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욕스러운 돌봄 - 잘 키우려 할수록 나빠지는 불행에 대하여
신성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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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발붙이고 사는 사회는 살만한 곳인가? 이 시대에는 희망이 있는가? 누구에게 물어도 썩 긍정적인 답이 돌아오지 않을 테다. 언젠가 지인에게 들은 적이 있다. 집 근처 학교에 아이들의 맛있는 급식을 원한다는 의미불명의 현수막이 걸렸기에 찾아보니 급식노동자 근무처우 개선 투쟁에 항의하는 내용이었다고.

참담했다. 이런 세상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될 수 있다며 사탕발림을 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나. 아이는 자라 어른이 된다. 어른들의 목소리로 표상되는 사회가 이 꼴인 것은, 지금 자라나는 세대를 어떻게 망치고 있는지에 대한 정확한 설명에 다름아니다.

p.27 우리 아이의 자존감을 길러주겠다는 노력은 시민적 자존감을 지켜줄 수 없는 사회 없이는 무효하다. 아무리 자식이어도 그는 내가 아닌지라 그가 어떤 선택을 하고 무엇을 좇을지 부모는 알지 못한다. 자식의 미래를 통제하거나 예측할 수 없는 부모, 결국 모든 부모가 지금 해야 할 일 중 하나는 바로 차별 없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p.40 사랑이 경제로 환원되면서 발생한 돌봄의 양극화는 가장 가까운 사람을 원망하게 만들고, 삶을 스스로 평가절하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더욱 잔인하다. 사실상 반돌봄이다. (...) 우리의 탐욕은 안이 아닌 밖을 향해야 한다.


내 아이가 대단한 부도 명예도 아닌 그저 안정적인 삶과 쪼들리지는 않는 생계를 누리기를, 상처받고 불편하지 않기를 바라는 '소박한' 욕망은 우리만 살아남는 좁은 세계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사랑이 탐욕이 되면 그저 무언가를 향한 갈망에 그치지 않는다. 세계를 더 좁고 작게 분열시킨다. 사회를 황폐화한다.

황폐화된 사회에서 현재는 미래를 위해서만 존재한다. 사람 위에 사람 있고 직업에는 귀천이 있는, 어쩔 수 없는 세상 순리가 원칙이 되고 정의가 되는 사회에서 시간과 주권은 착취와 기만의 협주 속에 불균등한 재화로 전락한다. 공동의 자원은 고갈되어 사유재산의 제로섬 쟁투만이 대두된다. 결국 무한경쟁의 잔인함에 던져진 개인만이 남는다.

p.47 아름답다고 느끼지만 아름답다고 소리 내 말하지 못하는 환경은 사막이다.아는 단어를 죄다 글로만 배운 사람이라면 그 또한 사막을 지나는 이다. 더구나 이 고행은 가난과 함께 대물림되기 마련이다. 이 불모의 토지에서는 씨를 뿌려도 초목이 자라지 않고, 희망을 품어봤자 신기루에 그치고 만다. 같은 세계를 사는 시민이자 어른으로서 우리에게는 사막화를 막을 책임이 있다.

p.91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인 우리가 개입할 수 있는 정치란 오직 선거뿐이며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 결과밖에 없다. 그래서 선거 때마다 정당과 정치인들은 우리의 요구를 받아안아 정책으로 실행하고 법으로 만들겠다고 공언한다. 그 앞에서만 우리는 공동의 선한 의도를 가진 성숙하고 단합된 국민이 된다. 전 세계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는 포풀리즘은 바로 이렇게 시작됐다.


비단 유형의 자원뿐만 아니라 여유, 배려, 관용 등의 필수 가치조차 파이 싸움의 대상이 되어버리고, 이 쟁투의 원인이자 목적일 사랑까지도 탐욕 앞에 무력해진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짓밟고 올라설 수밖에 없다. 실패는 용납되지 않으며, 국가는 성원의 존엄을 우선순위에 두지 않는다.

공존, 함께 살아가기, 동료 성원 따위는 먼 꿈이다. 우리, 더 진짜인 우리와 적뿐이다. 안으로, 더 좁고 작은 우리에게로만 향하는 탐욕이 모든 정의에 선행하는 사회는,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만은 잘 사는' 사회는 역설적으로 누구도 살 수 없는 곳이다.

저자는 성장해가는 아이와 변화된 사회적 요구에 분투하며 깨달은 바를 바깥에서 안으로, 다시 안과 바깥의 바깥으로 나아가는 사유로 펼쳐보인다. 육아와 교육, 나와 너와 수많은 타자들을 오가는 네 챕터의 글은 나와 아이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 이대로여서는 안된다는 절박한 요청에 가깝다. 그는 "돌봄의 어려움은 나 혼자 애쓴다고 덜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p.68 이종건은 《연대의 밥상》에서 연대는 "서로의 삶에 참견을 하는 일"이라고 했다. "당신의 고통이 나와 맞닿아 있기에" 도저히 방관할 수 없어 나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억울하면 의대 오라는 태도로는 연대를 이해하지 못한다. 또 연대는 "결국 자기 문제가 되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홀로 태어나 살 수 없는 이상, 우리에게는 인간다운 인간일 책임이 있다. 나와 타자가 서로의 곁이 아닐 수 없기 때문에 더더욱, 타자의 생애 전체에 책임 있는 존재일 책무를 진다. 혼자서는 결코 살아남을 수 없는 우리, 연약한 종으로서의 인간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오직 공동체를 이루는 것뿐이다. 더 취약하고, 느리게 따라오고, 이질적인 존재와 함께하는 것.

수없이 직면하는 실패와 다름을 개인의 희생으로 무마하지 않는 것, 사회 전체가 상처를 기억하고 절망을 반복하지 않으려 애쓰는 것. 사회 전체의 하한선을 높이고 안전망을 강화하는 것. 결국, 지긋지긋하게도, 이 완전수동식 사회는 사람으로 이루어진다고 반복해야만 하겠다. 그것도, 타자 곁에 서는 사람, 안이 아니라 바깥으로 향하는 탐욕에 힘입어서만, 비로소.

p.111 앞서 우리가 배웠어야 할 것은 불신이 아니다. 나와 아무 상관없는 저 먼 타자의 죽음이 실은 나와도 깊게 관련되어 있다는 공동체적 감각이다. 모든 공동체는 그 안에서 "죽어가고 태어나는 개인들의 생각들과 업적을 흡수하면서 유지"된다. 공동체가 유기체인 이유다. (...) 그 어느 때보다 타인의 마음과 죽음을 더 많이, 더 깊게 생각하는 것. 그것이 바로 재난을 대하는 자세다.

p.220 결국 "인간이 된다는 것"은 "책임을 진다는 것"이고 "자기와는 관계가 없어 보이는 비참함과 직면했을 때 부끄러움을 느끼는 일" 이다. (...) 시간이 걸리더라도 우리가 아이들을 위해 다 같이 쌓아 올려야 할 신뢰와 권위는 바로 그런 것이다. 이 세계는 그렇게 인간에 의해 완성되어간다. 미추를 결정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

*도서제공: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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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홍콩배우 양조위 - 말보다 깊은 눈빛, 양조위의 삶·사랑·작품
주성철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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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어째 평생을 가도 취향이라고 할만한 내용이 하나같이 애매한 방향으로 희한하게 생겨먹은 탓에 영화도, 배우도 메이저한 선에서 스몰토크라고 꺼내기 애매한 사람... 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어떤, 뭐랄까, 세월의 향수 같은 이름들이 있기 마련이다.

어렴풋하게 떠오르는, 마음 한켠에 차오르는 슬픔, 그래, 차라리 애수라고 해도 좋을 그런 이름들. 알음알음 돌려 보던 비디오 속 영화는 불룩한 화면에 스치는 얼룩지고 흐릿한 조명들, 음울과 권태로 꽉 눌린 청춘과 불온하고 위태한 장면들로 기억된다. 클리셰임을 부정할 수 없는 판에 박힌 줄거리와 끈덕지게 따라붙던 뒷맛들과 함께.

p.10 그 감정을 자신의 절대적인 눈빛 속에 가둔다. 그로 인해 얻게 되는 가장 큰 미덕은, 연기에서 과잉의 그림자를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자신이 맡은 작품 속 인물과 관객이 사랑에 빠지게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은 큰 소리로 불러서 돌아보게 하는 게 아니라, 상대가 스스로 먼저 다가오게 하는 일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처럼, 감정을 강요하지 않고 느긋하게 지켜보고 기다린다.

p.139 "넌 꿈이 뭐야?"라는 질문에 그는 "24시간 해가 지지 않는 아이슬란드에 가고 싶다. 춥더라도 적어도 빛은 볼 수 있으니까"라고 답한다. 이처럼 〈첩혈속집〉의 양조위는 1997년 반환을 앞둔 불안한 미래 앞에서, 희망 없이 떠도는 홍콩 그 자체를 대변하고 있었다.


그 편린들 사이에 낯익은 얼굴이 있다. 어떻게 발음하는지도 몰라. 그저 양조위였을 뿐. 곧은 눈썹 아래 무구하고 순한 눈매가 꼭 어린 강아지같다고 생각했다. 나이를 가늠하기 어렵다고, 누구도 상처입힐 수 없는 눈동자라고 생각했다. 배역을 떠나 사람이 그럴 거라고. 어리고, 순한, 둥그런 반복. 홍안의 양조위를, 사람들은 대체로 그렇게 기억할 것이다.

뭐랄까, 그에게는 꼭, 더럽혀질 수 없는 무언가가 있는 듯했다. 그런 얼굴에 이유 없는 악함을 부여한다는 건 어쩐지 모욕처럼 느껴질 만큼. 어느 세계에서든 그 얼굴을 믿어버리지 않을 재간이 없을 것처럼. 수줍고 깊고 외로운,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없는 남자... 라는 생각에 몇 번을 속아넘어갔던가. 젠장. 가만 되짚어보면 그 손은 결코 희고 보드라운 적이 없었을텐데!

p.204 "유덕화는 배역과 끝없이 경쟁하고, 양조위는 배역과 쉽게 사랑에 빠지고, 장국영은 배역을 유혹한다." 경쟁하는 유덕화에게는 불가능한 장면이고, 유혹하는 장국영에게는 비누와 수건이 먼저 말을 걸어올 것이기에 역시 불가능하다. 오직 양조위만이 관객을 야윈 비누의 자리에 두는 마법을 발휘하며 우리를 편안하게 해준다. 양조위에게는 고독마저 자랑이 된다.

p.226 비교해볼수록 장국영과 유덕화처럼 세상 투명한 배우가 또 어디 있나 싶다. 그런데 유독 양조위만은 다르게 읽힌다. 현실과 픽션을 넘나들며, 단순히 '사려 깊고 착해 보인다'는 표현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 배우는 차고 넘치기 때문이다. 본질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왜 매번 알면서도 양조위라는 인간에게 속고 마는 것일까.


밉지 않은 배신감은 접어두기로 하고, 그의 이름과 거의 언제나 붙어다니던 감독들의 이름을 꼽아본다. 예를 들면, 이쯤 되면 거의 세트 수준이라고 봐도 좋을 왕가위랄지. 어렵잖게 그릴 수 있는 양조위의 필모그래피는 곧 그가 해석한 세계를 그려낸 아들이 바라본 사회와도 촘촘히 엮여 있다. 그것이 곧 역사가 아닌가.

저자는 신통기... 홍통기? 를 도열하는 대신 생애부터 작품세계까지, 배우이기 전에 인간, 양조위라는 사람을 통해 말한다. 배우의 존재의의와 그 무게를. 비련과 허무로 뭉뚱그릴 수 없는 그때, 그 사람, 그 곳이 대체 무엇이었는지를.

p.284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을 뜻하는 '화양연화'라는 제목은 과거 형처럼 들리지만, 공식 영어 제목은 앞서 말한 것처럼 '화양연화'를 고스란히 영어로 옮긴 'The Most Beautiful Day in Life'가 아니라, 지극히 현재적 느낌의 〈In the Mood for Love〉다.

p.285 말하자면 왕가위는 그 마지막 장면을 통해, 이미 1997년 이후일지도 모를 미래의 시간을 보여준 것이다. 주 선생의 평행우주라고 하면 지나친 표현일까. 그처럼 양조위는 '왕가위의 시간'에서 모든 시간대를 산 유일한 배우라는 것을 넘어, 왕가위도 경험하지 못한 미래에서 살아가는 배우가 되었다.


배우로서 '시대를 풍미했다'는 말은 그런 의미일 것이다. 2027년을 코앞에 둔 지금, 언젠가 돌이킬 수 없는 날 배우 양조위와 그의 세계는 그리움일까, 절망일까. 아니면, 연약한 향수에 그치게 될까. 어쩌면 그의 세대가 제목 그대로 마지막 홍콩배우일 것이다. 이미 그렇게 되었을지도.

사랑이 아닌지라, 만 년을 채 채우지 못하고 내년부로 끝맺어질 홍콩의 그 때를 기억하는지, 더는 묻지 못하게 될 날도 머지 않았겠지. 그저 한가지 확실한 건, 이 수줍고 과묵한 남자에의 애정에 불이 붙어버렸다는 것이다. 스크린 안팎, 배우 양조위와 인간 양조위 모두 응원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 그러니 애수와 찬탄을 담아 오래도록 말해주기를. 아, 양조위, 그야말로 진짜배기였지.

p.387 다큐멘터리가 보여준 '인간 양조위'는 '배우 양조위'와 다르지 않다. 이를 누구보다 예리하게 포착한 이가 왕가위 감독이다. 말하려다 멈추고, 다가가려다 돌아서며, 사랑한다 외치는 대신 끝내 침묵하는 영화 속 양조위는 실제 그의 내면을 스크린에 투영한 결과다.

p.398 〈동사서독〉에서 일거리를 찾아 매일 자신을 찾아 오는 맹무살수를 두고, 사막의 인력사무소장 구양봉이 했던 흥미로운 묘사가 떠오른다. "한물간 검객이지만 생활은 규칙적이다. 술 한 잔에 밥 두 그릇. 해질녘에 떠난다." 그처럼 맹무살수, 아니 일거리를 구하지 못했어도 성실하게 다음날을 준비하는 양조위의 규칙적인 일상과 함께라면, 홍콩영화는 결코 저물지 않을 것이다.


*도서제공: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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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 시대의 귀환 - 팍스 아메리카나의 몰락과 무한 각축의 시작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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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 손 잡고 벽을 넘어서... 노래를 부르며 하나가 되는 지구촌, 자유와 진보의 상징인 '서방'과 단연 빛나는 선봉인 미국의 시대는 저물었다. 나날이 쇠락하고 있다. 실각하는 권력과 그 추종자들은 눈에 불을 켜고 찾는다. 누가 이 권좌를 훔쳐갔지? 누가 감히 앞지르려 하지?

그러나 모두가 혈안이 되어 있을 때야말로 이렇게 물을 때다. 누가 그 종말을 앞당기고 있는가? 적들에 의해, 그들을 물리치고 '정상'을 회복하기 위해, 야만으로부터 문명을 지켜내기 위해. 혹은, 야만이야말로 우리의 본성이니 마다할 이유가 없으므로. 전세계적으로 목도되는 상식의 붕괴, 폭력과 적대의 일상화.

p.5 자본 축적 과정을 중심으로 작동하는 자본주의 세계 체제에서는 전 지구적 축적 과정을 총체적으로 조절하고, 가장 뛰어난 생산력과 기술력, 생산 능력 등을 가지고, 세계 금융 시장을 주도하고 세계 시장에서의 '규칙'을 정하면서 동시에 그 담론들을 세계인들의 상식으로 만들 수 있는 국가야말로 '패권 국가'입니다.

p.6 역사적으로 최초의 패권 국가는 17세기의 네덜란드였으며, 그 뒤를 이은 것은 바로 영국, 즉 19세기의 대영제국이었습니다. 1945년 이후에 그 바통을 이어받은 것은 바로 지금 쇠락해가고 있는 패권 국가 미국입니다.


전세계가 휘말린 전쟁, '서구 문명'의 발전과 대안 모색의 끊임없는 시도로 쌓아올려진 인간성이라는 허위가 그저 허구였음을, 지성과 문명의 대실패적 현장을 뼈저리게 까발려버린 전쟁 이후, 우리는 얄팍한 평화를 너무도 깊이, 절실하게 믿어버렸는지 모른다. 마치 이것이 정상이었다는 듯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끔찍한 과거의 지평선 너머로 안녕히, 영원히.

그런데, 정말 이 야만으로의 회귀는 전례 없는 파멸의 서막일까? 아니면 신-미국이라는 새로운 과두체제의 창발일까? 설사 누군가의 경악어린 외침이 울려퍼진대도 꿈쩍이나 할까싶다. 이 파시스트들! 이만큼 무력한 외침이 없다. 저자는 말한다. 미국 주도의 서방 일극 체제가 오히려 세계사적으로 특별하고 또 이례적인 순간이었다고.

p.164 파시즘이란 자본주의 국가의 원점, 일종의 출발점입니다. 위기에 빠진 자본주의 국가는 위기 타개책으로 종종 각종 형태의 파시즘을 선택합니다. (...) 한데 혼란스럽고 무질서한 공격적 정책의 남발은, 비록 파시스트적 색채는 분명해도 아마도 히틀러 시대 독일과 같은 '질서 정연한 나라'를 만드는 것으로 이어지지는 못 할 것입니다. 트럼프의 파시스트적 정책들이 궁극적으로 정책 난맥을 가중해 오히려 역으로 미국의 위기를 더 악화시키며 그 패권을 무너뜨릴 가능성도 큽니다.

p.210 민주-공화 양당 사이에 대립의 강도나 진행 방식 등에 대해 차이가 있으나 중국을 전략적인 경쟁자로 보는 데 미국의 주류 정계에서는 거의 이견이 없습니다. (...) 단, 미국의 패권 쇠락이 심화되고 트럼프의 콘크리트 지지층의 요구가 극단적인 만큼, 기존 정책들도 눈에 띄게 극단화됩니다.


미국의 중국 혐오와 '구역'을 가리지 않는 공격적 태도를 남한 정치권이 어떻게 흡수하고 답습하고 있는지를 물을 필요가 있다. 한반도 요참 사태를 전후해 남한 정치사회의 주된 기조는 미국을 우방이자 우상으로 섬기는 태도였다. 기십년 사이에 급부상한 일부 집단의 미국에 대한 태도는 우방을 넘어 우국충정에 가까울 지경이기까지 하니 걱정스럽지 않을 수가.

신패권질서의 주도국 지위를 꿰차려는 미국과 그 하위-우방들의 시도는 과연 '질서'의 공고함, 절대적 격차를 공고히 하는 데에 성공하고 있을까? 반대 또한 마찬가지다. 좌파 운동 진영에서 미제 세력에의 대항 논리는 과연 얼마나 발전했는가? 과거의 영광이라는 허상에 매달려 현재를 등한시하고 있는 '그들'에 방심까지나 할 여유가 있는가?

p.154 이런 극우적 쇼 정치로는 이미 쇠락해 가고 있는 초강대국이 다시 위대하게 될 리가 없습니다. 단, 이런 쇼의 일환으로 한국까지 한미 동맹이라는 틀에 갇혀 한국 경제에 불리하기 짝이 없는 대중국 탈동조화 등의 정책 강압의 피해자가 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랄 뿐입니다. 그런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트럼프주의 시대 미국에 대응할 수 있는 주체적인 외교 전략은 정말 중요합니다.

p.325 문제는, 이런 접근 방법이 여러 제국들이 미 제국이 쇠락하는 틈을 타서 서로 경쟁하고 주변의 판도를 바꾸고 있는 현 상황의 특색, 즉 제국 간의 모순들의 심화와 경쟁의 첨예화, 미국 이외 제국들의 상대적 영향력 강화 등을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 여러 제국들의 대내외 정책과 이데올로기, 야망, 이해관계의 객관적이고 균형 잡힌 파악이야말로 진보적인 대응을 마련할 수 있는 첫 단계입니다.


혁신이든 실리든, 그 명목이 무엇이든 간에 현 세계가 문턱에 선 '야만 시대'는 그저 오랜 역사의 반복일지 모른다. 저자의 말처럼 이 패악 또한 반복이라면 그를 가능케 한 시민사회의 책임 또한 부정할 수 없을 테다. 그것이 민주주의를 지켜내고자 하는 성원 모두의 숙명적 책임이라 할 수도 있겠다.

유난히 길었던 지난 겨울, 민주주의는 완전히 수동이라는 말이 우스개처럼 돌았다. 끊임없이 신경써야 겨우 굴러간다고. 폭력만이 유일한 진리가 되려는 세계에서 그 말을 새삼스레 되새기는 것도 우연은 아닐 테다. 민주주의의 '민'으로 묻는다. 좋든 싫든 요동치는 세계에 놓인 지금, 무엇이 이 연쇄를 끊을 수 있을 것인가. 민주주의가 진정한 민의 것이 되기 위한 나와 당신의 책무란.

p.323 민주주의가 국가 정체성의 핵심인 구미권에서, 신분 하락과 상대적 빈곤화에 분노한 대중은 주류 정치에 대한 신뢰를 접고 트럼프와 같은 극우들에게 권력을 내주었고, 그 순간 민주주의도 무너졌습니다. (...) 구미권의 전반적 쇠락을 초래한 신자유주의는, 구미권의 최고 장점인 민주주의도 형해화시키고 말았습니다.

p.350 복지 국가도 그렇지만, 민주화는 일종의 조건부 사회계약입니다. 민의 자발적인 동원 능력과 투쟁 능력이 유지되는 이상 엘리트들은 싫든 좋든 민의 정치 참여를 보장합니다. 폭동이나 혁명을 통한 민의 표현보다 투표를 통한 민의 표현이 '통치성' 차원에서 훨씬 낫기 때문이죠. 한데 민의 동원 능력과 투쟁 능력이 떨어지는 그 순간, 민주주의라는 사회계약은 자동 해약됩니다.


*도서제공: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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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해 - 세상의 중심이 된 바다의 역사
찰스 킹 지음, 고광열 옮김 / 사계절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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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이 사실상 섬인 국가의 성원, 개중에서도 본토라고 할만한 반도 거주민으로 평생을 살아온 탓에 바다는 언제나 망망대해, 열린 공간이었다. 그렇잖아도 국토라고 해봤자 손바닥만한 당일 생활권이 태반이라 더더욱. 해외가 곧 자국 바깥, 외국-집단의 동의어로 쓰이는 것만 봐도 알만하지 않은가.

땅으로 둘러싸인 바다라는 건 뭘까. 바다 너머에 이 땅과 '이어진 대륙'이 있어 딱 잘라 이것으로 나와 그들의 경계를 그을 수 없다는 건 과연 어떤 의미일까. 흑해를 그 희한한 지리의 대표 사례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p.25 역사와 사회 연구에는 육지 중심의 편견이 깊이 뿌리박혀 있다. 우리는 역사와 사회생활이 땅 위에서만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물 위에서 일어나는 일들, 예컨대 바다를 항해하거나 강을 타고 내려가는 여정은 단지 배우들이 목적지에 도착해서 펼칠 진짜 연기를 위한 무대 장치에 불과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대양과 바다, 강들은 단순히 통로나 경계가 아니라 인간의 상호작용과 교류라는 독특한 이야기들의 핵심 주역으로서 자기만의 역사가 있다.

p.75 다른 변경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폰토스 그리스인들은 그들이 마주친 종족들의 문화에 적응하고 심지어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신들만의 방식을 찾아냈다. (...)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고전기 아테네의 시인과 극작가가 상상했던 '그리스인'과 '야만인' 사이의 명확한 문화적 경계선은 실로 매우 흐릿해졌다.


한때는 거친 바다, 또 언젠가는 간절한 기원을 담아 환대의 바다, 이제는 검은 바다로 불리는 그것은 '동서양'의 중간지대, 야만과 문명 사이의 공백. 언젠가는 대재앙의 현장이었다가, 미개인과 '도시' 바깥의 험지였던 때를 지나, 무역의 중심지이자 갓 움트던 유럽의 개념적 연장이 되었고, 이제는 범세계적 이권다툼의 요소로 여겨진다.

야망과 생업, 죽음과 침탈의 가능성 그 자체였던 검은 바다는 세계의 끝이자 지정학적 요충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의미로 들끓고 있다. 여전히. 땅의 바다, 대륙의 확장. 흑해는 언제나 신과 인간, 문화와 종족의 교차로였다. 언젠가는 미지의 땅에 용을 그렸다지. 'Hic sunt dracones'. 이 바다 너머에는 사람의 얼굴을 한 용이 있다. 침탈과 교잡, 낯선 이름이라는 피가 흐르는 존재.

p.155 복원된 비잔티움은 해협의 제국에 불과했고, 발칸과 카프카즈의 다른 기독교 왕국과 아나톨리아의 투르코만 에미르국에 둘러싸인 비교적 작은 세력이었다. 경제와 대외 무역은 대부분 이탈리아인들 손에 남았다. 보스포루스 해협을 조금만 올라가면 닿는 흑해는 이제 사실상 제국 통제권의 지평선 너머에 있었다.

p.241 흑해는 더 이상 내해, 즉 제국의 일부로 간주될 수 있는 땅으로 사방이 둘러싸인 물길이 아니었다. 이제 변경이 된 것이다. 1600년대 후반까지 북쪽에서 세력을 키워가던 러시아는 이처럼 변화된 상황이 자신에게 유리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고대부터 현재까지를 아우르는 방대한 역사를 톺아보는 작업에 어떤 도덕적 잣대로 첨언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은 일이다. 다만 언젠가 세계의 끝이었던 이곳에서 다채로운 문명이 꽃피고 뒤섞였음을, 수많은 역사의 시발점이자 종착이였음을 되새겨본다.

소련 붕괴 이후 그나마 오락가락하던 짧은 '평화'의 환상마저 숨통이 끊긴 지금, 전장으로 재구성되는 이 바다, 한때 변경이자 경계였던 '이 장소'를 묻는다. 죽음의 바다는 결코 자연만을 의미하지 않았으리라. 이곳은 누구의 바다인가, 혹은, '영토'인가. 공백을 공-존으로 두지 못하는 인간의 자리가 저 깊은 곳에 있겠거니, 희망과 절망의 뒤섞임을 저 아래 가라앉히며.

p.377 바다와 해안의 진정한 소유권에 관한 논쟁이 학술지와 책들의 지면에서 벌어졌다. (...) 이런 논쟁은 실제 정치적 결과로 이어졌다. 역사가의 연구가 특정 영토 합의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됐고, 영토에 대한 역사적 권리 주장은 평시 실지회복 운동의 기반이었으며 종종 또 다른 전쟁의 출발점이었다.

p.435 (역자 후기) 21세기 흑해는 19세기 제국주의 시대와 20세기 냉전 시대의 지정학이 중첩되는 복잡한 공간으로 변모했다. (...)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흑해가 앞으로도 국제 정치의 주요 갈등 지점이자 협력의 가능성이 공존하는 역동적 공간으로 남을 것이라는 점이다.


*도서제공: 사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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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이는 모두 날아오른다
요아힘 마이어호프 지음, 박종대 옮김 / 사계절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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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는 광인, 부랑자, 사회의 온갖 문제적 존재를 한 데 쑤셔넣는 곳이었다가, 또 언젠가는 치료를 빙자해 죽을 때까지 가둬놓는 격리소였다가, 시간이 흘러 이제는 주립 어린이청소년 정신병원. 환자 수 천오백 이상, 한가운데엔 원장 관사. 그곳이 바로 밤이면 환자들의 울음소리에 잠이 들고 아침이면 실랑이와 발작 가운데 씩씩하게 등교하는 주인공의 집이다.

박식한 아버지와 다정한 어머니, 시시때때로 속을 긁어놓는 두 형... 에 지지 않는 환장과 황당의 결정체같은 막내, 요세. 그가 풀어주는, 엉뚱발랄 따위의 깜찍한 수사로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유년의 기억은, 뭐랄까. 얘야 제발. 요세, 막내야, 대체 뭐가 문제니. 진정하고 제발 말로 좀 해라. 안돼 하지마! 뭐든간에 멈춰!!!

p.131 나는 말을 떼기도 전에 그들의 목소리를 알아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아기 때부터 한 번도 울지 않았다고 한다. 이상할 게 없다. 주변에서 밤마다 수천 명의 사람이 그렇게 비명을 질러대는데 나까지 울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새들이 아침의 특정 시간대에 노래하기 시작하듯 저녁 울음소리에도 일정한 논리가 있는 듯했다.

p.482 나는 그들의 무절제함, 끊임없는 소란, 그리고 내게는 너무나 정상으로 받아들여지던 그들의 일상적 광기가 그리웠다. 또한 뭐라고 불러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들의 분명함을 그리워했다. 수많은 환자들이 운명처럼 갇혀 있던 존재의 숨김없는 명료함을. 그리고 무엇보다 밤마다 울려 퍼지던 환자들의 무수한 절규를 그리워했다. 나를 그토록 기분 좋게 잠들게 했던 그 절규와 비명을.


꼬마에서 청년이 되기까지 자잘한 에피소드는 이따금 황당하고, 당황스럽거나 또 사랑스럽다. 어린이의 눈으로 보는 환상적이고 치열했고, 불가해한 갈등과 미처 알지 못했던 어른의 사정들, 짜릿한 비밀 사이사이를 채우는 것은 반짝이는 순간들이다. 사랑이거나, 두려움이거나... 슬픔 같은. 자연히 묻게 된다. 어른이 된다는 건 뭘까.

어쩌면 의심할 바 없이 당연하고 단단했던 불확실성의 집합으로 빨려들어가는 과정일지 모른다. 유년의 영웅이 그저 인간에 불과했음을, 때로는 어리석고 추잡하고 두려워하는, 언젠가 늙고 병들어 죽는 한 명의 사람. 정상과 광기, 어른과 아이, 안과 밖의 다름과 동시에 인간 존재의 근원적 동일성을 납득하게 되는, 아릿한 통증. 그를 무어라 불러야 할까.

p.248 슐라이 요트 클럽에 도착하자 수많은 사람이 우리를 맞았다. 이때부터 아들을 배 밖으로 내동댕이치고 바람 강도 0 상태에서 조난당해 구조된 교수의 이야기가 슐레스비히 회원들 사이에서 회자되었다. 그것도 모두 면허 없이 일어난 일이었다.

p.457 "참, 이상하지. 나는 내가 왜 소위 정상적이라고 하는 사람들보다 소위 정상적이지 않다고 하는 사람들 속에서 항상 더 편안함을 느끼는지 자주 생각했어. (...) 다른 의사들한테 부끄러워. 병든 의사라는 건 왠지 어울리지 않으니까. 이 작은 도시의 모두가 그걸 알아. 누가 병든 의사한테 자기 자식을 맡기겠니?"


종장에 다다라 그가 마주친 장면에 어떤, 아릿한 통증을 감각한다. 크으으으으게. 크게, 말고, 돌아 유리창 너머 소년의 눈동자, 흐려졌다 떠오르기를 반복하는, 단지 그뿐인 순간에 비로소 안도하는 자신을 발견하는 동시에 묻고 싶어진다. 너무 긴 포옹과 통제 불능한 존재들과 바깥의 삶은 무엇이 달랐겠느냐고.

그리고, 어째서, 이렇게나 그리운걸까. 이 정신사납고 사랑스럽고 난감한 일화들로 낱낱이 꿰인 삶을 따라가노라면 존재를 이루는 기억과 세계의 토대란 과연 이런 의미겠거니, 싶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슬픔은 단단하고 작은 조각이 된다.

어떤 순간은 잊혀질지언정 사라지지 않는다. 기이하고 곤란한 존재들의 형태로 마음에 남아 삶이 되고 그또한 누군가의 마음에 남아 이어지고. 그렇게 한때 이해할 수 없는 분노에 발작적으로 휩싸이던 소년은 유년의 일상이었던 불가해와 기나긴 포옹으로 하나가 된다. 찬란과 고통의 혼잡 한가운데서 독자는 그와 함께 조금 더 어른이 된다. 아침처럼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가야겠다.

p.479 내가 기억의 꾸러미를 다시 하나하나 풀어 꺼내놓을 때, 겉으로 확실해 보이는 과거에 대한 믿음을 접고 과거를 혼돈으로 받아들이고 형상화하고 꾸미고 기념할 수 있을 때, 그리고 나의 죽은 이들이 모두 다시 살아나 친숙하면서도 내가 지금껏 인정한 것보다 더 낯설고 자율적인 존재가 될 때 비로소 나는 현재 삶에 대한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때야말로 미래는 그 영원한 약속을 이행하고 불확실해지고, 하나의 선이 하나의 면으로 넓어질 것이다.

*도서제공: 사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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