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공간에서 너를 그린다 - 세월호참사 10년, 약속의 자리를 지킨 피해자와 연대자 이야기
세월호참사 10주기 위원회 기획, 박내현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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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10년 전 바로 그 일의 정확한 경위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때의 충격을 기억하지 못 하는 이는 많지 않다. 적어도 "오보"로 순식간에 고꾸라진 희망과 지난한 투쟁을 지켜본 이라면.

특별하지 않은 날, 보통의 어느 날, 수십 수백명의 사람이 해상 재난으로 죽었다. 구조할 시간도 여력도 있었건만 미흡한 초기 대응과 완전히 엇나간 후속 대처로 살랄 수 있었던 목숨을 잃었고, 책임자는 제대로 처벌받지 않았으며, 슬픔은 왜곡과 모욕으로 얼룩졌다.

원인과 추이를 두고 수많은 말들이 오갔다. 생각이 있든 없든, 돌아가는 사정을 알든 모르든 모두가 말을 얹었다. 그렇게 오가는 말들에는 슬픔이, 분노가, 공포가 있었다.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 대다수였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고, 어떻게 책임을 지는 사람이, 국가가 무고한 사람을 버릴 수가 있느냐고 물었을 것이다.


그러나 모욕과 조롱 또한 적잖이 목소리를 높였다. 누군가는 "내란세력"의 조작을 의심했고, 누군가는 자기 이득을 위해 꾸며내기를 원했으며, 누군가는 "놀러가다 죽은 걸 왜 남을 탓을 하느냐" 소리를 질렀고, 또다른 누군가는 알지 못하는 죽음을 조롱하기 바빴다.

차마 사람이 사람에게 할 수 없는 말이 시류와 집단과 권력 뒤에서 던져졌다. 죽은 사람과, 죽은 것과 다름 없는 사람과, 살아남은 사람, 그리고 남겨진 사람들에게.

10년, 강산도 변한다는 세월이 흐른 지금, 어쩌면 그때부터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이 "이제는 그만 하라"고 말한다. 잊을 떄도 되지 않았느냐고, 왜 지금까지 물고 늘어지느냐고, 이미 끝난 일이 아니냐고.

정말 그런가? "이제"와 "때"와 "끝난"은 언제, 누구에게 말해질 수 있는가? 슬픔에는 끝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애도에는 끝이 있어야 하는가?


여전히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 기억을 넘어 끝나지 않은, 몇 번이고 반복되는 참사가 현재의 자리에서 쓸려나가지 않도록 있는 힘껏 붙잡는 사람들이 있다. 증거를 남기고, 책임자에게 책임을 다할 것을 요구하고, 잊혀질 수 없는 것을 사라지지 않게 보존하여 다시는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있을 수 없는 일은 한 번으로 족하다. 그것이 정말 상식 밖의 일이라면, 단 한 번의 과오로도 충분하다. 다시는 일어나지 않아야 마땅하다. 정말 그러한가. 그것들은 정말 지나간 일이 되었는가?

"지나간 일"은 책임자가 마땅한 책임을 졌을 때, 해결되어야 할 것이 모두 해결되었을 때, 한 점의 의문도 남지 않았을 때 비로소 말해질 수 있다.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때, 그것은 비로소 과거에 안착할 수 있다.


이는 그렇게 되지 못한 우리 사회의 수많은 참사들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는 말과도 같다. 그것들이 과거의 일이기를 원하는 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살아남아진 사람, 남겨진 사람일것이다. 잊히지 않기를 바라는 이는 역설적으로, 그것이 기억 너머로 자연스레 사라지기를 바라는 이일 것이다. 그래도 되기를 가장 간절히 바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아직도, 말만 들어도 아는 재난들이 있다. 너무도 끔찍해서 오히려 현실로 느껴지지 않는 죽음들이 있다.그것들은 제대로 기억되고 있는가? 우리와 그들에게는 충분히 슬퍼하고 분노하여 받아들일 시간이 주어졌는가? 우리 사회에서 '재난'의 지위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어디의 누구에게라도, 재난을 각오해야 하는 일상은 당연하지 않다. 죽음으로 내몰려도 되는 사람은 없다. 세월호 참사 10주기를 맞아 세월호 희생자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그 때 그 시간에 머물 수밖에 없는 이들의 이야기를 읽는 마음은 여전히 참담했다.

사람이 사람을 향하는 마음을 한 단어로 모으면, '차마'일 것이다. 차마 어떻게 하지 못하는 그 마음이 사람을 돕게 하고 불의에 나서게 하는, 함께하도록 하는 힘일 것이다. 차마 모른척하지 못하는, 차마 잊지 못하고 차마 등돌리지 못하는 이야기에서 나는 세상 무엇보다 깊은 슬픔과 사랑과 큰 힘을 보았다. 그렇게 말하고 싶다.


*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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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가 잠든 사이에
스테이시 에이브럼스 지음, 권도희 옮김 / 비채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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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한 남자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시작부터 암시되는 죽음과 함께. 망상에 사로잡힌 남자는, 원래도 온화하고 유쾌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썩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사람처럼 보인다.

사사건건 불만에 의심을 달고 사는 데다 성미는 불같고 도무지 존중이라고는 모르는, 그의 정신은 무너져가고 있다. 현실과 상상을 혼동하고, 심장처럼 단단했던 기억은 나날이 흐려지고 있다. 누가 적인지, 아군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그러나 조금만 시각을 달리하면 위기와 불안의 낌새를 알아차릴 수 있다.

문제는 그가 평생을 연방대법관으로 살아온, 사법체계의 정점에서 수많은 이들과 권력의 향방에 영향을 미쳐온 거물이라는 데에 있다. 신념과 열정만큼 적도 많아졌다. 심지어 그의 죽음과 파멸을 가장 강력하게 소망하는 이는 바로...

그의 몰락은 그 자신만의 불행에 국한되지 않을 것이다. 누구를 의지할 수 있는가, 누구를 믿어야 할 것인가. 그는 궁지에 몰려 있다. 거대하고 강력한 적의 위협을 피해 아주 중요한 것, 물러서서는 안 되는 것을 단단히 숨겨야 한다. 적으로부터, 그 자신으로부터.


주인공 에이버리의 삶은 순탄치 않다. 마약중독자인 어머니, 가난, 불안한 직장. 그는 뛰어난 지성과 끝없는 지적 호기심을 가졌으나, 현실은 자꾸만 발목을 잡는다. 여자라서, 유색인종이라서, 나이가 아주 어리지 않고 당당한 매력이 있지 않아서...

수없이 깔보고 가장 중요한 성과는 안중에도 없는 사회에서 몇 안 되게 그를 사람으로, 정확히는 "그나마 덜 한심한 부하"로 여겨준 이가 있다. 그 자신도 엄청난 노력과 철저한 자기관리, 정의를 위해서라면 물러서지 않는 심지로 살아온 사람.

청천벽력같은 소식, 그가 죽음에 임박했다고 한다. 여기까지는 가슴 아픈 일이나 여전히 일상을 살아갈 수는 있다. 문제는 별다른 접점도, 친밀감도 없었던 사이에, 냅다 법적 후견인으로 지정되었다는 소식이다. 멀쩡히 살아있는 배우자와 자녀를 두고, 대체 왜?

p.29 "그녀에게 전해... 해답을 구하려면, 동쪽(East)에서 찾아보라고. 강(river)을 봐야 해. 그 사이(in between)에 있는. 광장(the square)으로 가야 해. 라스커. 바우어. 날 용서해(forgive me)."


여기서 이야기는 처음으로 돌아간다. 뭔진 몰라도 위기에 처한 남자, 하워드 윈은 에이버리를 믿고 모든 것을 맡겼다. 졸지에 얼마 남지도 않은 평범한 일상을 홀랑 빼앗기고 그의 수수께끼를 넘겨받은 에이버리에게 말 그대로 삶을 뒤흔드는 압력과 위험이 몰려드는데...!

뒤로 갈수록 상상도 못했던 치밀한 복선을 만나게 될 것이다. 아니, 여기까지 내다봤다고? 불세출의 천재란 대체 뭘까, 정말 존재하는 것일까? 평범한 사람보다 한 수, 아니, 때때로 상상도 못 할 경우의 수까지 내다보는 이들이 간혹, 아주 드물게 있기는 하다. 비범하다는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초월적인 사고력을 지닌 자들. 그들은 아주 쉽게 오만해진다.

물론 그 오만은 개인적인 냉소나 폭력성으로 향하지만은 않는다. 그보다는 오만의 심부가 타인을 자신의 목적에 맞게 "사용"하는 데에 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나와 타인의 생각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행동과 개별 사건들의 궤적과 접점을 극도로 치밀하게 추적하고 예측할 수 있기 떄문에.

p.206 하워드 윈은 무례하게도 아무 설명도 없이 에이버리를 함정에 빠뜨리고, 그녀의 인생 전체를 위험에 빠뜨렸다. 에이버리의 룸메이트가 집에 돌아오는 것을 두려워하게 만들었고, 모르는 사람들이 에이버리를 마치 체스판 위의 말처럼 다루게 만들었다. 쓸모없는 힘을 가지고 있고, 움직임에 제약이 있는 불운한 비숍처럼.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대의를 위해 장기말처럼 "배치하고 운용하는" 이들은 일종의 희생자가 되기도 한다. 비열하지 않은가. 이 오만의 핵심을 살짝 비껴갈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뿐이다. 최고의 승부사가 되는 것, 자기 자신마저 하나의 말로, 희생패로 써먹는 것.

이쯤에서 묻게 된다. 제목의 "정의"는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누가 악인가. 누가, 정의의 신의 눈을 가리고 그 칼날을 제 손으로 휘두르려 하는가. 이것은 신념의 이야기이다. 취약하고, 절박한 신념.

아무것도 예상하지 말고, 빈 손으로 따라가기를 권한다. 그렇게 우리 사회를 돌아보기를 바란다. 정의의 신이 눈을 가린 사이 우리는, 어디를 헤매고 있는가. 연약한 선은 끝끝내 살아남을 수 있을까.

p.524 "그 사람은 애국자가 아니에요. (...) 당신도 마찬가지고. 당신들은 괴물이야." (...) "숭고한 합동작전이었어. 인간의 목숨은 전쟁에서 피해를 입는 법이야. 실수하지 마. 우리는 전쟁 중이니까. (...) 순진하게 굴지 마. 나라를 위한 일이야. 난 내 조국을 위해 봉사해. 필요에 따라 외국과 국내에 있는 모든 적들로부터 조국을 지켜왔어." (...) "당신이 죽인 사람들은 적이 아니에요. 그리고 당신이 왜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출판사 비채에서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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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과 정전
오가와 사토시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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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겹도록 해온 말이지만 사람의 바깥을 상상하는 글은 사람의 이야기다. 사실 사람이 쓴 글 중에 사람의 이야기가 아닐 수 있는 게 얼마나 되겠냐만은. 사람-너머의 가능성을 상상하는 이야기는 사람의 본질적인 속성들을 강하게 부각한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픽션만큼 현실과 단단히 연결되는 장르는 없다.

세상에 좋은 작품은 수없이 많겠지만, 기분 좋은 허탈함과 함께 패배를 인정하거나, 정신없이 말려들어가 덮을 때쯤엔 훌쩍훌쩍 울게 하는 작품을 만나는 건, 일종의 행운 같은 것이다. 단순한 얄미움을 넘어 "마음을 탈탈 털어먹혔다"고 말해도 좋을만한 수작을 만난다는 것은.

거칠게 말해, 썩 옳다고 생각하는 표현은 아니지만, "이거 순 미친놈 아니야?"를 끌어내는 캐릭터, 전개, 설정, 작가를 만나는 경험은 뭐랄까, 독자의 세계 저 깊은 곳을 바꿔놓는 일이 아닐까.

p.33 "정확히 말해서 타임머신이 가짜라는 전제하에 생각했을 때 유일하게 합리적인 트릭이었다면... (...) 다케무라 리도는 천재야. 마술사상 최고의 천재. 이런 트릭을 고안해서 실행에 옮기는 건 천재 아니면 미친 사람밖에 없어. 만약 그 사람이 천재가 아니라면..." 누나가 그다음 한 말을 나는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타임머신이 진짜였다는 거지."


사실 일본 작가의 추리소설, 적어도 아 이건 일본 소설이다, 하는 느낌이 강하게 묻어나는 작품을 그다지 기꺼워하지 않는다. 분명 '좋아하지 않는다' 와는 다르다. 오히려 촘촘한 묘사와 집착적으로 느껴질 만큼 밀착된 서술을 아주 좋아하는 편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추리력, 개중에서도 독자의 예상과 시야를 뛰어넘고 빈틈을 찌르는 내용이라면? 좋다. 아주 좋다. 그와 별개로 약은 오른다. 열받아...! 좀 더 솔직히는, 니가 언제 그랬어! 언제 어디서 몇 시 몇 분 몇 초!!! 하고 바득바득 우기고 싶어진다고 해야 하나...

그런데, 이 질문(보다는 억지겠지만)은 과연 성립될 수 있는 것인가? 언제 어디서~는 무엇을 기준으로 하는가? 어디가 앞이고 뒤인가? 언제를 시원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

p.106 "세상의 시간으로 따지자면 대략 이십 몇 년 뒤, 당신이 첫 승리를 거둔 밤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면 지난번 뵈었던 것은 미래 같지요. (...) 그러나 ‘미래’란 없습니다. 이것은 과거의 이야기입니다. 지난번도, 이번도, 그 지하실에서 보낸 밤에서 보면 둘 다 과거입니다."


작가는 여섯 편의 단편을 통해 묻는다. 한 존재와 "역사"를 꿰뚫는 거대한 시간의 경계를 일순에 무너뜨린 텅 빈 곳으로 독자를 초대해, 아니, 끌어 앉혀 묻는다. 당신은 단 한 번의 기적같은 순간을 위해 모든 것을 걸 수 있습니까? 남은 일생이 아닌 과거와 현재와 미래 모두를 뒤틀어 바꿔버리는, 단 한 번, 순간의 도박을 위해.

죽은 자는 말이 없으나, 남겨진 것은 말을 하지요. 존재가 맞닿아 연결됨으로서 전해지는 것은 무엇을 말할 수 있습니까? 목적이 앎에 선행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집니까? 우리는 알지 못하는 것의 단서를 따라 처음으로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모두가 똑같은 개성을 추구하는 세계에서 낭만을 지켜낸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마지막으로, 찰나의, 아주 작은, 단 한 번의 신호가 바꿔버리는 거대한 역사를, 배아의 잠재태로 파고 내려가는 상상조차 못 할 이 기획을, 존재의 가능성을 걸고 맞부딪히는 싸움에서 당신의 당연함은 어느 희미한 가능성과 우연의 조합임을 알고 있습니까?

"제 이야기를 들은 당신은 시간의 개념 자체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했듯 픽션은 사람의 이야기, 현실의 틈새를 벌리고 비트는 환상이라고 생각하는 독자에게 아주 반가울 책이다. 그러나 말랑말랑하다거나 설레는 내용은 절대 아니라, 뭐랄까…

충격을 넘어서는 경악과 감동을 야 빨리 집어넣어!!! 눈치채기 전에 비벼!!! 흔들어섞어!!! 짠!!! 해서 저쪽 작가분께서 보내시는 겁니다, 하고 쓱 밀어주는 느낌이랄까. 분명 신기하고 즐겁고 맛도 있는데 어째 한구석이 찜찜한... 거 가진 것 좀 다 보여봐요. 수상한 놈일세, 싶은 동시에 우리 이제 친하죠? 또 볼거죠? 기대하게 만드는 작가랄까.

전체적인 흐름이나 메인 테마가 추리소설이냐, 하면 꼭 그것만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사회 소설이냐, 하면 그렇게 볼 수도 있다고 하겠다. 혹 SF냐 묻는다면, 그렇기도 하다고 답할 수도 있겠다. 어쩌면, 혹시나, 표지에 눈길을 붙잡혀 "대체 이게 뭐냐?"고 묻는 이에게는... 뭐긴 뭐예요 심연이지... 와 함께 눈을 피할 수밖에.

여러모로 참 수상쩍고 미심쩍은 부분이 많았다. 그러나, 단언컨대, 즐겁다. 이 작가가 열어젖힐 시공간으로 언제든 주저없이 뛰어들고 싶을 만큼. 여름이 오기 전에 만날 수 있어 다행이다.

이 모든 말은, 당신의 과거에서, 혹은 미래에서, 어쩌면 존재하지 않았던 현재에서 기록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출판사 비채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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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인된 지식 - 우리는 최초의 지식을 어떻게 획득했는가
조르조 발로르티가라 지음, 김한영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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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은 어디에서 오는가? 인간은 분명 고도의 지성을 가진 존재이다. 그러나 우리의 본질은 동물에 있다. 인간의 뇌는 결국 동물의 뇌다. 인간은 추상적인 정보를 처리할 수 있다. 창조하는 동물이다. 무형의 개념을 자유자재로 조작하여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내고 다른 개체에 전달할 수 있도, 역으로 수정하고 학습할 능력이 있다.

인간은 반사상, 혹은 창조되거나 변형된 이미지에서 특정한 개체-원본을 인지할 수 있다. 인간은 이야기를 만들고, 기억하고, 정보를 가공하고 개념을 조작할 수 있다, 안간의 인지능력은 고도로 발달된 뇌와 학습의

그 모든 우수한 능력들과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동물이다. 이족보행을 얻은 대가로 인간은 다른 동물에 비해 미숙한 개체로 태어난다. 신생아가 목을 가누고 사지를 운용하며, 체계를 갖춘 언어로 소통하는 데에는 다른 종보다 훨씬 긴 시간이 필요하다.


여기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인간의 지식은, 학습할 수 있는 능력, 인지능력은 어디에서 오는기? 그것은 동물로서의 인간 개체에 갖추어져 있는 생득적 능력인가? 아니면 그조차도 일련의 문화적 학습을 통해 이루어지는가?

우리가 당연한 수준으로 간주하는 일련의 인지적 능력은 본능에 의한 것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다른 종에게서도 유사하게 나타날 수 있는가? 그를 가능케 하는 요인에는 무엇이 있는가?

p.33 가속에 이어 감속하는 이 지향성 패턴은 목표물에 다가가는 손동작의 특징이다. 물체를 잡기 전에 손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생각해보자. 먼저 물체를 향해 속도를 높이고 그런 뒤 가까이 다가갔을 때 속도를 늦춘다. 심지어 자궁 안에서도 손은 이러한 가속-감속의 패턴으로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신생아의 이 지향성 선호는 태아가 자궁 안에서도 자기 자신의 움직임을 아는 데서 파생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것을 왜 궁금해하는가? 단지 '언제부터'에 그칠 수도 있겠지만, 신생아기부터 영유아기까지의 폭발적인 지적 성장을 지켜본 적이 있다면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물을 수 있겠다. 어째서 이것을 배울 수 있는가? 대체 얼만큼의 가능성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일까?

우리는 본능적으로 두려움의 대상을 아는가? 무의식적인 지식의 근원에는 뇌가 있는가, 혹은 유년기 학습의 영향이 있는가? 놀랍게도, 개중 많은 부분이 동물적 본능에 기인한다. 우리는 태어나기도 전부터 알고 있는 셈이다. 어떤 지식은 인식에 선행한다. 우리는 알기도 전부터 알고 있다. 아는 줄도 모르는 것을 아는 셈이다.

p.121 감각적 데이터로부터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서는 제1법칙 ((...) 고체는 공간을 배타적으로 점유한다는 법칙)이 그러한 습득 과정을 유도해야 하는데, 그 법칙은 구체적인 감각 경험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태어날 때 이미 뇌 속에 선천적인 성향으로 갖춰져 있다는 것이다.

p.143 신경과학자 안드레아스 니더는 뉴런이 수에 선별적으로 반응하는 것은 훈련하지 않아도 자연발생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임을 밝혀냈다. (…) '수치 뉴런'의 민감성이 발달하는 데는 수에 대한 특별한 훈련이 필요하지 않으며, 그 발달은 자연 발생적으로 이뤄진다고 볼 수 있다.


저자는 각인을 포함해 병아리와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여러 연구를 바탕으로 각인을 포함한 선천적 인지 능력의 영역과 가능성에 대해 풀어 설명한다 (약간 싸한... 어쩐지 나를 경멸하는 듯한 눈길의 일러스트로 일련의 낯선 개념에 부담을 덜어주는 상냥함은 덤).

우리는 다시금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언제부터, 얼마나 알고 있는가? 인간은 왜 배울 수 있는가? 우리가 동물이면서 동물 이상의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은 무엇에 기인하는가?

이 책은 "병아리의 각인부터 아기의 첫 동작까지", 배운 적 없이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한 이해로의 다정한 첫걸음이 되어주리라. "우리는 최초의 지식을 어떻게 획득했는가?" 아니, 태어나기 전의 지식을 어떻게 갖고 태어나는가?

p.120 지식의 기원을 숙고할 때 경험주의에 유리한 결정적인 주장을 완전히 배제하기는 어렵다. 그 주장에 따르면 아무리 잘 통제된 조건이라 해도 동물에서 모든 종류의 경험을 박탈했다고 확신하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물론 맞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노력해야 할 문제는, 어떤 경험도 하지 않았을 때 지식의 어떤 불씨가 존재한다는 걸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의 불씨가 깨어나기 위해서는 특정한 구체적 경험이 필요하다는 걸 입증하는 것이다.


*위즈덤하우스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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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이야기
이이지마 나미 지음, 홍은주 옮김 / 비채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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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 것, 이란 뭘까. 어떤 사람은 먹기 위해 살고, 또다른 누군가는 살기 위해 먹는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아무래도 후자가 아닐까. 물론 맛있는 것을 먹으면 즐겁다. 입에 맞는 음식이나 식재료는 한참씩이나 질리지도 않고 줄기차게 찾아 먹는다. 당연히, 좋아하는 음식이나 맛도 있다. 몇 개라도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꼭 그만큼 귀찮다. 먹는 행위에도 체력이 필요하다. 먹기 위해서는 메뉴를 고민하고, 재료와 과정을 생각해 적절한 품을 들여 차려야 하지 않는가. 만든다기보다 해치우는 느낌으로 해내고 밥상 앞에 앉았을 땐 이미 반쯤 곤죽이 된 상태다.

어디 먹는 사람만 있나. 치우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혼자 차려 혼자 먹는 식사라면, 집밥이든 도시락이든, 대개는 둘이 같은 사람이다. 포만감에 속은 불편하고, 몸은 무거운 와중에 냄새는 나니 상을 닦고 설거지를 하고 행주며 난리통을 정리하고 나면 '사람은 왜 먹어야만 사는가'를 고민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생각만으로도 지레 피곤해지기 십상인 이 먹고 사는 일, 혹은 살기 위해 먹는 일, '먹는 일'을 반복하게 되는 이유는 뭘까. 매번 지난 날의 귀찮았던 기억은 싹 지워버리고 먹을까, 내지는 먹여볼까, 를 고민하게 되는 이유는 뭘까.


어쩌면, 사람은 의미를 갖는 동물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한번쯤은 즐거웠던 적이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여행지에서 마주친 맛을 잊지 못해 낯선 식재료에 허둥거렸던 날, 별 것 아닌데도 문득 떠오르는 익숙한 맛, 경쾌한 식감이라든지 맛있다! 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는 얼굴이라든지... 웃고 울었던 날들에.

p.30 촬영 현장에서 정신없이 요리를 완성해나가는 와중에 찡해지는 일도 있었다. 단순히 피와 살이 되는 것, 맛만 좋은 것이 요리는 아니구나, 때로 맛과 냄새를 누군가의 기억과 추억을 불러오는 것이 요리로구나 하고 새삼 느꼈다. 그러고 보니 요리란 참 좋은 것이네요.

p.92 즐기면서 만드는 요리는 틀림없이 맛있을 터다. 그런 요리는 마음에 오래도록 남는다. 어른이 되어서도 그런 요리를 먹고 자랐다는 사실, 누군가에게 소중히 여겨졌다는 사실이 자신감으로 이어져 스스로를 더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정서가 풍부한 식탁을 둘러쌈으로써 요리에도 이야기가 태어난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단순히 맛만 내는 데에 그치지 않고 적재적소에 알맞은 모양새의 알맞은 요리를 만들어내는 사람이 있다. 저자 이이지마 나미는 광고와 영화 촬영 현장 등에서 그런 일을 전문으로 하는 푸드 스타일리스트다.

스쳐지나간 소품, 혹은 주인공이 차려내고 먹는 음식을 딱 알맞은 모양새로 그려내는 사람. 이 자리에 어떤 음식이 있어야 자연스러울지, 이런 사람이 하는 요리는 어떤 느낌일지, 어떤 곳의 요리는 그 지방의 특색이 어떻게 스며들어 있을지를 고민하는 사람.

해외 촬영의 현지 로케라든지, 세계 곳곳에 이벤트삼아 내는 테마 식당이라든지, 짧은 여행에서 만난 색다른 요리를 더 맛있게, 때로는 편안하게 만들어내는 방법을 고민하는 그는 맛있다!의 기쁨을 아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조금 부러워지기도 했다.

p.156 바쁘게 일하다 보면 식사를 대충 때우기 쉽지요. 그럴 때 먹음직스러운 요리가 나오는 영화를 보고 위안을 받거나 저거 나도 먹어보고 싶다, 하고 밥을 제대로 먹는 계기가 된다면 그런 것도 하나의 치유일지 모르겠습니다.


현대인은 바쁘다. 나도 바쁘다. 너무너무 바쁘다. 끼니는 커녕 물도 제대로 못 챙길만큼 바빴던 날은 밥이고 뭐고 까딱도 하기 싫어 늘어져있을 때도 있다. 휴식과 식사라고 하면 단연코 휴식이 먼저일 터, 앞서 말했듯이 먹는 데도 체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렇게 먹기보다는 때우는 일상은 어딘가 비었다는 느낌을 준다. 묘하게 허전하달까. 오늘은 뭘 먹었나, 짚어보노라면 메뉴가 아니라 상표만 줄줄이 이어질 때, '제대로 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어쩐지 아픈 기분, 든든한 식사 한 끼가 간절할 때다.

눈으로도 맛있는, 바로 그 장면, 그 곳에 있어야 할 요리를 최선을 다해 자리하게 하는 일, 먹고 먹이는 일의 기쁨을 고민하는 저자의 기억을 따라가며 내일의 메뉴를 고민해보는 건 어떨까! 즐겁게, 기꺼이 만들어보자고 다짐하며. 맛있었다!로 기억할 식사를 기대하며 말이다.

"즐겁게 기꺼이 만든 요리가 맛있죠!"


*출판사 비채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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