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담 보바리 - 지방 풍속 열린책들 세계문학 299
귀스타브 플로베르 지음, 김용은 옮김 / 열린책들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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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도서제공: 열린책들

이 작품이 이토록 막막하고 두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단연코, 이들의 절망에 대단한 비극적 지점이랄 것이 없다는 점일 것이다. 숨막히게, 끝을 알 수 없이, 어쩌면 영영 변하지 않은 채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은 평범하고 초라해빠진 매일들이 늘어서있다. 별처럼 빛나고 우아하게 흩날리는 이상이 손에 잡힐 듯 선명한데 도무지 닿을 수 없다.

아등바등할 것도 없고, 달라질 것도 없다. 누군가 차라리 연극적으로라도 나쁘면 나을 일이다. 밍밍하고 쿰쿰한, 낡아빠지고 칙칙한, 눅눅하게 사방을 감싼 일상. 어떤 순간에는 제법 즐거웠다. 또 어떤 날에는 나름 애도 썼고, 빛나는 기억도 있었다. 그 모든 것이 일상의 냄새에 묻혀 빛바랜 과거, 돌이킬 수 없는 순간의 실수가 아니었을까 하는 절망이 되었을 뿐.

p.43 그렇게 그는 순종하게 되었다. 그러나 욕망의 대담함이 자신이 선택한 처신의 비굴함에 저항했고, 그녀를 만나는 것을 금지당한 대신 그녀를 사랑할 권리를 얻은 것이라는 일종의 순진하기 짝이 없는 위선을 당당하게 받아들였다.

p.129 이런 비참함이 계속되려는 것인가? 이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인가? 행복하게 살고 있는 다른 어느 여자들보다 못한 것이 없었다! (…) 그녀는 하느님의 불공평함을 원망하며, 벽에 머리를 기대고 울었다. 떠들썩한 생활, 가면무도회의 밤들, 자신이 아직 알지 못하는 그러나 그것이 틀림없이 가져다줄 방자한 쾌락과 온갖 격정을 선망했다.


기실 '허영 넘치는 여성의 파멸'과 그 곁의 성실한 남성(으레 수수한 남편이기 마련인!)의 슬픔이라는 주제는 딱히 낯설 것이 없다. 그럼에도, 물론 '보바리즘'이라는 진부한 해괴를 탄생시키긴 했지만, 이 작품이 연민과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개인으로서의 정체성, 욕망과 현실이 충돌하고 괴리되는 데서 자라나는 절망감을 지독히도 사실적으로 그려냈기 때문이리라. 누구라도 '이것은 절대로 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단언할 수 없을 만큼.

엠마를 보라. 그의 '자기파괴'가 이토록 서럽고 막막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도덕적으로는 얼마든지, 쉽게 단죄할 수 있겠으나 내도록 그 심경을 들여다보고 그려본 독자로 하여금 그렇게 하기를 주저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 아닌가. 그가 선망한 화려한 생활과 격정 넘치는 사랑은, 어쩌면, 온갖 예술과 근대의 환상이 모두의 것, 자연스럽고 당연한 권리이자 인생의 꽃인 양 그려온 것이 아니던가. 그를 동경하고 갖지 못해 좌절하는 인간에게, 그 마음이, 대체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인가.

p.71 결혼 전에는, 그녀는 사랑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 사랑에 응당 따라야 할 행복이 오지 않으니, 잘못 생각한 것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엠마는, 책에서는 그렇게도 아름답게 보였던, 희열, 정열, 도취 같은 말들이 실제 삶에서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싶었다.

p.233 그녀는 남편에 대한 혐오를 연인을 향한 갈망으로, 활활 타오르는 증오를 새롭게 뜨거워지는 애정으로 착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폭풍은 휘몰아쳤고, 정념은 재가 되도록 타버렸기에, 그리고 아무런 구원도 오지 않고, 해는 조금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기에, 온 사방이 캄캄한 밤이었고, 그녀는 온몸 깊은 곳까지 스며드는 무서운 한기 속에서 길을 잃은 채 떨고 있었다.


이 현재-아님에 대한 갈망은 비단 엠마 보바리만의 고통이 아니다. 이 작품을 가득 메우는 것은 권태와 무력, 충동과 분노인 동시에 끊임없이 소용돌이치는 욕망과 구역감이다. 경련이고, 죽음이고, 충돌이다. 독자는 묻게 된다. 이것은 누구의 이야기인지. 그리곤 깨닫는 것이다. 당시 처벌과 검열의 이유를. 당대 '도덕적 판단'에 따라 검열된 문장들이 복원된 완전판의 모습은 그간의 '걸작 고전'에 걸맞게 다듬어 선보여졌던 내용과는 퍽 차이가 있었다.

한층 관능적이었고, 소용돌이치는 갈망의 매혹이 생생하게 그려진, 놀랍도록 섬세하고 정교한 비극, 광기, 좌절. 지독히도 아름답고 허무한 순간마다 독자는 새삼 깨닫게 될 것이다. 단정하고 비극적인 기존의 『보바리 부인』을 엄중히 꾸짖던 이들은 언젠가의 고매한 의식 뿐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풍속과 교양의 꺼풀을 벗겨낸 곳에서 마주하는 통속과 모순을. 그렇게 보바리-즘을 새로이 이해하게 될 것이다.

p.584 달빛처럼 하얀 새틴 로브 위로 물결무늬가 어른거리며 떨렸다. 엠마는 그 아래로 사라져 버렸다. 샤를르에게 그녀는, 몸 밖으로 퍼져 나와, 주위 사물들 사이로, 침묵 속으로, 밤 속으로, 지나가는 바람 속으로, 피어오르는 습기 찬 향내 속으로 힙쓸리며 형체 없이 뒤섞여 스러져 가는 것 같았다.

p.610 「그래요, 이제 당신을 더는 원망하지 않아요!」 심지어 그는 엄청난 말, 단 한 번도 입에 담아 본 적 없는, 한마디를 덧붙이기까지 했다. 「이게 운명 탓이지요!」 이 운명을 이끈 장본인 로돌프는, 그가 이 같은 상황에 놓인 사람치고 어지간히도 너그럽고,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좀 비루하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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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으로 철학하기 - 재미, 예술성, 장르 등 비디오 게임을 둘러싼 수많은 질문들
주자안 지음, 정세경 옮김 / 현암사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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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도서제공: 현암사


돌이켜보면, '게임을 좋아하냐'는 물음에 썩 적절한 응답자였던 적이 없는 듯하다. 게임, 개중에서도 주로 화면으로 송출되는 비디오 게임은 내 세대에게 퍽 다양한 의미값을 갖지 않던가. 방종의 상징과도 같은 '전자 오락'에서 평범한 취미로 인정받기까지 과장 조금 보태 격동의 시기를 거쳤으니 말이다. 오늘날 게임은 아동부터 성인까지, 후기 중장년층에서까지도 낯설지 않은 취미가 되었고, 그만큼 커뮤니티도 전세계적으로 탄탄하게 형성되어 있다.

게임 커뮤니티는 전세계적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유저 피드백이 극도로 활발한 분야이다. 이에 따라, 당연하게도, 현실과 잦은 충돌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데, 그 중 하나가 다양성과 평등에 대한 분야임을 부정할 수 없다. 이에 저자가 제시하는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명백한 허구성에도 불구하고 생생한 몰입을 이끌어낼 수 있는 요소와 관건들을 짚어나가는 독자는 필연히 경제, 체제, 커뮤니티, 인간 존재를 다루는 현실의 최전선에 서게 될 것이다. 다시 돌아와, 커뮤니티 말이다.

p.22 가짜 사물의 나쁜 점은 매우 분명하다. 하지만 우리가 진짜를 선택할 수 있음에도 가짜를 원하는 이유는 뭘까? 그 답은 때로 가짜가 진짜를 경험할 수 있게 하며, 또 때로는 가짜가 진짜보다 더 낫기 때문이다. (...) 데일이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에서 조종한 캐릭터는 당연히 가짜였다. 하지만 그는 게임 속에서 '여성으로 여겨지는' 경험을 했다. 이는 진짜이고 그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다.

p.112 가장 좋은 옵션만 눈에 띄고 다른 옵션에 대한 흥미가 떨어질 경우, 플레이어가 내릴 결정의 다양성에 문제가 생겨 위협적인 수준으로 게임의 재미가 떨어질 수도 있다. 이럴 때 플레이어들은 이 게임의 '밸런스에 문제가 있다'며 불평을 한다.


많은 분야에서 그러하듯 게임 유저 커뮤니티 또한 남성, 특히 백인 유성애-헤테로 남성을 기본 타겟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크며, 이들의 '재미'가 '기본값이 아닌 존재들'의 존재 자체를 위협으로 간주하고 추방하려는 경향은 낯설지 않다. 또한 유저들이 으레 내세우곤 하는 '재미와 휴식의 자유 확보'가 과연 그들과 게임이 놓인 현실, 유저와 제작자가 살아가야 하는 세계와 진정으로 '분리'될 수 있는지에 대해 많은 연구자들이 수차례 지적해온 바 있다.

게임이 종합 예술이자 존중될 수 있는 취미의 영역으로 인정받기 위해 탈정치를 주장해온 움직임이, 역설적으로 가장 개인적이고 탈정치적인 것이야말로 가장 공적 영역과 정치적 주제에 속한다는 사실을 여실히 드러나게 한 셈이다. 혹자는 이에 또다시 반발할지 모른다. 앞서 말한 역설처럼 왜 '사적인 재미'까지도 '눈치를 봐야'하는지 일면 억울함을 표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를 묻지 않고는 게임 산업의 일원으로서의 정체성 또한 논해질 수 없다.

p.161 '시간 낭비를 하면 안 된다' 라는 관념이 사실 자본주의 사회의 실패의 일환이며,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게 무의미하게 헛돌고 있는 사회에 일조하고 있음을 깨달을 때, 우리는 좀 더 객관적으로 자신의 시간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평가할 수 있다. 다만 우리가 비디오 게임도 이런 헛된 공전의 일부가 될 잠재력이 있음을 이해한다면 자신이 무엇을 위해 게임을 하는지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p.356 다만 '동등한 토론 공간을 만드는 일'에 대해 말하자면 현재의 게이머 커뮤니티는 수렁에 빠졌다고 할 수밖에 없다. (…) 차별적이고 성적 대상화를 하는 비디오 게임을 금지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한 공간에서 차별과 혐오 발언에 대해 강제력으로 대응하지 않는다면 그곳이 회사든 학교든 아니면 인터넷 커뮤니티든 동등한 토론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 누구도 의문과 고민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이야말로 게임-체계의 일원이 그저 '보통'의 일부라는 주장의 가장 든든한 뒷받침일지도 모른다. 게임이 숙고와 철학적 비평의 대상이 될 수 있다면, 게임의 내용과 구성에 다양한 의문이 제기하고 그것이 현실의 구조와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따지고 탐색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게임 향유자와 생산 및 운영자, 그에 관계되는 이들의 정체성이 어떻게 정치적 주체로서 목소리를 낼 근거가 되는지에 맞닿는 가능성일 것이다.

요구할 수 있음, 묻고 답할 수 있음. 이 허구가 현실과 완전히 별개로서의 완전무결한 존재일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며 '목소리'를 내는 것이야말로 주체적인 향유자로서의 핵심이므로. '재미만 있으면 그만'이라는 주장은 기실 '재미' 바깥으로 밀어내는 적극적인 선택과 외면의 결과일테니 말이다. 그렇게 게임은 철학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언젠가 게임철학이라는 분야가 나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묻고, 맞서고, 응전하고, 나아가라, 게이머들이여.

p.392 우리는 평소 'PC를 탓하는' 방식으로 작품을 이해하기 쉬우며, 이와 같은 방식으로 작품을 평가하기 십상이다. 그 때문에 어떤 작품에서 아주 작은 PC의 단서만 발견해도 '또 PC네'라고 댓글을 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평가 방식은 당신에게 좋을 것이 없다. (…) 오히려 당신은 작품을 감상할 줄 아는 행복한 사람이나 작품을 제대로 리뷰할 줄 아는 소통 능력이 있는 사람이 아닌, PC 냄새만 맡으면 재채기를 하며 분노를 쏟아 내는 사람이 될 뿐이다.

p.400 만약 스스로 정치로부터 방해를 받고 있지 않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현재 정치 환경의 기득권자라는 뜻일 것이다. (…) 예술 장르의 하나로서 비디오 게임도 다른 예술과 마찬가지로 사회의 복잡성과 다양성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 같은 주류 계층이 비디오 게임 속 다양성 요소에 위화감과 익숙하게 않음을 느낄 때 비디오 게임은 오히려 죽지 않고 살아 있음을 의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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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의 빈자리에 - 괴물, 여성, 망자, 호명되지 못한 존재들에 대해
권혁란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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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도서제공: 한겨레출판

이름은 의미를 담는다. 이름은 인간이 무언가에 대해 떠올릴 수 있는 것 중 가장 의미로 가득한 말이다. 이름은 대상 없이는 붙여지지 않는다. 불러질 대상이 없는 이름은 존재하지 않는다. 현존이든, 부재로 떠나갔든, 무엇으로 빗대든.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곧 상대에게, 그리고 호명하는 이 스스로에게 존재의 존재-함을 확인시키는 일이다. 그의 세계에 '이름'의 존재를 명확히 자리하게 만드는 일이다.

그렇다면 만일, 이름이 그 주인에게서 뜯겨나갔다면, 불릴 사람이 이름을 두고 떠나버렸다면, 갈 곳 잃은 부름만이 여기저기 정처없이 나돌아다닌다면, 존재하되 이름으로 불릴 일이 없다면, 눈 앞에 멀쩡히 있는데도 이름이 없으므로 부를 수도, 지칭할 수도 없다면. 이름의 빈자리에 무엇이 놓이는가. 이름과 존재의 틈 사이에는 무엇이 깃드는가. 또 이렇게 물을 수 있겠다. 이름이되 이름이 아닌 것, 그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지 못하는, 오롯한 자기이기를 부정당하는 사람들에게 이름이란 무엇인가.

p.40 〈프랑켄슈타인〉 그는 창조주라면 주어야 할 애정, 관심과 사랑부터 먹을 것과 보호에 이르기까지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해줘야 하는 첫 번째 일, 가장 기본이 되는 이름조차 지어주지 않았다. 크리처가 괴물이 될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잖은가.

p.54 〈시녀이야기〉 세상 만물에 이름을 짓고 이름을 붙여주고 부르고 불러주는 행위란 서로가 서로에게 해줄 수 있는 최상의 의미 부여이자 애정 표현이다. 이름을 지어 호명하고 지칭하면서 관계가 결속된다. 마음의 밀도를 보여줄 수 있는 고도의 정성이 깃든 의례이기도 하다.


그들이 진짜 이름을 갖지 못했다고 생각할 때, 그 자신의 마음에 있는 이름이 있어야 할 자리에, 그 빈 자리에는 무엇이 고이고, 흐르며, 스쳐지나갈까. 저자는 영화와 소설, 드라마를 오가며 창작물 속 이름 없는 존재의 형상을 불러낸다. 그 빈 자리, 이름을 뺏겼고 이름의 기회를 박탈당했기에 부재로 취급되는 존재들과 이름에서 벗어나고서야 비로소 자유로워진 이들에게서 내가 비춰본 것은 이름 대신 '무언가'로 붙박여버린 이들의 모습이었다. 그 이름은 그들의 것이 아니다.

다시금 이름의 의미를 고민한다. 불리지 못할 이름을, 답할 이 없는 이름을 떠올리며 곱씹는 그 의미는 필경 한 존재를 세상에 자리하게 하는 힘이자 존재하도록 마련된 자리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제대로 불러주지 않는 이름, 이름으로 불릴 수 없는 이… 그것들은 모두 한 존재를 그의 세계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밀어내는 것과 같지 않은가. 이 무슨 처참이란 말인가.

p.168 〈그 여자는 화가 난다〉 그녀가 어렵사리 친부모를 이해할 수는 있겠으나 '춘복'이나 '마야 리'가 엄마를 아빠를 언니를 마침내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그리운 가족으로 받아들이기는 힘들 거라 생각한다. (…) 책장을 덮으며 그녀에게 들릴 리 없는 한마디를 포옹처럼 보냈다. 춘복이를 버려요. 한국 이름을 기억하지 말아요. 그래야 당신이 살 수 있어요.

p.247 〈허공에의 질주〉 아서도 '나의 인생'을 찾고 싶은 것이다. 자꾸만 변하고 바뀌는 이름과 정체성에서 지쳐버린 것이다. 결국 살려고, 살아가려고 여러 번이나 죽은 남의 이름을 주워 달아 붙이고 살았지만, 원래의 자기 이름을 잊지 않은 것이다. 부르고 싶은 것이다. 대성통곡을 하면서, 주정처럼 난장을 치면서도 진짜 이름으로 불리고 싶은 것이다.


이는 곧 진짜 이름을 위해 분투하는 이들을 떠올리게 한다. 이것은 나의 진짜 이름이 아니라는 감각, 이름이 곧 족쇄가 되는 삶이 있다. 모멸을, 맞지 않음을 이름이라 여기기를 강요받는 이들이 있다. 같은 세상에서 제각기의 투쟁에 존재 자체를 걸고 맞서는 이들을 생각한다. 빼앗길 수 없는 이름, 호명-됨의 의의를 생각한다.

온당한 이름-됨을 고민하는 지금, 몹시도 사랑해 마지않는 구절의 의미를 깨닫는다. 선언이자 정의인 그 말을. 내가 여기, '이 자'로 있노라, 나를 이렇게 부르라. 당신의 세계에 이로써 거하겠다는 말, 무엇으로도 부서질 수 없는 '것'의 상징일지 모른다. 이 무겁고 찬란하며 뜨거운 의미를 누군가는이렇게 말했다. Call me Ismael. 세계는 여기서 시작된다.

p.67 〈비바리움〉 마틴은 마틴을 죽이고 마틴이 되어 똑같은 삶을 살아 영생을 누리지만 젬마와 톰은 미로에 같혀 살았어도 서로의 이름을 불렀고 떠나는 길을 눈물로 배웅했다. 검은 봉투에 이름 없이 담겨졌어도 젬마와 톰이라는 이름은 누군가에게 빼앗기지 않았다.

p.250 〈허공에의 질주〉 "내 이름은 대니, 피아노에 목숨 건 녀석이지." (...) 처음으로 제대로, 잘 버려진 것이다. 자신의 진짜 이름과 그 이름을 불러줄 사랑하는 사람과 진짜 피아노와 함께. 대니라는 이름으로 살아갈 인생과 함께.


#권혁란 #이름의빈자리에 #한겨레출판 #하니포터 #하니포터12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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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번역가의 이중생활
알라 알카이시 지음, 서제인 옮김 / 글항아리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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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주제에 대해 늦지 않은 책이란 없는 거겠지요. 무겁게 읽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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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은 왜 실패하는가 - 대한민국 정책 생태계의 민낯과 가능성
이창곤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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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도서제공: 한겨레출판

어김없이 돌아온 선거철, 곳곳에 익숙한 수사와 깊숙이 숙이는 미소들이 지겹게도 보인다. 이 구태의 정점이자 꽃이라 할만한 것은 이번에도 벽보와 현수막에 큼지막한 글씨로 박힌 각종 선언과 치적행사일 것이다. 그들은 말한다. 시민의 발이 되겠습니다. 시민을 위해 일하겠습니다. 공약 이행이 어떻고, 저떻고… 이에 시민들은 말한다. 뻥 치시네!

진작 물었어야 했다. 숱하게 물어온 말이기도 하다. 한국 사회에서 정치는 왜 정치인들의 것이 되었는가? 사람이 그렇게나 많은데 어째서 만년 탁상공론에 허울대잔치가 되는가? 선거는 정말 주권행사의 장이 되고 있는가? 청장님, 시장님, 의원님, 각종 '님'들에게 우리는 무엇을 의탁하거나 넘겨주는가? 철마다 내세우는 각종 정책은 시민의 삶과 어떻게 유리되고, 그 결과 정책은 어떻게, 언제, 왜 실패하는가?

p.54 정책 의제는 단순히 '선택된 사회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어떤 주체, 곧 결정자가 우월적 힘을 바탕으로 문제를 정의하고 구성하는 과정의 산물"이다. (…) 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주체들이 특정 사안을 공식 의제로 설정하고 해결 과제로 선언할 때, 사회 문제는 비로소 정책 의제로서의 생명력을 얻는다. 반대로 말하면, 아무리 뜨거운 여론과 사회적 관심이 집중되어도 정책 주체가 이를 채택하지 않는다면, 그 문제는 영원히 '해결되지 않는 현상'으로 남을 뿐이다.

p.79 오늘날 국민은 정책의 결과만을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무엇이, 누구에 의해, 어떻게 결정되는지 알고 싶어 하며, 그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자 한다. 일방적으로 통보받는 정책의 시대는 저물었다. 국민과 함께 설계하고 검증하는 정책만이 살아남는 시대, '열린 정책 생태계'는 이제 선택이 아닌 생존의 전략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헌법은 이렇게 시작한다. 가장 중요하고 기본되는 자리에 국민이 주권자이자 권력의 원천임을 명시하고 있으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사실상 양당제로 이분된 국가, 실제 삶과의 괴리가 커져만 가는 각종 정책들, 허울뿐인 성과발표와 바닥을 치는 정치 신뢰도까지. 저자가 말하듯 정책은 선택된 아젠다인 동시에 결정권자가 문제를 정의하고 구성하는 과정의 산물이다. 정책의 대상은 사회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인 동시에 '결정권자'의 주의와 실천 의지가 개입된 결과라는 뜻이다.

위기상황마다 발등에 불 떨어진듯 잠시 모였다 이내 심드렁한 냉소주의자로 흩어지는 상황이 반복되는 데에는 정당, 정치구조, 의사결정체와 시민 개개인에 이르기까지 사회 전 분야에 걸친 뿌리깊은 문제가 있다. 이를 해결하지 않고는 우리는 민주주의를 되찾았다 말할 수 없다. 설령 누군가 진짜 국민, 진짜 성원이라는 교묘한 호도로 민주주의라는 구호를 전용한들 반박조차 쉽지 않을 뿐이다.

p.155 정당이 정책에 단단히 뿌리내리지 못하는 근본적인 배경에 대해 장훈 중앙대 교수는 세 가지 구조적 원인을 짚는다. (…) 정당이 시민의 일상적인 요구와 삶의 현장에서 유리된 채 엘리트 중심의 정치 게임에 함몰되면서, 정책을 매개로 한 시민과의 접점을 잃어버렸다. 마지막으로 '대통령과 관료 중심의 폐쇄적 정책 결정 구조'가 정당의 입지를 좁혔다. 국가의 주요 의사결정이 청와대와 경제 관료의 밀실에서 이루어지는 구조 속에서, 정당은 정책의 주도자가 아닌 사후 추인 기구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p.201 과연 우리 사회의 싱크탱크는 제 역할을 다하고 있는가? 권력의 입맛에 맞춘 '답정너' 식 보고서를 생산하는 도구로 전락하지는 않았는가? 싱크탱크는 모름지기 당대의 모순을 날카롭게 해부하고, 이념의 벽을 넘어 대안과 해법을 치열하게 논쟁하는 '사상의 용광로'이자 '정책의 산실'이어야 한다.


긴 겨울을 지난 이후, '권력의 추가 기운' 것이 확실해지자 거대양당과 선출직 출마자들 모두가 저마다 '빛의 혁명'을 찬사하고 포섭하려 안간힘이다. 정치권력이 인기몰이로 결정된 지 오래라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노릇이다. 저자가 반복해 말하듯 오늘날 정책이 현실성도, 정의도 잃은 채 이권놀음이 된 것은 결국 제도권의 정치와 정치의 언어, 그리고 그 필요성과 실질적 권력이 시민과 유리되었기 때문이다.

이 말은 곧 정책결정권으로 나타나는 정치적 권력을 독점코자 하는 자들이 시민에게서 거세하고 싶어하는 것 또한 시민의 정치참여와 정책관심도라는 뜻이기도 하다. 선거철이다. 우리는 지지를 호소하는 이들에게 무엇을 요구할 것인가? 진정으로 정치주체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이제야말로 정치를 주권자의 것으로 되돌릴 수 있을 것인가? 그 지난한 과정은 여전히 시급한 일로 우리 앞에 남아있다. 선거가 시작되었다. 정치는 끝나지 않는다. 서둘러야 할 때다.

p.24 정책 오작동의 핵심은 시민과의 '단절'에 있다. 투표를 마친 시민은 정작 정책이 결정되는 과정에서 소외되고, 그 빈자리를 특정 이익 집단의 논리나 관성적인 행정이 채우면서 정책은 생명력을 잃는다. 이러한 제도적 결함과 불통의 악순환을 끊어내기 위해서는 투표함 너머의 민주주의를 고민해야 한다. 시민의 일상이 정책에 끊임없이 반영될 수 있는 열린 공론장을 마련하고, 단순한 다수결을 넘어 깊은 토론과 합의를 이끌어내는 숙의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 일이 절실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p.357 시민이 스스로 학습하고 의견을 나누며 공동체의 미래를 직접 설계하는 사회, 그것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넥스트 민주주의' 의 모습이다. 누군가 나를 대신해 결정해주는 시혜적 정치는 이제 끝났다. 이제 정치는 시민이 이끌고, 권력은 그 길을 닦는 조력자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정치는 비로소 수사가 아닌 진정한 의미에서의 '국민의 것'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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