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는 어떻게 삶을 파고드는가 - 최신 신경생물학과 정신의학이 말하는 트라우마의 모든 것
폴 콘티 지음, 정지호 옮김 / 심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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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숲 출판사 북클럽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트라우마에 빗댈 수 있는 또 한 가지는 비, 그것도 끊임없이 내리는 비다. 처음에는 가랑비처럼 느껴지지만, 아무런 보호막도 없다면 우리는 뼛속까지 푹 젖게 되고 물은 계속 주위에서 차고 올라와 결국 고통의 강이 되어 우리를 휩쓸어 간다. (p.64)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까... 아직도 밤마다 꿈을 꾼다. 돌이켜 짚어보면 딱히 닮은 점을 찾을 수도 없는데 찰나에 겁을 먹고 주저앉아 비명을 지르고 도망친 적도 부지기수다.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느낀다. 툭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밤새 웅크려있는 삶은 여전하다. 꿈이 두렵고 잠이 안 오고, 잠을 못 자니 하루종일 피로에 시달리고 규칙과 기억에 집착한다. 이런 삶을 살아내야할 이유가 있을까.
언젠가부터 트라우마와 PTSD는 꽤나 친숙하고 가벼운 개념이 된 것도 같다. 굳이 좋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 PTSD온다~"는 식의 우스개를 들으면 네가 내 삶을 알기는 하냐고, 알고도 그렇게 편하게 떠들 수 있겠냐고 멱살이라도 틀어쥐고 싶은 심정이 되어버리니. 세상에 쉬운 삶 하나 없고 편하게만 사는 사람은 없다고들 하지만 개중에는 회복할 수 없거나 적어도 그렇다고 느끼게 하는 사건들도 있기 마련이다. 그런 사람에게 방실방실 웃는 얼굴로 할 수 있다느니, 소중하다느니, 긍정적으로 살라느니... 찬사와 응원을 늘어놓는 건 역시나 독일테다.

안다. 스스로를 용서하라느니 용기를 가지라느니 입에 발린 싸구려 위로는 자기혐오를 보태줄 뿐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내가 그렇게 살고 있기 때문에, 내가 나를 용서할 수도, 그래서도 안된다고 느끼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여전히 주저앉고 헐떡이고 비명을 지르는 삶이 아니겠는가. 세상이 바뀌지 않고 달라진 것도, 바꿀 수 있는 것도 없는데 개인의 시선만 달랑 바꾼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는다는 걸 모두가 안다. 그렇기에 트라우마를 피상적이고 얄팍한, 자고 일어나면 털어버릴 수 있는 고민 정도로 치부하는 온갖 자기계발서에 넌덜머리가 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다.

이 책은 제목처럼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사람이 얼마나 비참하게 무너져내리고 전능한 의학, 햇살같은 자기긍정이 그 시궁창을 얼마나 멋지게 구해내는지를 말하지 않는다. 대신 제목처럼 트라우마가 어떻게 삶을 파고드는지, 왜 떨쳐내기 어려운지, 어째서 개인이 자기파괴적인 행동을 반복할 수 밖에 없는지를 말한다. 뿐만 아니라 운영 편의에 치우친 의료시스템이 환자에 대한 이해를 가로막고, 복지체계와 아동청소년 교육이 얼마나 중요하고 또 헛물만 켜고 있는지를 지적한다. 어떤 트라우마는 심리적 손상을 의도한 폭력의 결과물이고 그것을 개인의 문제로 축소하는 것이 얼마나 문제적이며 어떻게 변해야하는지도, 개인과 사회가 할 수 있는 일을. 그 모든 것을 때로는 관련 분야 전문가와의 대담으로, 저자 자신을 포함한 개인들의 사례로, 의료시스템의 일원으로, 심리사회전문가의 시선으로 설득력있게 풀어나간다.
"우리가 사회 구성원으로 겪는 수많은 트라우마는 실제로 그 안에 심리적인 의도가 있다는 거죠."(p.176)
"(...) 억압적인 체제를 유지하는 힘의 일부는 사람들의 심리를 바꾸는 데 들어갑니다. 그 이유는 트라우마를 겪으면 자신이 속한 곳에 대한 인식은 물론 세계관도 바뀌기 때문이죠."(p.177)

당신은, 나는, 우리는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 적어도 모두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 뭐라도 해야하고, 어떻게든 변해야 한다. 고통을 또다른 고통으로 앙갚음하며 모두를 트라우마의 교묘한 술책 속에 던져주지 말아야한다.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다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서라도.
사회의 일원으로서 트라우마를 전적으로 제거하는 것은 우리 능력 밖의 일이다. 사람은 죽고, 차 사고는 발생하며 질병을 얻는 것은 생물학적인 팩트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불필요한 트라우마가 우리를 죽이지 못하도록, 우리의 삶을 주도하지 못하도록 지금보다 훨씬 더 자신의 몫을 잘 해나갈 수 있다.(p.197)

책에 쏟아진 찬사를 나열하지는 않겠다. 누가 얼만큼의 고통에서 "구원"받았는지 감탄하고 싶지도 않다. 누구라도 개인의 고통을 부수고 구해낼 수는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말이 되지 못한 울음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외로운지를 안다. 때문에 이 책이 당신을 빛처럼 찬란한 세상으로 끌어낼 수 있다고 장담하지는 않겠다. 다만, 삶에 짓눌리고 더는 갈 곳도 다른 삶을 기대할 수도 없다고 느낄 때 당신을 도울 책이 될 거라고, 최소한 고개를 들고 상처를 움켜쥘 마음이 들게 할 수는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저자가 전능하고 위대한 위안의 신이어서가 아니라 고통의 무게를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도 당신과 같이 부서지고 회복되지 못한 삶을 끌어안고 있다고, 당신이 스스로가 얹어주는 고통 속에 버티려고 애쓸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푸른숲북클럽 #트라우마는어떻게삶을파고드는가 #심심 #인문학 #인문서 #심리학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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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길들임의 역사 - 인류의 생존을 이끈 선택과 협력의 연대기
앨리스 로버트 지음, 김명주 옮김 / 푸른숲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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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푸른숲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쓰는, 주관적 후기임을 밝힙니다.

#푸른숲북클럽
#세상을바꾼길들임의역사
#심심 #푸른숲

인류는 홀로 생존할 수 없다. 굳이 철학적 의미까지 끌어오지 않더라도 혼자, 단지 자기 종 하나만으로 생존하며 유지될 수 있는 종은 단 하나도 없다. 모두가 서로의 생명에 빚지며 살아간다. 살아있는 것의 제1원칙이다. 더군다나 인간은 여기저기 자연에 흩어져 살면서 잔디나 뜯어먹고 살지 않는 이상 더더욱 그 원칙에서 벗어날 수 없다. 원시 수렵시대 이후 무리지어 자리잡고 살아 지금의 문명을 이루는 동안 인간이 일상적으로 먹고, "사용하는" 동식물 중 인간에 의해 길들여지고 야생의 그것과 달라지지 않은 게 있을까.

늑대와 유전자형이 거의 일치하는 개는 본래부터 그렇게 애정이 넘치고 눈의 움직임이 잘 보이던 동물이었을까? 공룡의 후예인 조류, 그 중에서도 닭은 원래 그렇게 수없는 알을 낳고 급격히 비대해지는 동물이었을까? 소는? 말은? 우리 인간은?
식물은 또 어떠한가? 감자, 옥수수, 쌀은 태초부터 그렇게 크고 풍성하게 열렸을까? 맛도 좋고 몸에도 좋은데다 심기만 하면 온 동네를 먹여살리고도 남을 만큼 실한 열매로 번성했을까? 사과는 원래 그렇게 빨갛고 광택이 돌거나 새콤달콤하고 부드럽거나 아삭한 과육을 지녔던걸까?

당신은 인류와 함께, 정확히는 인간에 의해 인간의 필요에 따라 변화해온 동식물을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당신은 그것을 발견해온 여정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그림책으로 봐온, 식탁에 오르는 "친숙한" 것들의 역사를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이 책은 인류학과 생물학, 고고학과 역사를 넘나들며 파헤치고, 설명하고, 기원을 찾아내는 여정을 모험기처럼 그려낸다. 이만하면 『총, 균, 쇠』, 『사피엔스』를 잇는 대작이라는 평이 허황된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쉽게 알아차릴 수 있지 않겠는가.
현재는 과거의 반영이다. 미래는 또한 현재의 연장선이다. 우리의 현재에 어떤 계보가 있는지, 어떤 역사와 치열한 과정과 거짓말같은 우연이 있었는지, 그 의미를 깨닫는다면 기후위기, 식량위기에 인재도 이런 인재가 없는 이 난리통 세상에서 무엇을 꿈꿀 수 있는지 그 해법을 도모해 볼 수도 있겠다. 더해서, 예나 지금이나-라던가 이렇게 처절한 역사가 무색하게도 폭격 한 번에 사라져버린 현재를 생각하며 그저 쓴웃음만 날 지도.

불쑥 등장하는 리센코라는 이름에 소름이 끼칠지도, 약탈과 침략의 역사에 슬그머니 팝콘을 내려놓게 될 지도 모른다. 인간이 없으면 그 많은 젖을 감당하지 못해 퉁퉁 불어 고통스러워 하는 소, 너무 비대해 제 명을 다 살기도 전에 다리가 부러진다는 닭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다면 인간의 잔인함에 고개를 돌리거나,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해볼 수도 있겠다. 어쩌면, 대체 무슨 용기인진 모르겠지만 일단 입에 집어넣고 보는 고고학자들의 열정에 웃음과 박수를 참지 못할 수도 있고.
"몬테베르데를 발굴한 고고학자들은 야생 감자를 직접 맛보고 싶었다. 그들은 덩이줄기 한 개를 얻어 그것을 30분쯤 끓인 다음 먹어보았다. 실로 용감한 행동이 아닐 수 없다(p.257)."

"개는 늑대가 하지 않는 방식으로 인간과 눈을 맞춘다. 게다가 개는 어떤 식으로인지는 모르지만 인간의 신호를 이해하도록 진화했다(p.62)."
"농업이 시작되면서 개가 인간에게서 얻을 수 있는 먹이의 구성도 바뀌었을 것이다. (...) 대부분의 현대 개들은 녹말 소화효소를 지정하는 아밀라아제 유전자를 여러 개 보유하고 있다. (...) 시간이 흐를수록 개의 식생활은 육식의 비중이 줄고 잡식이 되어갔다. 인간 친구들의 식생활과 비슷해진 것이다(p.75)."

"초기 농부들은 밀을 재배하기 시작했을 때 그 옆에서 특정 식물들이 잘 자란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것은 잡초였다. 그리고 그런 잡초들 중 몇몇도 결국은 작물화되었다. 야생 호밀과 귀리는 둘 다 밀밭과 보리밭에서 흔한 잡초였다(p.101)."

"중국에 있는 닭의 절반이 아버 에이커 계통의 자손이다. 정말 놀라운 이야기다. 육종이 닭을 어떻게 그렇게 빨리, 그렇게 완전하게 바꾸었는지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는다(p.294)."

"인간은 다른 종의 진화에 영향을 미치는 유일한 종이 아니며, 인간 존재는 상호 의존에 기대고 있다. (...) 우리 가 '인위선택'이라고 불러온 행위는 실은 인간이 매개하는 자연선택에 지나지 않는다(p.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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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패로
메리 도리아 러셀 지음, 정대단 옮김 / 황금가지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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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쳐버린 명작은 기다림을 늘릴 뿐이란 것을 좀 더 빨리 깨달았다면 좋았을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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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ㅣ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12
요 네스뵈 지음, 문희경 옮김 / 비채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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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 난감하다... 너무... 너무 난감하다. 살다살다 이렇게까지 난감한 추천은 처음 해본다. 좋았냐고 묻는다면, 좋았죠. 좋았으니까 베개인지 책인지 헷갈리는 두께를 이마 팍팍 두드려가며 읽었지, 좋기는 좋았어요. 그래도 명색이 후기고 추천인데 작가님 이리와보세요. 따라하십쇼. 하나에 정신을, 둘에 차리자.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아니 그치만? 아무리 생각해도 작가가 독자 내지는 캐릭터한테 무슨 원수라도 져서 너 죽고 나 죽자며 작정한 게 아닌 이상 이렇게까지 너무한 이야기가 나올 줄은... 누가 알았겠냐구요. 아마 편집자도 받기 전까진 몰랐을거라고... 나만 당한 게 아닐거라고 믿어보겠습니다.

시작부터 상당히 모호하다. 전작들을 통해 이 작가의 스타일에 익숙해지지 않았다면 대체 이게 무슨 말인지, 순서가 이게 맞긴 한건지 물음표만 한가득 끌어안고 읽게 될 만큼. 작가의 기량 내지는 필력이라고 할 수 있는 요소는 다양하지만, 그 중 하나는 단 한 문장도 허튼 것이 없어 스쳐지나간 장면도 되돌아와 보게 하는 치밀함이 아닐까.

본격적인 시작부터 역겹다. 아니, 첫 장면부터 힌트를 주기는 했지만, 인간은 동물인가? 그렇다. 그러나,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다른 도덕성을 기준으로 삼는다. 인간은 야생동물이 아니고, 인간은 법과 질서가 있는 사회를 이루고 산다, 혹은 살고자 한다. 그것이 사회 구성원들의 기본적인 안전을 담보한다. 인간은 동물이다. 인간사회는 곧 동물로 이루어진 사회이기도 하다. 인간세계는 생태계의 일부이다. 단지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평화를 유지하는 것처럼 보일 뿐. 만일 "초식동물"의 사회에 길들여지지 않은 "육식동물"이 있다면? 게다가 그것이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반복적으로 특정 대상을 공격하고 자기 지배 하에 두어 이용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뭐라도 해봐야한다고 발버둥치지 않겠는가. 각자가 각자의 생명 앞에서.

주인공 해리 홀레가 분명 매력적인 인물로 그려지기는 하지만 결단코 선인은 아니다. 물론 물렁해지는 때도, 다정하고 사랑스러울 때가 있긴 하다만 기본적으로 진창에 발을 담그고 사는, 삶의 모든 순간이 위태한 평화와 아슬아슬한 광기로 이루어진 사람. 그래서 더욱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사람. 절로 눈이 가고 마음이 아파 나라면 이 자를 품을 수 있겠다고 생각한 모든 이들을 고통으로 밀어넣게 되는, 종내에는 자기 자신까지 빠져나갈 수 없는 지옥에 홀로 서있게 되는 사람, 부러 미친척 큰소리를 치고 너라도 가서 살라고 등떠밀어놓고 정작 자기는 외롭고 서러워 어쩔 줄을 모르는, 부서지고 상처입어 더는 회복될 길 없이 엉망이 된 채로 살아가는 사람. 해리 홀레.

순전히 독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더 굴려라 더 더!!!를 외칠 수도 있겠고, 요즘 말로 "맛있다!"고 외칠 "피폐물"일 수도 있겠다. 그치만, 그렇지만 해도해도 너무하지 않나 싶은 그의 인생. 방황의 끝, 삶의 유일한 안식처, 진짜 가족이라고 마음 깊은 곳에서 감히 안주와 평화를 꿈꾼 죄의 대가는 지독한 고독, 거의 모든 것의 상실이었다. 간신히 숨만 붙어 있을 정도만 남겨놓고 모든 것을 빼앗는 세상.
라켈, 사랑하는 아내. 이번 책만 해도 600쪽이 넘는 장대한 분량 내내 라켈은 그의 구원이 아닌 적이 없었다. 너무 절절해서 눈물이 절로 날 만큼 해리의 시간에서 라켈은 늘 눈부시고, 따스하고, 편안했다. 마치 탐내서는 안 될 것을 간신히 맛만 보여주는 것처럼, 감히 네가 평안을 꿈꾸었으니 실컷 취해있다 현실로 돌아가라는 조롱처럼. 그래서 그 상실이 더욱 잔인한 게 아닐까.
라켈이 죽었다. 라켈이, 내 아내가 죽었단다. 그것도 누군가의 습격으로. 아니, 쫓겨났으니 이젠 아내도 아닌가. 잊은 적도 떠나보낸 적도 없건만.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제일 먼저 잡아다 없애버리고 싶은데 나는 안된단다. 왜? "전"남편이니까, 가족"이었"으니까. 내가 생각해도 내가 제일 수상하니까. 툭툭 끊겨버린 기억 속에서 혼란스러운 직감과 실낱같은 단서만 가지고 찾아내야 한다. 깨어나지 않기 위해, 상실이 진실이 되지 않기 위해. 저 밑바닥에서 일렁이는 불안과 두려움의 정체를 알지 못한 채로, 어쩌면 알지 않으려 애쓰며.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는 책임과 상실일까. 어떤 기분일까. 과거의 내가 시간을 넘어 내 목을 조르는 건, 과거의 나와 그 행동과 시간들이 내 머리에 총구를 겨누는 것은. 삶은 축복이다. 동시에 살아있다는 것은 지독한 형벌이자 책임이기도 하다. 가장 잊을 수 없는 방식으로 심장에 새겨넣는 것이 상실인 것처럼.

읽는 내내 이거 보통 준비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굴리려고 작정을 했어 작정을... 국제문제부터 작중 등장하는 기관과 직위, 여러 후유증들까지 안팎으로 고루 공들인 흔적이 잘 드러난다. 그 결과, 작품 전체가 치밀한 복선과 은유로 가득차있다. 해서 나는 이 글을 읽는 누군가, 혹은 훗날의 내가 아무 단서도 없는 채로 이 책을 읽기 바란다. 숨 한 번 크게 쉴 수 없는 압박과 절망과 공포와 고독 속에 빠져들어 이를 악물고 비틀거리길 바란다. 모든 것을 잃고 또다시 남겨진 남자, 해리 홀레처럼.

어디까지 알려도 좋을까. 과연 소개라고 할 만큼 충분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이 두꺼운 책에서 충격이 아닌 부분이 없는데. 딱 한 마디, 이것만을 말할 수 있겠다. 아무도 믿지 마라. 그 누구도, 자기 자신조차도.

​
덧붙이는 팁.
1. 해리 홀레 시리즈를 전부 읽은 후에 이 책을 펼친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적어도 『팬텀』, 『박쥐』, 『목마름』 이 세 권은 꼭 먼저 읽으시길 권합니다.
2. 마음을 단단히 먹고, 가급적 한 번에 읽으시길 권합니다. 그게 어렵다면 한 챕터는 끊기지 않게 읽으시길.
3. 추천 BGM은 Raphael Lake의 "Vertigo"입니다. 어두운 방에서 스탠드 하나 켜놓고 들으면서 읽으세요. 분위기 짱.
4. 읽는 동안 제일 많이 한 말은 "오 젠장" 이었습니다. 나만 당할 수 없지. 꼭 읽으세요.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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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브로콜리 싱싱한가요? - 본격 식재료 에세이
이용재 지음 / 푸른숲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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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푸른숲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쓰는, 주관적 후기임을 밝힙니다.

#푸른숲북클럽 #오늘브로콜리싱싱한가요 #이용재 #푸른숲 #식재료에세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요리가 남 일이던 때가 있었다. 차려주는 대로 먹고, 있는 반찬으로 먹고, 급식 먹고 오다가다 대강 입에 맞는 데서 사먹고... 제철 식재료니 색다른 맛이니 해도 그때그때 입에 맞으면 그 뿐.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 이왕지사 먹는 거 맛있으면 좋지만 특출난 미식가도 아니니 괜찮네~싶으면 된 게 아닐까. 하던 때가 있었다.
이름 내지는 얼굴을 걸고 내세운 여러 요리사며 가게에, 세상은 넓고 천지에 널리고 널린 게 먹을거리 아닌가. 하루가 멀다하고 앞다투어 신메뉴!를 외치는 외식브랜드가 수없이 많고 밀키트도 여간 잘 나오는 게 아니다. 그런 세상에서 먹는 즐거움, 그것도 재료의 맛과 쓰임에 집중해 골라내 공을 들이는 즐거움은 어쩐지 요원한 일이 되어버리고 만다.

이 책의 저자는 식재료에 진심인 자, 먹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자다. 장르를 오가며 예찬에 가까운 온갖 지식을 풀어놓는 입담을 따라가다보면 절로 침이 고이고 괜히 냉장고 안 식재료를 흘끔 들여다보게 된다. 그렇구나. 이래서 맛이 없었구나. 중얼거리면서. 진열대 앞을 무심히 지나치며 있는지 없는지 몰랐던 재료들 또한 다이닝이 아니어도 충분히 맛있는 것이 될 수 있다. 내게는 아스파라거스(p.121)가 그랬던 것처럼.
"평범한 식재료를 더 맛있고, 향긋하게 즐기는 법!"이라는 자신만만한 문구의 의미를 몇 장 넘기지 않고도 깨달을 수 있다. 이 사람, 먹는 데 상당히 진심이구나. 직접 사온 토마토 껍질이 질기기가 너무해 그 이유가 궁금한 나머지 생산자에게 전화를 거는가 하면(p.82) 대강 색 내고 식감 더하는 재료로 취급되는 브로콜리마저 빛깔과 모양새를 따져 최고의 맛을 골라내는 방법을 소개하기도 한다(p.133).
그러나 미식을 주장하는 많은 요리서가 으레 그러하듯 듣도보도 못한 저 먼 나라의 희귀한 재료를 필수라고 하지 않는다. 여기서 다시 한 번 되새겨본다. 이 저자는 먹는 데 상당히 진심이다. 끼니마다 혀가 절로 꼬이는 이국의 뭐시기만을 고집하다가는 시장이며 백화점까지 발품팔아 얻는 싱싱한 재료와는 영 연을 맺지 못하게 된다. 현란한 기술이며 엄격한 등급을 잠시 내려놓는 마음으로 어깨에 힘을 빼고, 어쨌든 도구와 관용에 맡길 것은 맡겨보자.
p.42 "따라서 나의 맛에 자리가 있을지는 확실하지 않은 반면 가격대는 확실한 여섯 자리인 경우가 많으니 굳이 집착할 필요는 없다."
p.219 " 버릴 게 없는 가운데 여러 켜가 있으니 조금 섬세해질 필요가 있다. 우리 자신의 몫도 조금은 있지만 대부분의 섬세함은 강판이 짊어질 것이다."

에세이인듯 레시피북인듯, 가벼운 디저트부터 마지막 재료인 귀리를 응용한 식사까지 아마추어 셰프를 자청하는 현대인에게 다정하고 유쾌한 식재료 길잡이가 되어줄 수 있겠다. 이건 뭐고 저건 뭔지, 왜 이건 요리조리 굴려봐도 맛이 없는지 알 턱이 없는 생초보에서 벗어나 재료의 힘을 최대한 이끌어내 맛의 표정을 느껴본다면, 당신의 식세계는 이전의 삶보다 즐거움이 1.5배쯤(그 이상은 개인차가 있을테니) 상승한 곳이 될 것이다. 약속한다. 가는 손이 고와야 오는 맛이 곱다.
p.138 "에라 모르겠다고 푹 삶아버렸다가는 사달이 나지만, 약간의 섬세함을 발휘하면 방울양배추도 아름답게 익어 우리에게 화답해준다."

저자가 소개하는 요리법에 살짝 변형을 주는 것도 좋으리라. 가령, (아마도) 우리들의 귀염둥이, 뽀얀 구름같은 자태를 자랑하는 콜리플라워를 툭툭 잘라 드레싱과 함께 샐러드에 올려도 좋지만, 데쳐서 으깨면 삶아 으깬 감자와 식감이 매우 유사한데다 희미한 단맛까지 돈다. 매쉬드 포테이토처럼 간만 해도 좋지만, 빵가루를 입혀 살짝 튀겨보자. 튀김은 신발을 튀겨도 맛있다고 했다. 훌륭한 저칼로리 크로켓이 된다. 고로케 말고 크로켓. 고로케는 감자고로케나 사먹도록 하자. 마지막 장의 밀가루 편을 응용해도 좋겠다. 세상 간편한 98%무반죽 레시피가 있으니(p.287).
아쉬운 점이 없지만은 않다. 저자가 여타 생활 양식에서까지 비거니즘을 지향하는지는 알 방도가 없으나, 적어도 채식을 주로 하는 사람은 아닌 듯 싶다. 다만 본문의 과반이 채소와 과일 등 비건식이에서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내용이며, 동물성 재료를 따로 다루는 챕터가 있으니 식생활에서 비거니즘을 고민하는 독자는 해당 부분을 건너뛰거나 응용해 채식 레시피로 만들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언젠가는 이 아스파라거스며 가지, 호박, 토마토, 천도복숭아(중요!) 등등에 진심인 이 저자가 채식 식재료 레시피북 내지는 안내서를 하나쯤 내주지 않을까. 작은 바람을 남겨본다.

만일 당신에게도 손가락 한 번 까딱 하면 문 앞까지 오는 배달음식으로 대강 때운 끼니에 물려 꼴도 보기 싫었던 적이 있다면, 장보기라고는 편의점에서 집어온 삼각김밥에 컵라면이 전부여서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 지 당황스러웠던 적이 있다면, 미디어 유행을 타고 우후죽순 생겨나는 음식점에 입맛이 뚝 떨어져본 적이 있다면 이 책이 제격이다. 간신히 눈뜨면 출근 퇴근하면 탈진인 현대인이 재료부터 요리까지 책임질 체력과 여유가 모두 갖춰지는 경우는 많지 않을지도 모른다. 허나, 누가 말했던가. 아주 작은 기적, 밍기적이라고. 뭐라도 해본다면, 하다못해 단내에 홀려 사온 딸기에 소금후추 톡톡 뿌려 색다른 맛이라도 본다면 세상은 딸기 꼭다리만큼이라도 넓어지는 게 아닐까. 오늘날 먹고살기도 바쁜 사람들에게 특히나 그런 성취가 필요한 게 아닐까. 흙으로 돌아가자는 급진적인 외침이 아니더라도, 만져보고 고르고 때로는 이고지고메며 돌아와 땀범벅 흙범벅이 되도록 손질해 지지고볶은 재료가 음식이 되기까지 애쓴다면, 그 맛과 즐거움을 어느 진미에 비할까! (물론 사먹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자신 없으면 일단 사먹고 생각하자. 현대 식품 공학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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