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신화 속 별자리 이야기 어린이 고전 첫발 1
재클린 미튼 지음, 원지인 옮김, 크리스티나 발릿 그림 / 조선북스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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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도 12궁을 포함한 밤하늘 주요 별자리에 얽힌 그리스 신화들을 아름다운 그림과 함께 조곤조곤 들려주는 책. 책장을 넘기며 밤하늘의 별자리에 얽힌 신비로운 이야기들에 흠뻑 빠져들었다. 별자리 이야기를 읽다보면, 고대인들의 무궁무진하고 풍요로운 상상력과 이야기력(?)에 한없는 놀라움과 감사함을 느끼게 된다. 인간이란 존재는 본래 이야기본능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 본질적으로 인간은 호모 나랜스(Homo Narrans : 이야기하는 사람)일 것이다. 밤하늘에 흩어져 무심히 빛나는 별들을 이렇게 다채로운 이야기들로 태어나게 했으니.

 

표지부터 섬세하고 화려한 그림이 우선 눈길을 잡아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펼쳐지는 각 별자리를 표현한 신비로운 느낌의 그림들... 그린이 크리스티나 발릿은 다수의 일러스트레이션 상을 수상했다는데, 그럴 만하다고 고개가 끄덕여진다. 대담하고 화려한 색깔과 화면 구성도 그렇고, 기하학적인 문양과 섬세한 묘사도 뛰어나다. 몇번 접했던, 그냥 예쁘게만 그린(혹은 예쁘지만 어딘지 조악한) 어린이용 그리스 로마 신화 시리즈의 그림들과는 확실히 차원이 다르다. 어린이용 책이지만 어른도 책꽂이에 꽂아둘 가치가 충분히 느껴지게 하는 멋진 그림들!

 

널리 알려진 별자리 이야기인 황도 12궁 외에도 큰곰자리와 작은곰자리, 리라자리, 백조자리, 뱀주인자리, 용자리, 안드로메다자리, 페가수스자리, 큰개자리에 얽힌 다채롭고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펼쳐진다(근데 왜 '거문고자리' 대신에 굳이 '리라자리'라고 번역했을까? 물론 고대 그리스에서 쓰였던 악기니 거문고가 아니라 리라가 정확한 명칭이지만, 그래도 우리나라 천문학계에서 공식적으로 번역해서 일반에 통용되고 있는 이름을 쓰는 것이 더 맞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페가수스'로 알려져 있는 걸 굳이 '페가소스'라고 번역한 이유도 모르겠다).

고도의 성능을 자랑하는 천체망원경이나 천문학이 발달하기 훨씬 이전부터,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별들을 서로 이어서 여러 이름을 붙이고 이야기를 만들고 전한 사람들... 그렇게 경이로운 상상력을 품고서 밤하늘을 눈에 담았던 사람들 덕분에 후손들은 이렇게 풍요로운 이야기들 속에 살고 있다. 밤하늘의 별들을 서로 이어서 여러 동물들의 이름을 붙여 고대 그리스로 그것을 전해주었던, 오천 년 전 바빌로니아의 유목민들에게 감사를!

 

각 계절의 대표적인 별자리 이야기를 들려준 후에는 '별보다 반짝이는 별자리 이야기' 코너에서 어린 독자들을 위한 기초적인 천문지식들을 소개해주는 점도 좋다. 안그래도 이 책을 함께 읽는 동안, 조카가 "왜 계절마다 별자리가 다르게 보이는 거야?"라고 물어서, 음 지구의 공전 때문이야(이 주입식 교육의 오랜 힘이라니!)라고 건조하게 대답하려다가, '별보다 반짝이는 별자리 이야기' 코너 덕분에 그 호기심을 알차게 채워줄 수 있었다. 거기에 더해서, 지구 어느 곳에 있는지에 따라 볼 수 있는 별자리가 달라지는 것에 대해서도 어린 독자들의 눈높이에 맞춰 이해하기 쉽게 다정하게 설명해준다. 남반구에서는 큰곰자리나 작은곰자리는 절대 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조카의 그 흥분이라니!(당장 호주에 있는 작은 이모에게 메일로 그 사실을 자랑(?)하는 열성을 보인다).

 

처음 별자리를 찾았던 어렸을 적 밤하늘의 설렘을 생각나게 하는 예쁜 책. 산타클로스가 되어, 별을 사랑하는 아이들의 머리맡에 한 권씩 놓아두고 싶다는 상상을 해본다.

이제 봄이다. 북쪽하늘에선 큰곰자리의 북두칠성을, 남쪽하늘에서는 봄철을 상징하는 별 아르크투루스와 처녀자리의 스피카를 눈에 담을 수 있는 행복한 계절! 아름다운 이 책으로 처음 별자리 세계에 눈을 뜨게 된 조카와 함께, 이번 주말엔 천문대를 찾기로 꼬옥 손가락을 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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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의 공식 - 눈치 보지 않고 자기 길을 가는 내공에 대하여
장옌 지음, 정이립 옮김 / 불광출판사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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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 가장 쉬운 일도 하루를 사는 것이고 가장 어려운 일도 하루를 사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기 때문에 당연히 똑같은 인생을 사는 사람은 없다. 즐거운 날과 행복한 날은 자기 자신이 만드는 것이다. 마음가짐이 바르면 매일이 좋은 날 혹은 행복한 날인 것처럼 바라볼 수 있다.'(732쪽, <삶을 사는 것은 인생 최대의 공부이다' 중에서)

'인생 선배'들의 일화를 통해 깨달을 수 있는, 인생과 정면 승부해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법에 대한 이야기들. 8장으로 구성된 77편의 이야기를 천천히 곱씹으며 읽다보니 마음이 맑아지고 새 기운이 솟는다. 선사들이 남긴 각 일화는 짤막하고 단순해 보이지만, 마음 속에 퍼져가는 여운은 결코 짧지 않다. 어떤 일화는 내 경험을 찬찬히 돌아보게 해 주고, 어떤 일화는 이리저리 치이며 지쳤던 마음을 따뜻하게 위로해주고 힘차게 격려해준다. 이렇게 해서는 안 되겠구나,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일화도 있다. 이야기의 힘이란 것이 이렇게 강력하다는 것에 대하여 새삼스럽게 경이로움이 느껴진다.

누구에게나 삶은 한번뿐이다. 그리고 흔한 이야기지만,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한 삶인가에 대한 정답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한 번뿐인 삶을, 다른 이에게 휘둘리지 않고 진정한 나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해 추구해야할 것이 무엇인지를 일깨워주는 이야기들을 만나는 시간이 고맙다. 마음속에 차곡차곡 보석을 쌓아가는 마음으로 천천히 책장을 넘긴다.

선사들의 짧은 일화를 소개한 다음, 각 이야기마다 어떻게 이 이야기를 바라볼 수 있는지, 어떤 부분에 중점을 둬야할지에 대한 친절한 해설이 나오는 방식도 좋다. 선사들의 일화나 선문답 같은 것들은, 사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어리둥절 어렵게 느껴지기도 하고, 자칫 이 이야기에서 전하는 본질은 놓친 채 동문서답 같이 대충 받아들이게 될 가능성도 크다(어렸을 때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로다'를 듣고 해맑게(?) 웃었던 기억이 난다). 이렇게 친절한 설명과 함께 나오니 일화들이 한층 친근하게 느껴지고, 각 이야기가 전하고자 하는 지혜가 오롯이 전해지는 것 같다.

 

물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행합일, 이렇게 느끼고 깨달은 '공식'들을 내 일상에서, 내가 하는 일과 내가 만나는 사람들을 대하는 자세에서 조금이라도 실천에 옮기기 위해 노력하는 자세에 있을 것이다. '주위 사람을 진심으로 대하면 분명히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다... 마음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은 정성으로 남을 대하고 일을 할 때도 성실하다(40쪽)'를 메모지에 옮겨 적어 책장 앞에 꾹 붙여본다. 부디 이 글귀를 늘 새기면서, 이 글귀에 부끄럽지 않은 매일을 꾸려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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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없이 잘 사는 여자, 못 사는 여자 - 사랑 앞에 길 잃은 여자를 위한 자아 찾기 여행
페넬로프 러시아노프 지음, 한주연 옮김 / 책비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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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당신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아름다운 선물도 가져다준다. 아무것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고 오직 남자만이 당신의 삶을 채워줄 수 있다는 생각에 매여 있는 한 당신은 결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을 것이고, 인생을 발전시킬 수도, 다른 세상을 볼 수 있는 시야를 넓힐 수도 없다.'(153쪽)

 

저자는 뉴욕 사회조사 센터에서 수업을 하면서, 병원에서 심리치료를 하면서, 개인적으로 여행을 하면서 '남성을 만나야 비로소 자신들의 인생이 완전해진다고 믿었'(8쪽)던 수많은 여성들을 만났고, 그런 여성들을 위해 이 책을 썼다고 한다. 그래서 각 장마다 남자 의존증(!)으로 저자의 상담실을 찾았던 수많은 여성들의 실제 사례들이 다양하게 등장한다. 그 여성들이 풀어놓는 자신들의 이야기, 그 고민들과 생각들을 찬찬히 읽어갔다.

솔직히 적잖이 놀랐다. 미국, 특히 중산층 이상은 꽤 보수적인 사회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까지일 줄은 몰랐다. '세상에 결혼하지 못한 여성이 많아서가 아니라 완성되지 못한 여성들이 많은 것이 너무나 슬프다'는 저자의 말처럼, 그런 휘청거리는 여성들을 만나면서 저자가 느낀 안타까움, 측은지심이 절절히 느껴졌다. 국적과 사회적 배경은 다르지만, 같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그들의 답답한 가슴을 공감할 수 있었다. 아니 우리나라의 상황은 이보다 더할지도 모르겠다. '취집'이라는 신조어까지 유행하고 있는 현실이니.

 

온전한 한 사람으로서 남자에게 의지하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법. 사실 이것을 내면화하여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많은 여자아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이런 류의 이야기들에 둘러싸여 성장하기 때문이다. 왕자님의 키스로 비로소 자유를 획득하고, '그래서 왕자님과 공주님을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모든  해피엔딩이 장식되는.

그래서 이 책을 읽다가 불현듯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의 두 공주가 생각났다. 얼음성에 갇힌 언니를 세상으로 나오게 하고, 얼어붙은 동생의 심장을 녹게 한 것은 왕자의 키스가 아닌 두 공주의 뜨거운 자매애였다는 이야기가 좋았다. 저자도 '여자들의 강력한 우정 시스템'을 무척 강조하는데, 정신적인 행복을 누리기 위해 한 남자에게 의존해야 한다는 생각을 이 시스템은 막아준다고 이야기한다. 또한 '여자의 우정은 모든 면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삶을 윤택하게 해 준다'(199쪽)고, 고개를 끄덕이며 읽었다.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식으로 여자들 스스로 여자들의 우정을 폄하하는 것을 종종 보는데, 정말 안타깝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자가 강조하는 요소인 경제적인 자립. 가장 현실적으로, 남자에게 지독한 의존을 하지 않기 위해서 정신적인 독립 못지한게 중요한 것. 결혼을 했든 안 했든 직업은 여자에게 '구원'이고 '자기만족'이라는 얘기다. 그렇다. 내가 아무리 내면의 중심을 똑바로 세우려 해도 경제적인 능력이 없다면 얼마나 공허한 것인가.

'나를 찾아오는 여성들은 자신들이 꿈꾸는 낭만적인 이미지를 그려내는 대는 전부 도사들이다. 하지만 그 밖에 다른 것들을 계획하고 추진하는 것에는 영 소질이 없다. 같은 여자로서 부끄러울 만큼 자신들의 미래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는 여성들도 있다.'(236쪽)를 읽으며 처음에는 반발심이 들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경제적 능력이 출중한 남자를 만나 모든 것을 의지하며 사는 것을 목표로 하는 여성들이 우리 주변에도 적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그렇게 모든 것을 의지하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비극이 시작되는 것'이다.

 

남자가 있거나 없거나, 남자를 원하거나 원하지 않거나 상관없이 '나는 나' 자체로 온전하다는 것, 그리고 의지할 남자가 없어도 행복하고 충만하게 완성된 삶을 꾸려갈 수 있다는 것. 그것을 다시 확인하며 든든히 격려받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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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의 거리 창비청소년문학 58
김소연 지음 / 창비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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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혜>를 비롯해 <꽃신>, <남사당 조막이> 등 깊이 있는 역사 동화로 기억에 남았던 김소연 작가가 처음으로 쓴 청소년소설, 기대감을 안고 책을 폈다. 무거운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소설을 쓴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 작가가 얼마나 꼼꼼한 자료조사를 바탕으로 그 시대와 인물들을 만드는 데 공을 들였을지를 알 수 있었다(나중에 읽어보니 작가 스스로 도서관과 헌책방, 기록 자료관 등에서 수년을 보냈다고 한다, 역시...). 결코 가볍지 않은 시대적 배경과 주제의식이지만 소설로서의 재미와 카타르시스가 생생하게 느껴져 시간가는 줄 모르고 즐겁게 읽었다.

 

노비와 종, 소작인들이 모여사는 평안북도의 산골마을 범골에서 양반의 서자로 태어난 주인공 동천. 응당 평생 농사지으면서 살아야 할 팔자로 태어났지만, 소학교의 졸업을 앞두고 동천은 일본으로 나가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평양과 부산, 오사카를 거쳐 동경으로 이어지는 여정... 그 치열한 성장의 과정을 따라가며, 동천이 만나고 관계맺는 여러 사람들의 삶을 읽으며, 많은 생각거리들이 꿈틀꿈틀 물꼬를 튼다. 이미 제도상으로는 반상의 차별이 금지되고 노비법은 폐지되었지만 관습과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건재한 신분제의 그늘에 대해서, 그 시대에 여성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서(특히 동천의 어머니 본동댁 같이 이중으로 소외된 여성은 더더욱), 일제 강점기라는 격동의 시대를 살아가는 각 개인들의 선택과 그 선택의 결과에 대해서, 견디기 어려운 가난과 모진 탄압 속에서도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대의를 택한 이들의 용기와 희생정신, 그리고 그들이 견뎌야했던 혹독한 대가에 대해서...

 

책장을 넘기며 무엇보다 행복했던 것은,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지만 작가가 단순히 조선인 대 일본인의 대결구도나 흑백논리를 넘어, 인간에 대한 보편적 믿음과 가치를 생각하게 해 주었다는 것이다. 동천은 일본에 와서 갖은 핍박과 차별을 당하고, 메이데이 기념식에 참가했다가 구타를 당하기도 하고, 간도대학살을 목격한 후 죽을 뻔한 고비를 겨우 넘기기도 하지만 모든 일본 사람들이 적인 것은 아니다. 야쿠자이고 과거에는 결사대 대원으로 도망치는 조선인을 잔인하게 죽였지만 동천에게 일자리를 주고 후견인이 되어 준 구마모토를 비롯하여, 오자키, 요시코 등 많은 일본인들이 동천에게 힘이 되어준다. 또 같은 조선인이지만 유학생 모임을 검거하는 첩자 노릇을 한 동천의 조카 형섭처럼 어두운 시대에 자신만의 살 길을 찾은 이도 있다. 다케다처럼, 과거에는 동천에게 더 넓은 세상을 향한 꿈을 꾸라고 격려했던 은인이었으나 후에는 천황을 위한 황국신민이 될 것을 종용하는 이도 있다. 격동의 시대를 제각기 살아가고 견뎌갔던, 다양한 삶의 모습들을 담으려 한 작가의 노력이 느껴진다.

 

책의 마지막 '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왜 하필이면 일제 강점기냐고, 돌아보기에 힘들고 화가 나는 시대를 왜 끊임없이 공부하고 이야기하느냐는 질문을 받는다고.

'하지만 전 조금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프고 슬픈 삼십육 년이지만 분명 그 안에는 설움과 가혹함만이 전부가 아닌, 또 다른 삶이 존재했습니다. 시대의 무게에 억눌리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참모습을 찾아 세상을 헤매던 생명들이 있었습니다.'(400쪽)

그렇다. 내 나라와 내 정체성. 지금 나에게는 숨쉬는 공기처럼 너무나 당연한 것들을 끝내 잃지 않기 위해서, 캄캄한 어둠 속에서 기꺼이 피흘렸던 수많은 '동천'들을 생각한다. 그들 덕분에 지금의 우리가 이렇게 자유롭게 숨쉬고 있는 것이니까.

(덧붙임. 몇 주 전, 초콜렛 내음이 온세상에 가득하던 안중근 의사의 서거일 때, 광복 이후 가난과 탄압으로 인해 해외로 뿔뿔이 흩어져 비참하게 살아가야 했던 안중근 의사의 유족들에 대한 기사를 읽고 가슴 먹먹했던 기억이 난다. 날이 갈수록 치매에 가까워지는 이땅의 역사의식을 바로세우기 위해, 이런 좋은 책이 청소년들과 어른들에게 널리 읽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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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같은 시절
안드레아스 알트만 지음, 박여명 옮김 / 박하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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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같은 시절... 이라는 강렬한 제목과, 책 표지의 쭈그리고 앉은 채 담배를 물고있는 어린 소년의 모습. 담배를 문 채 눈을 내리깐 아이의 표정에서 아이다움은 도저히 찾아볼 수가 없다. 고단하고 메마른 표정의 소년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묻고 싶어진다. 아이야, 무엇이 너를 이런 모습으로 만든 거니?

 

전쟁이 끝나고 무사히 살아 돌아왔지만 이미 영혼이 황폐해져 버려 가족에게 폭력과 학대만을 일삼는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저지할 아무런 힘이 없이 그저 무기력하게 하루하루 살아가는 어머니, 위선과 폭력으로 가득한 가톨릭 학교... 지옥 같은 매일이 반복된다. 책장을 넘기면서, 이것이 한 사람의 인생의 실제 이야기라는 사실이 경악스러웠고 슬프기만 했다. 전쟁이 끝난다고 해서 상황이 종료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깨달음에 몸서리가 쳐졌다. 오히려 전쟁이 끝나면서 모든 악몽은 다시 시작된다.

'지옥에는 소란도, 엄청난 화염도, 식인 마귀도, 절규도 없을지 모른다. 오히려 존재의 무의미함을 일깨워주는 곳, 그곳이 지옥일지도 모른다. 여기서는 아버지가 자식에게 그렇게 했다.'(93쪽)

 

전쟁이라는 것이 도대체 인간을 얼마나 피폐하게 만들 수 있는지, 인간이 같은 인간에게 도대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 책장을 넘기면서 이런 의문이 끊이지 않고 고개를 들었다. 너무나도 나약했지만 소심하게나마 아버지의 광기를 저지하던 어머니마저 떠나고, 전쟁은 더욱 악화된다. 아버지의 광기를 막을 자는 이제 없다. 매일매일 계속되는 폭력과 학대, 어처구니 없는 절약 강박과 강제 노동이 이어지는 희망 없는 삶을 아이는 힘겹게 견디어간다. 사랑받지 못하는 아이의 메말라가는 가슴 한 구석에서, 그래도 실낱같은 온기를 목마르게 그리워하는 마음을 읽으며 슬펐다. 물론 아이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런 온기는 알트만 하우스에서 이미 말라버린지 오래되었다는 것을. 그런 사랑은 원래부터 자신의 손에 쥐어져있지 않았다는 것을.

'며칠 뒤, 문득 내 어린 시절 소원이 떠올랐다. 오래전에 완전히 포기해버렸던 소원. 전 세계 아이들의 소원이기도 한 그것은 바로 잠들기 전에 아버지가 침대 머리맡에서 책을 읽어주는 것이었다. 소설도 좋고 동화도 좋았다. 물론 그런 일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던 아버지가 최근 몇 달간 내 침대로 왔다. 책이 아닌 몽둥이를 들고. 그것을 휘두르며 큰 소리로 나를 꾸짖었다.'174~175쪽)

 

어린 안드레아스는 어떻게 이런 지옥을 견뎌냈을까. 그런 숨막히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아이다운 호기심이 살아있었다는 것이, 생명력이 힘차게 꿈틀대고 있었다는 것이 놀랍기만 했다. 잠가놓은 식료품 저장소에 몰래 들어가 주린 배를 채우고, 아버지의 책상을 뒤져 우표를 훔쳐내 팔고, 몰래 묵주를 판 돈으로 한밤중에 탈출하여 소시지와 빵을 사 먹고...

모든 것이 너무나 막막한 상황이었지만 아이가 열한 살 때부터 일기를 썼다는 것, 그리고 일치단결했던 착한 둘째 형 만프레드가 있었다는 것에(정확히는 집을 떠났던 만프레드가 김나지움 편입에 실패하여 돌아오게 되었다는 것에-물론 만프레드에게는 불행이었지만)에 무한히 감사한다. 그 두 구원이 없었다면 그는 견디지 못하고 미쳐버렸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책 맨 첫장에는 '용기있는, 나의 형 M을 위해'라고 써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글을 쓴다는 것이 (서투르고 형식적일지라도) 비밀스러운 방식으로 삶의 부담을 덜어준다는 것을 느꼈다.'(112쪽)

'그래도 알트만 하우스에는 만프레드가 있었다. 내 둘째 형 만프레드는 존재 자체로 나를 보호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곁에 있다는 사실 사나만으로도 나는 안심했다...(중략)...우리는 교대로 작업하며 고통을 나누었다. 그러나 얼마 후 나는 타인의 고통으로 내 고통이 배가되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멸시는 곧 자기를 향한 멸시이며, 그 사람을 향한 구타는 곧 자기의 심장을 향한 구타였다.'(146쪽)

 

벽 한쪽 공간에 날짜를 세는 달력이 있었고, 안드레아스는 매일 24시간을 지우며 2초간의 행복을 누렸다. 열아홉 살, 그는 마침내 알트만 하우스로부터, 아버지로부터 탈출한다. 법적으로 성인이 되어 자유의 몸이 되는 스물한 살이 되기까지는 아직 851일이 남아있었지만 그는 두꺼운 빨간색으로 사선을 긋고 "나쁜 언행으로 조기 석방!"이라고 쓴다.

그리고 1부, 2부 '전쟁'이 끝나고 이어지는 에필로그. 에필로그를 여러번 읽으며 생각했다. 한 사람이 자신이 상처의 역사와 마주서는 일, 또 그것을 극복하는 일이 얼마나 끝없이 험난한 길인가에 대해서. 전쟁이 끝나고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온 후 알트만 하우스에서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었듯, 아버지와 집으로부터 겨우 탈출하고 나자 또다시 전쟁이 시작되었다. 실체 없는,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전쟁에서 지지않기 위한 몸부림들. 그는 수많은 직업에 도전하며 자신의 가능성을(혹은 삶의 이유를) 발견하려 애쓰고, 그 과정에서 수없이 좌절하고, 수많은 곳을 여행하고, 자신을 치유하기 위해 수많은 방법을 동원한다. 성 불능을 이겨내고, 불교로부터 위안을 얻기도 하고, 자신의 호흡곤란의 증세에 숨겨진 출생의 비밀을 마주하고,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장례식에 참석한다.

 

그는 세상에서 자기 자리를 찾는데 드디어 성공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기자가 된 지금 나는 내 영혼에 남아 있는 종양에 감사한다'(317쪽)라고 말한다. 그 종양은 지나친 자만과 긍정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주고, 더 섬세하고 투명하게, 더 엄격하게 현실을 재면서 글을 쓰도록 돕는다고.

그리고 마침내,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에 대한 기사를 쓰기 위해 러시아의 한 마을을 여행하던 어느 겨울날, 그는 아버지를 이해하게 된다. 여든여덟의 안나 요노브가 독일 소련 전쟁에 참전해 살아돌아온 남편에 대해 들려준 이야기, '남편은 전쟁에서 이미 죽은 것이었다'는  그 이야기를 듣고선.

 

'아버지는 잘못된 직업을 가지고, 잘못된 시기에, 잘못된 장소에서, 두 손에 최악의 카드를 쥐고 살았다. 나는 44년 뒤에 세상에 태어났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났다. 이날, 안나 요노브나의 목조 별장 의자에서 나는 나에게 행운이 있었음을 알았다. 그리고 아버지에게는 행운이 없었음을 알았다.'(319쪽)

이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악몽의 시간을 건너야했을까. 그렇게 아버지의 비극에 대해 이해하고 난 후에도, 지금도 자다가 깨어나 울곤 한다는 그의 고백을 생각한다. 혐오스러울 정도로 망가져버린 두 사람의 인생에 대해, 또 자신을 위해 운다는 그 순간들을 생각한다. 마음이 저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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