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에로의 초대 - 김창래 교수와 함께 사유하는 철학 축제
김창래 지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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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 이래 학문으로서의 철학의 문턱을 낮추려는 시도는 수도 없이 이어져왔다. 이렇게도 섞어보고, 저렇게도 들이밀며 여기저기 꾹꾹 찔러봤지만 어째 그 결과가 영 만족스럽지 못한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는 형국을 전적으로 철학자의 소통능력이나 바쁘고 즐거운 현대사회의 탓으로 돌릴 수만은 없다(솔직히 조금은 있다). 철학의 본질적인 성격, 사유라는 무형의 활동을 기반으로 한다는 바로 그것이 곧 진입장벽이 되기 때문이다.

주제가 관심사에 맞지 않는다면 다른 분파의 주제를 논하면 그만이다. 그 어떤 대가의 사상이라 할지라도 납득할 수 없다면 최선을 다해 반박하면 될 일이다. 그러나, 추상적인 관념을 사유하는 일, 당장의 현실과는 관계 없어 보이는 일에 시간을 들여 고민하고 정답이 없는 질문에 매달리는 활동 자체에 흥미가 없고 도저히 이어나갈 수 없다면 그야말로 방도가 없다.

한 마디로, 어렵다. 명쾌한 답을 내릴 수도, 두 손으로 움켜쥘 수도 없다. 만학의 왕, 인문학의 꽃, 모든 학문의 시초임을 주야장천 피력하는 철학이 만년 인문학 골방 신세를 면하지 못하는 이유다.


철학의 기본은 사유다. 그것도 아주 치밀하고 치열한 뜬구름 잡기다. 끝날 수 없는 질문에 모호할 수 밖에 없는 답을 찾고, 드높은 이성의 탑을 논리로써 쌓아나간다고 해도 굶주려 죽어가는 이에게 당장 밥 한 술 떠먹여주지 않는다.

다른 분야 또한 그렇듯이, 학문으로서의 철학의 어휘도 일상어와는 거리가 있는 탓에 현실에 철학자 꼴은 썩 좋지만은 않다. 사방팔방 캐묻고 다니다 형장의 이슬 내지는 감방의 한숨으로 사라진 철학자만 해도 수두룩하지 않은가. 이런 이유로 철학은 배부른 자의 공상, 무가치하고 비현실적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지 오래다.

그러나 철학은 무엇보다 실생활에 가까운 학문이다. 당장 굶어죽는 입에 떠넣는 쌀을 키워내지는 못하지만 왜 내 것을 떼어 남의 입에 넣어주어야 하는지, 왜 산더미같이 쌓인 재화를 두고도 누구는 굶고 누구는 부른 배를 두드리는지, 왜 사람은 간신히 먹고 자는 삶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지, 어떻게 인간이 세상을 인식하고 아름답고 추한 것을 구분하며, 새로 등장한 기술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제한하고 이용해야 할지... 인간이 맞닥뜨리는 모든 ‘왜’와 ‘어떻게’, 그리고 ‘만약’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철학이다.


철학은 인간과 세계, 세계 안의 존재를 사유하는 학문이다. 모든 문제는 우리가 전지전능한 초월자가 아니라는 데에서 출발한다. 사유하는 자의 존재 자체까지 회의하면서까지 추구하는 절대적인 정답, 진리에는 영영 닿을 수 없다.

모든 것을 아는 존재는 고민할 필요가 없다. 모든 문제를 한 치의 오차나 시행착오 없이 해결할 수 있는 존재에게는 숙고가 필요치 않다. 그는 이미 답을 알고 있으니. 인간은 그럴 수 없다. 그래서 끝없이 질문하고 사유하고 부딪히며 논쟁한다. 그렇기에 철학은 철저히 인간의 학문이다.

사유하는 존재, 이성을 가진 동물, 지성의 선봉이라는 드높은 오만을 버리고 기원의 기원을 파고 들어갈 때, 무지를 인정하면서도 사유의 고통을 그 누구에게도, 설령 신이라 할지라도, 떠넘기며 회피하지 않을 때, 인간은 비로소 철학이 열어젖히는 세계 안의 세계, 세계를 뛰어넘는 세계를 향해 나아간다.


저자 김창래 교수는 철학의 어떤 분파가 최고나 근원임을 주장하지도, 절대적인 답이 있다는 희망을 주지도 않는다. 다만 philosophy, 지혜를 사랑하는 학문이 뻗어나온 가지를 함께 그려갈 뿐이다. 그리하여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철학에로의 초대다. 때문에 앞뒤를 잃고 짧은 문장이 되어 맥락없이 슬로건이 되는 문장을 모아놓은 책이 아니다. 다독여주지 않는다.

다만 찰나의 삶을 살아가는 존재가 무한과 영원을 치열하게 쫓아온, 혹은 근원을 파헤쳐온 길을 따라가며 자 갈 길이 멉니다, 하고 가만히 기다려줄 뿐이다. 그러나, 결국 그것이 수많은 철학자가 걸어온 길이 아니던가.

거부할 수 없는 초대, 선택의 자유가 있으나 없는 질문과 사유로의 초대를 함께할 독자에게 권한다. 또한, 재미없다 도리질을 치면서도 슬그머니 눈길을 주는 독자에게 권한다. 다 울었니? 자 이제 생각을 하자. 오세요. 철학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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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닌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정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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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출판사 문학과지성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alien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외계인, 그리고 외국인(체류자). 외국인이 된 적이 있는가? 그것도 말도, 문화도 다른 곳에 덜렁, 혼자일 뿐인 외국인. 태어나 자라며 자연스럽게 접하고 능숙하게 체화한 것이 아닌, 머리가 먼저 이해하고 몸을 움직여야 하는 낯선 세계에서 이질감의 당사자는 미숙함을 떨쳐내기 어렵다. 너무나도 쉽게 조롱거리가 된다.

이야기는 티모페이 프닌의 수난으로 시작해 수난의 회자를 예고하는 문장으로 끝난다(“그럼 이제부터 ‘크레모나 여성 클럽’에 간 프닌이 연단에 서다가 원고를 잘못 가져왔음을 알게 되는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그의 기벽과 문법적 오류, 장황하게 빗나가는 표현과 상황에 맞지 않는 경어, 어리숙한 태도에서 독자는 시종일관 웃음을 터트릴지 모른다. 물론 작가는 쉴새없는 익살과 수난 또는 실패의 연속으로 웃음을 자아낸 탓이다. 문제는, 생각할수록 웃을 수 없게 된다는 점이다.


웃음의 이유가 타자의 추락, 낯선 문화에서 필연적으로 겉돌 수밖에 없는, 문화와 그 개인에게 차라리 이물감에 가까운 이질감을 ‘구경’하며 잔인한 쾌감이 아닌지 퍽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화려한 수사와 첨언으로 산만하게까지 느껴지는 서술자를 통해 독자는 프닌, 그에게 닿을 수 없음을 깨닫는다.

우리가 우리의 말과 문화에 낯선 이를 대할 때, 부적절한 문법과 빗나가는 어휘에 우스꽝스럽거나 미숙하여 사랑스러운 이미지를 부여하는 것이 온당한가? 그 자신에게 익숙한 말과 환경에서 그는 어떤 사람인가. 우리는 그를 알고 있는가.

우리는 프닌을 모른다. 그의 내면과 고뇌와 혼란을 알지 못하고, 그의 역사와 향수를 알지 못한다. 필연적으로 미끄러지고 엇나가는 말들로 인해 우리는 그의 섬세한 내면과 험난했던 수난의 기록, 풍부한 지적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


글에는 쓴 사람의 생각이 담긴다. 쓰는 사람이 읽는 사람에게 자기 내면의 일부를 슬몃 드러내보이는 것이 글이다. 그것은 때로는 날것 그대로, 때로는 내용물을 짐작할 수 없도록 만신창이 또는 한껏 치장되어 세상에 내보내진다.

이 오물인지 선물인지 모를 것을 집어든 독자는 무엇을 하느냐. 흔들어도 보고 한껏 들여다보고 씹고 뜯고 에이 못 먹을 것이다 저만치 던져놓거나 박수갈채를 보내기도 하고... 아무튼 뭔가를 한다.

그렇다면 사건의 발단쯤 되시는 저자는 또 무엇을 하는가. 가만히 손 놓고 보기만 하는가, 하면 또 그렇지는 않다. 에 그것은 뭐가 아니고 된장입니다. 잘 보세요, 점잖게 권하거나 아니 그게 아니라니까! 노성을 지르기도, 더러는 어느샌가 독자 사이에 끼어 제가 던져놓은 혼돈을 부추기기도 한다.

나보코프는 어느 쪽이냐, 묻는다면 마지막에 가깝다. 한 술 더 떠서 ‘거 봐라, 내 그럴 줄 알았다’며 혀를 차거나 ‘내가 언제요?’ 시침 뚝 떼고 앉은 쪽이다. 즐기는 자는 재밌고 진지한 사람은 속이 터진다.


그의 모든 소설 중 가장 코믹하고 애달프고 단순한 작품이라는 평은 틀리지 않았다. 시종일관 우습고 짠하고 줄거리는 단순하다. 동시에 전혀 그렇지 않다. 주인공을 이해할수록, 그의 내면을 들여다볼수록 조금도 우습거나 단순하지 않다. 짠하다, 정도로 끝낼 수 있는 피로와 고달픔이 아니다.

독자는 이 작품 곳곳에서 작가를 보게 된다. 아마도 망명과 이주라는 작가 자신의 경험을 일부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리라. 결국 그것은 낯선 곳에 필사적으로 적응하기, ailen으로서의 경험이다. 이방인인 적이 없었던 이는 그 심정을 모른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데, 작가는 죽어서도 말이 많다. 자신의 글이 읽히고 회자되는 동안 유령처럼 나타나 끼어들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여기서, 작가는 묻는다. 우습지 않느냐고, 저 수난과 휘황찬란하게 엇나가는 문장에 웃지 않았느냐고, 그런데도 정말 우스우냐고.

결국 독자에게 남겨진 선택지는 뒤늦은 고민 뿐이다. 무엇이 우스운가, 우리는 누군가를 이해할 수 있을까, 마지막까지 닿지 못했던 그의 세계, 펼쳐지지 않은 페이지는 무엇을 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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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와 장소상실 논형학술총서 14
에드워드 렐프 지음, 김덕현.김현주.심승희 옮김 / 논형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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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논형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장소란 무엇인가. 존재가 있어 장소가 창출되는가, 혹은 장소가 있어 그곳에 존재가 위치할 수 있는가. 세계의 일부, 좌표 혹은 임의의 지정값으로 설명되지 않는 공간이 장소로서의 의미를 갖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혹은 언제부터인가. 인간 없는 장소는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으나, 장소 없는 인간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과연 그러한가?

p.47 개인은 자신의 공간의 중심에 있는 자신의 장소에 있을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개인도 그들의 지각 공간과 장소를 가진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다. 더 나아가 인간은 이런 자신과 타인들의 공간과 장소들이 전체 사회 및 문화 집단의 지속적이고 어느 정도 합의된 생활 공간의 일부를 구성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p.73 하이데거는 “공간은 자신의 존재를 장소로부터 부여받은 것이지 ’공간‘으로부터 받은 것이 아니다. (...) 인간이 장소와 맺는 본질적 관계는, 그리고 이 장소를 통해서 공간과 맺는 본질적 관계는, 인간존재의 본질적 속성인 (...) 거주에 있다.”고 말했다.


어느 애니메이션처럼, ’움직이는 성‘은 장소인가? 특정 좌표에 매이지 않으나 강력하게 연계되어 있는 공간 또한 장소로서 의미를 갖는가? 엑소더스, 집단이주로 ‘뿌리뽑힌’ 이들이 기억하는 장소가 이미 그 이름과 지표가 파괴되어 흔적없이 사라졌더라도 여전히 의미를 갖는 이유는 무엇인가?

장소를 점유함으로서, 혹은 공간을 장소로 만드는 권력은 인간이 그 자신의 실존적 토대를 마치 나무가 자라고 짐승이 영역을 형성하듯 이곳 혹은 그곳이 변할지언정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는 장소에 기반해 형성한다는 주장으로 설명될 수 있는가? 가능하다면, 추방과 강제이주의 경험이 정체성의 근간을 흔드는 이유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p.82 개인이나 문화에 의해 정의되는 장소들은 그 위치, 활동, 건물들이 의미를 가지고 또 잃어버리면서 성장 번영하고 쇠퇴하게 된다. 현재의 장소는 이전의 장소에서 성장하거나 과거의 장소를 대체하면서 그런 의미들의 진전이 있을 것이다. (...) 사라져버리고 변화하는 것을 막아주는 것은, 장소가 영구적이라는 감성을 강화시키는 의식과 전통이다.


이 책이 쓰여진 때로부터 벌써 수십 년의 시간이 흘렀다. 조금쯤 과거에 대한 낭만적 향수를 품은 것처럼 느껴지는 저자의 의견과는 달리, 오늘날 산업화가 진행된 국가의 지리 형성은 자본에 좌우되기도 한다. 어떤 공간에 의미를 부여하고, 소멸하는 변두리 혹은 폐허로 낙인찍어 파괴하거나 서서히 잊혀지게 하는 것 또한 자본과 시장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어렵다고 할 수 있겠다.

p.85 장소의 본질은 무시간성이나 시간의 지속성에 있지 않다. 장소의 무시간성이나 지속성이 중요하고 불가피하지만, 이것들은 우리의 장소 경험에 영향을 주는 차원에 지나지 않는다.

p.287 장소는 인간의 질서와 자연의 질서가 융합된 것이고, 우리가 세계를 직접적으로 경험하는 의미 깊은 중심이다. (...) 장소는 추상이나 개념이 아니다. 장소는 생활 세게가 직접 경험되는 현상이다. 그래서 장소는 의미, 실재 사물, 계속적인 활동으로 가득 차 있다. 이것은 개인과 공동체 정체성의 중요한 원천이며, 때로는 사람들이 정서적. 심리적으로 깊은 유대를 느끼는 인간 실존의 심오한 중심이 된다. 사실 장소와 인간의 관계는 사람들과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필수적이고, 다양하며, 때로는 불쾌한 것이다.


어쩌면 ’진정한 장소‘와 유대관계를 맺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는 점차 과거의 것이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혹은 물리적 공간에 인간 내적인 요소, 이를테면 지각, 인식, 감정과 같은 것들이 투영되어 의미가 형성되는 과정은 일시적이고 매우 휘발되기 쉬운 것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결국 미래의 장소 개념은 획일화된 사회의 좌표공간으로 귀결된 것인가? 인간은 장소-없음의 동물이 될 것인가, 혹은 장소는 일시적인 소비의 대상이 될 것인가? 아니면 여전히 소규모 집단과 세대를 이어 전해지는 역사가 부여된 ‘의미있는 장소’가 여전히 ‘의미’를 가질 것인가.

저자는 마지막까지 명확한 미래상을 제시하지 않는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 현재의 독자가 저자에게 어떤 답을 돌려줄지, 이후의 세계가 무장소의 지리를 전제로 할지는 오롯이 현세대의 몫이리라.

p.298 의미 있는 장소와 관련 맺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뿌리 깊은 욕구이다. 만일 우리가 이런 욕구를 무시하면서 무장소의 힘에 도전하지 않는다면 미래는 장소가 전혀 중요하지 않은 환경이 되고 말 것이다. (...) 우리가 사는 세계가 무장소의 지리가 될 것인지, 의미 있는 장소들의 지리가 될 것인지를 선택하는 것도 온전히 우리 자신의 책임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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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없는 자들의 목소리
황모과 지음 / 래빗홀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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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출판사 래빗홀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올해가 관동대학살 100주년이라고 했던가. 해방 직후 난리통에 언론통제까지, 제대로 알려질 기회조차 없었다. 어디선가 이런 문장을 본 적이 있다. 어떤 존재를 강력하게 부정하는 일, 누군가가 존재했던 흔적을 말살하려는 시도는 역설적으로 그 존재를 선명하게 드러낸다고, 박해가 없었음을 주장하는 가해자의 진술은 박해당한 존재들의 증거가 된다고.

식민지배기, 땅이 갈라지고 세상이 붕괴되는 대재난의 혼란 속에서 지배국의 하층민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처지가 얼마나 불안했는지, 어제까지의 세계가 무너져내리는 상황에서 최소한의 권리도, 실낱같은 도덕도 기대할 수 없었던 이들의 심정이 어떠했을런지.

10만 명이 넘는 사람이 목숨을 잃거나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으며, 그 수 배가 넘는 이들이 부상을 입었다. 최신식 설비와 시스템을 갖추고도 지진은 국가적인 재난이기 마련인데 1923년, 당시의 혼란은 차마 말로 할 수 없을 지경이었을 것이다.


목숨이라도 건졌으니 다행이라는 말은 잠시간의 위로일 뿐이다. 일시에 끊어지지 않은 삶, 살아남은 사람들은 기나긴 일상을 치러내고 복구해야만 한다. 최소한의 울타리, 몸을 가리고 바람을 피할 곳, 당장 입에 넣을 쌀 한 톨조차 남지 않은 사회는 더이상 이전의 문명과 질서를 찾아볼 수 없는 곳이 되기 마련이다.

이제 와 한순간에 야만 이하의 야만으로 내던져진 이들의 기록을 살피다보면, 필연적으로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만일 그 때 그 곳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단 하나의 무언가라도 바꿀 수 있다면 뭔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과연 나는 그 참극 속에서 한 사람이라도 구하기 위해 나설 수 있는가’.

이것은 필사적인 희망이자 애도의 일환이다. 단 한 명이라도 살릴 수 있었다면, 익숙한 얼굴을 두려워해야하는 참극 속에서 잊혀져버린, 그때부터 지금까지 내도록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는 이들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손을 내밀 수만 있다면, 살아달라고, 미안하다고, 차마 말로 다 할 수 없는 일이 있었으나 누군가는 당신을 잊지 않았다고, 그렇게 전하고 싶은 마음일테다.


2023년, 가상의 도쿄 카타콤베, 각각 한국인과 일본인인 이들이 모종의 임무를 띠고 관동대지진의 현장에 파견된다. 한 명은 어딘지 비장한 반면에 다른 한 명은 적대적이다 못해 분노에 찬 태도인 상황에 어리둥절한 것도 잠시, 그들은 역사의 현장으로 들어간다. 직접 보고, 기억해 돌아와야 한다.

누가 어디서 얼마나 용을 쓰든 역사는 변하지 않는다. 역사는 시간과 사건의 기록이다. 사람의 일인 동시에 사람의 손을 벗어난 것이기도 하다. 필연적으로 과거를 들여다보게 되는 그것은, 달라질 수 없으나 작은 요소에도 크게 변화한다. 과거는 현재 안에 존재한다.

혼란, 비명, 피흘리고 부서지는 것. 한계와 무력함을 알면서도 시도하기를 멈추지 않는 이와 강자의 논리에 부재했던 갇힘, 극한의 수동성을 경험하는 이를 통해 독자는 차마 말로 다 할 수 없는 슬픔, 새로 디뎌 일어서야 할 지점을 목도할 것이다. 목격, 닿을 수 없음, 그저 들여다보기, 산 사람이 남아 할 일을 찾기, 그것이 과거를 마주하는 현재-후손에게 주어진 과제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빈 자리가 그곳에 있던 존재의 흔적이 되듯이 어떤 부정은 가장 강한 긍정이 되기도 한다. ‘우리’에 지배되고 흡수되어 정체성을 박탈당한 ‘우리-아님’의 존재는 지배국의 사회 체계가 피지배국의 정체성을 지닌 이들을 흡수하는 데 실패했음을 역설한다.

이미 있었던 것, 이미 일어난 일을 지우는 일은 선을 긋고 덧칠하다 종내에는 종이를 바꾸는 것과 비슷하다. 결국 흔적이 남는다. 사람은 사람으로 흔적을 남긴다. 공간에 남은 기억과도 같다.

속 시원히 해결된 것 없는, 결국 처음과 다르지 않으나 가장 중요한 부분이 달라진 현재로 돌아와 작가는 다시 묻는다. 그래서, 당신은 무엇을 보았냐고, 그러고도 여전히 이전으로 돌아가 그린듯한 과거를 펼쳐보일 셈이냐고.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러나 죽은 자는 산 자에게 끊임없이 말을 건다. 당신의 현재는 과거의 무덤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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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 샤우트
P. 젤리 클라크 지음, 이나경 옮김 / 황금가지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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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출판사 황금가지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흔히들 상도를 넘어서다 못해 잔악무도하다고 평가되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한다. “저 사람같지도 않은 놈”이라고, 사람도 아니라고. 과연 그것은 야만의 시대, 피가 튀고 뼈가 부서지는 전쟁터에서만 통용되는 말인가. KKK, 정확한 명칭은 몰라도 과거 우스꽝스러운 복장과 더불어 비-백인(개중에는 ‘백인같지 않은 백인’이 포함될)을 향한 집단폭력행위를 일삼았던 유사종교집단을 모르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말입니다. 만일 저들은 사람도 아니라며 진저리치던 게 사실이었다면, 그러니까, ‘사람이 아닌’ 부분이 사실이었다면? 그들이 정말 사람 흉내를 내는 사람-아닌 존재였다면? 그들이 원하는 것이 악의적 선동에 넘어간 대중의 집단증오였다면? 그들을 처치하는 사냥꾼이 존재했다면? 이야기는 이 서글프고 제법 타당해보이는 상상에서 시작한다.


금주법 시대 미국, 1920년대의 조지아주 메이컨, 평범하고 한적하기 짝이 없는 이 곳에는 사람이 아닌 것들이 배회한다. 흑마술이 깃든 책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국가의 탄생”과 그에 홀려 증오를 뿜어내는 ‘평범한’ 시민들, 그리고 비밀 의식으로 소환된 쿠 클럭스. 그것들은 총과 폭탄으로도 해치울 수 없는 사악한 존재로, 사람을 사람-아닌 것으로 만드는 힘으로 불러내져 사람을 해친다.

일가족이 몰살당하는 참극에서 살아남은 마리즈, 그는 영혼과 신비한 힘이 깃든 무기, 노래하는 검을 들고 그들을 처단하는 사냥꾼이다. 그와 동료들의 힘을 노리는 이는 악마는 하얀 두건을 쓰고 온다. 악마의 정체는 무엇인가, 무엇을 노리는가.

과연 우리 자신은 악마의 꼭두각시가, 하수인이, 더 나아가 악마 그 자체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참극의 생존자, 마리즈는 불태워지고 손발이 잘려나가는 무력함 속에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과연 ‘살아남은 이’는 마리즈 그 하나라고 할 수 있는가.


괴물, 사람의 탈을 쓰고 사람 틈에 숨어있는 괴물이 노리는 것은 증오이다. 생생하고 뜨겁게 끓어넘치는, 영혼을 불태우는 분노와 증오. 그를 위해 영화, ‘깨끗한 고기’, 교묘한 속삭임과 스치는 눈길로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다.

저것 좀 보라고, 저 미움받고 불태워져 마땅한 것이 우리의 일상을 파고들지 않느냐고, 마땅히 채찍질당하고 얻어맞고 고통받아야 할 혐오스러운 종이 감히 신을 닮은 우리 하얀-인간과 동등한 삶을 살아가려 하지 않느냐고, 저들의 요술이 우리의 신앙과 동급으로 맞먹으려 하지 않느냐고. 없애라고, 짓밟아 부수고 조롱하고 모욕하라고. 먹인다. 모이게 한다. 속살거린다. 저들은 사람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러나 강한 혐오는 두려움의 반증이라던가. 누군가를 인간의 범주 밖으로 밀어내는 이들은 그들이 증오하는 이들이 인간임을 잘 알고 있다. 채 인간이 되지 못한 짐승이라고 채찍질하고 걷어차고 눈을 흘기면서도 그 누구보다도 그들을 두려워한다.


끊임없이 정당화할 이유를 붙이면서도 역설적으로 용서받을 수 없음을 알고 있다. 굴복당할 것을 요구받는 존재에게는 짓밟히지 않는 힘이 있다.

p.198 “저들의 공포는 현실이 아니다. 그저 불안과 무능일 뿐이지. 저들도 마음속으로는 알고 있다. 저들의 증오는... 물 탄 위스키 같다. (…) 너희 모두는 증오할 이유가 충분하다. 너와 너희 족속에게 가해진 온갖 악행은? 채찍질당하고 얻어맞고, 사냥당하고 개에게 쫓기고, 저들 손에 그토록 지독하게 고통당한 민족. 너희는 저들을 경멸할 이유가 충분하다. 수백 년간 타락한 저들을 혐오할 이유가. 그 증오는 너무나 순수하고, 너무나 확실하고 올바르며, 너무나도 강할 것이다!”


앞서 서글프고 제법 타당한 상상, 이라고 말한 바가 있다. 혹자는 외계인이니 괴물 또는 악마니 그런 허무맹랑한 소리가 어디 있느냐 하겠지만, 글쎄,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법과 제도로 꽁꽁 얽매어 사람 아닌 것으로 치부하는 일은 얼마나 있을법하냐고 묻고 싶다.

단체로 침대보같은 두건을 뒤집어쓰고 우 몰려다니며 대단한 소명인양 멀쩡히 살아가는 이를 잡아 불태우고 두들겨 패고 목매달아 죽이는 일이, 바로 쳐다보지도 원하는 자리에 앉지도 못하게 하는, 그런 일은 얼마나 조리있는 일이기에 축제처럼, 유희처럼, 일상처럼 자행되었느냐고 묻고 싶다.

p.39 클랜은 사라졌지만 그들이 퍼뜨린 악령은 살아남아 유색인이 이제 투표를 한다는 이유로 채찍질하고 죽이고, 정부에서 내쫓고, 온갖 학살을 저질러 지금껏 우리 숨통을 죄는 짐 크로법을 시행했다.

p.65 내 생각엔 클랜이 악을 받아들이면, 악이 그들을 먹어 치우는 것이다. 속이 텅 빌 때까지. 그리고 자기가 인간임을 기억 못 하는 허연 악령이 남는다.


존재했던 이들, 살아남은 이들의 후손은 말한다. 내가 여기 있노라고. 과연 총구를 겨누고 자루를 꼬나쥔 이가 누구일지 생각해보라고. 너의 연약한 살결에, 나와 같은 피가 흐를 몸뚱이와 너는 모욕하고 나는 응답하는 말을 내뱉을 목구멍에서 터져나올 것이 과연 무엇일지 잘, 아주 잘 생각해봐야 할 것이라고.

복수가 두려우면 처음부터 저지르지 않았으면 될 일이 아니었느냐고, 무엇을 위해, 무슨 이유로 우리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없애고자 발버둥을 쳤느냐고. 한 데 모여 눈을 빛내고 입을 벌려 씹어 삼켰느냐고. 보드라운 손과 연약한 발을 대신해 우리를 수족으로 부렸느냐고.

그래서, 이제는, 지금까지, 왜, 무엇을 어떻게 하겠느냐고, 너를 보라고, 누가 ‘우리’의 ‘우리’ 안에서 숨을 죽이고 때를 기다리느냐고, 그것이 누구에게 달렸겠느냐고.


노래와 민담과 전통신앙의 힘, 죽었으되 사라지지 않은 이들의 가호, 진창에 처박혀 빛나는 눈, 뼈의 질감, 짐승의 것들, 사람됨의 증거로 인정받지 못한 것들. 작가는 그를 통해 꺼지지 않은 불씨가 터져오르듯 묻는다. 내가, 우리가, 너와 당신이 아니면 무엇이겠냐고. 흥얼거리듯 묻는다. 조소처럼 건넨다.

p.206 그들이 내게 준다는 것은 권력이다. 지킬 힘. 복수할 힘. 내 동족의 생사를 좌우할 힘. 유색인들이 이런 제안을 받아 본 적 있을까?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이 언제 있었을까? 우리는 그동안 내내, 인간의 꼴을 한 괴물의 손에 고통당하고 죽어 나가지 않았는가? 우리가 다른 괴물과 계약을 맺는다면 뭐가 다를까? 우리를 그렇게 경멸하고 괴롭힌 이 세상을 위해 우리가 지켜야 할 의무가 있을까? 세상이 우리를 구하려고 무엇 하나 해 준 것 없는데, 어째서 손을 들어 그 세상을 구해야 할까?


모든 이유에도 다시금, 나는 여기 있었고, 있으며, 있을 것이라고. 우리는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당신들과 함께 존재하노라고. 당신이 부수고자 했던 짐승은 신과 같은 존재로 임하노라고.

신의 아들이 이르되,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누가10:18). 너희는 제 머리의 두건을 보지 못하고 남의 살결을 보는구나. 일상의 악마, 그들이 아이와 여인과 사랑하는 이들에게 하는 꼴을 보아라.

p.225 “쿠 클럭스가 그러니까, 쿠 클럭스 짓거리를 안 하면 무엇인지 생각해 본 적 있어? (…) 그들은 여전히 출근할까? 아내에게 남편의 의무를 다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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