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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 기울이면 들리는 것들 - 마음을 치유하는 젊은 한의사의 심리 처방전
김진혁 지음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2년 5월
평점 :
이 책을 읽으면서 옛날 살던 동네에서 종종 가곤 했던 한의원 생각이 났다. 조그만 한의원이었지만 늘 사람 냄새가 훈훈하게 가득한 곳이었다. 한의사 선생님은 매주 화요일이면 독거노인분들께 의료봉사 하러 가신다고 문을 아예 닫아버리는 등 좀 괴짜셨는데, 깐깐해 보이는 인상과는 달리 환자들에게 마음을 써주시는 것이 남달랐던 기억이 난다. 고등학교 때부터 예민한 성격 탓에 위장에 탈이 자주 났던 나는, 그 한의원에 들러서 가끔은 위를 들볶는 나쁜 식습관에 대해서 야단도 맞고 때로는 힘들겠다고 위로도 받곤 했다. 이 책의 저자와 내 기억 속 무궁화 한의원 한의사 선생님의 느낌은 사뭇 다르긴 하지만, 하여튼 기분 좋은 일이다. 이 삭막한 세상에 '환자=돈'의 공식을 거부하고 사람의 마음 속을 진지하게 들여다 봐 주는 한의원이 이렇게 있다는 것은.
저자는 책머리에서 자신의 경험을 소개하며 '아픔을 낫게 하는 경청과 공감의 힘'을 이야기해 주는데, 참 마음에 닿는 이야기다. 처음엔 이 분도, 반복되는 소화불량이나 위장염 때문에 자기 한의원을 찾는 환자들에게 "스트레스 받지 마시고, 제때 식사 하시고, 맵고 짠 것 소화 안되는 것 자제하세요"하고 매번 무미건조하게 반복해서 전달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아무리 말을 해도 환자들은 생활습관을 개선하지 않았고, 자신이 말한 것을 병원에서 으레 하는 말로 받아들이지 않았단다. 어느 날에는 환자가 너무나 변화가 없어 화가 나서(그래도 화가 난다는 것은 애정이 있다는 것이겠지. 화의 경지를 넘어서 생활습관을 바꾸든가 말든가 해탈(?)의 경지에 다다른 의사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생각하면 말이다) "자기 건강을 위해서인데, 왜 습관을 바꾸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그 환자 왈 "어디가나 비슷한 말 해요, 저도 알아요" 했다는 것이다. 그 후 이 한의사는 왜 환자들이 알면서도 행동이나 생활환경을 사람들이 바꾸지 못하는지 궁금해하고 고민하기 시작했고, 애정과 호기심을 갖고 환자들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고 한다.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고 마음을 이해해줄 때, 그들의 마음이 움직이고 자신을 변화시킬 의지도 차츰 생긴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참 흐뭇한 이야기다.
이렇게 젊은 한의사에게 자기 속앓이를 털어놓은 수많은 사람들의 사연들. 자신의 꿈을 충분히 지원해주지 못하는 부모님을 원망하는 고등학생,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만 살다가 폭식증에 걸려버린 여대생, 믿고 있었던 아내가 다른 사람에게 마음이 흔들린다는 것을 알게 된 남편, 성공한 금융인인으로 살고 있지만 우울과 불안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사람, 대기업 부장에서 명예퇴직한 후 만성 무기력증을 호소하며 스스로를 '산송장'으로 부르는 사람... 모두가 저마다 마음의 상처를 안고 있고, 그 상처가 몸에 반영되어 한의원을 찾았다. 그래도 참 운이 좋은 사람들이다. 자기 마음에 이렇게 귀 기울여주고 공감해주는 사람을 만날 수 있었으니까. 암튼 이 한의사분, 분명 전공이 심리학이나 상담학이 아니라 한의학이었을텐데 사람들 얘기에 귀 기울인 내공이 쌓이고 쌓여 마음 처방전이 프로급이다. "과거의 상처를 재현하고 치료하기 위해서 현재의 삶의 열정과 에너지가 소비되어 버리므로 우리들은 지금을 행복하게 보낼 수가 없습니다(150쪽)"같은, 그 내공이 빛을 발하는 문장들을 읽으며 끄덕끄덕.
음, 그렇지만 살짝 아쉬운 점 하나 추가. 읽으면서 가끔 문장부호 실수와 맞춤법에 맞지 않은 단어들이 눈에 띄어 읽기에 거슬리는 느낌이 있다. "의례 하는 말로밖에"(7쪽), "비로서 마음이 아팠다"(9쪽)나 "만들었다는 거야 머야"(158쪽) 등. 그리고 환자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도 어떨 땐 "세진님"이 되었다가, 어떨 땐 "세진양"이 되었다가 하는 것도 좀 통일이 되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책을 읽으며 오랜만에 무궁화 한의원의 훈훈한 공기를 다시 느낄 수 있어서 참 마음이 푸근한 시간이었다. 그 분은 지금쯤 어디서 무엇을 하고 계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