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지 못하는 사람들 - 우리의 인간다움을 완성하는읽기와 뇌과학의 세계, 2024 세종도서
매슈 루버리 지음, 장혜인 옮김 / 더퀘스트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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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자찬 내지는 거들먹대는 것처럼 보일 줄을 뻔히 알기에 굳이 꺼내지는 않는 말이 있다. 읽기는 내 삶이었고, '읽기'를 시작한 이후로 내 삶에 책이 없었던 적이 없다. "나를 이루는 것은 팔할이 활자와 종이로 이루어진 세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너무도 당연하게 읽었고, 다른건 몰라도 읽는 능력만은 숨쉬듯 당연하고 "정상 기준"이 요구하는 선 아래로 벗어난 적이 없었기에 오히려 의식적인 취미 개발로서의 독서를 이해하는 데 곤란을 겪기도 했다. '읽는 아이'였고, '읽는 어른'이 된 지금, 나의 정체성의 많은 부분은 독자로서의 그것에 근원을 두고 있다.

이것은 나의 자부심이자 정체성인 동시에 두려움이기도 하다. 물성으로서의 책, 의미로서의 책, 언제나 손 뻗으면 닿는 곳에 존재하는, 숨처럼 공기처럼 당연한 존재로서의 책과 그것에 닿을 수 있는 최소 조건인 '읽기 능력'을 한순간에 잃을 수 있다는 해묵은 공포가 있다.

p.170 읽기능력을 잃는다는 것은 단순히 학습한 기술을 잃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이것은 존엄성을 상실한다는 뜻이며 부분적 인격 또는 불완전한 인격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다. (...) 읽기능력을 잃은 사람은 더 이상 자신을 '완전한 인간'이라고 느끼지 못한다.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한 이 두려움에는 근원이 있다. 나는 이미 뿌리를 잃은 적이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빠짐 없이 욀 수 있을 정도로 사랑했던 책을, 그 첫 문장을 몇 번이고 읽고 또 읽어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을 때, "눈이 글자 위를 미끄려져" 붙잡을 수 없었을 때 나의 세계는 바닥부터 흔들려 무너졌다.

이전과 큰 차이 없이 회복한 지금도, 어쩌면 그렇기에 지금까지도, 그 때의 기억은 수시로 나를 찾아와 흔들어 놓는다. 이제는 익숙해진 통증에 눈을 감고 무력하게 누워만 있을 때는 마음과 몸이 모두 나의 '읽는 세계'를 앗아갈 수 있음을 뼈저리게 느낀다.

다른 세계를 이해하는 것은 비단 남을 위하고 함께 사는 일을 위하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당연한 것'이 없다는 깨달음은, 다양한 세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앎은 나 자신의 변화, 다양한 '정상'으로의 이동과 적응을 가능케 한다.

p.162 자폐인 독자와 똑같지는 않아도 자폐인 독자도 책과 만나며 즐거움을 느낀다. 자폐적 읽기 방식을 통해 일반 독자에게 읽기와 다른 활동의 경계가 어디인지, 무엇보다 읽기의 경계를 벗어나 텍스트를 느끼는 그들만의 즐거움에 과소평가된 측면으로는 무엇이 있는지 생각해볼 수 있다.


사는 동안 만나온 "'읽기'와 먼 사람들"에는 단 한 번도 책읽기가 즐거웠던 적이 없는 이도, '읽기의 즐거움'을 등지거나 잃어버린 이도, '정상적 읽기' 자체를 수행할 수 없게 된 이도, "정상에서 벗어난 '읽기' 방식" 탓에 스스로를 독자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이도 있었다.

"인간의 뇌는 읽기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말과 달리, 인간은 읽는 동물이다. 이것은 "인간은 이야기를 짓는 동물"이라는 상투적 표현과는 궤를 달리한다. '읽기'는 고도의 학습 능력이 종합된 결과인 동시에 좀처럼 상실되지 않는 능력이다.

이 책은 난독증, 자폐인, 문해력 상실, 공감각과 환각, 인지증(치매) 등, "정상적 '읽기'" 밖의 독자들과 그들의 전략을 고루 펼쳐보인다. "정상 바깥"의 너무도 넓고 다양해 기존의 의미처럼 단일하고 명확한 '읽기'의 기준선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p.315 리딩투커넥트 위원들은 독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텍스트 전체를 이해하든, 몇 페이지에만 머물든, 한 문구를 곱씹든 이미지만 즐기든, 그들은 활자 매체와 상호작용하고 있다. 자료에 접근할 수 있게 도우면 인지 결함이 있는 사람도 책과 계속 만날 수 있다. 나는 이런 방식도 읽기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비록 그들의 방법이 과거에 읽어왔던 방법과 전혀 비슷하지 않아도 말이다.


"인간의 뇌는 읽기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인간은 '읽는 동물'이다. 이 책의 독자들은 저마다 다양한 방식으로 '읽기' 혹은 읽기 이후의 세계에 적응하고, 살아갈 방법을 찾는다.

독자는 어쩌면, 이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경계를 지우고 다양성이 포괄하는 범위를 넓히는 것은 새로운 가능성을 시사한다고, 다르다는 것은 실패와 미달의 동의어가 아니라고.

p.339 읽기를 스펙트럼으로 본다고 해서 읽기와 읽기가 아닌 것을 절대로 구분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 하지만 우리는 제한적이지 않은 정의도 염두에 두고, 다양한 행위를 구분하는 일보다 이 행위들의 공통점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p.343 신경다양적 독자의 사례는 읽기 방법에는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음을 알려주고, 다른 사람과 비슷하거나 다른 자신만의 취향을 되돌아보게 한다. (...) 논의를 이어나가면서 자신이 읽기 습관이 완전히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신을 같은 생각을 해왔다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위안을 얻어도 좋다.



*도서 제공: 더퀘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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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반대편에 들판이 있다면 - 문보영 아이오와 일기
문보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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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기에 앞서, 고백합니다. 그간 내게 문보영이라는 시인은 어쩌면 묵묵하고 또 담담하면서 쓸쓸하고 건조한 이미지였기에, 이 책 또한 씁쓸한 맛이 강하게 배어나는 점을 빼면, 뭐랄까, 크게 특별하지 않은 에세이들의 반열에 넣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시작하자마자 뒤집어졌지만요.

이 사람이 이렇게 귀엽고 엉뚱해 어디로 튈지 전혀 모르겠는 이였던가? 정녕 이 사람이 부슬부슬하고 퍼석퍼석한 환상을 그려내던 그 시인이 맞나?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인간 문보영의 삶을 제대로 한 번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이제 쪼끔(조금 아님) 웃긴..." 이랄까.

p.14 아이오와에 와서 가장 먼저 한 말은 "My room has no view"이다. 작가들은 ‘아이오와 하우스 호텔’이라는 곳에 머문다. 호텔 인근에 아름다운 아이오와강이 흐르고 햇빛이 가득하지만 방은 어둠에 잠겨 있다. (...) 작가들에게 어두운 방을 배정하라는 상부의 지령이 있었나? 그게 아이오와 IWP의 은밀한 목적인 걸까? 빛이 없는 곳에서 어떤 글이 탄생하는지 실험하는…. 여기 일종의 글쓰기 감옥?

p.91 여하간 그렇게 걷다가 뒤를 돌아봤는데 아무도 없었다. 점점 더 모르는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둘은 신나게 대화를 하고 나는 소외된 채, 나아가 방해자가 된 채 걷고 있었다. 난 에바의 옷자락을 붙잡고, 에바야... 이건 좀 에바 같은데, 해 뜨면 가보지 않겠냐고 말했는데 내 말이 들리지 않는 듯했다.


언젠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인생이 영화라면 아무래도 장르는 호러가 아니겠냐고. 내게 삶은 대체로 불안하고, 끊임없는 계획과 통제와 경계... 익숙해진 것들에 대한 자그마한 사랑의 순간과 찰나를 파고드는 공포와 기겁의 연속체다. 하루의 크레딧이 올라갈 쯤엔 이미 모든 기력을 탈탈 털어쓰고 이제 그만 극장 문 닫죠... 의 심정이 되어버린달까.

그러니 이 작가의 기행(여러 의미로...)은 놀라움의 연속이 아닐리가. 두렵지 않은가? 무섭고 불안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꼭 그만큼 즐거웠다. 엉뚱하고 사랑스럽고 다정한, 심심찮게 헐렁한 구석이 있는 시인의 어떤 순간, 삶의 단편을 조금 나누어받는 경험이.

잠시 머무르는 이방인, 생각보다 대책없고 삶의 면면에서 귀엽고 유쾌하고 사랑스러운 구석을 발견해낼 줄 아는 사람. 여전히 나는 시인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가'도 '사'도 '자'도 아닌, 시인. 시 곁에 나란히 자리하는 사람, 그런 이가 써내는 시를 알알이 들여다보고 끌어안고 싶다고 생각하기에.

p.232 몽 씨는 사람을 안 만나고 대체로 사람 아닌 것들로 집안을 꾸며놨는데 (...) 대체로 사람 빼고 좋아하는구나. 내가 사람이어서 미안했다. 저 사람과 있을 때는 최대한 사람답지 않은 모양으로 있어야겠다. 그게 어떻게 하는 거냐 하면 내가 들판 아닌 방향으로 걸을 때 조사한 그 나무들처럼 존재하는 것일 테다. 사람 아닌 것으로 존재하는 것이 나 자신에게도 좋으니까, 나는 생각했다.


할 수만 있다면, 오래도록 작은 동네의 달팽이처럼 살고 싶다. 강박적인 효율과 계산의 세계에 사는 나는, 정처없이 걸어본 적이 없다. 적어도 자의로는. 들판의 길을 기꺼이 걸어본 적이 언제였던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매 순간 단단히 각오하지 않으면 순식간에 불안에 흔들리며 울먹일까봐.

오래 전에 먼 곳에 자리잡은 친구와 근래 들어 새로운 도전과 기회를 찾아 낯선 땅으로 건너간 이들을 떠올리며 읽었다. 어떤 사람의 세계는 저럴 수도 있겠구나. '그래도 괜찮다'를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부딪혀가며 배울 수도 있겠구나. 사랑을.

p.209 이곳에서 나는 강해지는 것 외의 다른 선택지가 있다는 걸 안다. 어떤 따뜻한 곳에서는 내가 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호구처럼 살아도 된다는 걸 안다. 아이오와에서도 똑같이 움츠려 있지만, 나의 웅크림은 보상받는다. 사람들은 호의를 알아차리고 보답한다. 며칠 전에 타로를 봤다. 이번 달에 당신은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다, 동시다발의 사랑이 발생하여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한다. 카드는 말했다. 나는 강해지지 않아도 괜찮다. 나는 변하지 않기로 한다.

p.266 사랑이 있을 때 많이 써둬야 한다. 사랑이 있어야 묘사의 눈을 갖게 되기 때문에 만상을 'devour'할 수 있다. 'devour'이라는 단어는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다'라는 의미이다. 이 단어는 가오나시가 사물과 음식을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는 장면을 상기시켜 쿡 웃음이 나온다.


다정하지만 무르지 않게, 자기만의 세계를 무너뜨리지 않는 이와 또 그러한 사람들과의 시간을 읽고 난 지금, 여전히 집달팽이(민달팽이→달팽이→집달팽이 순으로 은둔과 고립의 정도를 더한다는 나의 지론) 인간인 나는 울고 싶은 날에, 바람에 눈을 감고(질끈! 말고 아이고... 정도) 기꺼이 모르는 이와 인사를 나눌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삶은 여전히 벅차거나 두려울 수 있지만, 어쩌면, 들판의 길로 기꺼이 헤매고 돌아가기를 택한다 해도, 여전히 우리는 괜찮을 수 있다고, 조금 슬프고 구겨지고 낡고 닳아 헤진다고 하더라도, 그럴 수 있다고 말하는 것만 같아서.

p.60 I want to live here. I want to leave here. 살다와 떠나다를 구별할 수 없다면, 내가 여기 살고 싶다고 말할 때, 너는 내가 떠나고 싶어 한다고 이해하겠지. 이젠 떠나고 싶다고 말하면 여기서 살고 싶다는 뜻으로 이해하겠지. 그건 좋은 걸까 나쁘 걸까 아름다운 걸까. 그건 어두운 밤, 강을 건너는 새끼 오리 같은 것이거나 내가 좋아하는 들판의 나무들처럼 슬프겠지. 살고 싶다는 말은 떠나고 싶다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p.110 제 하루는 완벽하지 않은 언어로 누구가와 대화를 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일어나자마자 말문이 막히는 경험을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말문이 막히는 거 좀 좋지 않나요? 왠지 안전한 기분이 들지 않나요?


*도서제공: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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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에 이름 붙이기 - 마음의 혼란을 언어의 질서로 꿰매는 감정 사전
존 케닉 지음, 황유원 옮김 / 윌북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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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존재들이 있다. 분명 그곳에 존재하나 마땅히 부를 바가 없어 입만 벙긋대다 시선을 피하게 되는 것, 경계를 덧그릴 수 없는 것, 알지만 안다고 할 수도 함께함을 인정할 수도 없는 것. 감정에도 그런 것들이 있다.

어떤 슬픔은 차마 말로 표현할 방도가 없기에 이름조차 붙여지지 않는다. 어떤 슬픔은 너무도 미묘해 슬픔인 줄도 모르고 지나치게 된다. 또다른 어떤 슬픔은 다른 감정에 짐짝처럼 끼어 자리한다. 끝내 구석으로 치워져 고요히 고요히 먼지처럼 쌓이는 시간에 영영 가리워질 때까지.

어떤 날엔 죽은 식물처럼 바싹 말라 부서지고 싶었다. 또 어떤 날엔 눈알이 흘러나올 때까지, 강물처럼 울고 또 울고 싶었다. 또다른 어떤 날엔 마음의 무게에 온몸이 으스러지는 것 같았고, 언젠가는 심장이 혓바닥 위에서 쿵쿵 뛰는 느낌에 악물고 버티지 않으면 그것을 토해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p.46 우리는 우리의 삶을 채워나가기 위해 이런 바보 같고 사소한 것들을 필요로 한다. 설령 그것들이 별 의미 없는 것들일지라도 말이다. 애초에 걸린 판돈이 그리 크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주기만 한다면. 삶이 늘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는 일들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때로 삶은 그냥 삶이다. 그리고 그래도 괜찬다.


안녕하셔요, 나는 슬픔입니다. 라고 이마에 써붙이고 오지 않는 마음들이나 아련한 그리움, 막연하게 애태우는 심정까지, 내가 이름 붙이고자 하는 슬픔은, 이를테면 그런 것이다. 슬픔인 줄도 몰랐던 슬픔.

읽는 동안, 제목과는 다르게 혼란과 불안 혹은 그리움이나 질투와 수치심에 가까운 감정들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시금, 이 사람이 그 모든 것에 슬퍼했다면, 이런 감정이 몰아치는 순간마다 아파온 마음 또한 슬픔이었다면, 그 이름들을 찾는 여정이 『슬픔에 이름 붙이기』가 아닐 이유도 없지 않은가.

p.111 우리는 모두 그저 시선을 교환하며 서로에게 우리가 누구인지 말해주려 애쓰고 있을 뿐이다.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며 우리 자신을 엿보려 애쓰면서 말이다.

p.204 어쩌면 우리는 기억 자체를. 물감이 캔버스에 닿자마자 진짜 작품이 시작되는 하나의 예술 장르로 생각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예술 작품은 절대 완성되지 않는다. 오직 버려질 뿐.


세상에 이렇게나 많은 슬픔이 있으리라 생각지 못했던 탓도 있으리라. 행복의 구렁텅이, 기억의 한켠, 떠들썩한 밤을 보낸 날, 혼자서 혹은 인파의 한가운데서 느끼는 고립감, 어쩌면 인간은 자기 자신의 경계를 영영 넘을 수도, 열어보일 수도 없다는 공포. 한때의 감정은 흩어져 사라지고 그 무엇도 영원할 수 없거나 의지로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

아름답고, 슬프고, 혼란스럽거나 외롭거나, 질투하거나 벅차오르거나, 한숨을 내쉬거나 남몰래 조금쯤 전율하고 있는 마음들을 들여다보기 위해 저자가 아주 새로운 언어, 모든 것을 한 올 한 올 풀어헤칠 만한 새로운 언어 그 자체를 발명해냈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이 책은 여기저기서 빌어오고 꿰맞춘 단어와 개념들로 가득한, 사전 아닌 사전이다. 누더기다. 너무나도 유명해 창조주의 이름을 제 것으로 하였우나 정작 그 자신의 이름을 갖지 못한 괴물과도 같은 절박한 시도이다. 필연적으로 우스꽝스러워질 수밖에 없는 것.

결국 주저하거나 비밀스럽거나 터져오르기 직전인 이 모든 말들은 알지만 모르는 것, 이름이 없어 부를 수 없었던 감정을 이해하려는 시도의 흔적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말들이 치열하게 고민하고 유리알같은 고통을 펼쳐보이려는 시간의 기록일지 모른다는 생각은 나를 다시금 슬픔으로 끌어들인다. 이제는 이름 있는 고통, 잠겨가는 슬픔, 슬퍼하는 동물, 인간.

어느 시인의 말을 빌어, "슬퍼하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요". 또다른 작가의 말을 빌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인생이지만 그것도 인생이라고 말해주길".

슬픔을 들여다보고 가만히 펼쳐보이는 것을 넘어 숨은 슬픔에게도 자리를 내주려는 시도에 나는 이렇게 말하련다. 다정하고 안쓰러운 그 마음을 품은 슬픔에는 어떤 이름을 붙이겠냐고.

p.175 당신은 혼자서 사는 삶에 절대 편안함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당신은 자신이 존재한다는 최초의 충격을 이겨내지 못할지도 모르고, 여전히 숨을 고르고 마지막까지 몸을 바로 세우려 애쓰며 여생을 영원한 신참으로 살아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소한 당신은 당신이 좋은 사람들과 함께 있다는 사실만은 알고 있으라. 우리 중 누구에게라도 물으면, 우리는 당신에게 이렇게 말해줄 것이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에요".


*도서제공: 윌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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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옷의 어둠 모토로이 하야타 시리즈
미쓰다 신조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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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러가 픽션의 영역에 머물기 위해서는 최소한, 핍진성을 갖추되 현실의 위협, 그러니까, 현실에서 흔해빠지게 보이는 그것을 그대로 가져다 쓰지 않아야 한다. 적어도 내 기준으로는 그렇다. 어째서 그래야 하는가? 있을법한 일, 너무도 익숙한 사건을 토대로 그려내는 편이 쓰는 이와 읽는 이 모두 몰입하기 쉽지 않은가?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쓰는 사람에게는 현실을 그대로 가져다 따붙이는 셈이 되고, 읽는 사람에게는 조금도 현실 바깥, 뉴스나 신문의 사회면이 아닌 세계를 상상할 수 없게 하기 때문에. 그렇다면 창작이 실제 사건, 역사의 일면을 토대로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인가?

그렇게 말하자면 '거기서부터는 다른 장르의 개입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사회고발, 르포... 어떤 이름이든. 그것에 괴기 또는 미스터리와 추리가 더해질 수는 있어도 그것만으로 끝낼 수는 없다. 과거를 현재로 불러오는 힘이 필요하다. 그런 작품에는 필연적으로 명쾌한 결말이 따라붙을 수 없다.

p.12 전쟁 전이나 전쟁 중에 신문과 라디오는 국민의 전의를 대대적으로 선동했다. 물론 그에 편승한 국민에게도 책임이 있겠으나 그 청구서는 전쟁 중과 전쟁 후의 비참한 삶을 살아야 하는 형태로 날아왔다. (...) 이에 국민이 격노했느냐 하면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않았다. 하지만 무리도 아니다. 화나 내고 있을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단 살고 봐야 했다. 그래서 암시장이 생겨났다.


대신 깔끔하게 해결되지 않은 면모, 대안역사가 주는 위안의 한계. 서글프거나 원통하거나 참담한 뒷맛이 자리를 차지한다. 출판사며 서점의 구분이 어떻든간에, 독자인 내가 '모토로이 하야타 시리즈'를 역사와 사회현실에 기반을 두는 분야로 보는 것도 그런 이유다.

사건의 배경은 태평양전쟁 직후 뒷골목의 암시장, 제도와 터전 모두 폐허가 된 국가의 암시장, 그것도 뒷골목. 말 그대로 어둡고 숨어들어가야만 하는 곳이다. 국민을 지켜야 할 자가 그 자신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내맡기기를 강요당한 이들을 버렸기에.

그러고도 그들 위에 군림하기를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 안위를 보전하기 위해 다른 모두를 사람의 자리에서 몰아냈기 때문에.

p.50 두 사람 앞에는 신이치의 어머니가 준비해준 호화로운 요리와 술이 쭉 차려져 있었다. 변함없이 '있는 곳은 다 있는' 모양이다. 참고로 황실이 '있는 곳'의 대표였다. 황궁 벽에는 황족이 먹을 오늘 음식이 나붙었는데 쌀도 고기도 생선도 채소도 풍부했다. 그곳에 '배고픔'은 조금도 찾을 수 없었다. 황실은 도쿄도에서 완벽하게 다른 세계였다.

p.108 "그건 그렇고 국가는 말이야, 우리를 아무렇지 않게 배신하고 깨끗이 버리더라." 그녀는 자기들 창부를 가리켜 말했을 텐데 여기 나온 '우리'를 '일본 국민'으로 바꿔도 아무 문제 없을 정도로 전쟁 중에 국가는 확실히 국민을 버렸다. 아니, 실은 똑같은 짓을 패전 후에도 공공연히 저질렀다.


오롯이 그들만의 잘못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세상이 선과 악으로 명확히 나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악한 '이 편'의 압제로 신음하는 선량한 민중에게 새로운 '저 편'의 '구원'이 도래한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정말이지, 얼마나 쉽고 편리하고 순종적일까.

전쟁의 비참함은 일면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 고통이 '응당 받아야 할' 이에게만 몰려들지도 않는다. 그로 인한 죽음이 환한 빛으로 일시에 찾아와 모든 것을 끝내버리는 자비로움이지도 않다. 삶의 구석구석을 파괴하고, 가장 약한 자가 가장 고통스러운 자리로 밀려 떨어지며, 죽음은 한껏 느린, 그러나 무슨 수를 써도 피할 수 없는 파멸로 다가온다.

다시금 사건의 현장으로 돌아가보자. 패전국의 수도, 도쿄에 '붉은 옷의 괴인'이 출몰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그는 다른 곳도 아닌 암시장의 한 골목, '붉은 미로'에 나타나 행인을 절망과 공포에 빠트린다고 한다. 그는 무엇을 바라 나타나는 것이며 정체는 무엇인가.

p.351 ...다른 차원의 세계. 북적이는 암시장 구석에 나타난, 정적으로 가득한 어두운 세계. 이승이라기보다 저세상에 가깝다고 여겨질 정도의, 느낌이 드는 좁은 공간. 인간이 아닌 존재가 수없이 방황하고 있는, 결코 인간은 들어가서는 안 되는 장소.


신시대의 평화를 꿈꿨던 전도유망한 청년에서 체제의 기만과 패망을 목도한 자, 재건의 꿈을 안고 가장 천대받는 탄광부에서 등대지기를 전전하며 누구도 가지 않은 길을 모색하던 그가 이번에는 암시장에 나타났다. 이전까지의 거처가 일종의 벽지, 오지였던 것과는 사뭇 다른 행보이다.

괴이는 괴이. 그 자체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비틀린 곳에 왜곡된 현실이 비집고 들어와 덧씌워진 것일 뿐임을 온몸으로 겪고 돌아온 그가 다시금 마주한 초토의 신-수도는 어떤 모습이었던가. 가장 무서운 것은 괴이도 신도 아닌, 사람과 그의 마음임을 다시금 확인하지 않았던가.

어느 고전의 제목(~는 ~의 꿈을 꾸는가) 처럼, 모토로이 하야타는 조국 재건의 꿈을 꾸는가, 여전히. 처음 이 시리즈의 소개를 마주했을 때 감상은, 솔직히 말해, '꿈도 크지' 내지는 '무슨 염치로 여전히?'였다. 물론 그 생각은 작가가 그려내는 참상, 죄 없는 국민과 그들의 유죄성을 동시에 다뤄내는 솜씨를 이해하자마자 사라졌지만.

모토로이 하야타의 모험, 기행, 아니... 여정이라고 해야할 그것은 언제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 머지않아 그가 마주할 전쟁특수와 재부흥의 시기에 또 어떤 절망과 그에서 피어나는 의지를 보일 것인가. 그저 기대할 뿐이다. 참담한 마음으로.

*도서제공: 출판사 비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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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물리학 - SF가 상상하고 과학이 증명한 시간여행의 모든 것
존 그리빈 지음, 김상훈 옮김 / 휴머니스트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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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뜸 "시간 여행"을 상상한 적이 있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뜬금없이 대체 무슨 소리냐"고 묻는 자는 하수다. 잠시 생각에 잠겼다 시큰둥한 얼굴로 "글쎄..." 하고 말꼬리를 흐리는 자는 중수다.

그렇다면? 마침 잘걸렸다 내지는 땡잡았다는 얼굴로 반색하며 시간의 정의와 시간 여행을 소재로 하는 작품의 계보를 줄줄 읊어대는 (혹은 설명하기도 지친다는 얼굴로 말을 돌리는) 자, 그 자가 바로 고수다.

나는 그런 사람을 만날 때마다 양손을 움켜쥐고 "안녕하십니까. 고수 동지. 어디 있다 이제서야 나타나신 건가요." 하고 격한 반가움을 전하고 싶은 충동에 시달린다. 그치만, 만나기 좀처럼 쉽지 않단 말이지.

이 주접은 이를테면, "진짜 팬"을 만나기 쉽지 않다는 나름의 억울함의 발로(그런데 이제 쪼끔 구질구질한)인 것이다. 누군가는 이 세상에 '이 세상에 진짜 팬, 가짜 팬이 어디있나' 불만을 제기할지 모르겠으나...


결정적인 순간, 취향 합치에 실패해 머쓱한 분위기로 돌아서본 적이 있는 이라면 알 것이다. 이구동성을 기대했던 자리에 '으;; 맛알못'만이 남겨진 그 서글프고 찝찝한 마음을.

그뿐인가. 장르로서의 SF 자체의 역사도, 그 계보와 미래를 그리는 시도 자체도 숱하게 이어져왔으나, 여전히 SF를 "공상과학"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많다. 상상보다는 공상, 실현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로 간주해 팬들의 마음(또는 골치)을 아프게 하는 경우가 심심찮게 있다는 뜻이다.

그러던 차에 우리가 사랑했던 SF 작품들 속 장면들을 통해 시간여행의 원리와 그 가능성을 보이는 책이 반갑지 않을리가 있나. 각각의 챕터를 따라 고전 반열에 오른 대작부터 액션영화까지, 활자와 영상, 흑백과 컬러를 넘나드는 지적 탐구에 흠뻑 빠져있노라면, 확신에 가까운 생각이 들 지도 모른다.

아, 이거 동족이구나. 존 그리빈은, 앞의 이야기를 빌어, 그야말로 어디 있다 이제서야 나타난건지 반가운 고수 동지(라고 하기엔 줄곧 문단에 있었지만... 지박령에 가깝지만...)가 아닐 수 없다.


필연 SF는 가장 낭만적인 장르다. 눈 앞에 보이는 세계, 지금 여기의 시공 그 너머를 상상하는 일이 아름답고 환상적이거나 짜릿하고 생생하지 않을 수가 있나. 동시에 독자를 몹시 괴롭게하는 장르임이 분명하다. 당연함을 비틀고 진리라고 믿어온 세계를 다르게 보기를 요구하는데 진입장벽이 없을리가.

그러나 보라, 상상만큼 현실적인 일도 없다. 현실이 없다면, 지금의 세계를 알지 못한다면 그 너머, 다른 세계, 차이를 이해하는 즐거움도 느낄 수 없다. 소설과 영화 속의 한 장면은 현실을 찢고 파내고 뒤집어 만든 또다른 현실-가능성이 아닌가.

그러니 여기서 물어야 한다. 왜 가능한가? 어떻게 가능하거나 불가능한가? 그 답을 찾아가는 여정은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 숨은 팬을, 미래의 오타쿠 씨앗을 찾아서 떠나는 여행과도 같지 않을까.


우리는 시간 속에서 살아간다. 그렇다면 시간은 실제로 존재하는가? 시계바늘의 이동이나 숫자의 순차적 변화가 아닌, 시간 그 자체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과거나 미래로의 도약은 어째서 불가능하거나 또는 꿈꿔볼만한가? 과거의 나는 현재의 나와 동일한 개체가 맞는가? 우리 우주는 단일한가?

시간에서 시작해 자아와 우주로 흘러가는 일련의 의문은 과거부터 끝없이 제기되어왔다. '나' 너머의 '나', '세계' 너머의 '세계'를 원하는 마음은 이동의 자유를 체감할 수 있게 된 인간이 당연하게 가 닿는 결과일지도 모른다.

현재를 벗어나고픈 욕망, 과거를 바꾸고자 하는 후회, 미래를 알고 싶어하는 호기심은 어쩌면 인간의 본성에 내재되어 있는 게 아닐까?

상상의 토대가 되는 이론과 함께 가설을 넘어 가능성을 움켜쥐는 여정에 함께할 독자에게 이 책을 권한다. 언젠가 도래할, 혹은 시간을 넘어 찾아낼 "반가운 고수 동지"와의 만남을 기대하며!



*도서제공 출판사 휴머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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