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그림자 같은 목소리
이자벨라 트루머 지음, 이지혜 옮김 / 여운(주) / 2014년 5월
평점 :
"이따금 아버지의 시선이 내게 머물 때면, '이 여자가 누구지?'라고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한다. 그럴 때면 나는 아버지가
느낄 수 있도록 가능한 많은 애정을 표현하려고 한다. 감정적으로는 여전히 아버지에게 가 닿을 수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나와 가족들로부터
자신이 사랑받고 보호받고 있음을 그가 여전히 느낄 수 있다고. 아버지가 더 이상 의식할 수 없게 된 이 세계에서 느끼고 있을 두려움을 내가
조금이나마 덜어줄 수 있다고."(서문 중에서, 9쪽)
2006년 봄, '나'는 나의 여든 살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가족, 친척들과 친구들, 이웃들과 함께 있다. 모두들 나를 향해 웃음
짓고 잔을 들어 올려 건배를 나누지만 , 나는 이 자리가 불편하기만 하다.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의 이름도 생각나지 않고, 아내와 딸이 누구를
초대했는지도 도통 모르겠다. 사람들 앞에서 뭔가 연설을 해야 하는 상황이 오자 머릿속이 텅 비어 버려 한 마디도 할 수 없다. 딸이 미리 준비한
쪽지를 건네받고서도 두 번이나 잘 못 읽고서야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글을 겨우 읽는다. 춤추고 웃고 떠드는 사람들 틈에서
모든 게 시끄럽고 부담스럽고 피곤하기만 하다. 너무 더워 셔츠를 벗었더니, 아내가 '맙소사'하며 달려들어 셔츠를 도로 입힌다.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본다. 사람들과 작별 인사를 하고 악수를 나누는데 그들이 뭐라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목소리는 들리는데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그림자 같은 목소리'들.
참 생각할수록 잔인한 병이다. 육체는 아무 이상이 없는데 머릿속의 기억은 서서히 지워진다는 것. 가족들, 주위 사람들이 자신 때문에
혼란스러워하고 차차 인내심을 잃어 간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이 온다는 것. 사실 어떤 느낌일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저릿해진다.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해준 사람들의 목소리가 어느 날 음성만 남고 '의미'가 사라져 '그림자 같은 목소리'가 된다는 것이.
2006년 봄에서 2014년 봄까지, 시간은 무심하게 자꾸 흘러간다. 그 과정에서 '나'는 점차 변해간다. 시종일관 '나'의
관점에서 일상의 순간들이 담담한 어조로 그려진다. 슬픔과 두려움, 때때로 찾아오는 옅은 희망과 이어지는 좌절,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무력감과
고독의 세계.
알츠하이머성 치매를 겪는 이와 그 가족에 대한 책은 몇 차례 읽어본 적이 있다. 그런데 지은이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쓴 이
책이 좀 더 아프게 와 닿는 이유는, 첫째 '나'와 아내 힐데와의 관계의 현실성 때문이다. 그리고 후반부로 갈수록 언어능력을 상실해서 의사소통이
힘겨워지는 상황을 '나'의 무너지고 있는 언어로 그대로 담아냈기 때문이다(번역자가 꽤 고민했을 것 같다).
힐데는 '나'와 열두 살(혹은 열세 살) 차이가 난다. 아내를 두고 다른 여자들과 놀아난 적은 없었지만, 아직까지도 잊지 못하는 검은
머리카락의 그녀에 대한 아내의 끝없는 질투 때문에 이혼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항상 딸을 원했던 나의 딸에 대한 애착은 또 다른 질투의 불씨가
되기도 했고, '나'와 힐데의 결혼생활을 봐 와서 결혼이라면 지긋지긋하다는 딸은 독신으로 살고 있다.
힐데는 신경질적인 어조로 내가 어딘가에 둔 우편물 열쇠의 행방을 찾고, 손님이 오는 날이면 '정신을 바짝 차리라'고 다그치곤 한다. 뭘
물어보고 싶어도 내가 아는 것이 당연하다는 둣한 눈길을 준다. "그건 방금 말했잖아요!"라는 짜증 섞인 말을 듣게 될까 봐 '나'는 종종 입을
다무는 쪽을 택하고, 힐데는 대화가 부쩍 뜸해졌다며 투덜거린다.
하지만 사실 이것은 처음부터 힐데에겐 불리한 관점이다. 모든 것이 '나'의 시각에서 이해되고 서술되고 있으므로. 열두 살 연상이지만
나이보다 훨씬 젊어보이고 잔병치레도 없이 건강했고 역장으로 승승장구했던 자랑스러운 남편이 어느날 갑자기 알츠하이머성 치매에 걸린 현실에서,
그녀가 겪었을 고통에 대해 아무도 쉽게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애지중지 가꾸던 꽃밭에 남편이 눈을 퍼내어 쏟아붓는 것을 망연자실하게
지켜보면서 어떤 마음이었을지, 슈퍼마켓에서 토마토소스를 가져오겠다던 남편이 공황상태에 빠져 잡지꽂이와 함께 쓰러지는 상황이 일상이 되버리는 것이
어떤 느낌일지.
아무튼, 힐데는 내가 이제껏 왔던 치매 환자의 이상적인(?) 가족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 한없는 배려심과 자상함과 따뜻함 대신, 짜증과
투덜거림과 다그침, 답답해하는 모습. 하지만 한편, 이런 모습이 현실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아무리 가족이라 하더라도, 아무리 오랜시간
살을 맞대고 살아온 배우자라 하더라도 그와 함께했던 평범한 일상생활이 조금씩 무너진다는 것을 쉽게 받아들이기는 힘들 것이다. 점점 상태가
심해지고 기복이 심한 '나'의 상태를 이해하면서 함께 생활해간다는 일, 슬픔을 극복하고 변화하는 상황에 끊임없이 적응해야하는 일이 끝없이
반복된다는 것...
8년의 시간동안 기억에 남는 이야기들이 많았는데, 그 중 가장 여운이 오래 남는 것은 어느 크리스마스 이브날 일어났던 작은 에피소드다.
'나'는 손주들에게 줄 크리스마스 선물인 기념주화가 든 선물상자를 어디에 두었는지 잊어버리고 힐다의 눈치를 보고 있는 중이다. 곰곰이 생각했으나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던 '나'는 망연자실한다. 그렇게 식사를 마친 후 손녀 레나와 이야기를 나눈다. 레나의 인형을 위한 토요일용 드레스를
사줘야겠다고 지갑을 찾던 중, 돌연 서랍 속에서 선물상자가 나타난다. 레나는 웃음을 터뜨리며 내 볼에 뽀뽀한다.
"할아버지가 선물을 찾았어요!" 아이는 거실을 향해 외치며 인형을 들고 문 쪽으로 깡충깡충 뛰어갔다. "그것 보세요! 할아버지도 알고
있었다니까요!"
아이의 뿌듯해하는 목소리가 나를 기쁘게 했다. 꼬마 레나는 여전히 나를 믿고 있다. (80쪽)
누군가가 나를 믿고 있다, 여전히. 알츠하이머성 치매에 실어증, 공황장애까지 겪으며 점차 세상 밖으로 밀려나가고 있는 '나'는, 할아버지가
자기에게 줄 선물상자를 찾을 줄 '알고 있었다'는 아이의 말에서, 그 단단한 믿음에서 기쁨과 위안을 얻는다. 그것이 '나'의 무너져가는 삶을
버티게 해 줄 힘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알츠하이머가 비록 그의 많은 것을 앗아갔을 지라도, 지은이 이자벨라 트루머는 이야기하는 것이다.
'어릴 적 내게 세상을 가르쳐 준 사람, 내가 영원히 사랑하고 존중하고 존경할 사람인 아버지'(9쪽)라고.
'그림자 같은 목소리'들 틈에서 힘겨운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지만, 그래도 누군가는 그런 '나'를 변함없이 믿어준다는 것은 얼마나
눈물겨운 일인가. 당신은 우리에게 변함없이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느끼게 해 주는 사람들이 곁에 있다는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