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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참 늦복 터졌다 - 아들과 어머니, 그리고 며느리가 함께 쓴 사람 사는 이야기
이은영 지음, 김용택 엮음, 박덕성 구술 / 푸른숲 / 2014년 4월
평점 :
품절
연세가 드셨고, 이제는 몸이 아프셔서 집에 가지 못하고 병원에 계시는 한 어머니. 무료하게 계시는 어머니가 바느질을 좋아하신다는 것을 기억하고 조각 천과 반짇고리를 내미는 며느리. 그리고 어머니의 손끝에서 하나씩 하나씩 탄생하는 조각보, 찻잔 받침, 홑이불, 베갯잇... 정성이 가득 담긴 섬세한 문양들의 잔치가 벌어진다. 참, 따뜻한 이야기다.
'바느질을 시작하고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놀랍게도 어머니 눈빛이 살아났다는 것을 알았다. 병원에서 집 생각 말고, 자식들 생각 말고, 아프다는 생각 말고, 죽기를 기다리는 거 말고, 나만 기다리는 거 말고, 다른 생각과 고민을 하고 할 일이 생겨서 어머니의 모든 신경이 살아난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았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해낸 내가 말할 수 없이 기특했다.'(11~12쪽)
그렇게 바느질을 시작하고 두 달쯤 지났을 때, 며느리는 이번에는 어머니께 글쓰기를 하자고 공책을 내민다. 처음에 어머니는 못한다고, 바느질만 하자고 하신다. 그날 며느리는 그냥 돌아온다. 다음에 가서는 제일 쓰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라고 말씀드리지만, 없다면서 안 쓰신다고 하신다. 그러자 음에는 자기가 올 때까지 '살면서 제일 좋았을 때'가 언제였는지 생각해 놓으라고 하는 며느리(은근과 끈기의 힘!^^;).
다음에 며느리가 갔을 때, 어머니는 아들이 선생 되었던 때가 제일 좋았다고 하신다. 며느리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받아쓰고, 어머니는 그것을 다시 공책에 옮겨 적으신다. 한 문장을 쓰시는 데 30분도 더 걸렸지만, 손에 힘이 없어 글씨를 쓰는 손이 덜덜 떨렸지만, 그래도 그렇게 한 자 한 자 힘주어 당신의 살아온 이야기들을 꺼내놓으며 얼마나 즐거우셨을까를 생각해본다. 책에 실린 할머니의 삐뚤빼뚤한 글씨가 정겹다.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실 쉽지 않은 사이지만(그리고 처음부터 이렇게 다정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힘겨웠던 시간을 슬기롭게 건너온 둘이, 이렇게 마주앉아 도란도란 정겹게 이야기 나누는 것이 보기 좋다.
'어머니는 몸이 아프면서 잃었던 자존감을, 바느질과 글쓰기를 하면서 회복하고 계셨다. 놀라웠다. 행복했다. 그리고 나는 비로소 어머니께 잘해야 한다는 무거운 부채감에서 벗어났다.'(15쪽)
그동안 남편과 다른 사람들의 눈 때문에, 책임감과 의무감 때문에 어머니께 잘하던 때도 많았다고 돌아보는 며느리는, 이제 자신의 마음이 어머니께 새롭게 가 닿는다는 걸 느낀다고 했다. 참 예쁜 며느리다. 여든일곱에 한글을 깨치고, 침침한 눈으로 이불에 꽃잎을 흩뿌려놓으시는 어머니를 보며 이 나이에 내가 뭘 못하겠는가를 생각한다는 그녀의 생각을 따라, 나도 '이 나이에 내가 뭘 못하겠는가'하고 중얼거려본다. 글을 깨쳐서 읽어냈다는 성취감에 당신이 아픈 것도 잊어버린 채, 희열에 찬 모습으로 또박또박 당신 인생을 이야기하시는 걸 보고 며느리는 부끄러워졌다고 했다. 나도 내가 부끄러워진다. 서른을 넘기면서 몸이 이십 대 때와 다르다고 투덜거리고, 그때를 그리워하고, 마치 인생 다 산 것처럼 굴던 나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어머니의 고운 손바느질 작품들처럼, 두 분의 다정한 시간이 오래오래 예쁘게 이어지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