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발하고 싶은 여자들 - 청년여성들의 자살생각에 관한 연구
이소진 지음 / 오월의봄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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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발하고 싶은 여자들, 어찌 읽으면 영미 소설 제목 같기도 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제목에 홀려서 바라본 부제는 '청년여성들의 자살생각에 관한 연구'입니다. 


사실 출판사 오월의봄에서 이 책을 소개할 때, 가장 관통했던 어구는 '계급과 젠더의 교차로'였습니다. 


청년 여성을 호명할 때, 그들은 정말 다양한 관점이 투영되는 거진 기의 없는 기표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실업급여 받아서 명품이나 사고 여행 가는', '성차별로 저임금 노동을 수행하는', '요즘은 고학력인', '어려울 것 없는', '다 가진', '여성상위시대의 수혜자' 등등 



어떤 수식어는 화가 나고, 어떤 수식어는 나이기도 하고, 어떤 수식어는 편견이고, 터무니없고, 한쪽 면만을 묘사하고. 


그 사이에서 "계급과 젠더의 교차로"가 되게 한 줄기 빛처럼 눈에 들어왔습니다. 



통계청의 <2022 국민 삶의 질> 보고서에 따르면, OECD 국가 중 여성 자살률 1위로 2위 벨기에보다 두 배 이상의 수치를 기록합니다. 또한 여성 자살을 2030의 여성들이 40·50·60 여성보다 높은 자살률을 보입니다. 이러한 특이점들이 한국 청년여성의 자살률에 이목을 집중시킵니다. 




도대체 우리는 자살생각을 할까? 그리고 그게 우리의 문제일까?



《증발하고 싶은 여자들》은 총 3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크게 1부에서 '가족' 2부 '노동', 3부 '신자유주의 담론에서 기인한 존재론적 불안'을 그 이유로 설명합니다. 



아마도 증발하고 싶은 여성들이 가진 이유는 저 세 주제와 자신의 환경이 만났을 때 나타나는 교집합이라고 생각합니다. 



1부에서는 '아빠'라는 가부장제 속 권력 주체에게 의한 인정투쟁에 곁들여, 남자 형제와의 차별, '딸'이라는 이유로 부과되는 돌봄노동, 가사노동 등은 청년여성들은 평생 나올 수 없을 것만 같은 굴레에 갇힌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합니다. 



부모 세대와 전혀 다른 환경에서 딸인 그들은 부모의 성과 중심주의와 근거 없는 낙관론 속에서 언제나 '노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성과를 들먹이며 비난받거나 방임되었다는 (스스로도 잘못되었다 여기는) 감각 속에서 가족을 "자신의 성과가 담보되어야 안전할 수 있는 공간"으로 인식합니다. 



또한 그들에게 가해지는 부모의 신체적 학대와 차별과 통제는 가족이라는 개인에게 책임 지어진 복지의 최후 방어선에 의지할 수 없도록 합니다. 



2부에서는 한국 사회에서 청년여성이 느끼는 노동 불안정성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가족으로부터 기인한 위험을 탈출"하기 위해서는 노동을 통한 정기적인 소득이 필수이지만, 청년여성들은 가정 내 가부장 권력의 부조리가 그대로 사회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이들은 노동 주변부에서 노동 가치가 절하된 저임금 노동자로 노동시장을 떠돌며 "직종 내 여성 비율에 따라 임금이 낮아지는 경향"과 "여성은 (가족의 존재로 인해) 남성에 비해 일터에 헌신하지 못한다는 편견에 시달리고" 이것이 다시금 "여성들의 일에 대한 평가절하로 이어져 임금 불평등을 초래"합니다. 



여성들이 주로 구직하는 일자리는 '저숙련'일자리로 불리지만, 이는 사실 남성 중심적 시각이 발현된 호칭이며 이러한 저숙련 일자리는 저임금을 정당화하지만, "실제 노동 현장에서 여성들이 주로 하는 일은 저숙련이라기보다는 '여성'이 한다는 이유로 손쉽게 저숙련'으로 치부됩니다. 



또한 남성과 같은 직종에 근무하는 여성들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승진에서 밀리고 남성과 차이 나는 연봉을 바라보며, 이러한 사기업을 벗어나 일견 '공정'해 보이는 시험을 준비하는 경향이 보입니다. 



"신자유주의는 '경쟁'이라는 가치를 중심으로 특정한 삶을 향해 정진하도록 우리를 통치"하는 체제로 우리의 합리성이란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면서 커리어를 쌓아 공간적 제약에서 벗어나는 것"이 됩니다. 



이때 모든 문제의 원인이 개인에게 전가되며, 우리는 사회구조적 문제를 파악하는 눈을 잃습니다. 자신이 자신의 착취자가 되어지만 문제는 자신이 아니기에, 모든 것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3부 '청년여성이라는 존재론적 불안'에서는 신자유주의하 능력주의 서사와 결합한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이들을 탈진시키고 자기혐오와 자살생각을 부추기는지를 이야기합니다. 



구조적 문제의 원인으로 나를 지목했을 때, "계급상승을 위해 자기 자신을 개선해야 한다고 설파하는 자아실현 담론과 능력주의는 조직의 입장에서 구조의 문제를 개인의 책임으로 전환하는 유용한 정치적 도구로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자아실현'과 '능력주의'라는 이야기는 우리를 속이고 마치 성차별은 존재하지 않고 여성 개개인의 능력 혹은 노력의 부족이라는 평가 결과를 내놓습니다. 



이미 열심히 살아왔으나 앞으로의 타개책 또한 ‘열심히’ 말고는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이들은 앞으로 나가지도, 뒤로 돌아가지도 못하는 ‘끼어 있는’ 존재가 되어 있다


《증발하고 싶은 여자들》, 165쪽



양 틈에 끼어 있는 존재로, 우리는 도대체 우리의 미래를 어떻게 상상할 수 있을까. 불안정성이 뉴노멀의 규칙으로 등장했을 때, 우리는 그 위에 타오르려고 애쓰는 일 빼고 무엇을 상상할 수 있을까.



개인적으로 가장 공감을 했던 건, "쉰다는 행위는 그녀를 오히려 힘들게 한다."라는 141쪽의 짧은 문장이었습니다. 모든 이야기를 최대한 저자가 인터뷰한 인물들을 관조하는 태도로(그리고 그 태도를 고수하려고 했던 건 아직 '나'들을 직면할 준비가 안 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읽어가던 도중, 불현듯 저 문장에 멈춰 섰습니다. 



쉰다는 것, 작년 4월에 기고한 오피니언 "지루함에 대하여: 피곤하게 지루하기"가 떠올랐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제발 그냥 자면 안 돼? 



스스로 매번 묻지만, 이것 또한 쉽지 않다. 여가를 활용해서 자기 계발을 해내야 한다는 신자유주의의 압박감은 내게 쉽사리 눈을 감을 시간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한가함은 더욱더 멀어지고 내게는 해갈되지 않는 지루함 해소에 대한 갈증만이 남는다. 


이대로 눈을 감고 일어난 내일, 나는 오늘의 나보다 더 나아질 수 없고, 나는 나를 위해 아무것도 해낼 수 없고, 그러므로 나는 이 사회의 유용한 구성원으로 사용될 수 없고, 사용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나는 사회의 잉여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도태의 불안과 인간으로서의 지루함은 다음 날 떠지지 않는 눈꺼풀로 나타난다. 수면 부족으로 퉁퉁 부어버린 얼굴로도, 언제나 30퍼센트 정도는 자고 있는 머리로도 발현된다.


지루함에 대하여: 피곤하게 지루하기 中





왜 나는 아직도 "쉰다는 것"이 나를 불편하게 만들도록 하는가. 그리고 왜 여전히 나는 증발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벗어날 수 없을까. 저자의 분석에서 나를 '나'를 찾을 수 있을까. 내가 우리가 될 수 있을까. 



그리고 내가 '우리'가 되었을 때 무엇이 달라질까, 우리가 '우리'라는 사실만으로 얻을 수 있는 건, 무엇일까? 나는 이 피곤한 눈과 부은 얼굴을 더 이상 마주하지 않아도 되는가? 



끊기지 않은 질문이 튀어나온 순간, 책을 읽는, 사실을 책을 끝까지 읽으면서도 끝까지 관조자이자 제3자로 남고 싶었던 저의 거리감을 무너뜨리는 짧은 문장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이소진 연구자가 3부에 풀어쓴, 신자유주의의 능력주의 담론과 자아실현 이데올로기와 결합한 페미니즘이 오히려 성공하지 못한 여성들의 문제 원인을 개인으로 치환하며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 자체를 긍정한다는 비판에는 깊이 공감했지만, 여전히 래디컬 페미니즘과 신자유주의 페미니즘의 경계를 만드는 일에 저는 조금 부족한듯합니다. 


저자가 "나는 신자유주의 페미니즘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와 관련해서 신자유주의 페미니즘이 호명하는 ‘여성’이 누구인지에 대해 질문을 던진 바 있다. 자세한 논의는 다음의 글을 참고하라."라며 178쪽 각주에 달아놓은 논문 <페미니즘 대중화 시대, 페미니즘은 어떤 여성을 호명하는가>까지 찾아 읽었지만, 여전히 문제를 제기하고 원인을 파악하고 비판하는 일이 페미니즘 담론 안에서 벌어질 경우에 느껴지는 불편함을 참 이겨내기 쉽지 않습니다.




"계급과 젠더의 교차로"로서 청년 여성에 무수히 많은 단어를 집어넣어 봅시다.




계급/젠더, 계급/생물학적 성, 능력주의/젠더, 성별/능력주의, 공정/혐오 등등. 모든 단어를 청년 여성에게 교차시켰을 때, 우리는 도대체 '청년 여성'이라는 집단을 호명할 수 있을까? 만약 '청년 여성'(예를 들어 이대남의 반대항으로서 이대녀 등)이 와해되었을 때 실제 청년 여성이 잃어버린 발언권은 또 어떻게 이들을 억압할까? 만약 우리가 교차시켜야 혹은 단일하게 정의해야 하다면, 그렇게 할 때 잃는 것과 얻는 것은 무엇이며, 잃는 이와 얻는 이는 또 누구인가?



도대체 책을 한 권 읽고 나면 수만 수 억 개씩 떠오르는 질문에 숨이 막혀갈 지경입니다. 


내가 죽고 싶은 건, 병리적 증상인 우울 때문일까? 일시적인 기분인 우울함 때문일까? 신자유주의 담론과 성차별과 같은 사회구조적 문제 때문일까? K-장녀로서 가족 내 맡아진 역할 때문일까? 불안정한 노동 시장에 '노력하지 않은 나태한' 이가 되었기 때문일까? 



《증발하고 싶은 여자들》을 읽으면 답을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질문들은, 해결되기는커녕 보다 구체적인 단어들을 사용한 질문으로 변주될 뿐입니다. 언제까지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을 던질 수 있을까요. 


도대체 우리는 자살생각을 할까? 그리고 그게 우리의 문제일까?


본질적인 질문에 책을 다 읽고 나서는, 에필로그 제목을 붙여 봅니다.


아주 조금만이 당신의 몫이다.


이제 '우리'는 그 아주 조금의 나머지는 누구의 몫인지 찾아갈 목표를 얻었습니다. 누가 나에게 나머지 몫을 얹었는지 찾아내기 전까지, 우리 앞의 위협을 언어화하여 '명명'할 명명권력을 얻기 전까지 말입니다. 질문에 질식사 하는 것은 그 이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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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 킬조이 - 쉽게 웃어넘기지 않는 이들을 위한 서바이벌 가이드 Philos Feminism 9
사라 아메드 지음, 김다봄 옮김 / arte(아르테)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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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서퍼로 받게 된 마지막 도서는 사라 아메드의《페미니스트 킬조이》 입니다.이 책은 실물로 보았을 때 표지의 홀로그램 덕분에 엄청 눈이 가는 책이기도 합니다.

안 그래도 아메드의 《감정의 문화정치》를 읽고 싶어 하던 와중, 같은 저자의 책이라는 사실을 알고 반가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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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이 책을 '핸드북'이라고 묘사하고 책의 목차 또한 '페미니스트 킬조이로 살아남기', '페미니스트 킬조이 문화비평가/철학자/시인/활동가'와 같이 구성되어 있어 언뜻 보면 정말 쉽게 읽히리라 예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 문장 한 문장을 읽고 나면, 그 문장이 나의 삶에 끼워지는 순간을 받아들이는 시간이 굉장히 필요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내가 나의 삶에 구멍을 낸 채로, 언젠가 이 구멍을 틀어막아 줄 문장을, 단어를, 언어를 찾고 싶다는 열망으로 책을 읽어 왔던 경험이 차르륵, 눈앞을 스치고 지나갑니다.

'핸드북'이라는 게 학문 분과 중 하나의 '여성학/페미니즘'의 고찰과 분석 그리고 비평이 아니라 우리가 여성으로 살아가면서 마주쳐야 할 일상의 순간들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또 이렇게 일상에서 '반사적으로 사용해야 할 기제'들이 무엇이 있는지,그리고 보이지 않던 이들이 사실을 다른 곳에 존재한다는 걸 아는 일의 중요성을 다시 깨닫게 합니다.

'페미니스트 킬조이'란 단어를 역자는 번역하지 않고 원어 그대로 옮겨두었습니다. 한국어로 '킬조이'를 번역하자면, '산통 깨는 사람' 요즘 말로 하면 '갑분싸', 혐오 표현을 곁들이자면 '선비충'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이제 이 앞에 '페미니스트'가 붙는다면, 한국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무슨 의미가 더해질지 말 안 해도 아시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메드는 이렇게 페미니스트 킬조이로 살아남기 위한, 격언, 진실, 다짐, 등식을 정말 실용서처럼 정리해 두었습니다.

🗨️" 당신도 겪을 수 있는 일이다. 여전히 '콧물이 흐르는' 상태에서, 당신은 그렇게 느끼도록 조종당했음을 깨닫게 된다. 메임에 따르면 '부인의 순간'은 이전의 수용을 취소하는 것이 아니라 수용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이 긴밀한 연관성은 양가감정의 원천이 된다. 양가감정은 당신을 서로 다른 방향으로 이끈다. 감동했으면서 그 사실에 간담이 서늘해지는 느낌이 한 사람 안에 공전하는 것이다. 페미니스트 킬조이는 복잡함 그 자체이자 복잡한 느낌으로도 나타날 수 있다."(127)

최근 사회·문화 비평-칼럼을 작성하면서, 과연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현재 사회에 유효한가라는 질문을 스스로 수천 번을 던졌습니다. 그리고 콘텐츠를 바라보는 나의 감상과 감정, 그리고 글을 쓰기 위해 '콘텐츠를 바라보는 나'를 바라보는 '나'라는 새로운 서술자를 상정하면서 나의 감정이 도무지 정확히 하나로 정리되지 않더라고요. 그런데 아메드의 묘사처럼 '감동했으면서 그 사실에 간담이 서늘해지는 느낌', 이 느낌이 지금껏 내가 느꼈던 감상의 원천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앞서 말한 커다란 빈칸이 채워지는 기분을 느꼈습니다.

읽는 순간, 아마 독자가 100명이라면 100개의 인생 문장이 생겨나는 책이라고 생각하고,

연대감을 잃어서 힘들었거나, '왜 나만 이렇게 예민하지?'라는 생각이 들었던 분들이라면 정말 꼭 한번 읽어보시길

추천합니다.

《페미니스트 킬조이》로 북서퍼 마무리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았습니다,, 양질의 책을 읽으면 너무 행복합니다.

❓[북서퍼 질문]

저자는 페미니스트 킬조이가 되는 경험이 자원이라고 묘사합니다. 여러분은 그런 경험이 있으신가요? 그 과정 속에서 무엇을 배웠는지도 궁금합니다.

🏄‍♀️

저는 항상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난 후에, 집에 돌아가는 길에서야 '아 그때는 내가 이렇게 말했어야 하지 않았을까?'를 고민하는데, 언제나 킬조이처럼 생각만 하고 실제로 페미니스트 킬조이가 돼 본 적이 많지 않다는 생각을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 했습니다. 제가 페미니스트 킬조이가 되는 순간은 언제나 글을 쓸 때뿐이구나, 하는 자책과 함께... 저번에 다 썼지만 차마 게재하지 못한 원고도 이와 같은 이유인데, 그때 한 걸음 더 나가보면 좋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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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러리
사라 스트리스베리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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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에서 서평단을 모집한다는 게시글을 보고 신청해서 받았습니다. 저는 제목과 표지만 보고 처음에는 '밸러리 솔래너스의 삶에 대한 전기나 여성학 도서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스트리츠베리의 소설이었습니다.

밸러리 솔래너스는 길버트와 구바의 《여전히 미쳐있는》에서 처음 알게 된 인물입니다.

솔래너스는 앤디 워홀에게 총을 쏜 사건으로도 이름을 날렸지만, 그의 〈스컴SCUM 선언문>으로도, 그리고 그의 고된 어린 시절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솔래너스의 <스컴 선언문>은 페미니즘 제2물결이 시작되고 있던 1960년대 미국을 강타합니다. 이 선언문과 솔래너스의 등장은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를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에게서 분리시키며 선동적이고 과격한 여성 단체의 등장과 활동을 이끌어냅니다.


장편소설 《밸러리》는 사라 스트리츠베리는 이 책의 앞 부분에 이 책은 밸러리의 "(...) 전기가 아니며, 지금 세상을 떠난 미국인 밸러니 솔래너스의 삶과 저작에 기반을 둔 환상문학"이라고 언급합니다.

스트리츠베리는 왜 밸러리를 '환상 문학' 속의 인물로 되살리고 싶어 할까요? 소설을 읽는 내내 그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궁금증은 저자가 택한 독특한 서술 방식으로 이어집니다. 소설 속에서 '너'와 인터뷰를 기술한 듯한 대사 자체로만 존재하는 밸러리는 스스로를 완결된 지문이나 잘 다듬어진 문장으로 묘사하거나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도 밝혀진 것이 많지 않은 그의 삶을, 저자조차도 '나'로 뛰어들지 않고 관찰자 입장으로 남기로 한 결정, 그 결정의 이유가 무엇일까. 스트리츠베리 안에서 재조립되어 완성된 인물 '밸러리'는 누구일까. 그리고 왜 그였어야 하는가.

🗨️ 옳은 질문은 이거죠. 그 여자는 왜 총을 쏘지 않지? 도대체 왜 총을 쏘지 않지? 그 여자의 모든 권리가 공격받고 있어요. 강간당한 여자 아기나 강간당한 여자 동물과 같은 상태. 그런대 왜 그들은 총을 쏘지 않나요? 난 정말이지 모르겠어요, 닥터 쿠퍼. (127)

장이 되지 못하는 단어의 나열, 서사가 부재한 비명 같은 발화, 논리정연하지 못하고 두서없이 쏟아지는 감상, 질문에 걸맞지 않은 답변.

​그가 한 번씩 제기하는 문제점들은 소설 밖까지 터져 나오는 힘이, 벼려진 날렵함이 존재합니다.

🗨️ 당신이 내리는 이른바 진단은 대중 정신병의 체계 안에서 여성의 위치를 정확히 묘사합니다. 조현병, 편집증, 우울증, 파괴적 행동 가능성. 가부장제 안에서 모든 여자는 조현병, 편집증, 우울증이 단연코 개인의 의학적 상태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요. 그건 인구 절반의 두뇌 능력에 대한 상시적 모욕에 기반을 두고 강간 위에 구축된 사회구조와 정부 형태에 대한 최종적 진단입니다.(146)

그러나 그런 밸러리의 직접적인 발화, 작가를 거의 거치지 않는다고 느껴지는 구술 인터뷰 형식의 서술 방식으로 꼬집어지는 현실은 더 두렵습니다.

왜 저자가 밸러리의 입을 빌려야 했을까, '서술자'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너'로 밸러리를 묘사하는 화자일 뿐 아니라 밸러리를 이제서야 돌아보게 된 저자이자, 독자인 우리가 아닐까?

이 소설을 끝까지 읽고 나면, 내가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읽었는가?라는 혼돈과 함께 밸러리의 생각을 멈출 수 없습니다. 실제와 허구를 교묘히 교차시킨 채로 '환상 문학'이라는 단언 속에 묶어 두었지만, 그 속에서 말하지 못하는, 말해서는 안 되는 밸러리의 입으로 낱낱이 파헤쳐지는 현실. 그리고 밸러리의 발화이기 때문에 정확히 그 방식 그대로 무시당하는 실재.

밸러리이지만 밸러리가 아니고,
부재한 '나'를 가진 '너'의 소설,

소설이라는 장르에 갇히지 않는 저자의 실험적인 서술과 그 안에서 흐릿하게 보이는 밸러리를 찾아가면,
도대체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그리고 이 소설을 끝마친 저자는 무엇을 얻었을까.

-
어떠한 서사를 기대한다면 실망할 것이고,
읽는 동안 경험할 수 있는 원초적으로 불쾌한 감정들이 나에게 왜 발현하는 것인지, 그리고 실제의 그의 삶과 그의 선언이 세계에 가져온 흐름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다 보면, 결코 실망할 일 없는 작품입니다.

서사가 부재한 여성의 파편화된 발화를 읽고 싶다면, 그 파편 속에서 세계의 단면을 찾아낼 때의 쾌감을 느끼고 싶다면,

꼭 한 번 들춰 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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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티언스 - 의식의 발명 Philos 시리즈 22
니컬러스 험프리 지음, 박한선 옮김 / arte(아르테)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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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자유입니다. 



오늘 가져온 책은 니컬러스 험프리의 《센티언스》입니다. '의식의 발명'이라는 부재가 붙어 있습니다. 표지의 색감과 가름끈의 색상이 잘 어우러지는 책입니다. 



포스팅 제목을 도발적으로 지어보았습니다. 



인간-비인간, 포스트휴머니즘 논의가 대두되는 와중 완전히 인간을 중심에 두고 지각이 있는지에 따라 종을 가르는 책이 있다? 


당당하게 문어보다 개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책이 있다?



물론 험프리는 "윤리에 관해 과학은 할 말이 없다. 과학은 다만 제안할 뿐이다. 사려 깊은 개인으로서 각자 결정을 내려야 한다"(307)라고 말합니다. 



인간이 문어보다 개를 더 신경 써야 하는 이유는 "개는 문어와 다른 방식으로 개 자신에게 중요하기 때문"(306)입니다. 개는 '현상적 자아'를 가지고 있고, 문어는 '현상적 자아'를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고 다시 반복하자면, 개는 지각 동물로 감각 자극을 현상적 깊이를 가지고 고유한 형태로 표상 가능하며 인간처럼 자아를 가지고 있는 자기 자신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며 문어는 감각 자극을 인식하고 의식이 필요한 지능적 행동은 가능하지만, 상대에게 자아성을 부여하지 못하는 서브센티엔트, 즉 하위 지각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라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나'와 '나'가 나라는 것을 아는 '나'는 다른가? 



의식에 관한 질문은 고대 철학에서부터 유구히 이어진 질문입니다. 근대 이후 '자아'에 대한 탐구에 몰두하며 데카르트의 '의심하는 나' 존재 증명에서부터 진화생물학까지, 험프리는 철학과 과학을 넘나들며 '의식' 그러니까 내가 느끼는 것을 남들도 같이 느끼며, 남들도 같이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서부터 시작되는, 뇌의 생물학적 단위를 뛰어넘은 의식적 창발성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지각, 의식, 자극, 감각, 인식, 현상"과 같은 얼추 비슷한 범주처럼 보이는 단어 각각을 모두 구분하여 사용하기 때문에, 《센티언스》에서 길을 잃고 싶지 않은 분들은 이 각 단어가 등장할 때마다 개념을 정리하여 두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험프리는 감각을 "주체의 감각기관에서 발생하는 것과 관련된 정신 상태"(89)로 인식은 "외부 세계 대상의 존재와 관련된"(89) 것으로 봅니다. 



그리고 이 둘이 우리 의식에 독립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말합니다.  자극→감각 →인식의 선후관계가 아니라, 독립적인 영향이라는 점이 직관적으로 전혀 이해 가지 않습니다. 



험프리는 주장에 대한 근거로 감각 없는 인식인 '맹시'와 '한 치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내 엄지손가락이 어디에 있는지 알기'를 제시하고, 인식 없는 감각으로는 '오르가즘'을 제시합니다. 



아! 우리는 감각과 인식이 동시에 발휘되기 때문에 지금까지 이 둘이 함께여야 한다고 착각하고 있던 것입니다. 



특히, 맹시 개념이 무척이나 흥미롭습니다. 시각이 없지만, 뇌의 오른쪽 시각피질을 제거한 상태임에도 어떻게 환자는 빛이 나타난 곳을 알 수 있을까요? 맹시는 "무감각 시각 능력"입니다. 



험프리는 이어 "만약 주체가 이러한 자극을 다르게 평가한다면 이것은 인식이 아닌 감각 때문"(89)이라 말합니다.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뇌는 두 가지 별도 표상"(120), 즉 감각 표상과 인식 표상을 만들어내는데,



감각 표상은 "달콤한 맛을 느끼면 기분이 좋아지고 날카로운 소리를 들으면 불쾌해"지는 것이며, 인식 표상은 "달콤함을 느끼며 꿀이라는 것을 알고 날카로운 소리를 들으며 아기가 운다는 것을 안다"라는 것입니다. 



감각은 내적 속성이며 험프리는 "뇌의 감각 표상에 관한 표상 매체가 사실은 은폐된 신체 표상의 한 형태"(120)라고 하며, 이는 반복하자면 "일어난 일에 관한 인식과 달리, 자신에게 비춰지는 감각을 스스로 느끼면서 이를 통해 그러한 일이 가지는 의미를 스스로 읽어 낸다고 주장"(121)하는 것이며 "즉 자신이 느끼는 감각은 일어난 이에 관해서 자신을 향해 말하는 내적 언어라는 것"입니다. 



이게 단번에 이해된다면, 의식에 대한 책을 찾아볼 것이 아니라 당장 의식 분야에 뛰어들어 연구를 해야 합니다. 



자, '빨간' 사과가 있습니다. 여가서 사과는 물리적으로 존재하고, 우리가 볼 수 있고 머리로 표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빨갛다'라는 속성은 어떨까요? 



'빨갛다'라는 감각은 물리적 공간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내가 무엇을 보고 빨갛다고 할 때, 도대체 그 '00가 빨갛다'의 '빨갛다'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나의 '빨강'이 당신의 '빨강'과 같을 수 있을까요? 내가 '빨강'을 보고 얻는 감각 표상과 당신이 '빨강'을 보고 얻는 감각 표상이 일치할까요? 그렇다면 이 '빨간 감각'은 도대체 우리의 내부에 있는 것일까요? 외부에 있는 것일까요?


"감각은 우리의 감각기관에서 발생하는 일과 그에 대한 감정을 대표하는 개념이다. 이는 뇌에서 자극에 의해 유발되는 운동 반응을 추적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이것은 숨겨진, 실현되지 않은 신체적 표현 행태로 존재한다. 그다음 단계로서 이는 현상적 속성을 얻게 된다. 이 속성은 환상이 아니다. 그것들은 '어떤 것이 있는지'에 관한 느낌의 진실한 특성이다.


《센티언스》, 156쪽


험프리는 "감각은 항상 기본적으로 개인적인 경험"(164)이라는 전제에서 시작합니다.  감각에 대한 반사행동을 일으키기 위하여 참조 가능한 여러 정보를 저장하는 과정에서, 점차 복잡한 환경에 적응하게 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자기의 반응을 모니터링하여 자극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스스로 파악"(158)하는데, 이러한 피드백 과정의 신호를 "원심성 사본"이라고 하고 이를 역으로 읽어 자신이 어떻게 반응하고 느끼는지를 표상할 수 있다고 합니다. 



자, 슬슬 이해가 안 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자기 모니터링 행위를 역으로 읽어내 스스로 반응과 감정에 대한 표상을 얻어내는 과정에서, 자아가 형성되지 않았을까라고 저자는 슬그머니 자신의 주장을 제기합니다. 



생물은 자극에 적응합니다. (빨간빛은 위험함-뒤로 물러서는 행동)


그러나 환경은 변화합니다. (빨간빛이 안 위험함)


기존의 적응한 신체 행동이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빨간빛이 안 위험하니까 뒤로 물러서는 행동이 딱히 도움이 되지 않음)


문제가 생깁니다.  (그런데 빨간빛이 자신에게 감각된다는 사실과 이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아야 함)


그렇다면 "반응을 내부화하거나 사적화"합니다. (감각 신호를 신체 지도를 대상으로로 대응하는 것입니다. 빨간빛이 감각되었을 때, '나'는 뒤로 물러서는 행동으로 대응해야겠다'라는 계획을 세움. 그러면 빨간빛이 자신에게 감각된다는 사실과 이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계속 알 수 있음)


풀어 이야기하면 "내 몸의 이 부분을 이용해서 나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응한다"라는 도상 계획으로 대응합니다.



자 여기서 갑자기 '피드백'이 생깁니다.



대뇌수준에서 나가는 운동 신호와 들어오는 감각 신호의 순환이 일어납니다. 



들어오는 감각 신호와, 신체 지도를 대상으로 대응하는 운동신호가 끊임없이 반복하여 루프를 형성합니다. 



이 변화는 루프에서 안정화되고  '끌개attractor' 상태가 됩니다. 



이를 입선드럼ipsundrum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현상적 감각의 매개체입니다. 



다시 풀어 반복합니다.



이 일련의 상황에서 입선드럼이 생성되면, "감각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적 느낌으로, 즉 고유한 양식 특이적질modality-specific qualities로 물들게 된다. 주관적 현재의 두꺼운 시간에 뿌리를 둔, 비물질적이며 정신적인 것들immaterial mind stuff로 이루어진 것처럼 경험된다. 간단히 말해서 현상적인 경험"(163)이 시작됩니다.



자 이제 중요합니다. 



이렇게 입선드럼을 통해 우리는 "감각이 자아 감각에 기여하는 방식의 변화"를 예상할 수 있습니다.



이 한 문장을 위해 달려왔습니다.


"나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을 표상하는 행위에서 '나는 무엇인가'라는 감각을 채워 나가게 된다는 것이다."


《센티언스》, 164쪽


이러한 입선드럼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험프리는 뜨거운 피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온혈동물은 신체 유지 비용은 증가하지만 뇌의 유지 비용은 감소합니다. "포유류와 조류가 상대적으로 적은 수준의 에너지 추가 지출을 통해 더 크고 복잡한 뇌를 지탱해 낸다는 뜻"(215)입니다. 



'나'의 존재를 아는 것, 그리고 '나'의 지속성을 이해하는 것,  그리고 상대에게도 자아 감각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상대에게도 자아 감각이 있기 때문에 나와 같이 느낄 것이라는 것. 



이렇게 어떻게 의식이 탄생했고 지각 동물이 만들어졌는지를 아주 광범위한 과학적 사실들로 설명하는 책입니다. 



23장에서 기계도 감각을 가질 수 있을까라는 SF적 상상력이 발휘된 질문을 던지는데, 이는 엔지니어의 설계, 즉 지각 동물이 가지고 있는 "의식을 가진 동물의 두뇌가 자극을 느낄 때 하는 일을 똑같이 해내는 로봇 뇌를 설계하는 것"(295)에 성공 여부가 달려 있다고 합니다. 게다가 그 로봇이 의식이 있는지 없는지를 우리가 알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남습니다. 



옮긴이의 말에서  



"노벨상을 받고 더 이상 쟁취할 것이 없어진 과학자는 종종 두 길 중 하나를 택한다. 세계 평화와 기후 위기 해결을 위한 강연회를 다니거나 혹은 의식 연구에 빠지는 것이다"(333)라는 문장을 보고 진짜 웃음을 터트린 것처럼, 



의식 연구는 여전히 그 누구도 알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지만 어마어마한 매력으로 과학자들을 수렁에 빠트리는 분야라는 것만은 확실하게 알 수 있겠습니다. 



웃음을 터트릴, 가벼운 마음으로 책을 읽다 보면 어느 장에서는 여러분이 기대한 것 이상의 지식과 흥미를 얻게 될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도대체 의식은, 내가 나임을 나는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인지. 


전혀 해결되지 않는 물음에 다시 뛰어들어 보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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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만든 가난 - 가장 부유한 국가에 존재하는 빈곤의 진실 Philos 시리즈 25
매슈 데즈먼드 지음, 성원 옮김, 조문영 해제 / arte(아르테)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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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자유입니다.



오늘 가져온 책은 아르테에서 11월에 발간한 《미국이 만든 가난》입니다.



특별히 해제가 앞에 붙어 있어서, 사실 난도가 있는 책인가 두려워했지만 서술은 꽤나 평이하고 예시를 많이 들어주는 친절한 책이었습니다.



빈곤 문제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 읽으면 재밌으실 것 같은데, 



 《미국이 만든 가난》은 부유한 국가라는 미국에서조차 왜 빈곤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가난으로부터 이득을 얻고 있는 우리'를 제시하는 책입니다. 



두루뭉술한 사회 구조, 신자유주의 경제체제, 정부, 기업 등이 아닌 바로 '우리'입니다. 



이 지점에서 왜 갑자기 빈곤 문제가 '나' 때문이래?라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면, 이제 이 책을 펼치면 되겠습니다. 




저자 데즈먼드는 가난에 대해서 다루지만 '가난한 자'에만 초점을 맞춰서는 빈곤 문제를 정확히 바라볼 수 없다고 말합니다.



데즈먼드는 가난이란, "통증"(49), "인공항문 수술 뒤에 차는 배변 주머니와 휠체어", "사람을 불구로 만들어 놓은 뒤에도 교활한 고통을 안기는 심야의 테러와 총알(50)", "트라우마(51)", "불안정"(51), "상황이 점점 더 나빠질 거라는 끊임없는 두려움"(53)이자 "자유의 상실"(55)이며 "정부가 당신의 편이 아니라 당신의 적이라는 느낌"(56)이고 "당혹감과 수치심을"(58) 불러일으키며 "쪼그라든 삶과 인성"(59)들이 "겹겹이 누적된 형태"(62)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가난은 직선이 아니다. 사회적 병폐들이 단단하게 엉킨 매듭"(62)입니다.



데즈먼드의 비판적 어조가 여실히 드러나는 비유적 표현들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이러한 문체가 이 책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읽다 보면 헛웃음이 터질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뇌에 여유 공간이 있고 목소리가 큰 일부 대중은 빈곤에서 벗어나려면 당사자들이 행동을 바꿔야 한다고 믿는 듯하다."(117-118) 이 있습니다. 



잡설은 차치하고, 



가난이란 한 개인의 경제적 결핍 상태를 지칭한다기보다는, 개인의 삶 모든 영역에 침투하는 것으로 이 가난은 인종에 따라 다른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가난은 절대 공평하지 않으며, "인종적 약점 때문에 심해지거나 인종적 특권 때문에 약화될 수도 있다"(60)고 말합니다. 



저는 여기서 저자의 질문이 인상 깊었습니다.  "그러면 인종과 계급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어느 것이 사회적 불평등의 근원이고 어느 것이 곁가지인가? 어느 기원이 당신에게, 당신의 심장이나 두뇌에 더 중요한가?"(60)



이 질문은 괄호 안에 들어 있는 부연 설명이었는데도, 이 질문에 답을 정하느라 꽤나 고심했습니다. 인종과 계급. 어느 것이 근원이고 어느 것이 곁가지일까요? 미국만큼의 다인종성이 없는 한국에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어떻게 내려야 할까요? 인종 대신 이 빈칸에 들어갈 수 있는 단어가 무엇이 될지, 한국의 빈곤 문제의 교차성의 지점은 어디일지, 잠시 고민이 됩니다. 




이 책은 우리가 기본적으로 '빈곤 문제', 혹은 '저소득 계층'같은 특정 계층에게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복지 제도, 노동조합 등등에 대한 우리의 기본적인 고정관념을 무너뜨립니다. 



가난은 개인의 문제라던가, "사회적 원인의 부산물"(89)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이 재난을 의도하지 않았고, 사실상 그 누구도 여기서 이익을 얻지 않는다"(90)라는 진리와도 같은 생각에 저자는 답합니다.


사람들은 가난에서 온갖 방식으로 이익을 얻는다.

《미국이 만든 가난》, 90쪽


이러한 주장을 원로 학자가 '마르크스주의자의 길에 빠져들고 있다'라는 코멘트를 남겼다는 것도 뼈아픈 블랙 코미디이지만, 우리는 왜 이러한 주장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어려워하는지는 고민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아무래도 가난의 이유를 나와 너와 우리라고 이야기하는 주장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노조가 경제 성장을 막는다', '실업급여는 사람들을 복지제도에 의존하게 만든다'와 같은 한국 정치권에서도 심심찮게 등장하는 여러 슬로건들을 여러 연구 자료들로 반박합니다. 



노조를 와해한다고 해서 기업의 성장하지 않았으며, 실업 수당 때문에 노동자들이 집에 지낸다고 말할 수 있는 증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최근 "실업급여를 받은 여자들이 샤넬 선글라스를 사며 즐긴다"와 같은 서울지방노동청 실업급여 담당 공무원의 모든 혐오의 온상과도 같은 발언과도 맥이 이어집니다. 실제로 실업급여의 부정수급자 3명 중 2명은 남성이며 여성보다 2배가 많고, 연령대는 50대(33.4%)가 가장 높습니다. 



이와 유사하게 저자는 "많은 미국인이 여전히 흑인들은 노동윤리가 약하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155)고 하며 인종에 따른 부정적 편견과 "정부의 빈민 구호책이 오히려 부정적인 영향을 낳는다"(155)는 의견을 이야기합니다. 정부의 빈민 구호책이 부정적이라는 근거는 사실 아주 오랜 기간 동안 "개인적인 진술과 상식에만 의존"(155)해 있었으며, "증거가 필요 없는 주제"(156)라는 답변으로 갈음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와 다릅니다. 저소득층 가정일수록 정부 보조금을 생필품 구입에 지출한 비중이 높았고, 오히려 알코올음료와 마약류에 고소득층이 더 많은 비용을 지출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연구에서도 실업수당 때문에 노동자들이 집에서 지내는 거라는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중략)


어째서 우리는 다른 이유들을 찾을 수 있는데도 높은 실업률을 정부 원조 탓으로 돌리는 서사를 그렇게 순순히 받아들였던걸까? 어째서 우리는 사람들이 아프다가 죽고 싶지 않아서 일터로 안 돌아가는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걸까? 일자리가 처음부터 너무 형편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성추행과 학대에 신물이 났기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학교가(150) 문을 닫은 상황에서 자녀들을 믿고 맡길 데가 없기 때문일 수도 있는데. 많은 미국인이 일각에서 기대하는 것만큼 빠르게 일터로 복귀하지 않는 이유를 물었을 때 어째서 우리의 대답은 그 사람들이 주당 300달러를 더 받으니까였을까?

《미국이 만든 가난》, 151쪽



이러한 복지 의존성은 실제 데이터와 다른 상상 속에서 생성된 영향입니다. 저자는 오히려 이 지점에서 복지 수당을 받을 수 있지만 제도 등이 복잡하여 수급하지 않는 복지 회피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데즈먼드의 주장은 아무리 부자가 세금을 더 많이 낸다고 해도, 부자가 더 많은 복지 혜택을 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 정부는 도움이 가장 적게 필요한 사람들에게 가장 많은 도움을 준다. 이것은 우리 사회복지의 진정한 속성이며, 우리의 은행 잔고와 빈곤 수준뿐만 아니라, 우리의 심리 상태와 시민정신에도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다.


《미국이 만든 가난》, 166쪽



실제의 사실과 전혀 다른 거짓을 상식으로 믿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주당 300달러를 더 받으니까"라는 대답이었을까요?



가끔 사람들은 정말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은 것만 같습니다. 사람들은 사실 믿고만 싶어 합니다.



저자가 빈민 종식을 위해 주장하는 바는 '담장 허물기'입니다.



중산층 백인들은 자신들의 동네에 상징적인 담장(비싼 임대료, 높은 등록금의 사립학교 등)을 이용하여 저소득층 가정과 보이지 않는 담장을 쌓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경제적 불평등이 덜한 환경에서 자라난 저소득층 아이들이 더 높은 사회 진출률을 보인다는 통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는 "학교와 지역사회에서 한곳에 몰려 있는 빈곤층을 분산시켜 다른 계층과 통합을"(265) 이뤄야 합니다. 



분리주의에 반대하는 이러한 빈부 통합은 확실히 빈곤한 가정을 '덜 가난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저자는 "결핍 눈속임(scarcity diversion)"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부자들에게 세금 감세를 주지 않고 세금을 모두 걷는 대신, 우리에게는 빈민을 모두 구제할 예산이 없으며 지금이 최선이라고 주장하는 상황을 나타내는 용어입니다.



빈민들은 착취하는 빈민가의 임대업에서 우리나라의 쪽방촌이 떠오릅니다. 결국은 빈민들은 평당 더 높은 월세를 지출하고, 신용등급이 낮고 인종적 문제, 불안정한 직장 등을 이유로 대출을 승인해주지 않아 주택 매매도 남들보다 더 어렵습니다. 최저 임금을 주는 일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공간이 계급화되고 공공이 슬럼화되며, 가난은 그들에게 기회의 상품을 얻을 모든 수단을 박탈해나갑니다. 



 빈민과의 연대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금융 활동과 구매 활동을 한다는 것은 우리가 더 많은 돈을 내게 된다는 의미일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비용들을 인정함으로써 우리가 공모자였음을 인정한다. 우리가 서로를 등쳐 먹고 강탈할 때 우리 자신의 일부 역시 빼앗긴다. 바른 일을 하는 것은 종종 대단히 불편하고, 시간이 많이 걸리고, 심지어는 돈도 많이 드는 과정이다. 나는 시도하고, 실패하고, 다시 시도한다. 하지만 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해 그 정도 대가는 치러도 되지 않을까?


 《미국이 만든 가난》, 260-261쪽



결핍은 자연스러운 상태가 아닙니다. 그리고 빈곤을 해결하기 위해 "사회 안전망의 균형을 재조정" 하는 과정에서 분명 우리는 불편하고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이렇게 빈곤 종식의 해결책은 쉽고 따뜻하고 행복하지 않다고 반복해서 집어주는 점이 좋았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가난으로 이득을 취해온 우리가 그 불편함에 불평할 수 있을까요? 그 정도의 염치를 갖추고 살아야 하지 않나, 생각을 합니다. 물론 저자가 이러한 개인적 감정의 이야기를 하지는 않고 "사회 비용"에 대하여 논하긴 합니다. 



최근에 자신이 정의한 정상성이 당연한 것이라고 여기면서 정상성에 어긋하는 비정상성에 가해지는 제제가 정당하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을 본 적 있습니다. 그가 하는 주장은 이것입니다. "나는 정상이니까, 불편한 그들이 정상에 맞추어야 하지 않나? 왜 내가 그들을 배려해야 하나?"  이때 심장을 꽉 조이는 기분이, 데즈먼드의 "하지만 내가 그 논쟁에서 복장이 터지는 부분은 공정한 조세 집행이 얼마나 어려운지가 아니라, 터무니없는 조세의 허점을 막아서 빈곤을 타파할 수 있는 충분한 돈을 얼마나 쉽게 마련할 수 있는지다."(215)라는 문장을 읽으면서 다시 떠오릅니다.



그는 이 책을 읽고도 왜 내가 가난의 문제라는 거야, 가난한 사람들이 조금 더 노력해서 빈곤을 벗어나야지,라고 생각할 것임을 떠올려 봅니다. 



"부정의는 창궐하게 내버려두면 경계를 따라 기어다니며 시험해 보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자기 손아귀에 들어오지 않은 삶까지 위협한다."(290)



빈곤이 철폐된 삶에서 번영이란, 어떤 의미로 다가오게 될까요? 



단지 가난이 사라졌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존재할 것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Q. '빈곤을 종식시켜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대로 빈곤이 철폐된 사회를 상상해 보려고 합니다. 노조 파업, 노동자 산재 등의 뉴스가 등장하지 않는 세상을 상상해 볼까요? 그런 사회가 도래하게 됐을 때, 저녁 뉴스에서는 첫 번째 속보로 어떤 소식을 정하게 될까요?



A.

북서퍼 질문에 대한 답변을 고민해 보았는데, 어렵네요. 부정의가 창궐하지 않고 모두 빈곤에 잡아먹히지 않는 삶이라면, 반지하가 존재하지 않고 5평도 안 되는 작은 서울의 원룸 월세가 70만 원이 아닌 세상이겠죠? 



빈곤 철폐가 만인의 풍요를 의미하지 않기에, 빈곤 철폐라고 하면 일단은 르 귄의 《빼앗긴 자들》 공산주의 공동체 행성 아나레스가 생각나기도 하고, 마지 피어시의 《시간의 경계에 선 여자》 로시엔테의 2137년 미래 공동체가 떠오릅니다. (이때 코니는 이 책에서 말하는 빈곤층 라틴계 여성으로, 받을 수 있는 모든 억압을 당하는 인물입니다. 책을 읽으면서 코니 생각이 참 많이 납니다.) 계속해서 유토피아 공동체가 생각나네요. 길먼의 《허랜드》, 러스 <우리 떠난 자들이 돌아올 때>와 같은,,,



솔직히 지금과 크게 달라질 것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전히 빈곤층이 "열심히 노력하는 노동자의 세금을 빼앗아 간다"라고 주장하는 야당의 주장이 허구한 날 속보를 장식하게 되지 않을까, 싶네요. 진보는 언제나 뒷걸음질 칠 수 있다는 것,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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