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와 장소상실 논형학술총서 14
에드워드 렐프 지음, 김덕현.김현주.심승희 옮김 / 논형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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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논형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장소란 무엇인가. 존재가 있어 장소가 창출되는가, 혹은 장소가 있어 그곳에 존재가 위치할 수 있는가. 세계의 일부, 좌표 혹은 임의의 지정값으로 설명되지 않는 공간이 장소로서의 의미를 갖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혹은 언제부터인가. 인간 없는 장소는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으나, 장소 없는 인간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과연 그러한가?

p.47 개인은 자신의 공간의 중심에 있는 자신의 장소에 있을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개인도 그들의 지각 공간과 장소를 가진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다. 더 나아가 인간은 이런 자신과 타인들의 공간과 장소들이 전체 사회 및 문화 집단의 지속적이고 어느 정도 합의된 생활 공간의 일부를 구성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p.73 하이데거는 “공간은 자신의 존재를 장소로부터 부여받은 것이지 ’공간‘으로부터 받은 것이 아니다. (...) 인간이 장소와 맺는 본질적 관계는, 그리고 이 장소를 통해서 공간과 맺는 본질적 관계는, 인간존재의 본질적 속성인 (...) 거주에 있다.”고 말했다.


어느 애니메이션처럼, ’움직이는 성‘은 장소인가? 특정 좌표에 매이지 않으나 강력하게 연계되어 있는 공간 또한 장소로서 의미를 갖는가? 엑소더스, 집단이주로 ‘뿌리뽑힌’ 이들이 기억하는 장소가 이미 그 이름과 지표가 파괴되어 흔적없이 사라졌더라도 여전히 의미를 갖는 이유는 무엇인가?

장소를 점유함으로서, 혹은 공간을 장소로 만드는 권력은 인간이 그 자신의 실존적 토대를 마치 나무가 자라고 짐승이 영역을 형성하듯 이곳 혹은 그곳이 변할지언정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는 장소에 기반해 형성한다는 주장으로 설명될 수 있는가? 가능하다면, 추방과 강제이주의 경험이 정체성의 근간을 흔드는 이유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p.82 개인이나 문화에 의해 정의되는 장소들은 그 위치, 활동, 건물들이 의미를 가지고 또 잃어버리면서 성장 번영하고 쇠퇴하게 된다. 현재의 장소는 이전의 장소에서 성장하거나 과거의 장소를 대체하면서 그런 의미들의 진전이 있을 것이다. (...) 사라져버리고 변화하는 것을 막아주는 것은, 장소가 영구적이라는 감성을 강화시키는 의식과 전통이다.


이 책이 쓰여진 때로부터 벌써 수십 년의 시간이 흘렀다. 조금쯤 과거에 대한 낭만적 향수를 품은 것처럼 느껴지는 저자의 의견과는 달리, 오늘날 산업화가 진행된 국가의 지리 형성은 자본에 좌우되기도 한다. 어떤 공간에 의미를 부여하고, 소멸하는 변두리 혹은 폐허로 낙인찍어 파괴하거나 서서히 잊혀지게 하는 것 또한 자본과 시장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어렵다고 할 수 있겠다.

p.85 장소의 본질은 무시간성이나 시간의 지속성에 있지 않다. 장소의 무시간성이나 지속성이 중요하고 불가피하지만, 이것들은 우리의 장소 경험에 영향을 주는 차원에 지나지 않는다.

p.287 장소는 인간의 질서와 자연의 질서가 융합된 것이고, 우리가 세계를 직접적으로 경험하는 의미 깊은 중심이다. (...) 장소는 추상이나 개념이 아니다. 장소는 생활 세게가 직접 경험되는 현상이다. 그래서 장소는 의미, 실재 사물, 계속적인 활동으로 가득 차 있다. 이것은 개인과 공동체 정체성의 중요한 원천이며, 때로는 사람들이 정서적. 심리적으로 깊은 유대를 느끼는 인간 실존의 심오한 중심이 된다. 사실 장소와 인간의 관계는 사람들과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필수적이고, 다양하며, 때로는 불쾌한 것이다.


어쩌면 ’진정한 장소‘와 유대관계를 맺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는 점차 과거의 것이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혹은 물리적 공간에 인간 내적인 요소, 이를테면 지각, 인식, 감정과 같은 것들이 투영되어 의미가 형성되는 과정은 일시적이고 매우 휘발되기 쉬운 것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결국 미래의 장소 개념은 획일화된 사회의 좌표공간으로 귀결된 것인가? 인간은 장소-없음의 동물이 될 것인가, 혹은 장소는 일시적인 소비의 대상이 될 것인가? 아니면 여전히 소규모 집단과 세대를 이어 전해지는 역사가 부여된 ‘의미있는 장소’가 여전히 ‘의미’를 가질 것인가.

저자는 마지막까지 명확한 미래상을 제시하지 않는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 현재의 독자가 저자에게 어떤 답을 돌려줄지, 이후의 세계가 무장소의 지리를 전제로 할지는 오롯이 현세대의 몫이리라.

p.298 의미 있는 장소와 관련 맺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뿌리 깊은 욕구이다. 만일 우리가 이런 욕구를 무시하면서 무장소의 힘에 도전하지 않는다면 미래는 장소가 전혀 중요하지 않은 환경이 되고 말 것이다. (...) 우리가 사는 세계가 무장소의 지리가 될 것인지, 의미 있는 장소들의 지리가 될 것인지를 선택하는 것도 온전히 우리 자신의 책임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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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없는 자들의 목소리
황모과 지음 / 래빗홀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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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출판사 래빗홀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올해가 관동대학살 100주년이라고 했던가. 해방 직후 난리통에 언론통제까지, 제대로 알려질 기회조차 없었다. 어디선가 이런 문장을 본 적이 있다. 어떤 존재를 강력하게 부정하는 일, 누군가가 존재했던 흔적을 말살하려는 시도는 역설적으로 그 존재를 선명하게 드러낸다고, 박해가 없었음을 주장하는 가해자의 진술은 박해당한 존재들의 증거가 된다고.

식민지배기, 땅이 갈라지고 세상이 붕괴되는 대재난의 혼란 속에서 지배국의 하층민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처지가 얼마나 불안했는지, 어제까지의 세계가 무너져내리는 상황에서 최소한의 권리도, 실낱같은 도덕도 기대할 수 없었던 이들의 심정이 어떠했을런지.

10만 명이 넘는 사람이 목숨을 잃거나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으며, 그 수 배가 넘는 이들이 부상을 입었다. 최신식 설비와 시스템을 갖추고도 지진은 국가적인 재난이기 마련인데 1923년, 당시의 혼란은 차마 말로 할 수 없을 지경이었을 것이다.


목숨이라도 건졌으니 다행이라는 말은 잠시간의 위로일 뿐이다. 일시에 끊어지지 않은 삶, 살아남은 사람들은 기나긴 일상을 치러내고 복구해야만 한다. 최소한의 울타리, 몸을 가리고 바람을 피할 곳, 당장 입에 넣을 쌀 한 톨조차 남지 않은 사회는 더이상 이전의 문명과 질서를 찾아볼 수 없는 곳이 되기 마련이다.

이제 와 한순간에 야만 이하의 야만으로 내던져진 이들의 기록을 살피다보면, 필연적으로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만일 그 때 그 곳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단 하나의 무언가라도 바꿀 수 있다면 뭔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과연 나는 그 참극 속에서 한 사람이라도 구하기 위해 나설 수 있는가’.

이것은 필사적인 희망이자 애도의 일환이다. 단 한 명이라도 살릴 수 있었다면, 익숙한 얼굴을 두려워해야하는 참극 속에서 잊혀져버린, 그때부터 지금까지 내도록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는 이들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손을 내밀 수만 있다면, 살아달라고, 미안하다고, 차마 말로 다 할 수 없는 일이 있었으나 누군가는 당신을 잊지 않았다고, 그렇게 전하고 싶은 마음일테다.


2023년, 가상의 도쿄 카타콤베, 각각 한국인과 일본인인 이들이 모종의 임무를 띠고 관동대지진의 현장에 파견된다. 한 명은 어딘지 비장한 반면에 다른 한 명은 적대적이다 못해 분노에 찬 태도인 상황에 어리둥절한 것도 잠시, 그들은 역사의 현장으로 들어간다. 직접 보고, 기억해 돌아와야 한다.

누가 어디서 얼마나 용을 쓰든 역사는 변하지 않는다. 역사는 시간과 사건의 기록이다. 사람의 일인 동시에 사람의 손을 벗어난 것이기도 하다. 필연적으로 과거를 들여다보게 되는 그것은, 달라질 수 없으나 작은 요소에도 크게 변화한다. 과거는 현재 안에 존재한다.

혼란, 비명, 피흘리고 부서지는 것. 한계와 무력함을 알면서도 시도하기를 멈추지 않는 이와 강자의 논리에 부재했던 갇힘, 극한의 수동성을 경험하는 이를 통해 독자는 차마 말로 다 할 수 없는 슬픔, 새로 디뎌 일어서야 할 지점을 목도할 것이다. 목격, 닿을 수 없음, 그저 들여다보기, 산 사람이 남아 할 일을 찾기, 그것이 과거를 마주하는 현재-후손에게 주어진 과제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빈 자리가 그곳에 있던 존재의 흔적이 되듯이 어떤 부정은 가장 강한 긍정이 되기도 한다. ‘우리’에 지배되고 흡수되어 정체성을 박탈당한 ‘우리-아님’의 존재는 지배국의 사회 체계가 피지배국의 정체성을 지닌 이들을 흡수하는 데 실패했음을 역설한다.

이미 있었던 것, 이미 일어난 일을 지우는 일은 선을 긋고 덧칠하다 종내에는 종이를 바꾸는 것과 비슷하다. 결국 흔적이 남는다. 사람은 사람으로 흔적을 남긴다. 공간에 남은 기억과도 같다.

속 시원히 해결된 것 없는, 결국 처음과 다르지 않으나 가장 중요한 부분이 달라진 현재로 돌아와 작가는 다시 묻는다. 그래서, 당신은 무엇을 보았냐고, 그러고도 여전히 이전으로 돌아가 그린듯한 과거를 펼쳐보일 셈이냐고.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러나 죽은 자는 산 자에게 끊임없이 말을 건다. 당신의 현재는 과거의 무덤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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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 샤우트
P. 젤리 클라크 지음, 이나경 옮김 / 황금가지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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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출판사 황금가지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흔히들 상도를 넘어서다 못해 잔악무도하다고 평가되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한다. “저 사람같지도 않은 놈”이라고, 사람도 아니라고. 과연 그것은 야만의 시대, 피가 튀고 뼈가 부서지는 전쟁터에서만 통용되는 말인가. KKK, 정확한 명칭은 몰라도 과거 우스꽝스러운 복장과 더불어 비-백인(개중에는 ‘백인같지 않은 백인’이 포함될)을 향한 집단폭력행위를 일삼았던 유사종교집단을 모르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말입니다. 만일 저들은 사람도 아니라며 진저리치던 게 사실이었다면, 그러니까, ‘사람이 아닌’ 부분이 사실이었다면? 그들이 정말 사람 흉내를 내는 사람-아닌 존재였다면? 그들이 원하는 것이 악의적 선동에 넘어간 대중의 집단증오였다면? 그들을 처치하는 사냥꾼이 존재했다면? 이야기는 이 서글프고 제법 타당해보이는 상상에서 시작한다.


금주법 시대 미국, 1920년대의 조지아주 메이컨, 평범하고 한적하기 짝이 없는 이 곳에는 사람이 아닌 것들이 배회한다. 흑마술이 깃든 책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국가의 탄생”과 그에 홀려 증오를 뿜어내는 ‘평범한’ 시민들, 그리고 비밀 의식으로 소환된 쿠 클럭스. 그것들은 총과 폭탄으로도 해치울 수 없는 사악한 존재로, 사람을 사람-아닌 것으로 만드는 힘으로 불러내져 사람을 해친다.

일가족이 몰살당하는 참극에서 살아남은 마리즈, 그는 영혼과 신비한 힘이 깃든 무기, 노래하는 검을 들고 그들을 처단하는 사냥꾼이다. 그와 동료들의 힘을 노리는 이는 악마는 하얀 두건을 쓰고 온다. 악마의 정체는 무엇인가, 무엇을 노리는가.

과연 우리 자신은 악마의 꼭두각시가, 하수인이, 더 나아가 악마 그 자체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참극의 생존자, 마리즈는 불태워지고 손발이 잘려나가는 무력함 속에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과연 ‘살아남은 이’는 마리즈 그 하나라고 할 수 있는가.


괴물, 사람의 탈을 쓰고 사람 틈에 숨어있는 괴물이 노리는 것은 증오이다. 생생하고 뜨겁게 끓어넘치는, 영혼을 불태우는 분노와 증오. 그를 위해 영화, ‘깨끗한 고기’, 교묘한 속삭임과 스치는 눈길로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다.

저것 좀 보라고, 저 미움받고 불태워져 마땅한 것이 우리의 일상을 파고들지 않느냐고, 마땅히 채찍질당하고 얻어맞고 고통받아야 할 혐오스러운 종이 감히 신을 닮은 우리 하얀-인간과 동등한 삶을 살아가려 하지 않느냐고, 저들의 요술이 우리의 신앙과 동급으로 맞먹으려 하지 않느냐고. 없애라고, 짓밟아 부수고 조롱하고 모욕하라고. 먹인다. 모이게 한다. 속살거린다. 저들은 사람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러나 강한 혐오는 두려움의 반증이라던가. 누군가를 인간의 범주 밖으로 밀어내는 이들은 그들이 증오하는 이들이 인간임을 잘 알고 있다. 채 인간이 되지 못한 짐승이라고 채찍질하고 걷어차고 눈을 흘기면서도 그 누구보다도 그들을 두려워한다.


끊임없이 정당화할 이유를 붙이면서도 역설적으로 용서받을 수 없음을 알고 있다. 굴복당할 것을 요구받는 존재에게는 짓밟히지 않는 힘이 있다.

p.198 “저들의 공포는 현실이 아니다. 그저 불안과 무능일 뿐이지. 저들도 마음속으로는 알고 있다. 저들의 증오는... 물 탄 위스키 같다. (…) 너희 모두는 증오할 이유가 충분하다. 너와 너희 족속에게 가해진 온갖 악행은? 채찍질당하고 얻어맞고, 사냥당하고 개에게 쫓기고, 저들 손에 그토록 지독하게 고통당한 민족. 너희는 저들을 경멸할 이유가 충분하다. 수백 년간 타락한 저들을 혐오할 이유가. 그 증오는 너무나 순수하고, 너무나 확실하고 올바르며, 너무나도 강할 것이다!”


앞서 서글프고 제법 타당한 상상, 이라고 말한 바가 있다. 혹자는 외계인이니 괴물 또는 악마니 그런 허무맹랑한 소리가 어디 있느냐 하겠지만, 글쎄,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법과 제도로 꽁꽁 얽매어 사람 아닌 것으로 치부하는 일은 얼마나 있을법하냐고 묻고 싶다.

단체로 침대보같은 두건을 뒤집어쓰고 우 몰려다니며 대단한 소명인양 멀쩡히 살아가는 이를 잡아 불태우고 두들겨 패고 목매달아 죽이는 일이, 바로 쳐다보지도 원하는 자리에 앉지도 못하게 하는, 그런 일은 얼마나 조리있는 일이기에 축제처럼, 유희처럼, 일상처럼 자행되었느냐고 묻고 싶다.

p.39 클랜은 사라졌지만 그들이 퍼뜨린 악령은 살아남아 유색인이 이제 투표를 한다는 이유로 채찍질하고 죽이고, 정부에서 내쫓고, 온갖 학살을 저질러 지금껏 우리 숨통을 죄는 짐 크로법을 시행했다.

p.65 내 생각엔 클랜이 악을 받아들이면, 악이 그들을 먹어 치우는 것이다. 속이 텅 빌 때까지. 그리고 자기가 인간임을 기억 못 하는 허연 악령이 남는다.


존재했던 이들, 살아남은 이들의 후손은 말한다. 내가 여기 있노라고. 과연 총구를 겨누고 자루를 꼬나쥔 이가 누구일지 생각해보라고. 너의 연약한 살결에, 나와 같은 피가 흐를 몸뚱이와 너는 모욕하고 나는 응답하는 말을 내뱉을 목구멍에서 터져나올 것이 과연 무엇일지 잘, 아주 잘 생각해봐야 할 것이라고.

복수가 두려우면 처음부터 저지르지 않았으면 될 일이 아니었느냐고, 무엇을 위해, 무슨 이유로 우리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없애고자 발버둥을 쳤느냐고. 한 데 모여 눈을 빛내고 입을 벌려 씹어 삼켰느냐고. 보드라운 손과 연약한 발을 대신해 우리를 수족으로 부렸느냐고.

그래서, 이제는, 지금까지, 왜, 무엇을 어떻게 하겠느냐고, 너를 보라고, 누가 ‘우리’의 ‘우리’ 안에서 숨을 죽이고 때를 기다리느냐고, 그것이 누구에게 달렸겠느냐고.


노래와 민담과 전통신앙의 힘, 죽었으되 사라지지 않은 이들의 가호, 진창에 처박혀 빛나는 눈, 뼈의 질감, 짐승의 것들, 사람됨의 증거로 인정받지 못한 것들. 작가는 그를 통해 꺼지지 않은 불씨가 터져오르듯 묻는다. 내가, 우리가, 너와 당신이 아니면 무엇이겠냐고. 흥얼거리듯 묻는다. 조소처럼 건넨다.

p.206 그들이 내게 준다는 것은 권력이다. 지킬 힘. 복수할 힘. 내 동족의 생사를 좌우할 힘. 유색인들이 이런 제안을 받아 본 적 있을까?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이 언제 있었을까? 우리는 그동안 내내, 인간의 꼴을 한 괴물의 손에 고통당하고 죽어 나가지 않았는가? 우리가 다른 괴물과 계약을 맺는다면 뭐가 다를까? 우리를 그렇게 경멸하고 괴롭힌 이 세상을 위해 우리가 지켜야 할 의무가 있을까? 세상이 우리를 구하려고 무엇 하나 해 준 것 없는데, 어째서 손을 들어 그 세상을 구해야 할까?


모든 이유에도 다시금, 나는 여기 있었고, 있으며, 있을 것이라고. 우리는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당신들과 함께 존재하노라고. 당신이 부수고자 했던 짐승은 신과 같은 존재로 임하노라고.

신의 아들이 이르되,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누가10:18). 너희는 제 머리의 두건을 보지 못하고 남의 살결을 보는구나. 일상의 악마, 그들이 아이와 여인과 사랑하는 이들에게 하는 꼴을 보아라.

p.225 “쿠 클럭스가 그러니까, 쿠 클럭스 짓거리를 안 하면 무엇인지 생각해 본 적 있어? (…) 그들은 여전히 출근할까? 아내에게 남편의 의무를 다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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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름이 돋는다 - 사랑스러운 겁쟁이들을 위한 호러 예찬
배예람 지음 / 참새책방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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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출판 들녘(참새책방)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시작하기 전에, 고백할 것이 있습니다... 좋게 말해 상상력이 풍부하고 감수성이 높은 사람, 솔직하게 말해 겁이 많은 사람, 시체말로 쫄보인 사람을 하나만 대시오, 하면 모두가 손을 들고 정답! 하며 내 이름을 외칠 그런 사람입니다. 하나만 더 말하자면, 표지만 보고도 조금 오싹한 느낌에 기어이 엎어두고 며칠을 묵혔습니다. 책날개 그림에 간이 좁쌀만해졌습니다. 누군진 몰라도 책임지세요.

와중에 겁은 겁대로 많으면서 사서 고생을 하는 타입입니다. 네, 지난 주말에도 공포영화에 호러 소설로도 모자라 인터넷 괴담까지 줄줄 찾아보고 늦게까지 불을 끄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세간에서는 이런 걸 스불재, 스스로 불러온 재앙이라고 한다지요. 아니 뭐, 근데, 나만 그런 거 아니잖아요? 만국의 겁쟁이여, 단결하라.

들어보세요. 이런 사람이 나만 있는 건 아니잖아요. 만국의 겁쟁이라고 했잖아요?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김씨 쫄보 다나카 쫄보 잭슨 쫄보 다 있을거란 말이죠. 공포영화에서 겁 없는 놈과 소리지르는 놈이 제일 먼저 봉변을 당한다 뭐 그런 클리셰가 있을텐데... 거기에 내가 다시는 이 짓을 하나 봐라! 악을 쓰면서도 기어이 실눈 뜨고 기웃거리는 바람에 시작도 전에 사라지는 인물 1이 존재한다는 확신이 있습니다.


저 겁보들 꼬라지 좀 보라면서 낄낄대는 이들은 영영 이해하지 못하겠죠. 식은땀을 바가지로 흘리면서도, 졸아붙는 심장을 부여잡으면서도 그 짜릿한 즐거움을 잊지 못하는 이들의 마음을. 그치만 후자야말로 백점짜리 감상자가 아닌가요. 울어! 하면 네! 하고 펑펑 우는 관객이 좋은 관객이듯이.

원시시대에는 생존에 유리했을 (개중 반은 주체못한 호기심에 끝장났을) 것이고, 현재에는 알아서 숨넘어가는 긴장과 쾌감을 오가며 제 명을 재촉하고 있을 겁쟁이들, 호러마니아들.

p.22 창작자가 의도적으로 설치한 함정에 충실히 빠지고, 숨통을 조여오는 긴장감에 실눈만 겨우 뜬 채로 비명을 지르는 겁쟁이들이야말로, 어쩌면 호러라는 장르를 가장 잘 이해하고 체험하고 있는 사람들이 아닐까?

게임, 책, 영화, 댓글 형식의 쪽글까지 다양한 분야와, 묘한 불길함부터 대놓고 비명을 쥐어짜내는 좀비나 반쯤 경탄을 자아내는 외계인, 환상의 크리쳐들까지 차원과 경계를 넘나드는 형태의 대상들로


공포 장르를 즐기는 마음은 사람마다 다르겠으나, 그것이 즐거움으로 남을 수 있는 근원적인 이유는 같으리라는 생각을 합니다. 냉정히 말하면 ‘내 일이 아님’에서 오는 안도감이겠죠. 남이사 죽든지 말든지, 싶은 태평한 마음은 아닙니다. 쓰러지는 좀비나 크리쳐에, 원한을 품은 존재에도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는 사람도 있는걸요(네, 접니다).

다만 전율과 긴장이 즐거운 시간으로 남기 위해서는 화면을 끄고, 허리를 두드리며 의자에서 일어서거나 책장을 덮는 순간 안전한 현실로 돌아올 수 있어야 합니다. 숨막히는 두려움과 경계심을 내려놓고 지루하기까지한,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어야 지난 시간을 즐거움으로 남길 수 있습니다.

스크린, 화면, 책장 밖의 현실이 그 안과 다를 것이 없다면 그것은 더이상 상상과 창작의 영역이 아닙니다. 그때부터는 현실이 됩니다.

p.165 한 가지는 분명한 것 같다. 모든 흥미롭고 자극적이고 복잡환 사건 뒤에는 피해자가 존재한다는 것, 우리가 어떤 포지션을 취하든 피해자의 존재만큼은 결코 잊어선 안 된다는 것.


제법 흥행했던 몇몇 영화들을 비롯해 한국을 배경으로 하는 호러, 개중에서도 범죄 스릴러 장르를 거북해하는 이유와도 같습니다. 무서운가 그렇지 않은가, 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무서워하는지, 왜 무서워하는지, 그것을 자의와 타의 중 어떤 이유로 무서워하는가, 입니다.

그저 무섭구나, 하고 넘기기 전에 그것이 왜 공포의 대상으로 남는지, 왜 그 대상과 힘과 상황을 두려워하는지 물어야 합니다.

동북아 3국으로 묶이는 한중일 문화권에는 왜 그렇게 한을 품은 여성 귀신의 일화가 많은가, 그들은 왜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나, 그들이 누구를 어떻게 해치는가, 그들을 두려워하는 이들은 누구인가. 살아서는 그렇지 못했던 이들이 왜 죽어서는, 혹은 초인적 존재의 힘을 업고 공포스러운 존재가 되는가, 그것을 물어야 합니다.


혹은 경계의 저편, 버려진 장소와 사람의 형태이나 사람이 아니게 된 존재, 이를테면 좀비와 같은 존재들이 왜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그들의 기원을 묻고 공포가 재난의 형태를 띌 때는 이미 무수한 피해자가 존재했음을, 상상은 현실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을 이해할 때, 영화와 게임과 소설 속 이야기를 현실로 맞닥뜨리는 이들이 존재함을 잊지 않고 등 돌리지 않을 때, 비로소 즐거움으로 남을 수 있는 공포와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할 수 있게 됩니다. 기사로 따지자면 문화와 사건사고 면에 실릴 내용을 가려내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p.165 괴담을 읽으며 편안한 마음으로 두려워하고 겁먹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괴담 속 일들이 현실에서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가진 채로 덜덜 떨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오늘밤도 꺼림칙한 불길함과 환상적인 괴생물체, 숫제 뛰어다니기까지 하는 좀비를 상상하며 뒤척거릴 이들이 있습니다. 어떻게든 겁을 주려는 (내 기준) 고맙고 악마같은 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존재하는 겁쟁이들에겐 비 내리고 푹푹 찌는 여름이 한 해의 절정이겠지요.

손끝을 저릿저릿하게 하는 긴장감을 잊지 못해 괜히 머리 한 번 들이밀었다가 비명을 꽥 지르고 아 다시는 안 본다, 이걸 다시 하면 내가 사람이 아니다 하며 오늘 밤도 괜히 침대 밑을 살필 동지들에게, 우리는 영영 변하지 못할 팔자니 즐기기나 합시다. 슬그머니 이불 속으로 발을 밀어넣고 목덜미를 문지르며 괴담사이트를 찾아들어가는 사서고생의 달인들아.

근데, 뒤에 있는 사람 누구예요? 이상한 소리 안 들려요? 까드득... 하는...

p.202 겁쟁이라서 정말 다행이다 .겁쟁이인 우리가 좋다. 세상의 모든 겁쟁이 공포 애호가들이 오늘 밤도 덜떨 떨며 잠들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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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의 음악 - 날마다 춤추는 한반도 날씨 이야기
이우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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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이런 말이 있다. 기상청 체육대회 날에는 항상 비가 온다. 다 헛똑똑이라서 그런가? 생각해봐라. 그게 다 사내행사 불참을 위한 치밀한 계산의 결과다! 그런가하면 이런 말도 있다. 또 속았다. 이놈의 기상청, 이참에 구라청으로 이름 바꿔라. 내가 다시는 믿나봐라!

그러나 기상학의 세계는 자잘한 것들에 울고 웃기엔 너무도 거대하고 아름답지 않은가. 날씨는 대기와, 땅, 햇볕이 만들어내는 음악과도 같기 때문이리라.

지구촌, 연결된 세계... 이제는 다소 고리타분하게 느껴지는 표현이 아니더라도, 오늘의 빗방울이 어디서 왔는지, 때맞춰 불어오는 달콤한 공기는, 거대한 눈구름과 살을 에는 바람은 언제 어떻게 우리에게 도달하는지... 나와 연결된 세계를 곱씹다보면 나비의 날갯짓 한 번이 태풍을 불러오는 것이 비단 비유만은 아니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오래전부터 예술가들은 자연을, 날씨를 그들 세계의 언어로 표현하고자 애써왔다. 해서 수많은 걸작이 계절과 날씨와 비와 바람 눈과 흙 따위를 움키듯 생생하게 묘사하려는 노력으로 남지 않았는가. 그 말은 곧 날씨를, 자연을 예술의 언어로 그려낸 감상은 여전히 의미를 갖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비슷한 듯 다르게, 끊길 듯 이어지며 찾아오는 계절을 따라 순간의 압도, 휘몰아치고 스쳐지나가는 세계, 날씨를 악보로 옮길 수 있다면, 가늘게 들려오는 선율처럼 그 궤적을 따라갈 수 있다면, 사계는 그저 풍경의 변화가 아니라 거대한 협주곡의 한 장과도 같을 것이다.

그렇게 느끼는 이에게 날씨는 더이상 존재-외-배경 무언가가 아닌, 춤추고 노래하고 손가락을 두드릴 것을 종용하는 음악과도 같을 것이다. 그런 이에게 세계는 그저 장소가 아니라 거대한 콘서트홀과도 같을 것이다. 경이롭지 않을 수가 없다.

저자는 불규칙한 리듬으로 귀를 울리는 빗방울, 벗겨진 땅에서 불어오는 황량한 바람, 지축을 뒤흔드는 태풍과 눈송이의 춤을 섬세하게 덧그린다. 퍽 낭만적인 만남이나 그러면서도 고요한 서재에 앉아 나누는 담소처럼 느긋하고 낭만적인 문장으로 우리의 세계에 가득한 날씨, 그 원인과 성질을 풀어내면서도 날카로운 시선을 잊지 않는다. 그런데 말입니다. 정말 이렇게만 살 수 있을까요.


노래하는 세계, 세계의 음악, 그것이 날씨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선율 하나 울림 하나를 귀기울여 느끼고 들여다볼 수 있다면 한 해는 비발디의 그것 못지 않게 아름답고 낭만적인 시간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보자.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독자는 이내 두려움에 휩싸일 것이다. 이게 정말 음악이 맞는가? 끔찍한 고요와 불협화음, 절멸의 전주곡이 아닌가? 잠깐 멈춰보라고, 저 끝에 있는 이를 불러야 하는 게 아닌가?

날씨가 사람이라 이 못돼먹은 놈! 하고 탓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세상에 나쁜 날씨는 없다. 낯설고 인간의 생존을 어렵게 하는 날씨와 기대를 배반하는 글러먹은 일기예보는 있겠지만, 날씨 그 자체에 가치를 부여할 수는 없다. 날씨는 징벌이 아니고 어떤 은유적 표현도 아니다. 되려 그것은 소름끼치게 정확한 결과물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인간과 자연의 배은망덕 과실비율은 100:0인 셈이다.

앞서 말했듯 세계의 음악이 날씨라면, 자연에 존재하는 것들이 화답하는 움직임 또한 그의 일부일진대, 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오페라의 이중창처럼 주고받아야 할 대화가 중간에 뜯겨나가 긴 침묵만이 흐르는 것이다. 응답받지 못한 선율은 어그러지기 시작하고, 점점 더 이질적이고 괴로운 소음을 낸다. 현재의 이상기후가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언제까지고 바라보기만 할 수 있다면 허리까지 쌓인 설경과 얼음의 땅에서 살고 싶다고 말해왔다. 여전히 변하지 않은 꿈이지만, 이제는 다음 세대에게 만년설과 빙하의 아름다움, 때맞춰 내리는 고마운 비와 기름진 흙내, 가을날 산천을 수놓는 단풍을 말할 수 있을까, 범람하는 강으로 비옥해진 땅, 맑게 갠 하늘의 무지개가 주는 벅찬 감동을 설명할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된다.

그러니 결국 저 앞에서 던져버린 고리타분한 수사를 다시금 내밀 수밖에 없다(먼지 후후 불었다. 괜찮다). 사랑하라고. 이 계절 이 날씨, 순식간에 밀려와 세상이라는 무대를 뒤덮는 배경을 사랑하라고, 작은 변화에 귀기울이고 손끝으로 따라가며 즐기라고.

그 끝에 찾아오는 깨달음, 이것은 언제든 사라질 수 있으며 동시에 잃지 않을 수 있으니 쉼표 하나, 미끄러지고 떨리는 음표 하나에 기뻐하고 놀라워하는 동시에 소중함을 잊지 말라. 이런 마음이라면 매일의 기상예보를 다르게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렇게. 내일의 박자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다소 빠르고 잦은 박자 변화가 예상되며, 쿵짝짝, 쿵짝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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