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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에 이름 붙이기 - 마음의 혼란을 언어의 질서로 꿰매는 감정 사전
존 케닉 지음, 황유원 옮김 / 윌북 / 2024년 5월
평점 :
품절
이름 없는 존재들이 있다. 분명 그곳에 존재하나 마땅히 부를 바가 없어 입만 벙긋대다 시선을 피하게 되는 것, 경계를 덧그릴 수 없는 것, 알지만 안다고 할 수도 함께함을 인정할 수도 없는 것. 감정에도 그런 것들이 있다.
어떤 슬픔은 차마 말로 표현할 방도가 없기에 이름조차 붙여지지 않는다. 어떤 슬픔은 너무도 미묘해 슬픔인 줄도 모르고 지나치게 된다. 또다른 어떤 슬픔은 다른 감정에 짐짝처럼 끼어 자리한다. 끝내 구석으로 치워져 고요히 고요히 먼지처럼 쌓이는 시간에 영영 가리워질 때까지.
어떤 날엔 죽은 식물처럼 바싹 말라 부서지고 싶었다. 또 어떤 날엔 눈알이 흘러나올 때까지, 강물처럼 울고 또 울고 싶었다. 또다른 어떤 날엔 마음의 무게에 온몸이 으스러지는 것 같았고, 언젠가는 심장이 혓바닥 위에서 쿵쿵 뛰는 느낌에 악물고 버티지 않으면 그것을 토해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p.46 우리는 우리의 삶을 채워나가기 위해 이런 바보 같고 사소한 것들을 필요로 한다. 설령 그것들이 별 의미 없는 것들일지라도 말이다. 애초에 걸린 판돈이 그리 크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주기만 한다면. 삶이 늘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는 일들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때로 삶은 그냥 삶이다. 그리고 그래도 괜찬다.
안녕하셔요, 나는 슬픔입니다. 라고 이마에 써붙이고 오지 않는 마음들이나 아련한 그리움, 막연하게 애태우는 심정까지, 내가 이름 붙이고자 하는 슬픔은, 이를테면 그런 것이다. 슬픔인 줄도 몰랐던 슬픔.
읽는 동안, 제목과는 다르게 혼란과 불안 혹은 그리움이나 질투와 수치심에 가까운 감정들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시금, 이 사람이 그 모든 것에 슬퍼했다면, 이런 감정이 몰아치는 순간마다 아파온 마음 또한 슬픔이었다면, 그 이름들을 찾는 여정이 『슬픔에 이름 붙이기』가 아닐 이유도 없지 않은가.
p.111 우리는 모두 그저 시선을 교환하며 서로에게 우리가 누구인지 말해주려 애쓰고 있을 뿐이다.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며 우리 자신을 엿보려 애쓰면서 말이다.
p.204 어쩌면 우리는 기억 자체를. 물감이 캔버스에 닿자마자 진짜 작품이 시작되는 하나의 예술 장르로 생각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예술 작품은 절대 완성되지 않는다. 오직 버려질 뿐.
세상에 이렇게나 많은 슬픔이 있으리라 생각지 못했던 탓도 있으리라. 행복의 구렁텅이, 기억의 한켠, 떠들썩한 밤을 보낸 날, 혼자서 혹은 인파의 한가운데서 느끼는 고립감, 어쩌면 인간은 자기 자신의 경계를 영영 넘을 수도, 열어보일 수도 없다는 공포. 한때의 감정은 흩어져 사라지고 그 무엇도 영원할 수 없거나 의지로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
아름답고, 슬프고, 혼란스럽거나 외롭거나, 질투하거나 벅차오르거나, 한숨을 내쉬거나 남몰래 조금쯤 전율하고 있는 마음들을 들여다보기 위해 저자가 아주 새로운 언어, 모든 것을 한 올 한 올 풀어헤칠 만한 새로운 언어 그 자체를 발명해냈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이 책은 여기저기서 빌어오고 꿰맞춘 단어와 개념들로 가득한, 사전 아닌 사전이다. 누더기다. 너무나도 유명해 창조주의 이름을 제 것으로 하였우나 정작 그 자신의 이름을 갖지 못한 괴물과도 같은 절박한 시도이다. 필연적으로 우스꽝스러워질 수밖에 없는 것.
결국 주저하거나 비밀스럽거나 터져오르기 직전인 이 모든 말들은 알지만 모르는 것, 이름이 없어 부를 수 없었던 감정을 이해하려는 시도의 흔적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말들이 치열하게 고민하고 유리알같은 고통을 펼쳐보이려는 시간의 기록일지 모른다는 생각은 나를 다시금 슬픔으로 끌어들인다. 이제는 이름 있는 고통, 잠겨가는 슬픔, 슬퍼하는 동물, 인간.
어느 시인의 말을 빌어, "슬퍼하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요". 또다른 작가의 말을 빌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인생이지만 그것도 인생이라고 말해주길".
슬픔을 들여다보고 가만히 펼쳐보이는 것을 넘어 숨은 슬픔에게도 자리를 내주려는 시도에 나는 이렇게 말하련다. 다정하고 안쓰러운 그 마음을 품은 슬픔에는 어떤 이름을 붙이겠냐고.
p.175 당신은 혼자서 사는 삶에 절대 편안함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당신은 자신이 존재한다는 최초의 충격을 이겨내지 못할지도 모르고, 여전히 숨을 고르고 마지막까지 몸을 바로 세우려 애쓰며 여생을 영원한 신참으로 살아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소한 당신은 당신이 좋은 사람들과 함께 있다는 사실만은 알고 있으라. 우리 중 누구에게라도 물으면, 우리는 당신에게 이렇게 말해줄 것이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에요".
*도서제공: 윌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