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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의 거리 ㅣ 창비청소년문학 58
김소연 지음 / 창비 / 2014년 1월
평점 :
<명혜>를 비롯해 <꽃신>, <남사당 조막이> 등 깊이 있는 역사 동화로 기억에 남았던 김소연 작가가 처음으로 쓴 청소년소설, 기대감을 안고 책을 폈다. 무거운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소설을 쓴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 작가가 얼마나 꼼꼼한 자료조사를 바탕으로 그 시대와 인물들을 만드는 데 공을 들였을지를 알 수 있었다(나중에 읽어보니 작가 스스로 도서관과 헌책방, 기록 자료관 등에서 수년을 보냈다고 한다, 역시...). 결코 가볍지 않은 시대적 배경과 주제의식이지만 소설로서의 재미와 카타르시스가 생생하게 느껴져 시간가는 줄 모르고 즐겁게 읽었다.
노비와 종, 소작인들이 모여사는 평안북도의 산골마을 범골에서 양반의 서자로 태어난 주인공 동천. 응당 평생 농사지으면서 살아야 할 팔자로 태어났지만, 소학교의 졸업을 앞두고 동천은 일본으로 나가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평양과 부산, 오사카를 거쳐 동경으로 이어지는 여정... 그 치열한 성장의 과정을 따라가며, 동천이 만나고 관계맺는 여러 사람들의 삶을 읽으며, 많은 생각거리들이 꿈틀꿈틀 물꼬를 튼다. 이미 제도상으로는 반상의 차별이 금지되고 노비법은 폐지되었지만 관습과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건재한 신분제의 그늘에 대해서, 그 시대에 여성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서(특히 동천의 어머니 본동댁 같이 이중으로 소외된 여성은 더더욱), 일제 강점기라는 격동의 시대를 살아가는 각 개인들의 선택과 그 선택의 결과에 대해서, 견디기 어려운 가난과 모진 탄압 속에서도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대의를 택한 이들의 용기와 희생정신, 그리고 그들이 견뎌야했던 혹독한 대가에 대해서...
책장을 넘기며 무엇보다 행복했던 것은,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지만 작가가 단순히 조선인 대 일본인의 대결구도나 흑백논리를 넘어, 인간에 대한 보편적 믿음과 가치를 생각하게 해 주었다는 것이다. 동천은 일본에 와서 갖은 핍박과 차별을 당하고, 메이데이 기념식에 참가했다가 구타를 당하기도 하고, 간도대학살을 목격한 후 죽을 뻔한 고비를 겨우 넘기기도 하지만 모든 일본 사람들이 적인 것은 아니다. 야쿠자이고 과거에는 결사대 대원으로 도망치는 조선인을 잔인하게 죽였지만 동천에게 일자리를 주고 후견인이 되어 준 구마모토를 비롯하여, 오자키, 요시코 등 많은 일본인들이 동천에게 힘이 되어준다. 또 같은 조선인이지만 유학생 모임을 검거하는 첩자 노릇을 한 동천의 조카 형섭처럼 어두운 시대에 자신만의 살 길을 찾은 이도 있다. 다케다처럼, 과거에는 동천에게 더 넓은 세상을 향한 꿈을 꾸라고 격려했던 은인이었으나 후에는 천황을 위한 황국신민이 될 것을 종용하는 이도 있다. 격동의 시대를 제각기 살아가고 견뎌갔던, 다양한 삶의 모습들을 담으려 한 작가의 노력이 느껴진다.
책의 마지막 '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왜 하필이면 일제 강점기냐고, 돌아보기에 힘들고 화가 나는 시대를 왜 끊임없이 공부하고 이야기하느냐는 질문을 받는다고.
'하지만 전 조금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프고 슬픈 삼십육 년이지만 분명 그 안에는 설움과 가혹함만이 전부가 아닌, 또 다른 삶이 존재했습니다. 시대의 무게에 억눌리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참모습을 찾아 세상을 헤매던 생명들이 있었습니다.'(400쪽)
그렇다. 내 나라와 내 정체성. 지금 나에게는 숨쉬는 공기처럼 너무나 당연한 것들을 끝내 잃지 않기 위해서, 캄캄한 어둠 속에서 기꺼이 피흘렸던 수많은 '동천'들을 생각한다. 그들 덕분에 지금의 우리가 이렇게 자유롭게 숨쉬고 있는 것이니까.
(덧붙임. 몇 주 전, 초콜렛 내음이 온세상에 가득하던 안중근 의사의 서거일 때, 광복 이후 가난과 탄압으로 인해 해외로 뿔뿔이 흩어져 비참하게 살아가야 했던 안중근 의사의 유족들에 대한 기사를 읽고 가슴 먹먹했던 기억이 난다. 날이 갈수록 치매에 가까워지는 이땅의 역사의식을 바로세우기 위해, 이런 좋은 책이 청소년들과 어른들에게 널리 읽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