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옷의 어둠 모토로이 하야타 시리즈
미쓰다 신조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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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러가 픽션의 영역에 머물기 위해서는 최소한, 핍진성을 갖추되 현실의 위협, 그러니까, 현실에서 흔해빠지게 보이는 그것을 그대로 가져다 쓰지 않아야 한다. 적어도 내 기준으로는 그렇다. 어째서 그래야 하는가? 있을법한 일, 너무도 익숙한 사건을 토대로 그려내는 편이 쓰는 이와 읽는 이 모두 몰입하기 쉽지 않은가?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쓰는 사람에게는 현실을 그대로 가져다 따붙이는 셈이 되고, 읽는 사람에게는 조금도 현실 바깥, 뉴스나 신문의 사회면이 아닌 세계를 상상할 수 없게 하기 때문에. 그렇다면 창작이 실제 사건, 역사의 일면을 토대로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인가?

그렇게 말하자면 '거기서부터는 다른 장르의 개입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사회고발, 르포... 어떤 이름이든. 그것에 괴기 또는 미스터리와 추리가 더해질 수는 있어도 그것만으로 끝낼 수는 없다. 과거를 현재로 불러오는 힘이 필요하다. 그런 작품에는 필연적으로 명쾌한 결말이 따라붙을 수 없다.

p.12 전쟁 전이나 전쟁 중에 신문과 라디오는 국민의 전의를 대대적으로 선동했다. 물론 그에 편승한 국민에게도 책임이 있겠으나 그 청구서는 전쟁 중과 전쟁 후의 비참한 삶을 살아야 하는 형태로 날아왔다. (...) 이에 국민이 격노했느냐 하면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않았다. 하지만 무리도 아니다. 화나 내고 있을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단 살고 봐야 했다. 그래서 암시장이 생겨났다.


대신 깔끔하게 해결되지 않은 면모, 대안역사가 주는 위안의 한계. 서글프거나 원통하거나 참담한 뒷맛이 자리를 차지한다. 출판사며 서점의 구분이 어떻든간에, 독자인 내가 '모토로이 하야타 시리즈'를 역사와 사회현실에 기반을 두는 분야로 보는 것도 그런 이유다.

사건의 배경은 태평양전쟁 직후 뒷골목의 암시장, 제도와 터전 모두 폐허가 된 국가의 암시장, 그것도 뒷골목. 말 그대로 어둡고 숨어들어가야만 하는 곳이다. 국민을 지켜야 할 자가 그 자신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내맡기기를 강요당한 이들을 버렸기에.

그러고도 그들 위에 군림하기를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 안위를 보전하기 위해 다른 모두를 사람의 자리에서 몰아냈기 때문에.

p.50 두 사람 앞에는 신이치의 어머니가 준비해준 호화로운 요리와 술이 쭉 차려져 있었다. 변함없이 '있는 곳은 다 있는' 모양이다. 참고로 황실이 '있는 곳'의 대표였다. 황궁 벽에는 황족이 먹을 오늘 음식이 나붙었는데 쌀도 고기도 생선도 채소도 풍부했다. 그곳에 '배고픔'은 조금도 찾을 수 없었다. 황실은 도쿄도에서 완벽하게 다른 세계였다.

p.108 "그건 그렇고 국가는 말이야, 우리를 아무렇지 않게 배신하고 깨끗이 버리더라." 그녀는 자기들 창부를 가리켜 말했을 텐데 여기 나온 '우리'를 '일본 국민'으로 바꿔도 아무 문제 없을 정도로 전쟁 중에 국가는 확실히 국민을 버렸다. 아니, 실은 똑같은 짓을 패전 후에도 공공연히 저질렀다.


오롯이 그들만의 잘못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세상이 선과 악으로 명확히 나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악한 '이 편'의 압제로 신음하는 선량한 민중에게 새로운 '저 편'의 '구원'이 도래한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정말이지, 얼마나 쉽고 편리하고 순종적일까.

전쟁의 비참함은 일면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 고통이 '응당 받아야 할' 이에게만 몰려들지도 않는다. 그로 인한 죽음이 환한 빛으로 일시에 찾아와 모든 것을 끝내버리는 자비로움이지도 않다. 삶의 구석구석을 파괴하고, 가장 약한 자가 가장 고통스러운 자리로 밀려 떨어지며, 죽음은 한껏 느린, 그러나 무슨 수를 써도 피할 수 없는 파멸로 다가온다.

다시금 사건의 현장으로 돌아가보자. 패전국의 수도, 도쿄에 '붉은 옷의 괴인'이 출몰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그는 다른 곳도 아닌 암시장의 한 골목, '붉은 미로'에 나타나 행인을 절망과 공포에 빠트린다고 한다. 그는 무엇을 바라 나타나는 것이며 정체는 무엇인가.

p.351 ...다른 차원의 세계. 북적이는 암시장 구석에 나타난, 정적으로 가득한 어두운 세계. 이승이라기보다 저세상에 가깝다고 여겨질 정도의, 느낌이 드는 좁은 공간. 인간이 아닌 존재가 수없이 방황하고 있는, 결코 인간은 들어가서는 안 되는 장소.


신시대의 평화를 꿈꿨던 전도유망한 청년에서 체제의 기만과 패망을 목도한 자, 재건의 꿈을 안고 가장 천대받는 탄광부에서 등대지기를 전전하며 누구도 가지 않은 길을 모색하던 그가 이번에는 암시장에 나타났다. 이전까지의 거처가 일종의 벽지, 오지였던 것과는 사뭇 다른 행보이다.

괴이는 괴이. 그 자체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비틀린 곳에 왜곡된 현실이 비집고 들어와 덧씌워진 것일 뿐임을 온몸으로 겪고 돌아온 그가 다시금 마주한 초토의 신-수도는 어떤 모습이었던가. 가장 무서운 것은 괴이도 신도 아닌, 사람과 그의 마음임을 다시금 확인하지 않았던가.

어느 고전의 제목(~는 ~의 꿈을 꾸는가) 처럼, 모토로이 하야타는 조국 재건의 꿈을 꾸는가, 여전히. 처음 이 시리즈의 소개를 마주했을 때 감상은, 솔직히 말해, '꿈도 크지' 내지는 '무슨 염치로 여전히?'였다. 물론 그 생각은 작가가 그려내는 참상, 죄 없는 국민과 그들의 유죄성을 동시에 다뤄내는 솜씨를 이해하자마자 사라졌지만.

모토로이 하야타의 모험, 기행, 아니... 여정이라고 해야할 그것은 언제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 머지않아 그가 마주할 전쟁특수와 재부흥의 시기에 또 어떤 절망과 그에서 피어나는 의지를 보일 것인가. 그저 기대할 뿐이다. 참담한 마음으로.

*도서제공: 출판사 비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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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물리학 - SF가 상상하고 과학이 증명한 시간여행의 모든 것
존 그리빈 지음, 김상훈 옮김 / 휴머니스트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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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뜸 "시간 여행"을 상상한 적이 있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뜬금없이 대체 무슨 소리냐"고 묻는 자는 하수다. 잠시 생각에 잠겼다 시큰둥한 얼굴로 "글쎄..." 하고 말꼬리를 흐리는 자는 중수다.

그렇다면? 마침 잘걸렸다 내지는 땡잡았다는 얼굴로 반색하며 시간의 정의와 시간 여행을 소재로 하는 작품의 계보를 줄줄 읊어대는 (혹은 설명하기도 지친다는 얼굴로 말을 돌리는) 자, 그 자가 바로 고수다.

나는 그런 사람을 만날 때마다 양손을 움켜쥐고 "안녕하십니까. 고수 동지. 어디 있다 이제서야 나타나신 건가요." 하고 격한 반가움을 전하고 싶은 충동에 시달린다. 그치만, 만나기 좀처럼 쉽지 않단 말이지.

이 주접은 이를테면, "진짜 팬"을 만나기 쉽지 않다는 나름의 억울함의 발로(그런데 이제 쪼끔 구질구질한)인 것이다. 누군가는 이 세상에 '이 세상에 진짜 팬, 가짜 팬이 어디있나' 불만을 제기할지 모르겠으나...


결정적인 순간, 취향 합치에 실패해 머쓱한 분위기로 돌아서본 적이 있는 이라면 알 것이다. 이구동성을 기대했던 자리에 '으;; 맛알못'만이 남겨진 그 서글프고 찝찝한 마음을.

그뿐인가. 장르로서의 SF 자체의 역사도, 그 계보와 미래를 그리는 시도 자체도 숱하게 이어져왔으나, 여전히 SF를 "공상과학"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많다. 상상보다는 공상, 실현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로 간주해 팬들의 마음(또는 골치)을 아프게 하는 경우가 심심찮게 있다는 뜻이다.

그러던 차에 우리가 사랑했던 SF 작품들 속 장면들을 통해 시간여행의 원리와 그 가능성을 보이는 책이 반갑지 않을리가 있나. 각각의 챕터를 따라 고전 반열에 오른 대작부터 액션영화까지, 활자와 영상, 흑백과 컬러를 넘나드는 지적 탐구에 흠뻑 빠져있노라면, 확신에 가까운 생각이 들 지도 모른다.

아, 이거 동족이구나. 존 그리빈은, 앞의 이야기를 빌어, 그야말로 어디 있다 이제서야 나타난건지 반가운 고수 동지(라고 하기엔 줄곧 문단에 있었지만... 지박령에 가깝지만...)가 아닐 수 없다.


필연 SF는 가장 낭만적인 장르다. 눈 앞에 보이는 세계, 지금 여기의 시공 그 너머를 상상하는 일이 아름답고 환상적이거나 짜릿하고 생생하지 않을 수가 있나. 동시에 독자를 몹시 괴롭게하는 장르임이 분명하다. 당연함을 비틀고 진리라고 믿어온 세계를 다르게 보기를 요구하는데 진입장벽이 없을리가.

그러나 보라, 상상만큼 현실적인 일도 없다. 현실이 없다면, 지금의 세계를 알지 못한다면 그 너머, 다른 세계, 차이를 이해하는 즐거움도 느낄 수 없다. 소설과 영화 속의 한 장면은 현실을 찢고 파내고 뒤집어 만든 또다른 현실-가능성이 아닌가.

그러니 여기서 물어야 한다. 왜 가능한가? 어떻게 가능하거나 불가능한가? 그 답을 찾아가는 여정은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 숨은 팬을, 미래의 오타쿠 씨앗을 찾아서 떠나는 여행과도 같지 않을까.


우리는 시간 속에서 살아간다. 그렇다면 시간은 실제로 존재하는가? 시계바늘의 이동이나 숫자의 순차적 변화가 아닌, 시간 그 자체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과거나 미래로의 도약은 어째서 불가능하거나 또는 꿈꿔볼만한가? 과거의 나는 현재의 나와 동일한 개체가 맞는가? 우리 우주는 단일한가?

시간에서 시작해 자아와 우주로 흘러가는 일련의 의문은 과거부터 끝없이 제기되어왔다. '나' 너머의 '나', '세계' 너머의 '세계'를 원하는 마음은 이동의 자유를 체감할 수 있게 된 인간이 당연하게 가 닿는 결과일지도 모른다.

현재를 벗어나고픈 욕망, 과거를 바꾸고자 하는 후회, 미래를 알고 싶어하는 호기심은 어쩌면 인간의 본성에 내재되어 있는 게 아닐까?

상상의 토대가 되는 이론과 함께 가설을 넘어 가능성을 움켜쥐는 여정에 함께할 독자에게 이 책을 권한다. 언젠가 도래할, 혹은 시간을 넘어 찾아낼 "반가운 고수 동지"와의 만남을 기대하며!



*도서제공 출판사 휴머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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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점심
장은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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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종의 한국 문학계의 경향성, 같은 걸까? 언젠가부터 외로운 사람들의 외로운 이야기들이 별처럼 문단을 수놓는 것은. 어느 서점을 가든, 작게 속삭이는, 쓸쓸한 이야기가 가득하다. 어쩌면, 기실 그러지 않았던 때가 있었던가 싶을 만큼, 우리 사회가 외롭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저 꽃구경이려니,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 편히 읽거나 아주 짜릿한 오락을 즐기는 것처럼 읽을 수 있는 책은 그만큼 찾아보기 힘들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 사회에서 사랑을 말하는 것은, 찬바람이 채 가시지 않은 때에 성급히 자란 어린 싹을 보는 마음과도 같다. 위태롭고, 안쓰럽다.

사랑은 영원한가? 적어도 순간에는 그렇게 믿는다. 이 순간이 영원하리라고, 적어도 쉬이 변하지는 않으리란 마음으로 사랑을 한다, 사람들은. 영화에서처럼, 소설(와, 지독한 블랙 코미디 같다, 어쩐지)에서처럼 꿈결같고 뜨거운, 모든 것을 이겨내리란 믿음을 주는 사랑을 원하고 또 믿는다.

삶은 본질적으로 외롭다. 물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가는 우리는 그렇게 고독하다. 그 누구도 본질적으로 침범할 수 없는 존재의 경계, 알 수 없는 마음, 닿을 수 없는 심연.


그래서인지, 작중 "사람"들은 모두 외롭다. 이해를 바라고, 변하지 않으리라 믿으나, 쓸쓸하고, 버림받았다 느끼고, 지나간 것을 포기하지 못하며, 맹세는 쉬이 저버려진다. 그런데도 유달리 콕 집어 잘못한 이를 잡아내기 어렵다. 모두가 사정이 있다는, 살다 보면 어쩔 수 없는 일도 있다는 말을 이렇게도 전할 수 있던가, 싶을 만큼.

혹자는 이를 두고 패배주의라 할지 모른다. 밑도끝도 없는, 오를 곳도 비켜날 곳도 모르고 물에 물 탄듯, 술에 술 탄듯 흘러가버리는 이야기에 무슨 의미가 있느냐 물을지도 모른다. 그치만 그게 사는 이야기인걸, 지나가는 말로 잘 지내세요, 가볍게 점심이나 한끼 해요, 흘려보내는 말처럼.

p.23 흑회색의 거친 질감 때문인지 처음 윤주가 사진을 건넸을 때 아기는 몹시 외로워 보였다. 아무도 없고, 아무도 다가갈 수 없는 어두운 곳에 갇혀서 혼자 밥을 먹고 잠을 자며 지내는 ‘한 점’ 사람의 외로움. 사람은 시작부터가 외롭구나. 고독과 암흑 속에서 살아가는구나. 그러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고 윤주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래야 만날 수 있어, 하고 말했다.


장은진의 사람들은 외롭다. 눅눅하고 습한 외로움이 아니라 고요한 봄날, 실눈을 뜨게 하는 외로움이다. 바깥은 화창하고 해가 지면 서늘한 바람이 부는 듯도 한데, 이게 아닌 줄 알면서도 어쩔 수가 없이 손만 쥐었다 펴는 외로움이다. 생의 끝도 하루의 마지막도 아니면서 건조하고 고요한 외로움이다.

전반적으로 덜 자란 이들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 자랄 일도 없는데 어쩐지 서툴도 연약해, 어떻게 해줄 수도 없는 그런 사람들. 감추고 싶은 부분도, 나누지 못하는 부분도 채 갈무리하지 못해 쩝, 입소리나 내고 말아버리는 작은 초라함, 혹은 추레함. 계면쩍은 웃음들.

p.248 문학은 늘 삶을 노래하지만 삶은 문학으로 영위되는 게 아니었다. 그러자 문학이야말로 삶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걸 깨달아버린 나한테 화가 났고, 알려준 세상을 향해서는 분노가 치밀었다.

p.267 사람은 누구나 마음 한쪽에 덩어리가 되지 못하고 남은 자국을 지니고 살아가는 건가. 아니 우리는 결국 모두 덩어리가 되지 못하고 남은 사람들에 불과한 걸까. 덩어리는 허상인가.


차라리 악다구니라도 쓰지. 나한테 왜 이러냐고, 나를 안 보고 어딜 보느냐고 화라도 내지. 자존심 상한 날엔 어깃장이라도 놓고 객기라도 부리지. 그러지 못하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오가는 길에 숱하게 마주쳤을 법한 사람들, 시선 끝에 흔적처럼 지나가는, 평범한 사람들.

어쩐지 쓸쓸한 마음이 되어 덮고 난 후에,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름도 사는 곳도 모르는 이들에게 안부를 묻고 싶었기에. 잘 지내시나요. 그래, 그래요... 의미없는 추임새나 주워섬기며 드문드문 섞여드는 침묵에 귀를 기울이고 싶어졌다.

눈이 부시다. 화창한 날도 끝내주게 좋은 풍경도 없었지만, 눈을 가늘게 뜨고 먼 곳을 보는 듯하다. 가벼운 먼지 냄새가 나는 듯도 하다. 어쩔 수 없니, 그래, 그래요... 의미없는 안부를 묻는다는 말을, 이제 알겠다. 다시 만날지, 기약없는 주억거림으로 창을 닫는다. 이또한 언젠가 다시금 부옇게 떠오를 날이 있으리라 믿으며.

p.71 별난 인생도 없었고, 못난 인생도 없었다. 인생은 누구나 다 그냥 살다가 가는 것이었다. 단 살면서 때만 놓치지 않으면 되었다. 사랑해야 할 때 사랑하고, 용서를 빌어야 할 때 빌고, 슬퍼해야 할 때 슬퍼하는 것,


*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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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튼 뒤에서
사라 델 주디체 지음, 박재연 옮김 / 바람북스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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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알 수 없는 일들로 가득합니다. 어른들끼리 나누는 이야기처럼, 아빠가 숨겨둔 여자처럼 세상의 많은 비밀은 아이들에게 열리지 않아요. 아이들에게 커튼 뒤 비밀 같은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듯이."

사람들은 숨기고 싶은 것을 눈에 보이지 않게 한다. 눈을 질끈 감고 천 한 장 너머로 숨어들면, 혹은 그 너머에서 숨죽이고 있게 하면, 영원히, 아무도 모를 수 있을 것처럼.

기실 '커튼'이라는 것은 얼마나 연약하고 모순적인가. 바깥과 안을 가르고, 보여도 좋은 것과 그러고 싶지 않은 것을 나눈다. "숨긴다"는 의미에서, 그 안팎의 구분은 순전히 자의적이고 너무도 유동적인 것이 된다. 바람에 날리는 천자락처럼.

차마 떨리는 손을 잡아줄 수도 없았던 공포 앞에서 그 모순은 극적으로 드러난다. 어디로 도망칠 수 있을까. 더이상 밀려나고 숨을 곳도 없는데. 바깥과 안을 가르는 경계가 무너지고 최후의 '안'마저도 '밖'이 될 때, 손짓 한 번에 젖혀질 그 연약한 경계는 일상에서의 무게를 단숨에 상실한다.


이렇게 본다면, 마지막 장면에서 커튼이 갖는 의미를 여러 가지로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앞서 말했듯 최후의 경계, 마지막 남은 연약한 보호. 혹은, 그 너머의 존재를 알 수 없게 하는 우리의 편견.

보이지 않는 것은 무섭다. 알지 못하는 것, 실체를 마주한 적 없는 것은 너무도 쉽게 혐오와 거부의 대상이 된다. 커튼 너머의 아이들은 그렇게 "해충", "유태놈"들이 된다. '있을 것으로 상상되는 존재'에게는 항거할 권리가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자리는 '이미 없는 것'으로 치부되기 때문에.

그러나 커튼 너머를 들여다보면, 눈을 가리는 것을, 먼지를, 사람이 만들어낸 짜임 띠위를 걷어내면, 그곳에는 그저 두려움에 떠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그저 그곳에 있을 뿐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함께 살아가던 사람들이.

p.83 “소피! 소피! 소피!” 누군지 모르겠지만… 소피는 결국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비틀거리던 우리는 그 광경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았다. 살아 있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지, 죽는 것은 또 얼마나 쉬운 것인지에 대해 생각했다.


기존에 알려진 2차세계대전 중 유대인의 피해는 주로 독일과 폴란드에 집중되어 있다. 이 책에서는 자유와 평등의 나라로 알려진 프랑스의 수치, 비시 프랑스를 시대를 엿볼 수 있다. 시민의 자유, 권리의 평등 따위는 저버린 역사, 유대인 혐오와 학살 조장, 적극적인 부역의 주체였던, 나라 아닌 나라.

본문에서는 점차 조여오는 독일의 압박과 유대인 박해에 냉담해져가는 프랑스 사회의 면모를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으나, 현실은 훨씬 참담했다. 예상 밖의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에? 아니. 너무도 전형적이었기 때문에. 그 때 그 시기, 그 일이라고 하면 떠올리게 되는 내용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점이 있다면 모른 척 감춰졌다는 것뿐이다. 유야무야 넘겨졌을 뿐이다. 그들 스스로 "가장 심하지는" 않았다고 여겼기 때문에, "우리도 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어쩌면 "그땐 다 그랬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p.48 아빠는 뉘른베르크 법이 지성인의 작품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으며 고모에게 고함쳤다. “더 이상 유태인들은 ‘아리안’ 독일인들과 결혼도 못 하게 하고, 투표할 권리를 빼앗고! 상점과 공원의 입장도 금지하고! 의사나 약사, 변호사가 될 수 없도록 하고! 학교도 못 다니게 하는 것이! 그저 안타깝게도 근시안적 사고로 ‘방향을 잃은’ 천재의 생각이라고?”


말 그대로 이전까지의 세계를 뒤흔들어놓은, 사람이 쓰레기처럼, 먼지처럼 흩어져버릴 수 있다는 걸 무너지는 세상으로 체감할 수밖에 없었던 전쟁이 망각의 길로 접어들고 있다. 전쟁 이후, 그리고 다시 이후의 세대가 다음 세대를 바라보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세계는 또다시 전쟁의 길로 접어들고 있다. 학살과 파괴의 역사는 크게 달라지지 않은 꼴로 반복되고 있다. 파괴되었던 이들이, 환난을 알지 못하는 이들과 더불어 또다른 피해자를 낳는다. 이것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어린이의 눈으로 보는 세계는 극히 제한된다. 동시에 무서울만큼 정직하게 꿰뚫어본다. 다른 무엇도 아닌, 인간 이성의 실패라고 불리었던 참극이 반복되는 지금, 어른이 읽어야 할 이야기다. 다른 누구도 아닌, 어린이의 세계를 부수는 어른들, 우리 모두가.

p.127 만약에 다시 태어난다면? 갑자기 답이 떠올랐다. 명확하고 분명하게. 전에는 왜 이 생각을 못 했을까? 이렇게 간단한데… 다시 태어난다면, 나 자신으로 태어나고 싶다.


*도서제공: 바람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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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러, 이 좋은 걸 이제 알았다니 구픽 콤팩트 에세이 6
남유하 지음 / 구픽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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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다르다. 아니. 종자가 다르다고 하는 게 맞겠다. 쫄보 무더기에 살던 쫄보는 이 호러 마니아 작가를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너무 재밌게 얘기하는 통에 홀랑 넘어가 슬쩍 찍어먹고 밤새 눈을 감았다 떴다, 설치는 것까지가 쫄보의 삶이다. 어떻게 아냐고요? 그거야 이게 다 내 얘기니까 그렇지...

동시에 주관적 메이저, 객관적 약간 마이너로 분류되는 내 취향에 한마디씩 얹던 이들이 생각나는 기묘한 상황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그래. 읽는 동안 "아니 대체 무슨 소릴 하시는 거예요"를 한 칠십 번쯤 외쳤단 뜻이다.

p.51 나도 가위에 눌리는구나! 잔뜩 기대에 찬 마음으로 그것을 기다렸다. (…) 몸속에서 아드레날린이 분비되는 게 느껴졌다. 가위 눌렸다는 사실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p.56 은혜를 아는 귀신인지 아닌지 구분하는 것이 관건인데, 평소에도 사람 보는 눈이 없는 내가 과연 귀신 보는 눈은 있을까? 애당초 착한 귀신이건 나쁜 귀신이건 안 보이는 척 외면하는 게 답일까? 그래도 모처럼 만난 귀신을 그냥 보내기는 아쉬우니 한국말로 욕을 하면 어떨까? 욕에 반응을 보이면 한국 귀신이니 대화를 해도 되지 않을까?


그래도 마냥 이해 못할 내용은 아닌 것이, 저자의 경험과 나름의 줏대있는 호러 예찬론(!)을 따라가다 보면 아, 이 사람도 평범한 사람이구나. 그런데 이제 조금... 뭐랄까... 쉽사리 공감받기는 어려운 취향을 가진... 싶은 순간이 많다.

굳이 따지자면 나도 호러 장르를 좋아하는 편이다. 무섭다고 온 집안 불을 몽땅 켜둘지언정 어쩌다 마주친 괴담 시리즈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밤새 읽곤(혹은 보곤) 한다. 그 후의 뒷감당, 이를테면 괜시리 이불귀를 여민다든지, 가구 틈새의 어둠을 보지 않으려 애쓴다든지, 하는 것들은 내 몫이지만.

재밌다는 걸 부정하지는 않는다. 온전히 현실 너머의 것으로 즐길 수 있다면 즐거울 수 있다. 상상의 재미, 어디까지나 그 주인공이 내가 아닐 것을 확신할 수 있는 한 호러는 로맨스와 더불어 가장 원초적인 즐거움을 주는 장르가 아닌가. 그 즐거움의 이름은, 쾌감이다. 그것도 뇌가 비현실을 구분하는 아슬아슬한 경계에 걸쳐진.

p.26 짧은 순간 공포 영화에서 하지 말라는 짓을 해서 죽어간 엑스트라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엑스트라로 죽고 싶진 않다. 나는 다급하게-그러나 귀신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공손하게-외쳤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걸리는 부분이 많다. 인간은 동물이다. 동물로서의 본능을 가지고 있다. 호러는 개중 가장 심부의 본능, 생존 욕구를 건드리는 장르다. 안전과 생존을 위협하는 불안을 메인으로 끌고 오는 장르가 바로 호러 아닌가. 여기서 모순이 발생한다.

피할 수만 있다면 최대한 피하고 싶을 것을 왜 찾아다니면서 보고, 읽고, 듣고, 쓰고, 상상하는 걸까? 동어반복 같지만, 우리가 동물이기 때문일지 모른다. 상상하는 동물, 문명화 뒤로 밀려난 동물성을 되살리려 시도하는 동물이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렇기에 로맨스와 호러는 필연적으로 닮은 장르인 것이다. 이성을 넘어서는 것, 의지를 꺾고 기대를 배신하는 것, 예측 밖의 존재. 이 모든 것은 절절한 사랑과 극한의 공포 모두에 발을 걸친 수식어가 아니던가.

p.91 내가 상대방에게 원하는 것이 심장이 되는 순간 호러요, 마음이 되는 순간 로맨스가 된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당연히 상대방의 마음을 원한다. 그런데 그 마음이란 건 눈으로 볼 수가 없다. 상대방의 마음이 나만큼 간절하지는 않음을 느끼는 순간, 사랑의 감정은 분노와 집착으로 변질된다. (...) 너무 지나친 로맨스는, 호러와 서로 모른 척 등지고 사는 쌍둥이와 같은 것이다.


우리 인간은 본디 연약한 살과 부드러운 가죽으로 이루어진, 따뜻한 피가 흐른다는 것, 안전하고 확고한 세계는 언제든 뒤집힐 수 있다는 것, 잠시간 소름돋은 팔을 쓸어내리고 나면 무사히 현실, 안락한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 동물성을 부정하려 애써온 문명화의 허상을 정면으로 찌르는 쾌감은 필연 중독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더워지는 계절에 슬그머니 호러에 눈길이 가는 것도 일종의 사랑 같은,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닐까. 재채기와 사랑은 숨길 수 없다는데, 비명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이 책을 덮고 나면 작은 의문이 고개를 들지 모른다. 사람이 무서운 걸까, 사람 아닌 것이 무서운 걸까... 그 답은 호러에 있습니다. 오세요. 보면 알걸요.

p.115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은 어찌 보면 삶과 죽음의 경계를 걷는 것이다. 죽음은 우리 삶에 밀착되어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죽음을 인식하지 않고 살아간다. (…) 죽음을 망각하는 것은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 프로그래밍된 체계인지도 모른다.


*도서제공: 구픽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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