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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님전 ㅣ 시공 청소년 문학 50
박상률 지음 / 시공사 / 2012년 5월
평점 :
대학 졸업반이 되었던 해, 그 싱숭생숭했던 봄에 친구를 즉석에서 꼬드겨 전라도 여행을 떠난 적이 있었다. 3박 4일의 짧은 여정이었지만 그때 느꼈던 남도의 흥취랄까, 그 정겹던 느낌이 이 책을 읽으며 생생히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그때처럼 훌쩍 떠나고 싶어 온몸이 간질간질거렸다. 이야기 가득히 풍성하게 펼쳐지는 판소리 문체와 구수한 남도 사투리가 어찌나 맛깔스럽게 느껴지는지... 밤늦게 혼자 책을 읽는데 얼쑤얼쑤 나도 모르게 흥이 절로 났다. 구수하고 풍성한 소리들의 향연!
진도개 황구와 황구의 딸들 노랑이와 누렁이, 그리고 세 모녀에게 극진한 애정을 쏟는 황씨 할아버지. 황씨 할아버지가 세상을 뜬 후 그동안 죽 함께 살던 세 모녀는 뿔뿔히 흩어지게 된다. "사람 식구 먹을 것도 딸리는데 개 식구까정 멕여 살릴라믄 솔찬이 힘이 들겄"기 때문에 식구들이 내린 결정이었다. 황구와 노랑이, 누렁이는 황씨 할아버지를 그리워하지만 늘 그랬듯이 묵묵히 사람들이 내린 결정에 따른다. 책의 시작과 끝부분은 옷 장수를 따라 서울로 떠났던 누렁이가 진도로 찾아와 그리운 엄마와 만나는 장면인데 눈시울이 시큰해진다. 밤늦게 어미를 찾아온 자식에게 뭐라도 먹이고 싶지만 아무것도 없어 빈 젖이라도 물리는 어미와 안 나오는 어미젖을 열심히 물고 스르르 잠이 든 누렁이. 만남과 이별, 그리고 숱하게 부딪치는 아픔과 상처들을 딛고서 그래도 면면히 이어져가는, 삶이란 그런 것일 것이다. 황구는 틈나는대로 열심히 정성을 다해, 노랑이와 누렁이에게 제대로 '밥값'하는 '개 노릇'하며 살아가는 법을 가르친다. 그렇게 삶은 계속 이어져간다.
이야기의 전개를 따라가며 개 팔자(!)를 생각하면 마음이 짠하고 슬픈데, 웬걸 나도 모르게 키득키득 참 재미있게 읽히는 책이었다. 아 이것이야말로 학교 다닐때 줄창 줄 그어가면서 외웠던 우리 전통 문학의 뿌리, 풍자와 해학의 정신일까. 곳곳에 빵 터지는 부분이 많다. 아, 이렇게 유머와 센스가 넘치는 사랑스러운 진도개들이라니. 집에 고양이를 들이게 되어 밥 양이 줄어도, 마을 사람들이 몸이 좋지 않은 황씨 할아버지에게 황구를 고아 먹으라는 말을 들어도, 할아버지를 따라 간 국밥집에서 개가 식당에 들어왔다고 타박을 하고 소금을 뿌려도, 부모와 자식간에 생이별을 겪게 되어도 절망하거나 스스로를 가엾게 여기지 않는다. 어떤 상황에서도 의연함과 웃음을 잃지 않는 '개님'들.
작가의 고향이 진도라더니, 소리의 고장 진도에 대한 작가의 애정어린 시선이 이 책 곳곳에 한껏 묻어난다. 아, 특히나 압권은 황씨 할아버지의 장례 장면! 상복을 입고 상여 뒤를 따르는 황구네 새 모녀, 애달픈 상엿소리가 지난 후 풍물이 울리기 시작하자 노랑이는 앞으로 뛰어나가 춤을 춘다. 그리고 진도 아리랑의 곡조를 흉내내어 짖기 시작한다. 쥐 잡느라 수고했다며 장터에서 맛있는 국밥을 사주었던 할아버지, 손수레에 태워 끌어주던 할아버지, 어미 황구를 고아 먹으라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벼락같이 역정을 내었던 할아버지의 저승길을 개들은 그렇게 배웅한다. 언젠가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보고픈 욕심이 드는 아름다운 장면이다. 우리네 떠들썩한 장례 풍경, 삶과 죽음이 어우러져 하나가 되어가는 축제의 시간. 그렇게, 삶은 면면히 이어져가는 것이다.
"풍물패들이 진도 아리랑의 박자에 맞추어 풍물을 치고, 피리 부는 사람은 진도 아리랑 곡조를 불기 시작했다. 상여꾼들 모두 상 여를 내려놓고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베를 잡고 앞서 가던 호상꾼들 역시 어깨춤을 추기 시작했으니.
굿이, 아니 축제가 따로 없었것다."(11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