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욕스러운 돌봄 - 잘 키우려 할수록 나빠지는 불행에 대하여
신성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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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발붙이고 사는 사회는 살만한 곳인가? 이 시대에는 희망이 있는가? 누구에게 물어도 썩 긍정적인 답이 돌아오지 않을 테다. 언젠가 지인에게 들은 적이 있다. 집 근처 학교에 아이들의 맛있는 급식을 원한다는 의미불명의 현수막이 걸렸기에 찾아보니 급식노동자 근무처우 개선 투쟁에 항의하는 내용이었다고.

참담했다. 이런 세상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될 수 있다며 사탕발림을 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나. 아이는 자라 어른이 된다. 어른들의 목소리로 표상되는 사회가 이 꼴인 것은, 지금 자라나는 세대를 어떻게 망치고 있는지에 대한 정확한 설명에 다름아니다.

p.27 우리 아이의 자존감을 길러주겠다는 노력은 시민적 자존감을 지켜줄 수 없는 사회 없이는 무효하다. 아무리 자식이어도 그는 내가 아닌지라 그가 어떤 선택을 하고 무엇을 좇을지 부모는 알지 못한다. 자식의 미래를 통제하거나 예측할 수 없는 부모, 결국 모든 부모가 지금 해야 할 일 중 하나는 바로 차별 없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p.40 사랑이 경제로 환원되면서 발생한 돌봄의 양극화는 가장 가까운 사람을 원망하게 만들고, 삶을 스스로 평가절하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더욱 잔인하다. 사실상 반돌봄이다. (...) 우리의 탐욕은 안이 아닌 밖을 향해야 한다.


내 아이가 대단한 부도 명예도 아닌 그저 안정적인 삶과 쪼들리지는 않는 생계를 누리기를, 상처받고 불편하지 않기를 바라는 '소박한' 욕망은 우리만 살아남는 좁은 세계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사랑이 탐욕이 되면 그저 무언가를 향한 갈망에 그치지 않는다. 세계를 더 좁고 작게 분열시킨다. 사회를 황폐화한다.

황폐화된 사회에서 현재는 미래를 위해서만 존재한다. 사람 위에 사람 있고 직업에는 귀천이 있는, 어쩔 수 없는 세상 순리가 원칙이 되고 정의가 되는 사회에서 시간과 주권은 착취와 기만의 협주 속에 불균등한 재화로 전락한다. 공동의 자원은 고갈되어 사유재산의 제로섬 쟁투만이 대두된다. 결국 무한경쟁의 잔인함에 던져진 개인만이 남는다.

p.47 아름답다고 느끼지만 아름답다고 소리 내 말하지 못하는 환경은 사막이다.아는 단어를 죄다 글로만 배운 사람이라면 그 또한 사막을 지나는 이다. 더구나 이 고행은 가난과 함께 대물림되기 마련이다. 이 불모의 토지에서는 씨를 뿌려도 초목이 자라지 않고, 희망을 품어봤자 신기루에 그치고 만다. 같은 세계를 사는 시민이자 어른으로서 우리에게는 사막화를 막을 책임이 있다.

p.91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인 우리가 개입할 수 있는 정치란 오직 선거뿐이며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 결과밖에 없다. 그래서 선거 때마다 정당과 정치인들은 우리의 요구를 받아안아 정책으로 실행하고 법으로 만들겠다고 공언한다. 그 앞에서만 우리는 공동의 선한 의도를 가진 성숙하고 단합된 국민이 된다. 전 세계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는 포풀리즘은 바로 이렇게 시작됐다.


비단 유형의 자원뿐만 아니라 여유, 배려, 관용 등의 필수 가치조차 파이 싸움의 대상이 되어버리고, 이 쟁투의 원인이자 목적일 사랑까지도 탐욕 앞에 무력해진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짓밟고 올라설 수밖에 없다. 실패는 용납되지 않으며, 국가는 성원의 존엄을 우선순위에 두지 않는다.

공존, 함께 살아가기, 동료 성원 따위는 먼 꿈이다. 우리, 더 진짜인 우리와 적뿐이다. 안으로, 더 좁고 작은 우리에게로만 향하는 탐욕이 모든 정의에 선행하는 사회는,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만은 잘 사는' 사회는 역설적으로 누구도 살 수 없는 곳이다.

저자는 성장해가는 아이와 변화된 사회적 요구에 분투하며 깨달은 바를 바깥에서 안으로, 다시 안과 바깥의 바깥으로 나아가는 사유로 펼쳐보인다. 육아와 교육, 나와 너와 수많은 타자들을 오가는 네 챕터의 글은 나와 아이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 이대로여서는 안된다는 절박한 요청에 가깝다. 그는 "돌봄의 어려움은 나 혼자 애쓴다고 덜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p.68 이종건은 《연대의 밥상》에서 연대는 "서로의 삶에 참견을 하는 일"이라고 했다. "당신의 고통이 나와 맞닿아 있기에" 도저히 방관할 수 없어 나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억울하면 의대 오라는 태도로는 연대를 이해하지 못한다. 또 연대는 "결국 자기 문제가 되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홀로 태어나 살 수 없는 이상, 우리에게는 인간다운 인간일 책임이 있다. 나와 타자가 서로의 곁이 아닐 수 없기 때문에 더더욱, 타자의 생애 전체에 책임 있는 존재일 책무를 진다. 혼자서는 결코 살아남을 수 없는 우리, 연약한 종으로서의 인간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오직 공동체를 이루는 것뿐이다. 더 취약하고, 느리게 따라오고, 이질적인 존재와 함께하는 것.

수없이 직면하는 실패와 다름을 개인의 희생으로 무마하지 않는 것, 사회 전체가 상처를 기억하고 절망을 반복하지 않으려 애쓰는 것. 사회 전체의 하한선을 높이고 안전망을 강화하는 것. 결국, 지긋지긋하게도, 이 완전수동식 사회는 사람으로 이루어진다고 반복해야만 하겠다. 그것도, 타자 곁에 서는 사람, 안이 아니라 바깥으로 향하는 탐욕에 힘입어서만, 비로소.

p.111 앞서 우리가 배웠어야 할 것은 불신이 아니다. 나와 아무 상관없는 저 먼 타자의 죽음이 실은 나와도 깊게 관련되어 있다는 공동체적 감각이다. 모든 공동체는 그 안에서 "죽어가고 태어나는 개인들의 생각들과 업적을 흡수하면서 유지"된다. 공동체가 유기체인 이유다. (...) 그 어느 때보다 타인의 마음과 죽음을 더 많이, 더 깊게 생각하는 것. 그것이 바로 재난을 대하는 자세다.

p.220 결국 "인간이 된다는 것"은 "책임을 진다는 것"이고 "자기와는 관계가 없어 보이는 비참함과 직면했을 때 부끄러움을 느끼는 일" 이다. (...) 시간이 걸리더라도 우리가 아이들을 위해 다 같이 쌓아 올려야 할 신뢰와 권위는 바로 그런 것이다. 이 세계는 그렇게 인간에 의해 완성되어간다. 미추를 결정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

*도서제공: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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