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소녀들의 숲
허주은 지음, 유혜인 옮김 / 미디어창비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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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출판사 미디어창비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상상해보자, 어느 나라의 기록이 있다. 모 년에 모 국으로 보내는 공물 내역. 내용은 대강 다음과 같다. 은 오백여 관, 소 이천여 두, 쌀, 과일, 세공품, 자기... 그리고 여인 삼백여 명. 이 문서에는 사람이되 사람으로 취급되지 않는 이들이 있다. 공녀(貢女), 공물로 보내지는 여인이라는 뜻이다. 아니, 노역을 질 인부가 필요하면 자국 장정을 모집하고, 기술자가 필요하면 사신단에 딸려 오가면 될 것을 사람을 아주 돌아오지 못하게 바친단다. 그것도 여인을, 조공품으로. 그려지는가.
이름이 무엇이든간에 건국 이래 한반도는 조용할 날이 없는 땅이었다. 툭하면 이리 치이고 저리 빼앗기고, 제법 나라같이 생긴 꼴을 갖추기 전까지는 달달 볶여 시달리는 것이 일상이었다는 뜻이다. 그 중에서도 제주는 이중, 삼중의 고생을 해야만 했던, 우리이되 우리가 아니었던 아픈 역사가 응축된 땅이기도 하다.
이 이야기는, 아마도 있었을 이야기에 작은 위안과 사죄를 전하는 이의 마음이기도 하다. 벼락같이 끌려가 말도 글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삶을 살다 간신히 돌아오기라도 하면 손가락질에 숨어 살아야 했던 이들의 하나하나 읊어주는 상상이다. 동시에 서문처럼 저자 자신과 동생을 위한 화해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단다. 최고의 수사관,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것만 같던 아버지가, 어디에 계시는지 땅으로 꺼졌나 하늘로 솟았나, 제발 살아만 계시라고 빌었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하지만 시신을 찾지 못했으니 그저 그것에 매달려 오래 전 떠나온 고향 제주도로 향한다. 희미한 죄책감을 안고. 두고 온 동생을 떠올리며.
정의감 넘치는 수사관이었던 아버지는 소녀들이 연달아 사라지는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찾은 제주 땅에서 실종되었다. 그리고 찢긴 옷소매만이 발견되었다. 사건의 전말을 파헤치면 아버지에게 닿을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렇게 도달한 섬, 바람과 바다가 모든 것을 가져갈 것만 같은 이 섬에서 무얼 할 수 있을까. 서먹하기만 한 동생은 아버지도, 나도 그저 원망할 뿐이고 그 동생이 가족처럼 여기는 늙은 무당은 수상하기 짝이 없다.
복순이라는 여인에게 전해받은 아버지의 수사일지와 기억을 더듬어가며 사건의 전말에 가까워질 수록 점점 믿을 수 없는 사람은 늘어가고, 내내 불안하던 동생과의 관계조차 파탄이 나고 마는데...!

책을 덮고서야 참았던 숨을 몰아쉴 수 있었다. 다소 가벼운 성장소설이겠다는 예상과는 달리 중간중간 서럽게 울부짖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사람의 이야기이다. 밑바닥에서 끌려가고 짓밟히고 기껏해야 규중규수, 방 안의 화초로 자리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여겨지는 이들이 판을 뒤집는, 모험이자 승리의 기록이기도 하다. 어떻게든 서로를 돕는 힘없는 사람 간의 연대를 잊지 말라. 높으신 분(스포일러 방지)의 말은 틀렸다. 약한 자가 승리할 수 있다. 선한 길을 가려고 투쟁하는 사람은 꽃처럼 짖밟혀도 들불로 살아난다. 그러니 부당한 요구에 저항할 힘이 없다고, 혹은 그럴 용기가 없다고 타인에게 고통을 떠넘겨서라도 자신을, 제 자식만을 구해보려 애쓰는 이가 그저 죄인만은 아닐지라도 그에게 죄가 없다고만 할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제 자식에게, 남의 자식에게, 그 누구에게라도.

"아방이 대낮에 내 목을 졸라수다. 도와달랜 도와달랜 해신디도 마을 사람들은... 그 사름들 그냥 대문 앞에 고만히 보고만 있었수다. 얼굴 알려지면 공녀 된댄 아방이 나 얼굴 해싸지게 허는 동안에요(p.327)."
전에도 집안 물건들을 보관하기 위해 이런 자물쇠를 사용해본 적이 있다. 하지만 이건 아니지. 나는 아무 열쇠나 골라 자물쇠를 열며 속으로 말했다. 이 아이들은 문갑에 보관하는 옥반지, 은 머리 장식, 비단이 아니야. 하지만 현실이었다. 보휘, 경자, 마리는 그런 물건처럼 우리 안에 갇혀있었다(p.381).
악마다. 이제야 알겠다. 이 사람을 이해하기가 왜 그리 힘들었는지. 나는 악마라면 뾰족한 뿔, 날카로운 이발로 만들어졌다고 상상했다. 선하고 점잖은 겉모습으로 빛나고 있을 줄을 꿈에도 몰랐다. 아버지의 말이 내 왼쪽 귀에 들렸다. 좋은 것들이 알고 보면 모조일 때도 있자. 문 촌장의 친절은 진심이었을지 몰라도 금칠한 놋쇠처럼 싸구려였다(p.388).

다만 시대 배경상의 한계인지 애쓰고 분투하는 여성, 어리고 약한 이들의 행동을 높은 지위의 남성이 인정하고 격려하는 느낌을 준다는 것이 다소간 아쉽다. 허나 등장인물의 대사에서 제주말씨를 살리려 노력한 점과 주인공 민환이가 작중 높으신 분(스포일러 방지)의 권유와는 달리 궁내 수사관이 되어 강대국의 요구를 이행하기 위해 민중과 여성을 착취하는 또다른 가해자의 일원이 되는 길을 거부하는 선택은 마음에 든다. 미디어작품, 기왕이면 영화로 나오면 좋겠다. 어느 때에 나와도 우리 사회가 잊을 수 없는 이야기가 될 수 있을테니.
"(...) 아무리 깊이 묻혀 있어도 진실은 반드시 떠오른다고. 진실은 꺾이지 않으니까. 몇 년, 몇십 년이 지나도 포기하지 않고 빛을 찾아 올라오는 게 진실이야(p.326)."
"나리께서 나헌티 한 가지 질문을 남겨신디. 좀좀허랜 할 순 있다. 허나 그 결정을 멫 년이 지나도 만족햄시나? 라고." (...) "아시 돕쟁 헐 때 내가 깨달은 게 이수다." 가희가 마침내 고개를 들고 나와 눈을 마주쳤다. 캄캄한 밤에 희미하게 일렁이는 빛을 보는 듯했다. "옳은 행실 헌다는 건 죽을 만큼 무섭다고. 하지만 지금은 펜안해져수다(p.362)."


함께 읽기를 권하는 책들.
1. 조혁연, 『빼앗긴 봄, 공녀』 (세창출판사)
2. 정구선, 『공녀』 (국학자료원): 절판
3. 정승호, 김수진, 『명나라로 끌려간 조선 공녀 잔혹사』 (지식공감)
4. 로렐 켄달, 『무당, 신령, 여성들』 (일조각)
5. 진성기, 『제주도무속논고』 (민속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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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당을 만나러 갑니다 - 함께 우는 존재 여섯 빛깔 무당 이야기
홍칼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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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시작에 앞서, 무속 및 민간신앙을 포함한 모든 유신론자들에게 양해를 구해야겠다. 아무리 생각하고 또 고민해봤지만 강경한 무신론자이자 초월신 신앙에 부정적인 사람이다, 나는. 이는 종교의 순기능이나 신에게 의지하는 마음에 대한 부정과는 다르다. 나뿐만 아니라 무신론자를 자청하는 모두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다. 신의 이름을 빌어, 혹은 공유하는 믿음과 가치에 기대서라도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마음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된다. 한발 물러서서 생각해보면, 결국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도 일부가 공유하는 믿음에 불과하지 않는가.
이쯤해서 잊을만하면 한번씩 꺼내드는 모 평론가의 글을 떠올려보자. "내가 생각하는 무신론자는 신이 없다는 증거를 손에 쥐고 환호하는 사람이 아니라, 신이 없기 때문에 그 대신 한 인간은 다른 인간을 향한 사랑을 발명해낼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나는 신이 아니라 이 생각을 믿는다." 나또한 그렇다. 초월적인 힘을 믿지 않는 이들에게 주어진 것은 내세나 거대한 순리에 대한 믿음을 비웃을 권리가 아니라 기댈 존재가 없기에 사람이 사람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책임져야할 의무이다. 그 무게를 잊지 않고서야 비로소 믿음의 체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짊어지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된다.

이 책은 굿을 하고 부적을 쓰고 치성을 드려 복을 얻으라는 '팁'이 아니라 우리 곁에 직업인으로서, 사람으로서 존재하는 여러 무속인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이야기이다. 영화 "만신"의 주인공으로도 알려진 고 김금화 만신의 제자부터 성소수자, 시각장애인, 나라의 이름으로 가해진 폭력의 희생자를 위로하는 무당, 무당을 위한 무당 등 "무당"이라는 이름 아래 다양한 가치를 위해 살아가는 무속인들과의 문답을 통해 그들의 내력과 세계관을 듣는다. 그 사이사이 저자가 독자에게, 어쩌면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을 통해 읽는 이를 곁으로 부른다.
어쩌면, 여기서만은 당신의 이야기를 놓고 가도 좋을 거라고. 우리는 속죄도 회개도 요구하지 않으며 그저 큰 흐름이 있다, 그럴 수도 있겠다 정도의 조언을 줄 수 있을테니, 천지만물에 깃든 신에게 당신 몫의 기원을 전할테니 마음 편히 머물다 가셔도 좋으리라고.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아 아 젊은 사람들이 이래서 무속신앙을 찾으러 가는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이 책의 여러 에세이를 읽고나서 무속신앙에 대한 믿음이 생겼냐고 묻는다면, 아니다. 한번쯤 타로나 괘를 뽑아 나온 결과에 의지하고자 하는 마음이 들었느냐고 묻는다면, 역시 아니다. 여전히 본인도 믿지 않는 무형의 힘에 영험한 효능이라도 있는 양 퍼트려 돈과 시간을 갈취하는 일에는 분노가 치솟고 저것이 사회악이지 다른 것이겠냐고 화를 내지만 어쩌겠는가. 무엇에라도 기대고 싶은 마음, 스스로가 믿는 축복과 기원의 힘을 타인을 위해 쏟아붇고 나누고자 하는 사람의 마음은 언제 어디서나 끈질기게 존재해왔고 나는 그것을 사랑하지 않을 방도가 없다.
신이 없는 세상을 살아가는 내가 신의 품안에서 흘러가는 시간을 살아가는 이들과 살아가는 방법은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사람 위에도 아래에도 다른 것이 없으니 귀하고 천한 것이 따로 없어 모두를 각자의 세계에서 최선을 다하는 존재로 동등하게 존중하는 것, 그것이 내가 해야할 일이라고. 나의 좁은 식견에 드넓은 세계를 끼워맞추지 말자고, 모든 시간 모든 대상에게서 배우기를 멈추지 말자고, 다만 그것이 세상이 나를 위해 존재한다 믿는 오만이 되지 않기만을 바라고 잊지 말자고. 오늘도 어딘가에서 맑은 물을 떠놓고 신령의 이름으로 기원했을 이들에게서 배운다. 그렇게 살아가는 마음을 잊지 말자고.

함께 읽기를 권하는 책
1. 로렐 켄달, 『무당, 여성, 신령들』 (일조각)
2. 홍칼리, 『신령님이 보고 계셔』 (위즈덤하우스)
3. 손노선, 『한국무당의 신들림과 무업의 사회적 실천』 (민속원)
4. 도우리, 『우리는 중독을 사랑해』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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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앤더
서수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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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막막하다. 갑갑하고. 영화, 드라마, 만화, 소설... 매체를 가리지 않고 회귀며 빙의가 유행한단다. 새삼스레 그러는 것도 아니고 제법 오래된 소재란다. 계보도를 그려도 충분할 그것을 더듬어보노라면 지금의 기억과 지식을 가진 채로 다시 도전한다면 더 잘 살 수 있을텐데,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텐데, 그 때 그 괴로움을 조금은 수월히 넘길 수도 있을 것도 같은데. 미련에 가까운, 그런 욕망은 인류보편사인가, 하는 의문이 들고야 마는 것이다.
낡고 지친 어른, 닳아빠진 어른이 만드는 세상은 하나같이 청소년기를 아름답고 눈이 시리도록 푸른 낭만의 시기로 그려내는데 정작 우리네 아이들은 어떤 몰골인가. 하이틴 로맨스처럼 가슴떨리는 첫사랑에 울고 웃는가? 방과후 부활동으로 잊지 못할 추억을 쌓는가? 무모한 도전에 덤벼들고 마음껏 미래를 꿈꾸는가? 아니라고만 할 수는 없겠지만 대다수 학생들의 삶은 공부, 경쟁, 입시 이 세 단어로 대강 설명되지 않는가. 아침부터 밤까지, 학교에서 학원이나 과외로, 수업 끝나면 자습, 자습 끝나면 한밤중, 조금 눈붙이고 나면 새벽같이 등교.
식용견, 불법으로 감금되고 사육되어 도축되는, '시장 보신탕집' 개들은 소리에 예민해지면 짖느라 살이 빠지니 부러 고막을 터트린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좁은 우리에서 스트레스로 서로를 공격하면 '상품가치'가 떨어지기에 이빨과 꼬리를 절제당하는 돼지도 다를 바가 없다. 청춘입네 미래네 추켜세우는 청소년들을 대하는 현실이 이와 다를 바가 있는가.
우정의 소중함과 청춘의 아름다움을 외쳐봤자 "지금 이 순간에도 적들의 책장은 넘어간다"느니, "지금 자면 꿈을 꾸지만 공부하면 꿈을 이룬다"는 말이 하루가 멀다하고 쏟아지는 세상에 친구가 어디 있는가. 생활기록부 한 줄에, 시험점수 1점에 기십년의 미래가 오락가락 하는 곳에서 그게 가당키나 한가. 한창 잘 먹고 잘 쉬고 잘 놀아야 할 시기에, 12년 또는 그 이상의 시간을 온통 쏟아부어 결정짓는 것이 겨우 대학이란 말인가. 겨우, 겨우 그것때문에 애써 태어나 자라는 이들이 서로를 향해 눈을 홉뜨고 경계하지 않으면 영영 패배자로 살아야한다고 여기는 것이 이상하지 않단 말인가.

주인공 해솔은 한국의 중심, 그중에서도 가히 '교육의 성지'라고 일컬어지는 대치동 수험생이다. 가장 가까운 친구도 그와 마찬가지로 인생의 '스토리'가 온통 입시에 맞춰진, 부모까지 입시에 올인하는 열성적인 학생이다. 그마저도 편하지만은 않다. 미묘한 신경전, 견제, 기싸움은 기본인 그런 사이. 친구라고는 하지만 정말 친구가 맞는걸까, 마음 한구석이 껄끄러운 그런 사이.
“스토리. 우리한테 필요한 건 성적이 아니라 스토리야. 대학에 가려면 학생부의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를 관통하는 스토리가 있어야 돼. 그러니까 요즘은 공부만 잘해서는 안 된다는 말들을 하는 거야.”(p.11)
엄마의 재혼으로 졸지에 가족에서 떠밀려나와 호주로 유학하게 된 해솔은 한인 홈스테이 가정에 머물지만 자리잡을 생각도, 동갑내기인 주인집 딸 클로이와 친해질 생각도 없다. 그저 악물고 공부만 열심히 하다 좋은 대학에 가는 것, 지금까지 살아온대로, 그렇게.
엄마는 해솔에게 바라는 것이 없어 보였다. 해솔이 호주에만 있으면, 한국에 돌아가서 엄마의 행복한 재혼 생활에 걸림돌이 되지만 않으면 그것으로 된 것 같았다.(p.144)

주인공 클로이는 가족과 함께 호주로 이민 온 학생이다. 이유는 몰라도 그래야 하니까, 착한 딸이고 엄마의 삶 또한 입시에 걸려있으니까,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고 엄마가 애걸해 얻어낸 우등생, 명문대 튜터에게 과외를 받고, 그렇게 의대에 가야한다고 믿는 조용하고 착한 아이. 왜 그래야만 하는지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생각할 기회도 다른 기회도 없었으니 그저 그래야만 하는 그런 아이. 그동안 상냥함을 내밀면 이용해먹는 친절이나마 돌아오던, 자기와는 경쟁할 수 없는 그저 그런 하숙생들과 다르게 자기 자리를 위협하는 무심하고 낯선 해솔을 만나며 클로이의 일상이 뒤틀린다. 혼란스러워진다. 자꾸만 저 아이를 미워하게 된다. 해솔과 친해지고 싶고, 그를 이해하고 싶은 동시에 밉고 싫고 자신을 불안하게 한다.
클로이는 멍하니 해솔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엄마가 한창 보고 있는 드라마를 떠올렸다. 드라마에서는 시드니 도심에 가야 볼 수 있을 크기의 건물이 학원이었다. 그 건물 옆도, 그 옆도 모두 학원 건물이었다. 깜깜한 밤까지 학원의 불빛이 환했고, 건물들 앞에는 학원 버스가 줄지어 서 있었다. 고등학생들은 한밤까지 학원에서 공부하는 것도 모자라 집에서도 자신을 감금한 채 공부를 했다. 가르친다기보다 학대하는 것에 가까운 과외 선생에게 수업을 받고 싶다고 울기까지 했다.(p.51)
“저거 봐라, 한국 애들은 저렇게 공부해. 넌 쟤들에 비하면 맨날 놀고먹는 거야.”
Selective School. 선별된 학교. 선택받은 학교. OC반에서도 우수한 학생이고 학원 셀렉티브 준비반에서도 상위권이던 클로이가 셀렉티브 스쿨 시험에 떨어진 건 선택받지 못했기 때문일까? 누구로부터?(p.115)

주인공 엘리는 호주에서 자란 한국인이다. 엄마도 아빠도 나라도 내가 한국인이라는데, '원래는 여기 있으면 안 될' 신분이라는데 한국어라고는 조금도 모른다. 아주 어릴 때부터 호주에서 자랐고, 당연히 호주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불법으로 개조한 차고에 세들어 살지만, 마약 판매로 용돈벌이를 하지만, 매년 익스펙션 때면 온가족이 세간살림을 싸들고 밤을 보낼 곳을 찾아야 하지만, 엄마도 아빠도 불안정한 일자리를 전전할 수 밖에 없지만. 그게 다 나를 위해서란다. 내가 대학에 가고 취직을 하고, 비자를 받아내기만 하면 모든 게 다 해결된단다. 그걸 위해서.
매일 혼자 있었다. 그런데도 엄마와 아빠는 모든 게 엘리 때문이라고 했다. 엘리 때문에 집에 들어올 시간도 없이 힘들게 일을 하는 거라고. 엘리를 위해. 엘리가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잠을 자고, 혼자 학교에 다니도록 하기 위해.(p.190)
모든 것이 너무나 간단하다는 듯 엘리 엄마는 확신에 차서 말했다. 엘리가 (...) 그 많은 일이 이미 다 준비되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 교실마다 가득 들어차 있는 애들을 보면, 부모의 욕망을 대리 충족해 주는 것을 자기 장래 희망으로 굳건히 믿고 공부하는 애들을 보면 엘리의 엄마 아빠가 바라는 것이 저런 애들이고, 결국 문제는 자신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p.222)

김혼비 작가의 추천사처럼 "꺼지지 않는 산불이 호주 남부를 집어삼키듯 하루하루 잿더미로 변해가는 세 명의 10대를 지켜보는 내내 마음이 정말이지 까맣게 타들어갔다". 자기만의 이야기도, 인생도, 고민할 기회와 마음놓고 자랄 환경마저도, 단 한번도 쥐어보지 못한 그것들은 연대의 싹을 잘라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여성이 서로를 향해 보내는 애정, 서로를 결국 사람으로 인정하기에, 감히 해쳐져서는 안될 존재임을 믿어 의심치 않기에 가능한 그 마음은 여전히 중심을 세우지 못하고 휘청이는 모든 이들을 눈물짓게 할 것이다. 그것이 단지 동정에 그치지 않고 가능성에 대한 희망이자 더이상 이렇게 잃을 수는 없다는 간절한 외침이 되기를 바란다.

깨질 것만 같은 세 사람이다. 저마다의 이유로, 어쩌면 같은 이유로 처절하게 외롭고 지친 세 사람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읽는 내내 독자를 제발 그러지 말라고, 아니, 차라리 한번은 질러야 한다고, 아니, 아니. 애원하고 갈등하게 만든다. 속이 타들어가는 느낌. 까끌하고, 위태롭고, 또 찬란한 동시에 안타까워 어쩔 줄을 모르게 한다. 같은 시기, 같은 고통을 겪어봤기에 모른 체 할 수가 없어 더더욱 그렇다.
그렇다고 이들이 무력하고 순진무구한 소녀들에 불과한가, 그럴리가. 술도 마시고 약도 하고 자퇴에 기물파손에... 별 걸 다 한다. 그러나, 그럴 만한 나이가 아닌가. 그럴 수 밖에 없도록 궁지에 궁지로 몰리지 않았는가. 이해해야 하지 않겠는가. 익히 알려진 문구가 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부서지기 전에, 숨 쉴 틈도 없이 조여오는 세계를 부수고 날아가는 이들을 응원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이 소설은 응원인 동시에 위로이다. 웃을 수 있는, 행복할 수 있는 세계로 날아가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분투하는 모든 이들을 위한 연대와 격려이다. 세상에 태어난 이상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 잊지 않기를. 나도, 당신도. 행복해지기를 포기하지 않기를.
둘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도 한참을 더 웃고, 또 웃었다. 분명히 둘은 연결되어 있었다. (p.182)
언제까지라도 계속 웃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다 같이 울 수도 있을 것 같고, 왜 울었는지 까맣게 잊어버리고 다시 웃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시간이 끝나지 않고 영원히 이어질 것 같았다. 둘은 신이니까. 해솔과 클로이는 사방으로 끝없이 펼쳐진 시간 위에 서 있었다. 버림받고 나서 신이 되어 버린 둘은 그렇게 무한한 세계를 바라보며 킬킬거리고 웃었다.(p.214)
그때 해솔의 머릿속에서 구슬 목걸이가 끊어졌다. 몇 년에 걸쳐 모아온 구슬이 산산이 흩어졌다. 침대 아래로, 서랍장 뒤쪽으로, 문틈으로 사라져 버렸다. 어떤 구슬도 아쉽지 않았다. 해솔은 자신이 구슬 목걸이를 직접 끊어버렸다는 걸 알았고, 그게 중요했다. 그것이 자신이 선택한 서사였다.(p.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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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미래를 꿈꾸는 이주민입니다 - 더 나은 ‘함께’로 나아가는 한국 사회 이주민 24명의 이야기
이란주 지음, 순심(이나경) 그림 / 한겨레출판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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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부정하지 않겠다. 나는 '단일민족의 우수성'을 교육받고 자란 세대이다. '우리 한민족은 외세의 숱한 침입에도 순수성과 단일성을 잃지 않은 우수한 민족'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도록 교육받았고 그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미술시간에 사람을 그리려면 살색(그 땐 살구색이 아니라 살색이었다) 크레파스 하나만 있으면 되었으니, 어떤 시대였는지 대강 감이 잡히지 않는지.
사는 동안 우수성이네 뭐네 그게 다 헛것이라는 생각은 하게 되었으나 여전히 '한국인처럼'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낯설다. 그런 이들이 섞여 사는 사회를 낯설게 느낀다. 내가 사는 곳이 아닌 것만 같다. 지금의 아이들은 어떨까, 특히나 농어촌과 산업단지가 모여있는 동네의 아이들은 모르긴 해도 그맘때의 나보다는 훨씬 다문화가정에 익숙하겠지

주로 백인, 그것도 북미유럽계 비-한국국적자에 아주 익숙한 영상미디어와 별개로 살을 맞대고 살아가는 이주노동자 혹은 비한국인을 대하는 태도는 이전과 달라진 부분이 있을까? 오늘날의 우리는 과연 그들을 '아프리카 사람', '미국 사람', '못사는 나라 사람'이 아니라 그저 사람, 일하고 먹고 생활하고 살아가는 사람으로 인정하고 있을까? 그들이 '진짜 한국인'이 아니기에 차별과 배제가 당연한 것이라면 한국인과 한국계 이민자 2세대가 외국에서 겪는 차별과 배제 또한 당연한걸까?
최근, 중국어 사용자가 많은 지역에 설치된, 중국어로 된 방역수칙 안내 게시물이 논란이 된 적이 있다. 여전히 한국사회에서 '동남아', '짱깨', '조선족'은 욕설과 혐오의 대상이다. 잊을만하면 한번씩 튀어나오는 외국인 건강보험은 수차례의 '팩트체크'와 정정을 위한 노력에도 인식을 바꾸지 못했다. 코미디 프로그램에서는 엉터리 외국어가 수행자만 바꿔가며 재등장한다. 외국인 노동자가 가건물도 아닌 비닐하우스에서 살며 착취당하며 기르고 수확한 농산물은 저렴한 가격으로 밥상에 오른다. 전세계의 맥도날드 지점보다 많다는 한국의 교회에는 당연하려니 하는 사람들이 모스크 건립에는 오열하며 드러누워 결사반대를 외친다. 이 모든 것은 숨쉬듯이 당연하고 '감히' 한국인이 겪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는 일들이다.

표지의 문구처럼 이 책은 총 4개의 주제와 "더 나은 '함께'로 나아가는 한국 사회 이주민 24명의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이주노동자, 이민 1.5세대, 한국인 자녀를 둔 귀화인 등. 그 수만큼 다양하고 급박한 고민과 고통을 안고 있으나 그 기저에는 같은 원인이 있다. 이 사회가 그들에게 끊임없이 하나의 메세지를 던지고 있다는 것. '너희는 우리가 아니다' 라고.
누군가는 미동륵아동으로, 누군가는 이민 1.5세대로, 누군가는 이주노동자, 누군가는 귀화한국인으로서의 경험을 말한다.
각각의 경험담을 읽는 동안 이 문장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당신은 나의 존재를 알고도 잊으려 애쓰지만, 나는 지금, 여기, 당신과 같은 땅에서 살아가고 있다'. 스물 네 명의 목소리가 풀어내는 경험담들은 정말이지, 기함을 할 만큼 잔인하고 모욕적이면서도 소중하고, 때로는 얼굴이 벌개질만큼 부끄럽고 미안한 일 투성이다. 두 가지를 적어둔다.
"E-9 노동자는 사장님이 허락해줘야만 회사를 그만둘 수 있다는 거, 당신은 혹시 알고 있나요? (...) 해고했다고 고용센터에 신고해줘야, 비로소 나는 고용센터에 '사업장 변경 신청'을 할 수 있고, '고용센터에서 알선해주는 회사'에 갈 수 있어요.(p.81)"
"전에 같이 일하던 동료가 그만둘 때 사장님한테 100만원을 주고 허락 사인을 받았어요. 그래서 나도 그만두고 싶다고 말할 때 (...) 사장님은 단번에 거절했어요. "너 데려오는 데 돈 많이 들었어. 너는 100만원 갖고 안 돼."(p.120)"

각각의 본문 뒤에 덧붙여진 저자의 글이 생각을 더할 수 있게 돕는다. 그러니 명쾌한 해답이 없는 생각을 멈추지 않기를 바란다. 이것은 딱부러지는 답을 주는 책이 아니다. 그럴 수 있다면 애시당초 진작에 해결되어 나오지도 못했을 책이다. 하면 되는데 왜 그러지 않겠는가? 미안한 얘기지만 사실 이 말에도 답은 없다. 하면 되고 해야하는데 하지 않는다. 혹자는 그런 구조를 공고하게 쌓아올려 안거하고 있기 때문에, 혹자는 그 과정에서 이문을 얻고 삶을 꾸리기 때문에, 혹자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기에 이 글과 책을 읽을 이들이, 오늘과 내일들의 내가 이 한 마디를 마음에 새기기를 바란다. 우리는 같은 사람이라고, 내가 그들이며 그들 또한 나라고, 서로가 없이 존재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도 없다고, 그걸 잊어서는 안된다고.

어쩌면 이 글과 책을 모두 읽었을 이들이 마지막 장을 덮으며 앞서 던진 질문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기를 바란다. 우리는 달라졌는가? 우리는 그들을 사람으로 대우하고 있는가? 우리가 당해서는 안될 일을 당연히 누군가에게 떠넘기고 있다면, 그렇게 해도 된다는 생각은 대체 어디에서 나오는가? 어쩌면 이주노동자의 사정에도 공감하나 '가난한 한국사람'이 더 마음에 걸릴 이들이 스스로에게 묻기를 바란다. 한국인의 기준은 무엇인가? 한국인은 어떻게 한국인이 되는가? 타국의 '가난한' 현지 고용주에게 착취당하는 한국인에게도 '사정은 딱하지만...'을 말할 수 있겠는가? 뭉쳐야 할 우리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서는 일은 무엇인가?

*함께 읽기를 권하는 책
1. 은유, 『크게 그린 사람』 (한겨레출판)
2. 은유, 『있지만 없는 아이들』 (창비)
3. 설동훈, 『외국인노동자와 한국사회』 (서울대학교출판부)
4. 김희교, 『짱깨주의의 탄생』 (보리)
5. 김무인, 『다문화 쇼크』 (스리체어스)
6.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문학과지성사)
7. 윌 킴리카, 『다문화주의 시민권』 (동명사)
8. 우춘희, 『깻잎 투쟁기』 (교양인)
9. 홍재희, 『그건 혐오예요』 (행성비)
10. 백승주, 『미끄러지는 말들』 (타인의사유)
11. 이란주, 『이주노동자를 묻는 십대에게』 (서해문집)
12. 뻐라짓 뽀무, 『여기는 기계의 도시란다』 (삶이보이는창)
13. 박경태, 『소수자와 한국사회』 (후마니타스)
14. 김달성, 『파랑 검정 빨강』 (밥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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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놀 - 도덕적 선입견에 대한 생각들 세창클래식 15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이동용 옮김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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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창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단언컨대 오늘날 한국에서 가장 많이, 가장 크게 오독되는 철학자를 꼽으라면 니체!를 외치는 사람이 수두룩할 것이다. 그러니 '억울한 철학자 대회'가 열린다면 니체는 사흘밤낮을 울어제껴도 말릴 수 있는 이가 몇 없을 것이다. 오죽하면 좋아하는 철학자로 마키아벨리와 니체를 말하는 사람을 만나면 당장 도망치라는 우스개가 다 돌겠는가. (솔직히 이건 나도 좀 움찔한다. 그치만 다 이유가 있습니다.)
어째서일까. 아마 겉핥기로 입혀진 이미지에 홀려 무작정 돌진했다가 맛도 채 보기 전에 나온 사람이 수두룩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망치를 든 철학자', '신은 죽었다', '노예의 도덕' 등 자극적인 수식어에 솔깃하기 때문일까? 각자의 사정이야 알 수도 알 바도 아니지만,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역시 그의 철학이 그의 생애가 그러했듯 타오르는 것처럼 치열하기 때문이리라. 세상을 향해 망치를 휘두른 철학자, 삶의 많은 순간에 주저앉고 붕괴된 철학자, 누구보다도 뜨겁게 타오르고 종내엔 자기자신마저도 불사른 철학자, 누군가에게는 신성모독자, 또 누군가에게는 광인, 누군가, 나에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어서기를 포기하지 않은 사람. 누군가에게는 신성모독자, 또 누군가에게는 광인, 누군가, 그러니까, 나에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어서기를 포기하지 않은 사람. 니체.

이 책은 잠언집이지 교훈집이 아니다. 모든 문장과 글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의문을 품지 않는 것은 니체에게도, 니체가 지향하는 이상향의 인간에게도 모욕적인 일이 될 것이다. 매순간은 아니더라도 자주, 돌부리에 걸려넘어지듯이 읽었다. 모든 꼭지를 소개하는 것은 마찬가지로 의미가 없으니 인상깊었던 문장과 주석, 그간의 메모를 일부 적어둔다.

p.53 허무주의의 도래는 일종의 '부질없다'는 인식이 와 주는 것이다. (...) 모든 것은 그 부질없다는 말로 절망의 감정에 휩싸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감정의 상태는 극복을 요구한다. (...) 부질없음을 극복하기 위해 그 부질없던 감정을 짓밟고 일어설 수 있어야 한다. 극복을 위해서는 극복될 수 있는 대상에 대한 잔인함이 허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메모. 허무주의는 궁극적으로 투쟁, 투지의 철학인가?)
p.67 미덕으로서의 정교해진 잔인함. (...)우월의 도덕이 결국에는 정교해진 잔인성에 대한 쾌감이라는 사실은 지금도 여전히 너무도 역설적이고 거의 고통스러울 만큼 새로운 사실이기 때문이다. (...) 두 번째 세대에서는 이미 잔인함의 쾌감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오히려 그런 습관 자체에 대해서만 쾌감이 존재한다. 그러나 바로 이 쾌감이 '선'의 첫 번째 단계다.
p.133 동정을 일삼는 기독교인. 이웃의 고통에 대한 기독교적 동정의 이면에는 이웃의 모든 기쁨, 즉 그가 원하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한 기쁨에 대해 깊이 의심하는 측면이 있다. (메모. 전능하고 선한 유일신의 세계에서 타자에 대한 도덕은 배제와 처벌을 전제하는가?)
p.232 그러나 우리는 이런 사태에 대항해서, 그동안 이기적인 것으로서 비난받아온 행위들을 행할 수 있는 선한 용기를 사람들에게 돌려주고 그것들의 가치를 회복시키고 싶다. (...) 우리는 행위들과 삶의 모든 모습에서 악한 것으로 인식되는 겉모습을 거둬 낼 것이다! (...) 사람이 자신을 더 이상 악하게 간주하지 않으면, 사람은 악하기를 그만둘 것이다! (메모. 니체가 양차대전기를 살아냈다면 그의 인간본성론은 지금 전해지는 것과 다른 내용이었을까?)
p.402 가장 위험한 망각. 우리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잊는 데서 시작하고, 자기 자신에게서 사랑할 만한 어떤 가치도 발견하지 못하는 것으로 끝낸다.
p.427 자신의 비참함을 넘어서기 위해. 자신의 품위와 중요성의 감정을 만들어내기 위해 희생될 타인을 구하는 자들은 긍지에 찬 사람들로 보인다. (...) 그들은 잠시 자기 자신의 비참함을 넘어서기 위해 그들 주변의 비참함을 필요로 한다! (메모. 현대 1인미디어의 범람, 자극적인 고통의 전시와 장기적이고 다양한 삶을 고려하지 않는 자기계발론이 도덕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시대에 이 비판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참 칼침 맞아 죽지 않은 게 용하지 않나 싶을 정도로 신랄하다. 순간순간 의구심을 품은 부분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무례하게까지 느껴지는 비판들에서 호소와 절박함을 읽어내게 된다. 그의 외침이 끓어넘쳤던 시대와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던 상황을 곱씹어보노라면, 그래, 조용히 중얼거리게 된다. 일상의 어느 순간에 아, 하는 탄성과 함께 깨닫는 것처럼.
그러니 앞서 이야기한 '꺼림칙한' 이미지를 정확히 말하자면, 니체가 아닌 니체의 일면을 곡해하는 사람에 대한 경계라고 할 수 있다. 차라투스투라도 짜라두짜도 니체도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식의 지배론이나 모든 것을 근성으로 치부하는 자기계발론을 말한 적이 없다.
니체를 사랑하는, 그의 칼날같은 비판을 사랑하고 그에게서 타인을 짓밟고 올라서는 승자의 논리가 아니라 세상에 대한 연민과 삶에 대한 사랑을 읽어내는 이와 같이, 지쳐 쓰러져 하염없는 채찍 아래 늘어진 나귀를 끌어안고 통곡했다던, 무너져내린 마음의 철학자가 세상에 전하는 호소에 마음아파하고, 부끄러워하고, 끄덕이고, 분노하는 이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니체를 차별과 혐오의 도구로 이용하는 사람을 경계한다.

덧. 목차에서는 본래 원문에는 순서가 없었으나 출판사가 전집 발간 시 편집상의 편리함을 위해 차례를 더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저자의 의도대로라면 순서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는 의미리리라. 이 판본 또한 분권화된 목차를 따르고 있으나 마음 내키는 대로 앞뒤를 오가며 읽어도 좋겠다. 처음부터 끝까지 목차에 따라 읽는 것과 그날그날 펼쳐지는 부분에서 뛰어넘고 돌아가며 읽는 것 두 가지를 다 해보았으나 경우마다 색다르게 좋았으니 각자의 성향에 맞게 읽기를 권하고 싶다.
자칫 잘못 이해하기 쉬운 원문 곳곳에 옮긴이의 주가 더해져 이해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 원문 텍스트에 대한 보충설명 뿐만 아니라 원저 출판 당시의 사회상, 역자의 개인적인 견해가 함께 담겨있어 깊고 넓게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니체의 『아침놀』과 역자의 『아침놀 주해』를 함께 읽는 느낌. 니체과 그의 저작에 대한 관심은 있지만 선뜻 펼치기엔 겁이 나는 독자에게 친절한 발판을 제공해줄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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