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문자 뱀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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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미문의 살인자. 그가 지나간 자리엔 피와 죽음의 현장 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단서도, 동기도, 하다못해 꼬리를 감추려는 최소한의 노력까지도! 뒤늦은 경찰과 평범한 이들의 몫은 고작 분통을 터트리고 비명을 지르는 것뿐이다. 달리 무엇이 있겠는가? 아무도 모르게 찾아와 탕, 탕. 그리고는, 끝. 동정도 대의도 필요치 않다.

그는 뭐랄까, 그래, 사람이라기보단 뱀이다. 어둠 속에 도사린 뱀, 소리 없이 다가와 아가리를 쩍 벌려 집어삼키는 포식자. 잠시 눈을 돌려보자. 한 여자가 지나간다. 늙고, 뚱뚱하고, 썩 온순하다고 볼 수는 없는, 대단한 재산도 없이 그저 개 하나 끌어안고 그저그런 나날을 반복하는. 조심하라. 눈 깜빡할 사이에 사타구니에 그야말로 주먹만한 구멍을 내줄테니. 깔끔하게 한 발 더. 그것만이 유일한 자비일 뿐.

p.37 마틸드가 작업을 하면, 한 발도 총알이 빗나가는 법이 없고, 아무 문제 없이 깨끗하게 일이 처리된다. 그러나 이날 저녁은 예외였다.

p.151 이 살인자 뱀은 필요성이 있을 때에만 움직일 것이다. 놈은 교활하고도 강력한 파충류이다. (...) 이 대문자 뱀은 희한한 습성을 가지고 있으니, 사타구니에 들끓는 조그만 뱀들에 특별한 혐오를 느끼며, 거기에다 독을 내뿜기 때문이다. 놈은 작은 뱀들을 싫어하는 커다란 뱀이다. 당신의 이마 한가운데 총알을 박는 그런 종류가 아니라, 당신이 남자이든 여자이든 상관없이 당신의 무게 중심에다 총알 두 발을 쏘는 진짜배기인 것이다.


63세, 과부, 예술 및 문학 기사 훈장 서훈, 레지스탕스 활동으로 훈장 서훈…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평범, 아니, 모범에 가까운 그의 안락한 일상에 가장 큰 걸림돌은 비밀스러운 이면도, 고독도 아니다. 의뢰는 처리하면 그만, 대단한 의미조차 필요치 않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깜빡이는 기억력이다. 바늘틈 하나 없는 냉철함에 균열을 내는… 아이구, 참. 나이도!

그 자신조차도 의심없이 뒤바꾸고 흘려버리는 기억 탓에 이야기는 좀처럼 종잡을 수 없이 내달린다. 확신은 누구의 것인가. 평생의 동지도, 죄 없는 목격자도 필요하다면 일말의 고민도 없이 '제거'해버리는 그들? 기름진 부스러기를 털어대며 거드럭대는 경찰? 모순적이게도 그들 자신은 의문하지 않는다. 당혹에 빠지는 건 독자 뿐이다. 어느순간 정의와 명분 따위는 내던지고 사악한 공모의 웃음을 짓는 스스로를 발견하리라.

p.114 내 상황이 되면 누구라도 마찬가지일 거야. 아냐, 기억력이 없어진 것은 아니야… 저녁이 되고, 밤이 된다. 그녀는 잠이 들었다가, 파리의 기념물들에 대한 불안감에 사로잡혀 잠에서 깨어난다. 전화 부스들의 리스트를 옆에다 적어 놓았지만, 모든 게 뒤죽박죽이다.

p.338 떠나기 전에 그를 찾아가서 분명히 따지지 않아야 할 이유가 없다. 아무것도 요구한 일이 없는 뤼도 같은 불쌍한 개에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인간이, 아무런 벌도 받지 않고 지낸다는 것은 그녀의 정의감과 너무나 어긋난다. 그러나 동시에,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떠오르는데, 왜 그래야 하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내일이면 생각나리라.


마틸드의 후련한 은퇴를 목전에 둔 우리 '목격자들'은 기대와 함께 부풀어오르는 의구심을 감추지 못할것이다. 과연 누가 그를 '단죄'할까? 허물어지는 기억, 느슨해지는 연결고리에도 흔들림 없는 솜씨를 지닌 이 총잡이의 끝은 과연 어떻게 될까? 여기서 작가는 아무것도 숨기지 않으나 한치 없을 예상할 수 없는 전개로 다시금 허를 찌른다.

이 이야기는 무언가를 '위해' 쓰이지 않았다. 잔인한 쾌감과 지독히도 기능적인 폭력만이 있을 뿐. 몹시도 사악하다. 대문자 뱀처럼, 매혹적인 냉소. 의심하라, 모든 것을. 경계하라, 흔들리는 눈을. 두려워하라. 어둠속에 형형히 도사린 대문자 뱀. 도망칠 수 없다, 소리 없이 다가와 삼켜버릴 심연에서. 그리고, 탕.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p.230 선생은 멍하니 반장을 바라보지만, 자신은 다른 식으로 행동해야 한다고 느낀다. 강렬한 감정, 분노, 혹은 다른 것을 표현해야 하지, 이렇게 초점 없는 눈으로 상대방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앉아 있기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땅콩 냄새를 지독하게 풍기는 이 뚱뚱한 반장은 똑같은 질문을 끈질기게 반복한다. 마치 고장 난 레코드판 같다. 만일 내가 좋은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곧 사회 복지사들이 들이닥칠 거야…

p.329 그날 여기에 왔던 사람이 바로 이 여자다. 이 여자가 테비와 르네를 죽였다. 경찰에 전화해서 그들에게 알려야 한다. 그로부터 한 15분이나 지났을까, 선생은 그 종이를 발견 하지만, 그게 무엇에 관한 것인지 기억하지 못한다. 그는 그것을 쓰레기통에 던진다.


*서평도서제공: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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