밸러리
사라 스트리스베리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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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에서 서평단을 모집한다는 게시글을 보고 신청해서 받았습니다. 저는 제목과 표지만 보고 처음에는 '밸러리 솔래너스의 삶에 대한 전기나 여성학 도서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스트리츠베리의 소설이었습니다.

밸러리 솔래너스는 길버트와 구바의 《여전히 미쳐있는》에서 처음 알게 된 인물입니다.

솔래너스는 앤디 워홀에게 총을 쏜 사건으로도 이름을 날렸지만, 그의 〈스컴SCUM 선언문>으로도, 그리고 그의 고된 어린 시절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솔래너스의 <스컴 선언문>은 페미니즘 제2물결이 시작되고 있던 1960년대 미국을 강타합니다. 이 선언문과 솔래너스의 등장은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를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에게서 분리시키며 선동적이고 과격한 여성 단체의 등장과 활동을 이끌어냅니다.


장편소설 《밸러리》는 사라 스트리츠베리는 이 책의 앞 부분에 이 책은 밸러리의 "(...) 전기가 아니며, 지금 세상을 떠난 미국인 밸러니 솔래너스의 삶과 저작에 기반을 둔 환상문학"이라고 언급합니다.

스트리츠베리는 왜 밸러리를 '환상 문학' 속의 인물로 되살리고 싶어 할까요? 소설을 읽는 내내 그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궁금증은 저자가 택한 독특한 서술 방식으로 이어집니다. 소설 속에서 '너'와 인터뷰를 기술한 듯한 대사 자체로만 존재하는 밸러리는 스스로를 완결된 지문이나 잘 다듬어진 문장으로 묘사하거나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도 밝혀진 것이 많지 않은 그의 삶을, 저자조차도 '나'로 뛰어들지 않고 관찰자 입장으로 남기로 한 결정, 그 결정의 이유가 무엇일까. 스트리츠베리 안에서 재조립되어 완성된 인물 '밸러리'는 누구일까. 그리고 왜 그였어야 하는가.

🗨️ 옳은 질문은 이거죠. 그 여자는 왜 총을 쏘지 않지? 도대체 왜 총을 쏘지 않지? 그 여자의 모든 권리가 공격받고 있어요. 강간당한 여자 아기나 강간당한 여자 동물과 같은 상태. 그런대 왜 그들은 총을 쏘지 않나요? 난 정말이지 모르겠어요, 닥터 쿠퍼. (127)

장이 되지 못하는 단어의 나열, 서사가 부재한 비명 같은 발화, 논리정연하지 못하고 두서없이 쏟아지는 감상, 질문에 걸맞지 않은 답변.

​그가 한 번씩 제기하는 문제점들은 소설 밖까지 터져 나오는 힘이, 벼려진 날렵함이 존재합니다.

🗨️ 당신이 내리는 이른바 진단은 대중 정신병의 체계 안에서 여성의 위치를 정확히 묘사합니다. 조현병, 편집증, 우울증, 파괴적 행동 가능성. 가부장제 안에서 모든 여자는 조현병, 편집증, 우울증이 단연코 개인의 의학적 상태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요. 그건 인구 절반의 두뇌 능력에 대한 상시적 모욕에 기반을 두고 강간 위에 구축된 사회구조와 정부 형태에 대한 최종적 진단입니다.(146)

그러나 그런 밸러리의 직접적인 발화, 작가를 거의 거치지 않는다고 느껴지는 구술 인터뷰 형식의 서술 방식으로 꼬집어지는 현실은 더 두렵습니다.

왜 저자가 밸러리의 입을 빌려야 했을까, '서술자'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너'로 밸러리를 묘사하는 화자일 뿐 아니라 밸러리를 이제서야 돌아보게 된 저자이자, 독자인 우리가 아닐까?

이 소설을 끝까지 읽고 나면, 내가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읽었는가?라는 혼돈과 함께 밸러리의 생각을 멈출 수 없습니다. 실제와 허구를 교묘히 교차시킨 채로 '환상 문학'이라는 단언 속에 묶어 두었지만, 그 속에서 말하지 못하는, 말해서는 안 되는 밸러리의 입으로 낱낱이 파헤쳐지는 현실. 그리고 밸러리의 발화이기 때문에 정확히 그 방식 그대로 무시당하는 실재.

밸러리이지만 밸러리가 아니고,
부재한 '나'를 가진 '너'의 소설,

소설이라는 장르에 갇히지 않는 저자의 실험적인 서술과 그 안에서 흐릿하게 보이는 밸러리를 찾아가면,
도대체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그리고 이 소설을 끝마친 저자는 무엇을 얻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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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서사를 기대한다면 실망할 것이고,
읽는 동안 경험할 수 있는 원초적으로 불쾌한 감정들이 나에게 왜 발현하는 것인지, 그리고 실제의 그의 삶과 그의 선언이 세계에 가져온 흐름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다 보면, 결코 실망할 일 없는 작품입니다.

서사가 부재한 여성의 파편화된 발화를 읽고 싶다면, 그 파편 속에서 세계의 단면을 찾아낼 때의 쾌감을 느끼고 싶다면,

꼭 한 번 들춰 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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