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불평등 - 시간의 자유는 어떻게 특권이 되었나
가이 스탠딩 지음, 안효상 옮김 / 창비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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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든 시간, 부자의 시간 관리 비법, 근로 외 소득으로 부를 쌓는 법, 부수익 파이프라인, 경제적 자유, 시간 투자로 바뀌는 인생... 너무도 익숙한 수사가 아닌가. 퍽 매력적이지 않을 수 없다. 돈이 시간, 시간이 돈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미련하게' 일만 하는 대신 '효율적인' 시간관리로 부를 축적하고 '여유를 되찾으라'는 말은 일종의 이상향이다.

여기서 물어야 한다. 어째서 노력에 부가 따르고 환경마저 개인의 근면성실과 자본에 좌우된다는 매끄러운 명제에 이상함을 느끼지 않는가? 대부분이 평생을 뼈빠지게 일을 한다. 쉴 틈도 없이 노동하고 저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좁혀지지 않는 간극, 삶의 필수적인 요소들을 갈아넣어야만 겨우 확보되는 생존이 있다.

p.5 한국 노동자들은 연간 OECD 평균보다 39일 더 노동한다. 대부분의 나라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프레카리아트 대열에 있다는 것, 즉 불안정하고 불안전한 일자리에서 벌어들이는 변덕스럽고 불확실한 소득을 통해 근근이 살아가며, 종종 감당할 수 없는 부채가 있고, 무엇보다 청원자 같은 느낌에 시달린다는 점도 아주 분명하다. 프레카리아트는 자국에서조차 시민권에 따른 권리들을 상실하고 있다.

p.5 역사상 대부분의 지배자들은 대중이 생존하기 위해 해야 하는 일과 노동의 양에 무관심했다. 현대의 노동자들은 국민경제와 경제성장에 공헌하는 존재로 여겨져왔다. 시간에 관한 진정으로 진보적인 정치가 더욱 필요해졌는데, 그것은 만성적인 초과 노동과 과도한 노동을 해결하는 것, 그리고 모든 불평등 가운데 가장 최악인 시간 불평등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노력이 부족하기 때문인가? 그런 사회에서 노동으로 시간을 구매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그 시간의 주체인 사람은 무엇으로 소모되고 '투자'되는가? '가난한 자'의 시간은 누구에게 '구매'되고, 소모되는가? 익히 알려진 금언처럼, 시간은 누구에게나 평등한가?

'현대화된' 대부분의 사회들은 오롯이 자본주의 체제로만 운영되지 않는다. 당연한 일이다. 그것이 경제체제이기 때문이다. 노동은 사람 없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회 운영은 '대상'과 '주체'가 되는 사람을 요한다. 앞서 말했듯 부가 시간, 시간이 부인 사회에서 부가 편중되어 있다는 것은, 시간 또한 불평등한 재화로 취급되고 있음이 분명하다.

p.110 산업적 노동시간의 강화에는 두가지 함의가 있었다. 첫째, 규율 통제 체제가 노동자 행위성-즉 스스로 생각하고 원하는 대로 행동할 수 있는 시간과 범위-을 더 많이 제한했다. 행위성이 탈 상품화의 본질적인 속성이라고 한다면 생산과정은 더 심하게 상품화되고 있었다. 이는 공장에서 관료제적 사무실로 확산되었다. 포드주의•테일러주의 토요타주의 모델은 시간 블록에 맞는 '노동력'을 획득했고, 정해진 노동일 동안, 정해진 근무 연수 동안 사람들의 시간과 노력을 구매했다.

p.152 사람들이 스스로를 자기 기업가로 간주한다면 그들은 일, 돌봄, 공유화, 스콜레로서의 여가 등의 가치가 아니라 '자본주의적' 가치를 내면화하는 경향이 있을 것이다. 그럴 경우 이런 활동들에 쓰는 시간은 '비생산적' 혹은 심지어 '구걸한' 것으로 비난받으며 낭비된 시간으로 간주된다.


혹자는 말한다. 모두에게 안전감을 제공하는 사회에서는 누구도 노력하지 않을 것이라고, 따라서 경제적 불평등으로 인한 열등감, 모욕감, 굴욕감이 '적정선'에서 주어질 때 사람들은 그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과연 그러한가? 게으른 자가 가난하며, 가난의 이유는 요구되는 행정 절차에 부응할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믿음은 틀렸다.

사회가 변한 것이 아니다. 국가가, 행정 체계가 발달하고 세분화됨에 따라 다른 방법을 시도할 틈조차 사라졌기 때문이다. 왜 '가난한 자'들은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가? 어째서 당장의 이익을 미래의 더 큰 손실과 낙인과 바꾸는가? 사실상 그들에게 선택지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p.202 노동이 아닌 모든 형태의 일은 금전적으로 보수를 받지 못함에도 대부분 이를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비용을 물리며 이를 수행하지 않을 경우 소득 상실의 위험마저 있다. 비용은 결과의 불확실함 때문에 커진다. 어떤 시간 사용이 더 높은 보상을 가져오는가? 할 수 있는 다른 활동과 비교할 때 이 노동을 위한 일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하는가? 그런 질문에 대해 답하기는 불가능하지는 않을지라도 어렵다.

p.211 국가가 프레카리아트에게 부과하는 일의 '거래 비용'은 일에 관한 분석에서 간과된다. 그들의 시간은 존중받지 못한다. 모든 공리주의적 정부는 소소한 것들을 개혁하고자 한다. 오늘날의 정부는 행위 조건을 사용하여 급여 청구인이 대부분 쓸모없고 시간을 소모하며 보수 없는 일을 하도록 강요한다. 이것은 잔인한 형태의 불평등이다.


이전의 저서들에서 기본소득을 토대로 삶의 안전망을 제공하는 사회와 지속 가능한 경제 체제를 제시한 바 있는 저자는 이 책에서 보다 근원적인 차원, '시간' 그 자체에 주목한다. 우리는 삶을 살아간다. 단지 살아있을 뿐 아니라, 행위하고 영위한다. 그것이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의 의미이다.

한국 사회에서 자본주의 바깥을 상상하는 것은, 이미 그렇게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체제전복의 위협으로 취급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우리는 자본주의 하의 예속에 있지 않은가... 모두의 시간을 존중하는 진보적 정치는 결국 사람으로 살고자 함이다. 지금 시작하자. 불안정노동에 내몰린 시간-무산자들이 주체로 돌아오는 사회를.

p.448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물었어야 했다. 왜 우리는 진정한 여가가 사라지게 놔두었는가? 왜 우리는 자본주의를 변호하는 자들이 공유화를 게으르고 기생적인 일이라며 묵살할 때 공유화를 구출하지 못했는가? 왜 페미니스트들은 돌봄을 일로서 정당화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는가?

p.449 이유가 무엇이든 미래가 돌아오고 있으며, 시간은 분명 해방되고 있고, 더욱이 더 평등하게 공유되고 있다. 사회개혁가들의 마음에서는 아직 현실이 아니지만 말이다. 시간의 정치는 오로지 거기서부터 개선될 수 있다. 한번 해보자.


*도서제공: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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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터 빌런
존 스칼지 지음, 정세윤 옮김 / 구픽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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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삼촌. 돌아가신 와중에 죄송하지만 생전에 돈이 많으셨다고요... 다름이 아니라 제가 지금 자금이 좀 급해서 그러는데, 사랑하는? 아마도 사랑했을? 조카가 내일모레쯤 굶어죽게 생겼으니 430만 달러만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근데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슈퍼빌런이요? 우리 고양이가 말을 한다고요?

와중에 내 집 그거 꼴랑 하나 남은 재산이, 엄연히 말하자면 하나까지도 안 되는... 아무튼 그게 잿더미가 됐다고요? 근데 내가 용의자라고요? 얼굴도 까먹은 삼촌의 단독상속인으로 와서 장례식을 주관하라고요? 화환에 꼴 좋다고 써있다고요? 오신 분들은 이 인간 진짜 죽었나 시신에 칼도 좀 찔러보고 유전자 증거도 좀 가져가겠다고요? 뭐라는거야 대체?

그러니까, 연락두절 인성파탄자 삼촌이 생전에 어마어마한 부호였단다. 그것도 전세계를 손아귀에 넣은 사업가이자 슈퍼빌런. 죽기 전에 나를 상속인으로 지정했으니 소식 들고 찾아간 직원을 따라가 냉큼 사업 물려받아 호시탐탐 털어먹으려는 동종업계 사업가들도 어떻게 좀 해보란다. 안 그러면 너도 죽을 꼴이니 아무튼 이해를 좀 해보라고? 지금요? 갑자기요?

p.116 악당은 전문적인 방해자였다. 시스템과 과정을 조사해 각각의 약점, 빠져나갈 구멍, 의도치 않은 결과를 찾아낸 다음, 그들 자신이나 고객의 이익을 위해 그것들을 이용한다. 이러한 활동은 그 자체로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으며, '선함'이나 '악함'은 관찰자의 시각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고 양은 설명했다.


황당함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유일한 가족 고양이가 사실은 회사 직원이었으며, 나름 부동산도 가지고 있단다. 또다른 직원 돌고래는 노조 조직권을 요구한다. 그러니까, 삼촌이 악당재벌일 뿐만 아니라 악덕사장이기도 했다고요? 환장하겠네... 어제까지만 해도 나는 세금 낼 돈도 없어 나앉게 생긴 임시 교사였다고요!

그치만 '회사와 함께 사라지다'가 되게 생겼는데 그게 중요한가요. 까짓거 한 번 해보죠. 일단 협상부터 해봅시다. 누구와? 돌고래, 그리고 예의 '동종업계 종사자들'과. 그것도 '네가 뭘 몰라서 그러니 한 수 가르쳐주겠다'는 분들과. 가봅시다, 조만장자 라이프, 초재벌 거물인지 뭔지 얼마나 대단한가 어디 한 번 해보자고요.

p.139 "돈은 현실이 아니에요, 찰리. 인쇄소에서 찍어내는 종이일 뿐이죠. 미국 정부나 중국 정부, 또는 브라질 정부가 우리에게 내는 돈은 전부 비자금이에요. 그 정부의 예산에 기록되지 않아요. 그저 자신들이 그 돈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며 우리에게 송금할 뿐이죠. 우리가 쓰려고 하기 전까지는 그 돈은 존재하지 않아요."

p.143 "우리는 그 돈을 이용할 수 없어요. 쓸 수도 없어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그런데 왜 그러는 거죠?" "경쟁자들이 그 돈을 가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예요." 모리슨이 말했다. "어떤 정부가 우리의 구독자라면, 그 정부는 다른 경쟁자의 서비스를 구독하지 못해요. 왜 그러겠어요? 우리가 전부 제공할 수 있는데."


작중의 악당, 빌런, 정재계를 좌우하는 거물들의 모임 등은 이제는 놀랍지도 않은 것들이다. 상상 이상의 부, 전지구를 쥐락펴락하는 권력은 더이상 낯선 이야기가 아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누군가는 잔고인지 잔돈인지 헷갈릴 금액이 전재산인데 같은 세상을 사는 누군가는 섬을 소유하고, 가늠조차 어려운 거액이 숨만 쉬어도 불어나는 걸까?

현실 속의 악당은 화려한 코스튬에 기괴한 분장을 하지 않는다. 초능력을 가진 인외의 존재도 아니다. "진짜" 악당은 폐쇄적인 집단에 스스로 고립되어 있다. 정당한 주인에게서 훔쳐낸 것을 아무도 몰래 야금야금 팔아치울 기회를 노린다. 교묘한 말재주와 우격다짐으로 배를 채운다. 적나라하게 드러난 "이너 서클"은 그저 우스꽝스러울 뿐이다.

p.266 "당신은 전 세계의 비극을 이용했고, 그 비극이 당신 생각만큼 빨리 일어나지 않으면 몇 가지를 직접 일으키기도 했을 겁니다. 그리고 똑똑하고 젊은 예스맨들을 심고 또 심어 일구었겠죠. 그 예스맨들의 에고를 부풀렸을 겁니다. 그래야 당신이 그들의 재능을 얼마나 많이 훔쳐 가는지 모를 테니까요."

p.267 "당신은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세계의 운명을 좌우하고 있다고 확신했겠죠. 그러다 탐욕스러워지거나, 게을러지거나, 당신 자신의 홍보자료를 믿게 된 겁니다. 아니면 이 전부가 동시에 일어났을 수도 있겠죠."


작품 전체가 이렇게 묻는 듯하다. 이것이 부의 권력인가. 이것이 가진 자들의 힘인가. 대체 무엇이 마땅히 추구당해야 하며, 누군가는 정당하게 노동하고 대우받을 권리를 투쟁으로 쟁취해야만 하는가. 누가 협잡꾼이자 약탈자인가. 그들이 가지고 누리는 것들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누가, 대체 누가 "진짜 악당"인가?

이 책을 읽는 모든 이들이 웃고, 화내고, 머쓱해지기를 바란다. 한순간에 비일상에 휘말리는 주인공의 황당한 심정에 공감하고, 끔찍하게 치우친 부와 권력이 얼마나 허상같은 것인지 깨닫기를 바란다. 그에 더해 동정도 '애완'도 거절당하는 경험을 하길 바란다. 그렇게 우리 사회를 한 겹 젖혀보기를, 동료시민의 범주가 어디까지인지 심란한 마음으로 고민하기를 바란다. 왜 안되겠는가. 그들도 생각을 하는데!

p.151 "잠깐만." 내가 말했다. 돌고래가 멈춰 섰다. "너를 뭐라고 부르면 되지?"
"무엇으로도 부르지 마." 돌고래가 말했다. "우리의 요구에 귀 기울여 줘. 이제 네가 여기 주인이라고 말했지. 좋아. 우리의 요구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우리와 공정하게 협상해. 그러면 나를 부를 수 있는 이름을 알려 줄게. 그래야 공평한 거래지."

p.279 "돌고래와 실제로 대화하는 건 아직 좀 느낌이 이상해." 대화를 시작하면서 나는 73에게 털어놓았다. "당연하지. 무슨 말인지 알겠어." 73이 대답했다. "지능을 가지고 있는데도 발언권이 인정되지 않는 생물체가 되는 것도 난 이상해. 그러니 피장파장이야."


*도서제공: 구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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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계곡
스콧 알렉산더 하워드 지음, 김보람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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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살아가는 존재의 절대적 유한성을 뛰어넘을 이야기를 보여줄지, 기대가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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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에 새기는 빛 - 서경식 에세이 2011-2023
서경식 지음, 한승동 옮김 / 연립서가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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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별이신 서경식 선생님의 명복을 빌며, 새겨 읽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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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타의 매 열린책들 세계문학 63
대실 해밋 지음, 고정아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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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믿을 수 없다. 누구도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기보다 거의 모든 전개가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과 표정, 말과 동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어느 하나 속내를 드러내지 않으므로 독자는 마음 편히 이입할 수 없는 동시에 마치 현장에 함께하는 것 같은 생생함을 느끼게 된다.

정의의 편도, 처음부터 끝까지 진실만을 말하는 증인도, 전적으로 탐정의 능력을 신뢰하는 의뢰인도 없다. 무엇보다, 일단 우리의 주인공, 그 '탐정'을 믿을 수 있는지부터가... 묘사부터 신사답다든지, 명석하다든지, 유쾌하고 다정한 면모와는 거리가 멀다. 정말이지 칼만 안 들었을 뿐 날강도나 다름없는 냉정한 태도는 오히려 악당과 협잡꾼에 가깝다.

한 번을 져주는 법이 없고, 돈이면 좋고 없으면 썩 꺼지라는 식이다. 쓰다보니, 이거 탐정 맞아요? 깡패두목 아니고...? 그밖에도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주저 없이 왼뺨에 뒤통수까지 갈겨줄 캐릭터로 가득한 이 이야기의 핵심은 울먹이는 의뢰인으로 시작된다.

p.10 달그락거리는 소리, 희미한 종소리, 에피 페린이 타자를 치는 소리가 닫힌 문 저쪽에서 들려왔다. 가까운 어느 사무실에서 웅웅거리는 모터 소리도 둔중하게 올렸다. 스페이드의 책상에 놓인 놋쇠 재떨이에서는 피우다 만 담배 한 대가 담배꽁초들 틈에서 가늘게 연기를 올리고 있었다. 흰 담뱃재들이 노란 책상 표면과 녹색의 압지와 몇몇 서류를 위로 점점이 내려앉아 있었다.


탐정과 독자가 편을 먹고, 그래, 아무래도 이 이야기에는 팀을 이룬다거나 협력한다는 말보다는 이쪽이 더 잘 어울리는데, 진실을 찾아 좌충우돌 행진을 벌이는 정석적 추리 소설에서 벗어나도 한참 벗어나있는 이 작품이 1차대전 직후에 발표되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은가.

이전까지의 세계를 송두리째 뒤엎은 '그 전쟁' 직후, 사회는 정의와 인간 본성의 신뢰, 유대감을 잃어버렸다. 선량한 사람의 순진한 믿음도, 간신히 재건된 사회의 공권력도, 겉으로나마 신뢰를 이야기하는 세속적 계약 상대도 믿을 수 없다. 그 누구도 가진 패를 내보이지 않고, 모두가 진실을 숨기고 등 뒤에 칼을 감추고 있다.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세계, 지겨울만큼 여전한 이권다툼 속에서 이른바 〈하드보일드〉라 불리는, 사회성원의 도덕성과 기존의 가치를 더이상 신뢰하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그저 무자비하게 뚫고 나가는 캐릭터가 등장하는 소설이 쏟아져나온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결국 이런 유행 또한 뼈저리게 느낀 무력감과 환멸의 반영이었을지 모른다.

p.161 「그들은 보화 속을 뒹굴었소. 선생은 모를 거요. 우리도 전혀 모르오. 그 사람들은 수십 년 동안 사라센인을 상대로 해적질을 해서 무수한 보석, 귀금속, 비단, 상아를 약탈했소. 동양 세계에 있는 부의 정수 중에서도 정수들을 말이오. 그것이 역사요, 선생. 그 사람들에게는 그 성스러운 전쟁이 — 성당 기사단도 마찬가지였지만 — 노략질에 지나지 않았다는 걸 우리는 모두 알고 있소.


깊은 밤, 불빛이 어른거리는 창 너머로 오가는 말은 그저 입에 발린 속임수인가. 그는 그녀를, 당신은 나를, 서로가 서로를 배반하는 지독히도 외로운 세계에서 그들은 무엇을 갈구하는가. 눈물도 미소도, 사랑도 증오도 믿을 수 없는 차가운 도시의 하루는 저물고...

마지막까지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조각난 진실 속에서 독자는 무엇을 발견하게 될까. 끔찍하게 매력적인 그들의 말과 행동에, 달콤한 미소에 싸늘한 경멸이 스치는 이야기에서 시대의 초상을 읽어낼 수 있으리라 믿는다.

p.274 스페이드가 부드럽게 말했다. 「사랑스러운 아가씨! 운이 좋으면 20년 후에 샌퀜틴 감옥에서 풀려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그때 나한테 돌아와요.」 그녀는 그에게서 뺨을 떼고 고개를 뒤로 멀리 젖힌 채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그가 창백한 얼굴로 부드럽게 말했다. 「이 가녀린 목에 교수형 밧줄이 걸리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그는 두 손으로 그녀의 목을 어루만졌다.

p.281 그는 어깨를 살짝 들썩이고 말했다. 「아. 고액의 수임료라면 적어도 저울의 반대편에 얹을 또 하나의 추는 될 수 있었겠죠」 그녀는 그에게 얼굴을 바싹 가져다 댔다. 그러고는 입을 살짝 벌린 채 입술을 내밀고 속삭였다. 「만약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면 저울의 반대편에 다른 건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스페이드는 이를 다물고 그 사이로 말했다. 「나는 당신 때문에 얼간이가 되지는 않을 겁니다.」


*도서제공: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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