은 범위의 관계를 통칭) 사람들에 대해 언제나 호의적인 태도를 견지할 수 있는지,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가 좋은지, 언제나 사람들에게 선행을 베풀 준비가 되어있는지 입니다. 그들이 납세하는 법인세라던가, 개인세에 대해 생각하며 그들이 진정으로 선행을 베풀고 있냐는 의문을 갖고 있으신 분들도 계실 겁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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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망계급론 - 비과시적 소비의 부상과 새로운 계급의 탄생
엘리자베스 커리드핼킷 지음, 유강은 옮김 / 오월의봄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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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주말에 알라딘 추천마법사에 떠서 책을 한 번 살펴 봤는데, 알라딘 책 소개 개요에 상당히 잘 소개돼 있었다. 길고 자세한 글의 종합이 이 책의 방향성을 개략적으로 표현해 줬기에, 이 책은 내가 읽었을 때 잘 맞을 거라 생각해서 주저하지 않고 구입해서 읽어 보았다.


이 책은 먼저 과거 영국에서의 귀족과도 같은 문화로 이야기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간다. 상류층이 중간 계급과 하위 계급을 뚜렷하게 구별짓는 여러가지 지표와 기표들(ex) 1세기 전 파티에서 한 저명한 교수가 잔에 우유를 먼저 따르고, 그 뒤에 차를 따라야 그 반대의 상황보다 맛이 더 좋다는 직관적 발견과, 그를 증명하고 입증하는 그의 뛰어난 미적 감각ㅡ그것은 반복적인 시음을 해 봐야 알 수 있는 꽤나 고도의 영역에 속해 있으며, 많은 사람들에게는 그런 정보로의 접근이 제한된다.)에 대해 설명하고, 그것이 중간 계층과 하위 계층이 획득하기에 얼마나 어려운 조건에 있는지도 더불어 표현한다.


산업 혁명 이후, 역사적으로 상류층과, 중간 계급, 하위 계급을 명확하게 구분짓는 방식은 과시적 소비였다. 남에게 드러내는 과시적 소비가 개인의 지출에 있어 얼마나 많냐에 따라 계층이 뚜렷하게 갈렸다는 이야기다. 그에 따라 상류층이 자신의 부, 입지 등 여러가지를 과시하는 데에 쓰는 소비(통칭 과시적 소비)를 중간 계층이 모방하려는 행동을 반복적으로 보여줬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예를 들면, 1900년대의 값비싼 자동차들, 그리고 호리호리한 집, 값비싼 의류 등이 있다.


하지만, 기술과 통신, 그리고 경제가 점점 고도화되고 발전하면서, 과시적 소비는 상류층에게 있어 더 이상 다른 계급과 구별짓기를 할 수 있는 조건이 되지 못했다. 그에 따라 상류층ㅡ그리고 상류층보다 좀 더 포괄적인 집단에 속하는, 저자가 창안한 개념인 바로 이 야망계급ㅡ은 비과시적 소비를 통해 이 시대에 새로운 구별짓기를 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렇다면 저자가 말하는 야망계급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야망계급이란, 20세기 말부터 21세기 현재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의 선진국에서 제조업이 쇠퇴하고 서비스업이 부상하면서 높은 학력과 지식, 그리고 소위 몸보다는 머리를 써서 돈을 버는 사람들ㅡ가장 쉽게 생각하자면, 법조계, 의료계, 학계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라던가,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통해 글을 써서 돈을 버는 모든 집단을 통칭한다고 보면 된다.ㅡ을 일컫는다. 그들의 주된 공통점은, 아무래도 소득수준보다는 지식의 습득과 가치관에 달려 있다. 이들은 사회적, 문화적 지위를 획득하기 위해 자신들의 지식을 활용하고, 더 많은 지식을 얻는 것을 꺼리지 않는다. 문화평론 읽기, 일반적인 가정에서 읽기에는 어려운 매체 읽기(뉴욕타임스, 뉴요커, 이코노미스트, 파이낸셜 타임스 등), 한 가정에 있어 모유수유의 여부, 유기농 식품의 섭취 등이 비과시적 소비를 하는 야망계급과 그렇지 않은 집단들을 명확하게 구별짓고, 소득 수준의 스펙트럼이 비교적 넓은, 이 상류층이라고 하기에 애매한 야망계급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관통한다.


이 비과시적 소비에는 매니큐어(특정 집단에 있어 어떤 색깔의 매니큐어를 바르는 것이 공통적으로 "괜찮다"는 평을 듣는지에 대한 정보의 사전적인 인지라던가) 같은 정보비용 비과시적 소비(돈이 얼마 들지 않는다)와, 대학교육, 육아, 의료 같은 굉장히 값비싼 비과시적 소비가 있다고 말한다.


1) 2~3살부터 바이올린을 배우게 한다던가ㅡ미국에서의 대학교육을 위한 학비는 말할 것도 없고, 중등교육에 있어서도 크나큰 지출을 쓸 수 있는 부모는 상대적으로 적다.ㅡ, 2) 직장의 문화 자체가 좋아, 출산휴가를 오랜 기간 보낼 수 있는 직장이라던가, 3-1) 미국에 여러 도시가 있지만, 치안의 안전함과 불안전함에 따라 길가에서 어머니들끼리 애에게 마음 놓고 모유수유를 해줄 수 있는 환경인가의 여부, 3-2) 어머니가 직장의 고된 일 때문에 아이에게 모유수유 자체를 할 시간이 있는지의 여부, 3-3) 모유수유가 아기에게 장기적으로 미치는 영향을 부모가 잘 모르기에 분유를 선택한다거나 4) 뉴요커, 이코노미스트 등에 매 해 구독 지출을 하며 꾸준히 기사를 읽는다거나, 5) 부모가 자녀가 어릴 때부터 함께 오랜 시간을 보낸다거나 6) 유기농 식품을 섭취하는 데에 있어, 소비자보다는 생산자가 더 중요해지는, 즉, 내가 구입하는 상품이 어떤 방식으로, 어떤 스토리를 통해 만들어졌는지가 돈을 쓰는 데에 있어 더 중요해지는 것 등이 비과시적 소비의 대표적 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저자의 이런 '야망계급'이라는 개념의 명명, 그리고 (저자가) 이 집단을 찾아냈다는 것이 이 21세기의 흐름을 살펴보는 데에 유용하다는 생각이 든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구입하는 물건에 있어, 어떤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는지, 출산지는 어디인지 등을 명확하게 따져 가고 있다. 저자와 그와 관련된 다른 사람들의 예측은, 이런 집단이 앞으로 꽤나 커질 것이고, 그것은 주로 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질서가 재편될 것 같다고 말한다. 인구가 지금도 급격하게 늘고 있는 인도와, 저출산에 직면했지만 여전히 인구가 굉장히 많은 중국이 적절한 예다. 인구 14억의 인도와 중국에서의 많은 사람들이 비과시적 소비에 동참한다면, 여러 부문의 다국적 기업들과 대기업들, 중견기업, 스타트업 및 중소기업은 앞으로 변화하는 세계 질서에서 어떤 포지션을 취해야 할까? 그리고 이 점점 증가하는 야망계급의 수를 통해 분리, 그리고 소외되는 다른 집단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생각을 가져야 할까? 또한, 중간계급만이 자신을 확연히 드러내려는 심리에 기인하는 과시적 소비에 열중하고, 그의 윗 급간에 있는 계층은 과시적 소비보다는 비과시적 소비에 좀 더 집중적인 것은 무엇을 말해줄 수 있을까? 개인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숙고하며 현명하고 적절한 소비가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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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만의 선택 (양장) - 우리 시대 인문학 최고의 마에스트로 박이문 인문학 전집 1
박이문 지음 / 미다스북스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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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이문 인문학 전집 1권을 읽었다. 개인적으로 처음 '박이문'이라는 이름을 알게 됐던 때가 기억난다. 작년 봄 즈음에 도서관 종합자료실 내에서도 거의 가지 않는 철학 서가 쪽을 두리번 거리다가, 반양장 판형으로 10권이 나란히 놓여있는 전집을 보고, '이 사람 뭐지?' 하며 잠깐 둘러봤던 기억이 있다. 전집을 구입할까 하다가, 반양장 10권 전집도 절판인지 품절인지 돼서 벌써부터 중고가가 심상치 않았던 기억이 있다. 몇 달 뒤 도서관에 다시 가 보니, 도서관에 '박이문'이라는 이름으로 검색되는 도서가 거의 없길래ㅡ심지어 전집 10권도 다 사라져 있었다.ㅡ내가 본 것은 환영이었을까, 싶으면서도, 요즘 도서관이 참 힘들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다.


 그 이후로는 기억나는 게, 민음사 김우창 전집 <세 개의 동그라미>와 <대담/인터뷰>1,2권을 보면서 김우창 선생님의 대담에서 박이문 선생님을 발견하고 책을 살펴 보았다. 거기서 출연하신 박이문 선생님의 대담을 보고 반드시 박이문 전집은 어떻게든 봐야겠다, 생각했었고, 일단 맛보기 정도로 박이문 인문학 에세이 특별판 세트에서 마지막 권인 <박이문의 서재>를 읽었는데, 이 책은 블로그의 이전 글에서도 쓴 적이 있지만, 서평을 모아놓은 책 치고는 굉장한 지적인 탐구를 보여줬다고 생각했어서, 바로 30만원이라는 거금을 주고 인문학 전집을 구입했다. ​


 이 전집 1권은, 박이문 선생님의 자서전 격 저서이다. 여러 매체에 오랜 기간동안 발표했던 작품들을 한 데 모아 책으로 만들었는데, 읽는 데에 재미가 있으면서도, 학문을 하는 사람의 지적인 탐구에 대한 허무가 짙게 배여나오는 것 같아, 굉장히 씁쓸했다.


 박이문 선생님은 아직 한창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에 태어나셨다. 시골에서 살면서 나름 유복했던 삶을 누린 박이문은, 청소년 시절, 형이 두고 간 일본어로 된 화가들의 그림책이나 세계문학전집을 보고 지적인 앎에 대해 처음으로 생각해 본 계기가 되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동급생들과는 은근 괴롭힘이 있었던 반면, 선생님들로부턴 인정받았던 경험이 그에게는 좋은 경험과 추억이 되었다고 한다.


​ 일제 강점기가 끝나고 곧 이어 6.25전쟁이 터지면서, 박이문은 친구에게 고등학교에 나오지 말라는 조언을 듣고, 그대로 실천에 옮겨 삶을 부지하게 된다. 당시에 남/북으로 갈라진 이념의 대립이 얼마나 컸을지, 나는 지금 이렇게 역사책이나 그 시대를 살았던 자서전을 읽어 봐도 도저히 온전히 느낄 수가 없다.


 박이문은 우연히 부모님의 지원과 형들의 지원을 통해 대학에 갈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돼, 열심히 공부해서(어느 정도로 열심히 공부했는지는 책에 적혀 있지 않지만, 1950년대에 대학을 간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엘리트라는 방증이 되므로... 나는 이렇게 서술하겠다.) 서울대학교 불문과에 진학한다. 불문과에 망설임이 없었던 이유는, 저자가 어릴 때부터 일본어로 된 여러 책들을 읽으며, 자신도 작가나 시인이 되어야겠다는 마음을 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 서울대학교 불문과에 다니면서, 박이문은 당시의 학습 현장이 굉장히 처참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교재다운 교재도 없고, 교수나 강사들은 시나 작품을 해석하기 급급했다는 그의 냉정한 필치를 읽고 있자니 손에 땀이 난다. 여러 친구들을 사귀었고, 책을 읽기 보다는 주로 사람들과 술 마시며 어울리길 좋아했다고 고백한 저자는 어느덧 대학을 마칠 때가 되고, 이렇게 학습을 끝내도 되는 걸까, '나는 더 알고, 알아가고 싶다.'라는 마음으로 마찬가지로 서울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준비하고 마친다. ​


 석사학위를 통해 이화여대 교수가 된 박이문은 여러 매체에 기고도 하고, (자신이 회고하기를) 얼마 안 되는 불어 실력으로 작품을 번역하기도 하고ㅡ굉장히 엉터리였다고 고백하고 있다.ㅡ이화여대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지만, 서울에서의 삶이 만족스럽지 않았다고 한다. 자신의 지적인 앎의 과정이 여기서 끝나야 하는가, 그런 고민을 몇 년간 한 끝에, 부모님과 같이 살 집도 팔고, 가지고 있던 책들도 팔아서 프랑스 소르본 대학에 불문과로 유학을 간다. ​


 프랑스에 대한 로망, 공부다운 공부를 하고 싶었고, 지적인 삶에 메말랐던 저자는 그 곳에서 미약하게나마 별천지를 본 것 같다. 언어는 잘 통하지 않지만 어떻게든 박사학위에 걸맞는 자격을 얻기 위해 치열하게 고군분투했던 삶의 현장들이 기록돼 있었다. 거기서 자신과 나이는 같지만 벌써 조교, 교수가 되어있는 데리다를 보며, 학문적 열등감에 휩싸이기도 한다. 자서전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저자는 그 당시에 데리다라는 사람이 이 정도로 20세기와 21세기를 뒤흔들 즉 '해체'의 대명사가 될 줄은 몰랐다고 한다. 데리다의 강의도 열심히 들으려고 했지만, 따라가기 벅차했었다는 기억이 있으셨고, 여러 Test에서 처음엔 낙제점을 받았지만, 계속해서 점수가 올라갔던 경험은, 데리다가 그를 좋게 평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있으셨다. ​


 프랑스 문학에 대해 공부하면서, 그의 지적인 탐구는 점점 문학에서 철학으로 옮겨간다. 영미권의 분석철학으로 관심을 돌린 그는 데리다의 굉장한 칭찬에 가까운 추천서를 통해 장학금을 받고 미국에서 철학을 공부한다. 남들은 다 애를 낳아 살 만한 나이에 자기는 아직도 박사를 하고 있으니, 자괴감도 조금은 있으셨던 것 같다. 미국에서 박사를 하며 다시 생소한 언어로 남들과 소통하고, 글을 읽고 글쓰기를 하려니 굉장히 힘들었다는 경험을 토로하신다. 철학 박사를 처음 할 즈음에는, 자신이 공부하고 있는 영미권의 분석철학에 대해 그다지 와 닿지 않았는데, 점점 공부하면 공부할수록 논리를 추구하는 분석철학을 통해 많이 배웠고,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후술하신다. ​


 박사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갈까, 미국에 좀 더 남아있을까, 고민하다가 그의 지적인 여정은 미국을 택한다. 이유는 '좀 더 알고 싶은 욕구를 멈출 수 없어서.' 자신도 결국 철학을 통해 밥 벌어먹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말엔 가슴이 아프다. 


​ 그리고 이후에 살펴 보니, 미국 시몬스 대학에서 20년 정도 가르치시다가 명예교수가 되시고, 한국으로 돌아와 포스텍과 연세대, 서울대 등에서 교양 강의를 잠시나마 하신 듯 하다. 


​ 결국 이 자서전을 읽고 나니 '천재들이 30대 정도에 자신의 지적 세계를 종결짓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자신은 동 나이대에 무엇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회의감 앞에서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겠구나, 만약 지적인 유희를 좇는 사람이라면'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박이문 선생 자체적으로 내재돼 있는 삶에 대한 허무주의와 실존주의가 크게 와 닿았다. 나의 인생관은 허무주의까진 아니지만ㅡ명랑하고 자유분방하고 긍정적인 삶을 추구하는 정도일까ㅡ, 다른 사람의 허무주의에 대해선 크게 공감했다는. 확실히 조부뻘 세대분 답게 사르트르에 크게 영향을 받은 점도 무시할 수 없을 듯. 요즘처럼 철학이든 어떤 분야든 굉장히 많은 책이 번역 출판돼 있는 때엔, 꼭 자신에게 중요하다고 느껴질 문학 작가라던가, 철학자는 읽고 싶으면 얼마든지 읽을 수 있다는 점 때문인지는 몰라도, 요즘이 뭐든 공부하기엔 더 좋은 환경 같다. 다만 그것을 방해하는 것은 스마트폰과 태블릿, 그리고 PC 정도. 결국 자신이 우군이자 곧 적이다. 요즘은 까뮈 전집도 국내에 전부 출판돼 있고, 원하는 책은 정말 어느 정도는 볼 수 있다는 것이... 물론 해외에서 출판되는 굵직굵직한 책들은 바로바로 번역이 안 되는 점은 아쉽지만... 음음.. 확실히 우리나라가 정말 좋아지긴 했어. 라는 생각에 오늘도 겸허해지는 지점. ​


 그런 말이 있다. '인간의 역사에서 19세기 정도 부터 20세기 까지는 사람에게 있어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책들은, 웬만하면 거의 다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 21세기에는 그것이 아예 불가능하고, 그것을 꿈꾸는 자ㅡ즉, 세계의 유명한 모든 책을 다 읽겠다는 마음을 품는 것 자체로 그 사람은 허황된 사람이라는 얘기다.' 라는 말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저는 허황된 사람에 도전하겠습니다. ​ 이 책을 읽으면서, 앞으로의 내 공부 계획도 어떻게 지침을 삼아야 할지 이제 또 어려워졌다는...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정해져 있는 것 같은데, 내가 계속 피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단 말이지. ​ 새삼 석사나 박사과정을 밟는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도 나름대로 겉핡기로 절감했다. 거기에 돈까지 엮여 있다면, 정말 공부하면서 피가 마를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 자서전을 읽는 것은 언제나 재미있고 배울 점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 한 사람의 총체적 삶을 추적하는 형사가 된 느낌이랄까. 작가가 무언가 사건을 벌여 두면, 독자인 나는 형사가 되어, 그의 삶을 맹렬히 추적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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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스필드 파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66
제인 오스틴 지음, 김영희 옮김 / 민음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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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략적인 줄거리: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패니는 고향이었던 포츠머스를 떠나, 부자인 이모들과 이모부가 살고 있는 맨스필드 파크로 넘어가서 살게 된다. 10대 초반 정도부터 맨스필드 파크에 머물러 살게 되면서 이모들과 여사촌들의 말하기 힘든 압박에 힘들어져 고향을 그리워 하기도 하고, 가끔씩 패니를 위해 마련된 작은 방에서 눈물을 흘리기도 하지만, 패니는 토머스 경 집안의 둘째 에드먼드의 심지 굳은 보호와 그와의 오랜 기간 꾸준히 이어진 대화를 통해 정신적인 성장을 이루게 된다. 여러 사람들과 깊고 얕은 관계를 맺고 살아가면서, 패니는 사람을 보는 자신만의 뛰어난 안목을 갖게 되고, 사람이 조용하면서도 정신적으로도 굉장히 굳센 성격으로 변모하며, 한 편으로는 그런 정신력을 기르는 데에 큰 도움을 준 사촌 에드먼드에 대해 연모하는 마음이 커지게 된다. 동네 이웃이 된 크로퍼드 남매와 패니, 그리고 에드먼드와의 관계에서 패니는 크로퍼드 남매 각각에 대해 사람됨이 부족하다고 느껴 여러모로 불편함을 느끼고, 크로퍼드 양에 대해 적극적이면서도 소극적인 구애를 펼치는 에드먼드에 대해 답답함을 느낀다.

이 소설을 읽으며 느낀 점:

작품 초반과 중반을 읽으면서 집안별로 돈의 많고 적음과, 신분의 우열 관계가 패니에게 다가오는 중압감을 지켜 보면서 패니가 참 안쓰러웠다. 그리고 그 당시에 여성이 자유로운 연애도 할 수 없고, 마땅한 직업을 갖기 힘든 시대였음을 고려한다면, 작품의 주인공 패니 프라이스가 겪는 고통과 괴로움을 온전히 이해하기는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지가 굳은 여성으로 성장한 패니가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또한, 제인 오스틴만의 문체, 등장인물들이 각자 생각하고 느끼는 마음이 굉장히 정확하게 그 자리에 깃들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작가로서 작중 등장인물들을 정말 정확하고 속속들이 잘 알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작품을 초반부터 후반까지 읽으면서 떠나질 않았던 것 같다.

작품 외적으로는 그 당시에 소설을 편집자도 없이 홀로 완벽하게 여럿 써 내면서, 영국 왕실을 알현하기도 했던 제인 오스틴이 정말 대단한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소위 '자기만의 방'도 없었던 제인 오스틴은 거실의 탁자에서 원고지에 소설을 쓰고, 누군가 그녀의 주변을 지나갈 때는 원고를 탁자 밑으로 숨기기도 했다는데, 오스틴 그녀가 당시에 겪었을 삶의 풍파가 나로서는 도저히 그려지지 않는다. 병세에 시달리면서 어떻게든 여러 장편소설과 단편소설을 써내려 갔던 제인 오스틴은 4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는데, 그녀가 건강하게 오랫동안 살았다면 얼마나 많은 대작을 써내려갔을지 한 편으로는 너무 아쉽기도 하다. 그녀가 집필한 모든 작품이 명작이라는 평가를 온전히 받고 있는 점에선, 그녀가 쓴 작품들을 보고 여러모로 도와줄 편집자도 없었고, 그 당시에 책이란 것이 21세기의 현재처럼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니었어서 독서란 것에 온전히 몰입하기에도 힘들었을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작품이 집필된 그 시대로부터 몇 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전 세계의 독자를 매료시키는 작가로 남아있다는 것이 경이롭다.

 

 ​김영희 선생님의 번역도 굉장했다. 그 분의 번역이 정말 엄밀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한 문장 한 문장이 역자 선생님께 소홀히 여겨지지 않았구나.' 읽으면서 그런 마음이 가득했다. 이런 뛰어난 번역으로 책을 읽게 해 주신 김영희 선생님과 민음사 출판사에 정말 무한한 감사와 존경뿐이다.


다른 한 편으로, 최근 열화당 출판사에서 출판되고 있는 상허 이태준 전집에 대한 칼럼을 써 주셨던 강성민 글항아리 대표님의 글을 읽었는데,

(매일경제 칼럼 : https://www.mk.co.kr/news/contributors/10954722 )


(네이버 뉴스 : https://n.news.naver.com/article/009/0005266187 )


"동시대 작가들의 작품에선 긴장과 스트레스를 받는 반면, 근대 시기 작가들의 작품에선 늘 편안함을 느껴왔다. 동시대의 글들은 심리적 거리가 충분치 않다. 작품 속 인물들이 처한 상황이나 딜레마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반면 근대 시기의 작품들은 시간적 거리로 인한 여유가 있다. 동시대 작품엔 미학적으로 예민하게 반응하게 되고 쉽게 평가자의 입장이 되곤 한다. 몰입을 방해하는 미숙한 표현, 작위적 설정, 윤리적 회피나 과잉을 만나면 머릿속에선 처형극장이 연출된다.

반면 근대 시기의 작품들은 우리가 넘볼 수 없는 경험적 지평에서 얻어진 것들이라 호기심과 경외감이 감상의 주조를 이루게 된다." 이라는 대목에서 제인 오스틴 작품을 읽으면서 떠오른 감상이기도 했어서, 많은 공감을 했고, 스스로 생각하고 느끼는 지점을 온전히 글로 표현하지 못한 점을 너무나 정확하고 아름답게 적어 주셔서, 어렴풋이 느끼던 생각을 재확인하게 돼 감사한 마음이 느껴졌다.

"그런데 이런 건 일반적인 얘기다. 이것 말고 좀 더 개인적으로 나는 근대라는 시기의 특수성에 더 이끌리는 것 같다. 나는 궁핍한 시대의 문학이 좋다." 이 부분을 읽고 '대표님께선 김우창 선생님의 대표작 <궁핍한 시대의 시인>과 횔덜린을 감명깊게 읽으셨을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제인 오스틴 다른 작품을 언제 또 읽을 지는 기약이 없지만, 아마 다음에는 <이성과 감성>(Sense and Sensibility)을 읽게 될 것 같다. Sense and Sensibility라니! 언어적 유희가 너무 멋진 것 같다.작품이 전체적으로 지루할 수 있지만, 그 지루함을 무기 삼아 스토리의 과정과 결과를 빌드업 해내서 후반부에 굉장히 크게 터트린다는 평가를 받는 것 같아, 내심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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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스필드 파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66
제인 오스틴 지음, 김영희 옮김 / 민음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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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사건들과 여러 인물들에 대한 패니의 시각과 관점은 현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시사하는 점이 많을 수 있다고 느껴진다. 오스틴의 글을 감탄하며 읽을 수 있도록 뛰어난 번역을 수고해주신 김영희 선생님께 감사 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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