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터 빌런
존 스칼지 지음, 정세윤 옮김 / 구픽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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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삼촌. 돌아가신 와중에 죄송하지만 생전에 돈이 많으셨다고요... 다름이 아니라 제가 지금 자금이 좀 급해서 그러는데, 사랑하는? 아마도 사랑했을? 조카가 내일모레쯤 굶어죽게 생겼으니 430만 달러만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근데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슈퍼빌런이요? 우리 고양이가 말을 한다고요?

와중에 내 집 그거 꼴랑 하나 남은 재산이, 엄연히 말하자면 하나까지도 안 되는... 아무튼 그게 잿더미가 됐다고요? 근데 내가 용의자라고요? 얼굴도 까먹은 삼촌의 단독상속인으로 와서 장례식을 주관하라고요? 화환에 꼴 좋다고 써있다고요? 오신 분들은 이 인간 진짜 죽었나 시신에 칼도 좀 찔러보고 유전자 증거도 좀 가져가겠다고요? 뭐라는거야 대체?

그러니까, 연락두절 인성파탄자 삼촌이 생전에 어마어마한 부호였단다. 그것도 전세계를 손아귀에 넣은 사업가이자 슈퍼빌런. 죽기 전에 나를 상속인으로 지정했으니 소식 들고 찾아간 직원을 따라가 냉큼 사업 물려받아 호시탐탐 털어먹으려는 동종업계 사업가들도 어떻게 좀 해보란다. 안 그러면 너도 죽을 꼴이니 아무튼 이해를 좀 해보라고? 지금요? 갑자기요?

p.116 악당은 전문적인 방해자였다. 시스템과 과정을 조사해 각각의 약점, 빠져나갈 구멍, 의도치 않은 결과를 찾아낸 다음, 그들 자신이나 고객의 이익을 위해 그것들을 이용한다. 이러한 활동은 그 자체로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으며, '선함'이나 '악함'은 관찰자의 시각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고 양은 설명했다.


황당함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유일한 가족 고양이가 사실은 회사 직원이었으며, 나름 부동산도 가지고 있단다. 또다른 직원 돌고래는 노조 조직권을 요구한다. 그러니까, 삼촌이 악당재벌일 뿐만 아니라 악덕사장이기도 했다고요? 환장하겠네... 어제까지만 해도 나는 세금 낼 돈도 없어 나앉게 생긴 임시 교사였다고요!

그치만 '회사와 함께 사라지다'가 되게 생겼는데 그게 중요한가요. 까짓거 한 번 해보죠. 일단 협상부터 해봅시다. 누구와? 돌고래, 그리고 예의 '동종업계 종사자들'과. 그것도 '네가 뭘 몰라서 그러니 한 수 가르쳐주겠다'는 분들과. 가봅시다, 조만장자 라이프, 초재벌 거물인지 뭔지 얼마나 대단한가 어디 한 번 해보자고요.

p.139 "돈은 현실이 아니에요, 찰리. 인쇄소에서 찍어내는 종이일 뿐이죠. 미국 정부나 중국 정부, 또는 브라질 정부가 우리에게 내는 돈은 전부 비자금이에요. 그 정부의 예산에 기록되지 않아요. 그저 자신들이 그 돈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며 우리에게 송금할 뿐이죠. 우리가 쓰려고 하기 전까지는 그 돈은 존재하지 않아요."

p.143 "우리는 그 돈을 이용할 수 없어요. 쓸 수도 없어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그런데 왜 그러는 거죠?" "경쟁자들이 그 돈을 가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예요." 모리슨이 말했다. "어떤 정부가 우리의 구독자라면, 그 정부는 다른 경쟁자의 서비스를 구독하지 못해요. 왜 그러겠어요? 우리가 전부 제공할 수 있는데."


작중의 악당, 빌런, 정재계를 좌우하는 거물들의 모임 등은 이제는 놀랍지도 않은 것들이다. 상상 이상의 부, 전지구를 쥐락펴락하는 권력은 더이상 낯선 이야기가 아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누군가는 잔고인지 잔돈인지 헷갈릴 금액이 전재산인데 같은 세상을 사는 누군가는 섬을 소유하고, 가늠조차 어려운 거액이 숨만 쉬어도 불어나는 걸까?

현실 속의 악당은 화려한 코스튬에 기괴한 분장을 하지 않는다. 초능력을 가진 인외의 존재도 아니다. "진짜" 악당은 폐쇄적인 집단에 스스로 고립되어 있다. 정당한 주인에게서 훔쳐낸 것을 아무도 몰래 야금야금 팔아치울 기회를 노린다. 교묘한 말재주와 우격다짐으로 배를 채운다. 적나라하게 드러난 "이너 서클"은 그저 우스꽝스러울 뿐이다.

p.266 "당신은 전 세계의 비극을 이용했고, 그 비극이 당신 생각만큼 빨리 일어나지 않으면 몇 가지를 직접 일으키기도 했을 겁니다. 그리고 똑똑하고 젊은 예스맨들을 심고 또 심어 일구었겠죠. 그 예스맨들의 에고를 부풀렸을 겁니다. 그래야 당신이 그들의 재능을 얼마나 많이 훔쳐 가는지 모를 테니까요."

p.267 "당신은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세계의 운명을 좌우하고 있다고 확신했겠죠. 그러다 탐욕스러워지거나, 게을러지거나, 당신 자신의 홍보자료를 믿게 된 겁니다. 아니면 이 전부가 동시에 일어났을 수도 있겠죠."


작품 전체가 이렇게 묻는 듯하다. 이것이 부의 권력인가. 이것이 가진 자들의 힘인가. 대체 무엇이 마땅히 추구당해야 하며, 누군가는 정당하게 노동하고 대우받을 권리를 투쟁으로 쟁취해야만 하는가. 누가 협잡꾼이자 약탈자인가. 그들이 가지고 누리는 것들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누가, 대체 누가 "진짜 악당"인가?

이 책을 읽는 모든 이들이 웃고, 화내고, 머쓱해지기를 바란다. 한순간에 비일상에 휘말리는 주인공의 황당한 심정에 공감하고, 끔찍하게 치우친 부와 권력이 얼마나 허상같은 것인지 깨닫기를 바란다. 그에 더해 동정도 '애완'도 거절당하는 경험을 하길 바란다. 그렇게 우리 사회를 한 겹 젖혀보기를, 동료시민의 범주가 어디까지인지 심란한 마음으로 고민하기를 바란다. 왜 안되겠는가. 그들도 생각을 하는데!

p.151 "잠깐만." 내가 말했다. 돌고래가 멈춰 섰다. "너를 뭐라고 부르면 되지?"
"무엇으로도 부르지 마." 돌고래가 말했다. "우리의 요구에 귀 기울여 줘. 이제 네가 여기 주인이라고 말했지. 좋아. 우리의 요구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우리와 공정하게 협상해. 그러면 나를 부를 수 있는 이름을 알려 줄게. 그래야 공평한 거래지."

p.279 "돌고래와 실제로 대화하는 건 아직 좀 느낌이 이상해." 대화를 시작하면서 나는 73에게 털어놓았다. "당연하지. 무슨 말인지 알겠어." 73이 대답했다. "지능을 가지고 있는데도 발언권이 인정되지 않는 생물체가 되는 것도 난 이상해. 그러니 피장파장이야."


*도서제공: 구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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