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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ㅣ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12
요 네스뵈 지음, 문희경 옮김 / 비채 / 2022년 5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 난감하다... 너무... 너무 난감하다. 살다살다 이렇게까지 난감한 추천은 처음 해본다. 좋았냐고 묻는다면, 좋았죠. 좋았으니까 베개인지 책인지 헷갈리는 두께를 이마 팍팍 두드려가며 읽었지, 좋기는 좋았어요. 그래도 명색이 후기고 추천인데 작가님 이리와보세요. 따라하십쇼. 하나에 정신을, 둘에 차리자.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아니 그치만? 아무리 생각해도 작가가 독자 내지는 캐릭터한테 무슨 원수라도 져서 너 죽고 나 죽자며 작정한 게 아닌 이상 이렇게까지 너무한 이야기가 나올 줄은... 누가 알았겠냐구요. 아마 편집자도 받기 전까진 몰랐을거라고... 나만 당한 게 아닐거라고 믿어보겠습니다.
시작부터 상당히 모호하다. 전작들을 통해 이 작가의 스타일에 익숙해지지 않았다면 대체 이게 무슨 말인지, 순서가 이게 맞긴 한건지 물음표만 한가득 끌어안고 읽게 될 만큼. 작가의 기량 내지는 필력이라고 할 수 있는 요소는 다양하지만, 그 중 하나는 단 한 문장도 허튼 것이 없어 스쳐지나간 장면도 되돌아와 보게 하는 치밀함이 아닐까.
본격적인 시작부터 역겹다. 아니, 첫 장면부터 힌트를 주기는 했지만, 인간은 동물인가? 그렇다. 그러나,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다른 도덕성을 기준으로 삼는다. 인간은 야생동물이 아니고, 인간은 법과 질서가 있는 사회를 이루고 산다, 혹은 살고자 한다. 그것이 사회 구성원들의 기본적인 안전을 담보한다. 인간은 동물이다. 인간사회는 곧 동물로 이루어진 사회이기도 하다. 인간세계는 생태계의 일부이다. 단지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평화를 유지하는 것처럼 보일 뿐. 만일 "초식동물"의 사회에 길들여지지 않은 "육식동물"이 있다면? 게다가 그것이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반복적으로 특정 대상을 공격하고 자기 지배 하에 두어 이용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뭐라도 해봐야한다고 발버둥치지 않겠는가. 각자가 각자의 생명 앞에서.
주인공 해리 홀레가 분명 매력적인 인물로 그려지기는 하지만 결단코 선인은 아니다. 물론 물렁해지는 때도, 다정하고 사랑스러울 때가 있긴 하다만 기본적으로 진창에 발을 담그고 사는, 삶의 모든 순간이 위태한 평화와 아슬아슬한 광기로 이루어진 사람. 그래서 더욱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사람. 절로 눈이 가고 마음이 아파 나라면 이 자를 품을 수 있겠다고 생각한 모든 이들을 고통으로 밀어넣게 되는, 종내에는 자기 자신까지 빠져나갈 수 없는 지옥에 홀로 서있게 되는 사람, 부러 미친척 큰소리를 치고 너라도 가서 살라고 등떠밀어놓고 정작 자기는 외롭고 서러워 어쩔 줄을 모르는, 부서지고 상처입어 더는 회복될 길 없이 엉망이 된 채로 살아가는 사람. 해리 홀레.
순전히 독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더 굴려라 더 더!!!를 외칠 수도 있겠고, 요즘 말로 "맛있다!"고 외칠 "피폐물"일 수도 있겠다. 그치만, 그렇지만 해도해도 너무하지 않나 싶은 그의 인생. 방황의 끝, 삶의 유일한 안식처, 진짜 가족이라고 마음 깊은 곳에서 감히 안주와 평화를 꿈꾼 죄의 대가는 지독한 고독, 거의 모든 것의 상실이었다. 간신히 숨만 붙어 있을 정도만 남겨놓고 모든 것을 빼앗는 세상.
라켈, 사랑하는 아내. 이번 책만 해도 600쪽이 넘는 장대한 분량 내내 라켈은 그의 구원이 아닌 적이 없었다. 너무 절절해서 눈물이 절로 날 만큼 해리의 시간에서 라켈은 늘 눈부시고, 따스하고, 편안했다. 마치 탐내서는 안 될 것을 간신히 맛만 보여주는 것처럼, 감히 네가 평안을 꿈꾸었으니 실컷 취해있다 현실로 돌아가라는 조롱처럼. 그래서 그 상실이 더욱 잔인한 게 아닐까.
라켈이 죽었다. 라켈이, 내 아내가 죽었단다. 그것도 누군가의 습격으로. 아니, 쫓겨났으니 이젠 아내도 아닌가. 잊은 적도 떠나보낸 적도 없건만.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제일 먼저 잡아다 없애버리고 싶은데 나는 안된단다. 왜? "전"남편이니까, 가족"이었"으니까. 내가 생각해도 내가 제일 수상하니까. 툭툭 끊겨버린 기억 속에서 혼란스러운 직감과 실낱같은 단서만 가지고 찾아내야 한다. 깨어나지 않기 위해, 상실이 진실이 되지 않기 위해. 저 밑바닥에서 일렁이는 불안과 두려움의 정체를 알지 못한 채로, 어쩌면 알지 않으려 애쓰며.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는 책임과 상실일까. 어떤 기분일까. 과거의 내가 시간을 넘어 내 목을 조르는 건, 과거의 나와 그 행동과 시간들이 내 머리에 총구를 겨누는 것은. 삶은 축복이다. 동시에 살아있다는 것은 지독한 형벌이자 책임이기도 하다. 가장 잊을 수 없는 방식으로 심장에 새겨넣는 것이 상실인 것처럼.
읽는 내내 이거 보통 준비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굴리려고 작정을 했어 작정을... 국제문제부터 작중 등장하는 기관과 직위, 여러 후유증들까지 안팎으로 고루 공들인 흔적이 잘 드러난다. 그 결과, 작품 전체가 치밀한 복선과 은유로 가득차있다. 해서 나는 이 글을 읽는 누군가, 혹은 훗날의 내가 아무 단서도 없는 채로 이 책을 읽기 바란다. 숨 한 번 크게 쉴 수 없는 압박과 절망과 공포와 고독 속에 빠져들어 이를 악물고 비틀거리길 바란다. 모든 것을 잃고 또다시 남겨진 남자, 해리 홀레처럼.
어디까지 알려도 좋을까. 과연 소개라고 할 만큼 충분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이 두꺼운 책에서 충격이 아닌 부분이 없는데. 딱 한 마디, 이것만을 말할 수 있겠다. 아무도 믿지 마라. 그 누구도, 자기 자신조차도.
덧붙이는 팁.
1. 해리 홀레 시리즈를 전부 읽은 후에 이 책을 펼친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적어도 『팬텀』, 『박쥐』, 『목마름』 이 세 권은 꼭 먼저 읽으시길 권합니다.
2. 마음을 단단히 먹고, 가급적 한 번에 읽으시길 권합니다. 그게 어렵다면 한 챕터는 끊기지 않게 읽으시길.
3. 추천 BGM은 Raphael Lake의 "Vertigo"입니다. 어두운 방에서 스탠드 하나 켜놓고 들으면서 읽으세요. 분위기 짱.
4. 읽는 동안 제일 많이 한 말은 "오 젠장" 이었습니다. 나만 당할 수 없지. 꼭 읽으세요. 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