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앤더
서수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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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막막하다. 갑갑하고. 영화, 드라마, 만화, 소설... 매체를 가리지 않고 회귀며 빙의가 유행한단다. 새삼스레 그러는 것도 아니고 제법 오래된 소재란다. 계보도를 그려도 충분할 그것을 더듬어보노라면 지금의 기억과 지식을 가진 채로 다시 도전한다면 더 잘 살 수 있을텐데,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텐데, 그 때 그 괴로움을 조금은 수월히 넘길 수도 있을 것도 같은데. 미련에 가까운, 그런 욕망은 인류보편사인가, 하는 의문이 들고야 마는 것이다.
낡고 지친 어른, 닳아빠진 어른이 만드는 세상은 하나같이 청소년기를 아름답고 눈이 시리도록 푸른 낭만의 시기로 그려내는데 정작 우리네 아이들은 어떤 몰골인가. 하이틴 로맨스처럼 가슴떨리는 첫사랑에 울고 웃는가? 방과후 부활동으로 잊지 못할 추억을 쌓는가? 무모한 도전에 덤벼들고 마음껏 미래를 꿈꾸는가? 아니라고만 할 수는 없겠지만 대다수 학생들의 삶은 공부, 경쟁, 입시 이 세 단어로 대강 설명되지 않는가. 아침부터 밤까지, 학교에서 학원이나 과외로, 수업 끝나면 자습, 자습 끝나면 한밤중, 조금 눈붙이고 나면 새벽같이 등교.
식용견, 불법으로 감금되고 사육되어 도축되는, '시장 보신탕집' 개들은 소리에 예민해지면 짖느라 살이 빠지니 부러 고막을 터트린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좁은 우리에서 스트레스로 서로를 공격하면 '상품가치'가 떨어지기에 이빨과 꼬리를 절제당하는 돼지도 다를 바가 없다. 청춘입네 미래네 추켜세우는 청소년들을 대하는 현실이 이와 다를 바가 있는가.
우정의 소중함과 청춘의 아름다움을 외쳐봤자 "지금 이 순간에도 적들의 책장은 넘어간다"느니, "지금 자면 꿈을 꾸지만 공부하면 꿈을 이룬다"는 말이 하루가 멀다하고 쏟아지는 세상에 친구가 어디 있는가. 생활기록부 한 줄에, 시험점수 1점에 기십년의 미래가 오락가락 하는 곳에서 그게 가당키나 한가. 한창 잘 먹고 잘 쉬고 잘 놀아야 할 시기에, 12년 또는 그 이상의 시간을 온통 쏟아부어 결정짓는 것이 겨우 대학이란 말인가. 겨우, 겨우 그것때문에 애써 태어나 자라는 이들이 서로를 향해 눈을 홉뜨고 경계하지 않으면 영영 패배자로 살아야한다고 여기는 것이 이상하지 않단 말인가.

주인공 해솔은 한국의 중심, 그중에서도 가히 '교육의 성지'라고 일컬어지는 대치동 수험생이다. 가장 가까운 친구도 그와 마찬가지로 인생의 '스토리'가 온통 입시에 맞춰진, 부모까지 입시에 올인하는 열성적인 학생이다. 그마저도 편하지만은 않다. 미묘한 신경전, 견제, 기싸움은 기본인 그런 사이. 친구라고는 하지만 정말 친구가 맞는걸까, 마음 한구석이 껄끄러운 그런 사이.
“스토리. 우리한테 필요한 건 성적이 아니라 스토리야. 대학에 가려면 학생부의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를 관통하는 스토리가 있어야 돼. 그러니까 요즘은 공부만 잘해서는 안 된다는 말들을 하는 거야.”(p.11)
엄마의 재혼으로 졸지에 가족에서 떠밀려나와 호주로 유학하게 된 해솔은 한인 홈스테이 가정에 머물지만 자리잡을 생각도, 동갑내기인 주인집 딸 클로이와 친해질 생각도 없다. 그저 악물고 공부만 열심히 하다 좋은 대학에 가는 것, 지금까지 살아온대로, 그렇게.
엄마는 해솔에게 바라는 것이 없어 보였다. 해솔이 호주에만 있으면, 한국에 돌아가서 엄마의 행복한 재혼 생활에 걸림돌이 되지만 않으면 그것으로 된 것 같았다.(p.144)

주인공 클로이는 가족과 함께 호주로 이민 온 학생이다. 이유는 몰라도 그래야 하니까, 착한 딸이고 엄마의 삶 또한 입시에 걸려있으니까,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고 엄마가 애걸해 얻어낸 우등생, 명문대 튜터에게 과외를 받고, 그렇게 의대에 가야한다고 믿는 조용하고 착한 아이. 왜 그래야만 하는지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생각할 기회도 다른 기회도 없었으니 그저 그래야만 하는 그런 아이. 그동안 상냥함을 내밀면 이용해먹는 친절이나마 돌아오던, 자기와는 경쟁할 수 없는 그저 그런 하숙생들과 다르게 자기 자리를 위협하는 무심하고 낯선 해솔을 만나며 클로이의 일상이 뒤틀린다. 혼란스러워진다. 자꾸만 저 아이를 미워하게 된다. 해솔과 친해지고 싶고, 그를 이해하고 싶은 동시에 밉고 싫고 자신을 불안하게 한다.
클로이는 멍하니 해솔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엄마가 한창 보고 있는 드라마를 떠올렸다. 드라마에서는 시드니 도심에 가야 볼 수 있을 크기의 건물이 학원이었다. 그 건물 옆도, 그 옆도 모두 학원 건물이었다. 깜깜한 밤까지 학원의 불빛이 환했고, 건물들 앞에는 학원 버스가 줄지어 서 있었다. 고등학생들은 한밤까지 학원에서 공부하는 것도 모자라 집에서도 자신을 감금한 채 공부를 했다. 가르친다기보다 학대하는 것에 가까운 과외 선생에게 수업을 받고 싶다고 울기까지 했다.(p.51)
“저거 봐라, 한국 애들은 저렇게 공부해. 넌 쟤들에 비하면 맨날 놀고먹는 거야.”
Selective School. 선별된 학교. 선택받은 학교. OC반에서도 우수한 학생이고 학원 셀렉티브 준비반에서도 상위권이던 클로이가 셀렉티브 스쿨 시험에 떨어진 건 선택받지 못했기 때문일까? 누구로부터?(p.115)

주인공 엘리는 호주에서 자란 한국인이다. 엄마도 아빠도 나라도 내가 한국인이라는데, '원래는 여기 있으면 안 될' 신분이라는데 한국어라고는 조금도 모른다. 아주 어릴 때부터 호주에서 자랐고, 당연히 호주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불법으로 개조한 차고에 세들어 살지만, 마약 판매로 용돈벌이를 하지만, 매년 익스펙션 때면 온가족이 세간살림을 싸들고 밤을 보낼 곳을 찾아야 하지만, 엄마도 아빠도 불안정한 일자리를 전전할 수 밖에 없지만. 그게 다 나를 위해서란다. 내가 대학에 가고 취직을 하고, 비자를 받아내기만 하면 모든 게 다 해결된단다. 그걸 위해서.
매일 혼자 있었다. 그런데도 엄마와 아빠는 모든 게 엘리 때문이라고 했다. 엘리 때문에 집에 들어올 시간도 없이 힘들게 일을 하는 거라고. 엘리를 위해. 엘리가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잠을 자고, 혼자 학교에 다니도록 하기 위해.(p.190)
모든 것이 너무나 간단하다는 듯 엘리 엄마는 확신에 차서 말했다. 엘리가 (...) 그 많은 일이 이미 다 준비되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 교실마다 가득 들어차 있는 애들을 보면, 부모의 욕망을 대리 충족해 주는 것을 자기 장래 희망으로 굳건히 믿고 공부하는 애들을 보면 엘리의 엄마 아빠가 바라는 것이 저런 애들이고, 결국 문제는 자신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p.222)

김혼비 작가의 추천사처럼 "꺼지지 않는 산불이 호주 남부를 집어삼키듯 하루하루 잿더미로 변해가는 세 명의 10대를 지켜보는 내내 마음이 정말이지 까맣게 타들어갔다". 자기만의 이야기도, 인생도, 고민할 기회와 마음놓고 자랄 환경마저도, 단 한번도 쥐어보지 못한 그것들은 연대의 싹을 잘라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여성이 서로를 향해 보내는 애정, 서로를 결국 사람으로 인정하기에, 감히 해쳐져서는 안될 존재임을 믿어 의심치 않기에 가능한 그 마음은 여전히 중심을 세우지 못하고 휘청이는 모든 이들을 눈물짓게 할 것이다. 그것이 단지 동정에 그치지 않고 가능성에 대한 희망이자 더이상 이렇게 잃을 수는 없다는 간절한 외침이 되기를 바란다.

깨질 것만 같은 세 사람이다. 저마다의 이유로, 어쩌면 같은 이유로 처절하게 외롭고 지친 세 사람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읽는 내내 독자를 제발 그러지 말라고, 아니, 차라리 한번은 질러야 한다고, 아니, 아니. 애원하고 갈등하게 만든다. 속이 타들어가는 느낌. 까끌하고, 위태롭고, 또 찬란한 동시에 안타까워 어쩔 줄을 모르게 한다. 같은 시기, 같은 고통을 겪어봤기에 모른 체 할 수가 없어 더더욱 그렇다.
그렇다고 이들이 무력하고 순진무구한 소녀들에 불과한가, 그럴리가. 술도 마시고 약도 하고 자퇴에 기물파손에... 별 걸 다 한다. 그러나, 그럴 만한 나이가 아닌가. 그럴 수 밖에 없도록 궁지에 궁지로 몰리지 않았는가. 이해해야 하지 않겠는가. 익히 알려진 문구가 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부서지기 전에, 숨 쉴 틈도 없이 조여오는 세계를 부수고 날아가는 이들을 응원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이 소설은 응원인 동시에 위로이다. 웃을 수 있는, 행복할 수 있는 세계로 날아가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분투하는 모든 이들을 위한 연대와 격려이다. 세상에 태어난 이상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 잊지 않기를. 나도, 당신도. 행복해지기를 포기하지 않기를.
둘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도 한참을 더 웃고, 또 웃었다. 분명히 둘은 연결되어 있었다. (p.182)
언제까지라도 계속 웃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다 같이 울 수도 있을 것 같고, 왜 울었는지 까맣게 잊어버리고 다시 웃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시간이 끝나지 않고 영원히 이어질 것 같았다. 둘은 신이니까. 해솔과 클로이는 사방으로 끝없이 펼쳐진 시간 위에 서 있었다. 버림받고 나서 신이 되어 버린 둘은 그렇게 무한한 세계를 바라보며 킬킬거리고 웃었다.(p.214)
그때 해솔의 머릿속에서 구슬 목걸이가 끊어졌다. 몇 년에 걸쳐 모아온 구슬이 산산이 흩어졌다. 침대 아래로, 서랍장 뒤쪽으로, 문틈으로 사라져 버렸다. 어떤 구슬도 아쉽지 않았다. 해솔은 자신이 구슬 목걸이를 직접 끊어버렸다는 걸 알았고, 그게 중요했다. 그것이 자신이 선택한 서사였다.(p.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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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미래를 꿈꾸는 이주민입니다 - 더 나은 ‘함께’로 나아가는 한국 사회 이주민 24명의 이야기
이란주 지음, 순심(이나경) 그림 / 한겨레출판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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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부정하지 않겠다. 나는 '단일민족의 우수성'을 교육받고 자란 세대이다. '우리 한민족은 외세의 숱한 침입에도 순수성과 단일성을 잃지 않은 우수한 민족'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도록 교육받았고 그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미술시간에 사람을 그리려면 살색(그 땐 살구색이 아니라 살색이었다) 크레파스 하나만 있으면 되었으니, 어떤 시대였는지 대강 감이 잡히지 않는지.
사는 동안 우수성이네 뭐네 그게 다 헛것이라는 생각은 하게 되었으나 여전히 '한국인처럼'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낯설다. 그런 이들이 섞여 사는 사회를 낯설게 느낀다. 내가 사는 곳이 아닌 것만 같다. 지금의 아이들은 어떨까, 특히나 농어촌과 산업단지가 모여있는 동네의 아이들은 모르긴 해도 그맘때의 나보다는 훨씬 다문화가정에 익숙하겠지

주로 백인, 그것도 북미유럽계 비-한국국적자에 아주 익숙한 영상미디어와 별개로 살을 맞대고 살아가는 이주노동자 혹은 비한국인을 대하는 태도는 이전과 달라진 부분이 있을까? 오늘날의 우리는 과연 그들을 '아프리카 사람', '미국 사람', '못사는 나라 사람'이 아니라 그저 사람, 일하고 먹고 생활하고 살아가는 사람으로 인정하고 있을까? 그들이 '진짜 한국인'이 아니기에 차별과 배제가 당연한 것이라면 한국인과 한국계 이민자 2세대가 외국에서 겪는 차별과 배제 또한 당연한걸까?
최근, 중국어 사용자가 많은 지역에 설치된, 중국어로 된 방역수칙 안내 게시물이 논란이 된 적이 있다. 여전히 한국사회에서 '동남아', '짱깨', '조선족'은 욕설과 혐오의 대상이다. 잊을만하면 한번씩 튀어나오는 외국인 건강보험은 수차례의 '팩트체크'와 정정을 위한 노력에도 인식을 바꾸지 못했다. 코미디 프로그램에서는 엉터리 외국어가 수행자만 바꿔가며 재등장한다. 외국인 노동자가 가건물도 아닌 비닐하우스에서 살며 착취당하며 기르고 수확한 농산물은 저렴한 가격으로 밥상에 오른다. 전세계의 맥도날드 지점보다 많다는 한국의 교회에는 당연하려니 하는 사람들이 모스크 건립에는 오열하며 드러누워 결사반대를 외친다. 이 모든 것은 숨쉬듯이 당연하고 '감히' 한국인이 겪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는 일들이다.

표지의 문구처럼 이 책은 총 4개의 주제와 "더 나은 '함께'로 나아가는 한국 사회 이주민 24명의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이주노동자, 이민 1.5세대, 한국인 자녀를 둔 귀화인 등. 그 수만큼 다양하고 급박한 고민과 고통을 안고 있으나 그 기저에는 같은 원인이 있다. 이 사회가 그들에게 끊임없이 하나의 메세지를 던지고 있다는 것. '너희는 우리가 아니다' 라고.
누군가는 미동륵아동으로, 누군가는 이민 1.5세대로, 누군가는 이주노동자, 누군가는 귀화한국인으로서의 경험을 말한다.
각각의 경험담을 읽는 동안 이 문장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당신은 나의 존재를 알고도 잊으려 애쓰지만, 나는 지금, 여기, 당신과 같은 땅에서 살아가고 있다'. 스물 네 명의 목소리가 풀어내는 경험담들은 정말이지, 기함을 할 만큼 잔인하고 모욕적이면서도 소중하고, 때로는 얼굴이 벌개질만큼 부끄럽고 미안한 일 투성이다. 두 가지를 적어둔다.
"E-9 노동자는 사장님이 허락해줘야만 회사를 그만둘 수 있다는 거, 당신은 혹시 알고 있나요? (...) 해고했다고 고용센터에 신고해줘야, 비로소 나는 고용센터에 '사업장 변경 신청'을 할 수 있고, '고용센터에서 알선해주는 회사'에 갈 수 있어요.(p.81)"
"전에 같이 일하던 동료가 그만둘 때 사장님한테 100만원을 주고 허락 사인을 받았어요. 그래서 나도 그만두고 싶다고 말할 때 (...) 사장님은 단번에 거절했어요. "너 데려오는 데 돈 많이 들었어. 너는 100만원 갖고 안 돼."(p.120)"

각각의 본문 뒤에 덧붙여진 저자의 글이 생각을 더할 수 있게 돕는다. 그러니 명쾌한 해답이 없는 생각을 멈추지 않기를 바란다. 이것은 딱부러지는 답을 주는 책이 아니다. 그럴 수 있다면 애시당초 진작에 해결되어 나오지도 못했을 책이다. 하면 되는데 왜 그러지 않겠는가? 미안한 얘기지만 사실 이 말에도 답은 없다. 하면 되고 해야하는데 하지 않는다. 혹자는 그런 구조를 공고하게 쌓아올려 안거하고 있기 때문에, 혹자는 그 과정에서 이문을 얻고 삶을 꾸리기 때문에, 혹자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기에 이 글과 책을 읽을 이들이, 오늘과 내일들의 내가 이 한 마디를 마음에 새기기를 바란다. 우리는 같은 사람이라고, 내가 그들이며 그들 또한 나라고, 서로가 없이 존재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도 없다고, 그걸 잊어서는 안된다고.

어쩌면 이 글과 책을 모두 읽었을 이들이 마지막 장을 덮으며 앞서 던진 질문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기를 바란다. 우리는 달라졌는가? 우리는 그들을 사람으로 대우하고 있는가? 우리가 당해서는 안될 일을 당연히 누군가에게 떠넘기고 있다면, 그렇게 해도 된다는 생각은 대체 어디에서 나오는가? 어쩌면 이주노동자의 사정에도 공감하나 '가난한 한국사람'이 더 마음에 걸릴 이들이 스스로에게 묻기를 바란다. 한국인의 기준은 무엇인가? 한국인은 어떻게 한국인이 되는가? 타국의 '가난한' 현지 고용주에게 착취당하는 한국인에게도 '사정은 딱하지만...'을 말할 수 있겠는가? 뭉쳐야 할 우리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서는 일은 무엇인가?

*함께 읽기를 권하는 책
1. 은유, 『크게 그린 사람』 (한겨레출판)
2. 은유, 『있지만 없는 아이들』 (창비)
3. 설동훈, 『외국인노동자와 한국사회』 (서울대학교출판부)
4. 김희교, 『짱깨주의의 탄생』 (보리)
5. 김무인, 『다문화 쇼크』 (스리체어스)
6.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문학과지성사)
7. 윌 킴리카, 『다문화주의 시민권』 (동명사)
8. 우춘희, 『깻잎 투쟁기』 (교양인)
9. 홍재희, 『그건 혐오예요』 (행성비)
10. 백승주, 『미끄러지는 말들』 (타인의사유)
11. 이란주, 『이주노동자를 묻는 십대에게』 (서해문집)
12. 뻐라짓 뽀무, 『여기는 기계의 도시란다』 (삶이보이는창)
13. 박경태, 『소수자와 한국사회』 (후마니타스)
14. 김달성, 『파랑 검정 빨강』 (밥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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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놀 - 도덕적 선입견에 대한 생각들 세창클래식 15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이동용 옮김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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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창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단언컨대 오늘날 한국에서 가장 많이, 가장 크게 오독되는 철학자를 꼽으라면 니체!를 외치는 사람이 수두룩할 것이다. 그러니 '억울한 철학자 대회'가 열린다면 니체는 사흘밤낮을 울어제껴도 말릴 수 있는 이가 몇 없을 것이다. 오죽하면 좋아하는 철학자로 마키아벨리와 니체를 말하는 사람을 만나면 당장 도망치라는 우스개가 다 돌겠는가. (솔직히 이건 나도 좀 움찔한다. 그치만 다 이유가 있습니다.)
어째서일까. 아마 겉핥기로 입혀진 이미지에 홀려 무작정 돌진했다가 맛도 채 보기 전에 나온 사람이 수두룩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망치를 든 철학자', '신은 죽었다', '노예의 도덕' 등 자극적인 수식어에 솔깃하기 때문일까? 각자의 사정이야 알 수도 알 바도 아니지만,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역시 그의 철학이 그의 생애가 그러했듯 타오르는 것처럼 치열하기 때문이리라. 세상을 향해 망치를 휘두른 철학자, 삶의 많은 순간에 주저앉고 붕괴된 철학자, 누구보다도 뜨겁게 타오르고 종내엔 자기자신마저도 불사른 철학자, 누군가에게는 신성모독자, 또 누군가에게는 광인, 누군가, 나에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어서기를 포기하지 않은 사람. 누군가에게는 신성모독자, 또 누군가에게는 광인, 누군가, 그러니까, 나에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어서기를 포기하지 않은 사람. 니체.

이 책은 잠언집이지 교훈집이 아니다. 모든 문장과 글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의문을 품지 않는 것은 니체에게도, 니체가 지향하는 이상향의 인간에게도 모욕적인 일이 될 것이다. 매순간은 아니더라도 자주, 돌부리에 걸려넘어지듯이 읽었다. 모든 꼭지를 소개하는 것은 마찬가지로 의미가 없으니 인상깊었던 문장과 주석, 그간의 메모를 일부 적어둔다.

p.53 허무주의의 도래는 일종의 '부질없다'는 인식이 와 주는 것이다. (...) 모든 것은 그 부질없다는 말로 절망의 감정에 휩싸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감정의 상태는 극복을 요구한다. (...) 부질없음을 극복하기 위해 그 부질없던 감정을 짓밟고 일어설 수 있어야 한다. 극복을 위해서는 극복될 수 있는 대상에 대한 잔인함이 허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메모. 허무주의는 궁극적으로 투쟁, 투지의 철학인가?)
p.67 미덕으로서의 정교해진 잔인함. (...)우월의 도덕이 결국에는 정교해진 잔인성에 대한 쾌감이라는 사실은 지금도 여전히 너무도 역설적이고 거의 고통스러울 만큼 새로운 사실이기 때문이다. (...) 두 번째 세대에서는 이미 잔인함의 쾌감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오히려 그런 습관 자체에 대해서만 쾌감이 존재한다. 그러나 바로 이 쾌감이 '선'의 첫 번째 단계다.
p.133 동정을 일삼는 기독교인. 이웃의 고통에 대한 기독교적 동정의 이면에는 이웃의 모든 기쁨, 즉 그가 원하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한 기쁨에 대해 깊이 의심하는 측면이 있다. (메모. 전능하고 선한 유일신의 세계에서 타자에 대한 도덕은 배제와 처벌을 전제하는가?)
p.232 그러나 우리는 이런 사태에 대항해서, 그동안 이기적인 것으로서 비난받아온 행위들을 행할 수 있는 선한 용기를 사람들에게 돌려주고 그것들의 가치를 회복시키고 싶다. (...) 우리는 행위들과 삶의 모든 모습에서 악한 것으로 인식되는 겉모습을 거둬 낼 것이다! (...) 사람이 자신을 더 이상 악하게 간주하지 않으면, 사람은 악하기를 그만둘 것이다! (메모. 니체가 양차대전기를 살아냈다면 그의 인간본성론은 지금 전해지는 것과 다른 내용이었을까?)
p.402 가장 위험한 망각. 우리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잊는 데서 시작하고, 자기 자신에게서 사랑할 만한 어떤 가치도 발견하지 못하는 것으로 끝낸다.
p.427 자신의 비참함을 넘어서기 위해. 자신의 품위와 중요성의 감정을 만들어내기 위해 희생될 타인을 구하는 자들은 긍지에 찬 사람들로 보인다. (...) 그들은 잠시 자기 자신의 비참함을 넘어서기 위해 그들 주변의 비참함을 필요로 한다! (메모. 현대 1인미디어의 범람, 자극적인 고통의 전시와 장기적이고 다양한 삶을 고려하지 않는 자기계발론이 도덕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시대에 이 비판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참 칼침 맞아 죽지 않은 게 용하지 않나 싶을 정도로 신랄하다. 순간순간 의구심을 품은 부분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무례하게까지 느껴지는 비판들에서 호소와 절박함을 읽어내게 된다. 그의 외침이 끓어넘쳤던 시대와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던 상황을 곱씹어보노라면, 그래, 조용히 중얼거리게 된다. 일상의 어느 순간에 아, 하는 탄성과 함께 깨닫는 것처럼.
그러니 앞서 이야기한 '꺼림칙한' 이미지를 정확히 말하자면, 니체가 아닌 니체의 일면을 곡해하는 사람에 대한 경계라고 할 수 있다. 차라투스투라도 짜라두짜도 니체도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식의 지배론이나 모든 것을 근성으로 치부하는 자기계발론을 말한 적이 없다.
니체를 사랑하는, 그의 칼날같은 비판을 사랑하고 그에게서 타인을 짓밟고 올라서는 승자의 논리가 아니라 세상에 대한 연민과 삶에 대한 사랑을 읽어내는 이와 같이, 지쳐 쓰러져 하염없는 채찍 아래 늘어진 나귀를 끌어안고 통곡했다던, 무너져내린 마음의 철학자가 세상에 전하는 호소에 마음아파하고, 부끄러워하고, 끄덕이고, 분노하는 이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니체를 차별과 혐오의 도구로 이용하는 사람을 경계한다.

덧. 목차에서는 본래 원문에는 순서가 없었으나 출판사가 전집 발간 시 편집상의 편리함을 위해 차례를 더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저자의 의도대로라면 순서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는 의미리리라. 이 판본 또한 분권화된 목차를 따르고 있으나 마음 내키는 대로 앞뒤를 오가며 읽어도 좋겠다. 처음부터 끝까지 목차에 따라 읽는 것과 그날그날 펼쳐지는 부분에서 뛰어넘고 돌아가며 읽는 것 두 가지를 다 해보았으나 경우마다 색다르게 좋았으니 각자의 성향에 맞게 읽기를 권하고 싶다.
자칫 잘못 이해하기 쉬운 원문 곳곳에 옮긴이의 주가 더해져 이해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 원문 텍스트에 대한 보충설명 뿐만 아니라 원저 출판 당시의 사회상, 역자의 개인적인 견해가 함께 담겨있어 깊고 넓게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니체의 『아침놀』과 역자의 『아침놀 주해』를 함께 읽는 느낌. 니체과 그의 저작에 대한 관심은 있지만 선뜻 펼치기엔 겁이 나는 독자에게 친절한 발판을 제공해줄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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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스티븐 킹 지음, 진서희 옮김 / 황금가지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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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황금가지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식스 센스"를 아는가. 지금이야 반쯤 고전(사람에 따라서는 퇴물) 취급이지만 처음 수입되었을 땐 희대의 센세이션이었던 그 영화. 만일 죽은 사람을 볼 수 있다면 그건 축복일까? 주인공이 멋지게 활약하고 반쯤 날아다니는 애니메이션에서는 그럴 지도 모르겠다. 죽은 자만이 알고 있는 진실을 파악하고 그들과 소통하고... 그런데 만약 그들의 몰골이 영 처참하다면? 얼굴이 반쯤 날아가고 없다든지, 그때도 그걸 어떤 강점 비슷한 단어로 부를 수 있을까. 더욱이 본인 의지와는 하등 관련 없는 일이라면. 이쯤되면 이 꼬라지 안볼란다! 하고 눈을 뽑아버려도 썩 할 말이 없을 것도 같다. 애절한 그리움과 미련, 중요한 진실을 파악하고 활약하는 우리의 주인공! 비슷한 게 아닌 이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숨기고픈 게 하나쯤은 있고 그걸 알아내도 좋을 게 없는 경우가 허다하니.

이야기는 밑도끝도 없는 사과로 시작한다. 제이미 콘클린, 우리의 주인공, 챔프. 때로는 모든 게 지나고나서야 풀어놓는 이야기가 더 무서울 때도 있다. 그러니 아예 말을 해주지 않는가. "이건 공포물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잘 읽어보길 바란다(p.12)."라고.
작중 주인공은 수차례 이것은 공포물이라고 언급하지만 공포보다는 슬픔이 느껴졌다. 물론 그 어린아이가, 아니 누가 겪기에도 지나치게 잔인했고 견디기 힘든 일이었겠지만 우리는 이 이야기가 누구의 입장에서 쓰여진 것인지를 알고 있다. 작가가 쥐어주는 독자의 특권이랄까. 성장기이자 이별기에 가까운 이야기다. 이별과 상실의 의미를 깨닫고, 고난과 애도의 과정을 거쳐 한층 크게 자라나는 그런 이야기. 어쩌면 상실에 익숙해지고 삶의 굴곡과 타인의 악의, 개인적인 삶을 이해하는 과정이 곧 성장이 아닌가. 분명 장르소설이다. 재미를 위해 쓰인 작품이지만 그 안에는 어린 아이의 성장통과 저자가 겪어온 시간이 담겨있다.
"하나만 더 여쭤봐도 돼요?" 바보같은 질문이었다. 죽은 이들은 우리의 질문에 반드시 대답을 행만 한다. 그 대답이 우리 마음에 들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 "응." 나는 질문을 했다(p.243).

거장의 귀환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싶지는 않다. 일단 집에 간 적이 없는데 어딜 봐서 귀환이에요... 거장의 출근, 정도로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짧은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도 재미가 보장된. 300쪽이 넘는 내용, 소설이라고 해도 그렇게까지 짧은 분량은 아니지만 앉은 자리에서 쭉 읽어내릴 정도로 흡입력있는 문장이다. 활자임에도 불구하고 영화처럼 생생하게 느껴지는 글쓰기에는 아주 통달한 양반이 아닌가. 역시.
죽은 작가의 미완작을 대필하는 장면에서는 스티븐 킹이 죽으면 저렇게 되는 것이 아닌가... 잠시 상상해봤지만 허연 알궁둥이(조금 점잖게는 '배관공의 계곡')를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을 질끈 감았다. 이 글을 읽을 이들과 미래의 나를 위해 여기까지만 말하기로 하자.

개인적으로 다소 아쉬운 분량이기는 하다. 개인적인 마음으로는 그 모든 일 이후로 어떻게 살았는지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그 능력이 어디로 어떻게 이어질 것인지 시시콜콜 하나하나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급으로 상세히 써주기를 바란다. 회고록이 아니라 일대기였으면 좋겠다니까요, 한 열 권쯤 되는. 어디까지나 개인의 취향이지만. 연작으로 이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없지는 않으나 때로는 아쉬워도 딱 이만큼이 적절할 때가 있다. 작중의 미완작이 이 작품과 겹쳐지거나 또다른 세계로 연결될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또다른 제이미 콘클린이 대필을 가능케 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러려면 누구 하나는 유령이 되어야 하니 그건 좀 아쉬우려나.
어쨌든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언젠가는 알게 될 수도 있겠지. 나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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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할 권리
아미아 스리니바산 지음, 김수민 옮김 / 창비 / 2022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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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창비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차에 알라딘에서 이런 리뷰를 보았다. "소위 '섹스할 권리'라는 게 있는 것 마냥 작동하는 욕망의 역학이 한국에서도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한다면(Justread, 2022)."
선거권 보장으로 대표되는 시작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페미니즘 운동은 여타 인권운동과 마찬가지로 숱한 부침을 겪고 반대와 의혹, 조롱에 부딪혀가며 발전해왔다. 주류 남성 집단을 포함한 외부로부터의 탄압과 공격은 말할 것도 없고, 기본 전제로서의 '우리'를 식별하는 일조차 한순간도 조용할 날이 없지 않았던가.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21세기 페미니스트의 시선으로 우리는 무엇을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지금의 위치와 나아가야 할 길을 어떻게 말하고 또 넓힐 수 있을 것인가.
저자 아미아 스리니바산은 숱하게 제기된 문제라고 할 수 있을 여섯 가지 논제를 통해 페미니스트 독자들과 그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 대해 날카로운 의문을 제기한다. 페미니즘은 도덕주의와 궤를 같이하게 될 것인가? '위험요소'를 차단하고 '정신적인 가치'에 몰두함으로써 '올바른 미래'를 열어나갈 수 있을 것인가?

각 장의 제목이기도 한 주제들은 잊을만하면(이 수식어가 진정으로 느껴지기를 바라는 사람이 차고 넘칠 것이라는 확신에 더 화가 나지만) 온갖 인터넷 게시판과 칼럼, 토론 프로그램과 정치인의 발언으로 구설수에 오르는 내용들이다. 혹자는 진정성을, 또 다른 누군가는 자율성과 무결성을 그 때 그 때 입에 맞게끔 곡해해서 떠벌리고 그것이 곧 페미니즘 자체와 페미니스트들, 페미니즘의 주체가 되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가해지는 공격이 되는 상황이다.
"누가 남성을 음해하는가?', "섹스할 권리". "포르노를 말한다", "학생과 잠자리하지 않기". 한국 사회에서 'me too 운동' 이전에도 유구하게 존재해왔던 '꽃뱀 신화'를 모르는 이가 몇이나 될까. 아마 잠재의식 속 희미한 편견으로라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을 찾기가 더 어려울 것이다. 정말 허위 고발이 늘었을까? 정말 '간악한 여성이 강력한 처벌법을 이용해 선량한 남성을 사회적으로 매장하려는 시도'가 크게 증가했으며 그것은 실질적인 위협으로 느껴질 만큼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는가? 누구에게나 성적 접촉을 할 권리가 있는가? 성적 접촉 또는 관련 행위를 통한 욕구 충족은 국가 또는 사회가 개개인에게 보장해야 할 권리에 해당되는가? 한때 한국에서도 제기되었던, 남성장애인에게 성적 욕구를 해소할 대상을 제공하는 것을 복지라고 할 수 있는가? '아무도 욕망하지 않을 못생기고 사악한 여자들'이 '매력적이고 순종적이지만 성적 적극성을 띄고 나와 접촉할 여성'을 탄압하고 있는가? 포르노는 여성억압에 일조할 뿐만 아니라 성적 물화의 원인으로 기능하는가? 여성을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간주하지 않는 사회가 된다면 그것만으로 성평등과 권리신장은 가능한가? 여성 자신의 성적 욕망은 어떻게 간주되어야 할 것인가? 4B운동은 유의미한 해답이 될 수 있을까? 학습지도자 위치에 있는 남성이 여학생과 성적 관계를 맺는 것은 개인의 자유로 해석되어야 하는가? 교수자와의 성관계를 통해 학생 또한 일종의 권력 위계나 성적 만족감을 획득하지 않는가? 무엇보다, 성인간의 '상호합의'를 통해 이루어진 일이 아닌가?

어쩌면 이 책을 읽을 페미니스트 또한 (높은 확률로 읽지 않을) 안티페미니스트들과 마찬가지로 저자의 질문과 지적에 반감을 표할지도 모른다. 명쾌한 해답을 주지 않는 데에 불만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대체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와 너희를 딱 잘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결국 근본적으로는 사람을 사람으로 존중해야 할 일이 아니던가? 유구히 제기되어온 이 문제에 언제는 나아갈 방향이 없었으며 해야한다고 다 하는 사람이 있었던가? 고뇌를 주는 책이고, 불편감을 주는 지적들이다. 그러나, 불편한 일은 불편하게 해야한다. 나의 편안과 권력과 쾌감이 누군가를 짓밟아야 얻어낼 수 있는 것이라면 온당히 그 발을 치우고 함께 살아갈 방도를 찾아야한다. 혹자는 묻는다. 그렇게 된다면, "페미니즘은 여성의 정치적, 사회적, 성적, 경제적, 심리적, 신체적 종속을 끝내면 세상이 어떻게 될 것 같으냐고 묻는다(p.8)." 이에 저자는 이렇게 답한다. "우리도 모른다고, 한번 해본 다음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자고(같은 쪽)."

화려한 수식어보다, 강렬한 추천사보다 직접 읽었을 때 휘몰아칠 분노와 혼란으로 더 큰 의미를 가질 저작이다. 이 책이 새로운 고전이 될 수 있을까. 바라건대, 최소한 지금보다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기를, 언젠가는 지금의 폭력과 차별을 부끄러워하고 당연하지 않은 것으로 여길 수 있기를 바라며 서문의 일부와 인상깊었던 문장으로 이 글을 끝맺고자 한다.
"페미니즘은 다양한 이해관계가 언제나 하나로 수렴될 것이라는 환상, 우리의 계획에 예상 밖의 일이나 달갑지 않은 결과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는 환상, 정치가 안락한 장소가 될 것이라는 환상에 안주할 수 없다(p.13)."
"한 무리에게 샌드위치를 서로 사이좋게 나누어 먹으라고 요구하는 것은 타당할 수 있지만, 섹스에 대해서도 똑같은 요구를 할 수는 없다. 여기서 통했다고 저기서도 통하란 법은 없다. 섹스는 샌드위치가 아니며 사실 다른 어떤 것과도 같지 않다. 정치적으로는 이토록 분열되어 있으면서도 이만큼이나 침범할 수 없는 사적 영역은 달리 존재하지 않는다. 좋든 나쁘든 우리는 있는 그대로 섹스를 이해할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p.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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