캣피싱
나오미 크리처 지음, 신해경 옮김 / 허블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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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Z 세대에 최적화된 스릴러'라는 홍보문구가 이해가 가는 소설이네요. 《캣피싱》은 가로세로를 조금씩 늘린 사륙변형판이고, 400쪽이 넘는대도 생각보다 책이 가벼워요. 표지는 절반 이상이 일러스트로 되어 있는데 책 제목이 음각으로 되어있어서 신기해요. 전에 다른 책도 그렇고 일러스트가 강하면 음각으로 제목을 넣나 봐요. 확실히 제목이 눈에 잘 들어와요. 제목 색도 예쁘고,,, 항상 궁금한데 이게 후가공인지,,,그냥 파는 건지,,그리고 안에는 박인지,,

목차는 따로 없고, 중간중간 스테프가 캣넷을 이용해 친구들과 채팅하는 부분이 실제 채팅방처럼 대화로만 구성되어 있는 점도 재미있네요.

소설 《캣피싱》은 로봇 사용이 현재보다 상용화된 근미래를 바탕으로 하는 SF 소설입니다. 소설은 초반 아버지와 비슷한 존재만 보아도 소스라치게 놀라 강박적으로 존재를 숨기며 이사를 다니는 엄마 밑에서 자란 스테프가 등장합니다. 스테프가 느끼는 유일한 유대는 엄마보다도 캣넷의 얼굴도 모르는 친구들로 향하게 되고요. 아마 이 부분에서 MZ 세대를 끄집어온 게 아닐까 싶어요. 디지털 세계에 익숙하니, 인터넷으로 사람을 사귀는 일이야 새로울 것도 없기에.

처음에는 아버지의 존재를 의심하게 되다가, 중간에 비밀이 많은 엄마를 의심하게 되었다가, 사실 아버지가 스테프에게 찾아오기 직전만 해도 누구를 믿어야 할지 아슬아슬한 만큼 후반부로 갈수록 흡입력이 높아지는 소설입니다. 그리고 초반부터 등장한 의문들을 결말 전에 아주 깔끔하게 모두 풀어내요. 어머니의 입에서 나오는 소치 이모의 이름까지도, 군더더기 없는 스토리텔링을 보여주던 소설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친구를 구하기 위해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인공지능의 등장]

스테프를 구하기 위해 마이클을 차로 받아버린 채셔켓. AI의 행위에 대한 도덕윤리적 고민은 인공지능을 그리는 SF 소설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지만, 그만큼 상대도 AI를 믿어준 적이 있던가, 생각해 봤더니 그 부분은 조금 찾기 어렵더라고요. AI와 인간의 쌍방의 우정.

"윤리적인 부분을 고정 값으로 잡아 코딩하다 보면 문제가 생기는데, 실제 인간들은 그런 식으로 윤리를 따지지 않기 때문이야.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시켜 주지 않는다고들 하지만, 실제로는 그 말이 어떤 결과와 수단이냐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다는 건 누구나 인정할 거야."

최근에 《군주론》을 읽어서 그런지, 마키아벨리즘적인 대사가 나올 때마다 꽂히네요. AI가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시켜준다고 말하면, 사실 결말을 <매트릭스> 말고, 있을 수가 있나요? 결국 죽음뿐이다. 아이작 아시모프의 유명한 로봇 3원칙을 떠올리자면,

1. 로봇은 인간에게 행동을 하거나 하지 않음으로써 해를 입힐 수 없다

2. 로봇은 첫 번째 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인간의 명령에 복종한다

3. 첫 번째와 두 번째 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로봇은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다.

인데요. 윤리에 절대적인 원칙은 없고 인간들조차 사소한 정보 값의 변화로 전혀 다른 결정을 해나가는 마당에, 정확한 값이 필요한 코딩으로 인공지능의 도덕 윤리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라는 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 이미 체셔캣은 첫 번째 원칙부터 어긴 셈이죠. 끝까지 '채셔캣을 믿지 마'라고 말하는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해 봅니다.

사실 여기서 체셔캣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에 '아주 작은 고민을 하던 점'이 이 책에서 그리는 인공지능이 흥미로웠던 거 같아요. 스토리를 따라가면 당장이라도 스테프를 구해줘! 라고 외치고 있었으나, 체셔캣을 아주 인간적으로 윤리를 고민하는 존재로 만들었다다고 생각했어요. 참 궁금하네요, 체셔캣이 가진 것이 자아라면 그에게 기계 몸이 주어졌을 때 그를 어떻게 취급해야 할까?

최근에 문학을 이해하는 '가능세계 이론'에 대해서 읽었는데, 실제 세계가 작가가 속해있는 세계, 텍스트 실제세계가 작가가 그려낸 책의 세계, 텍스트 지시세계는 텍스트 실제세계가 지시하는 구체적인 상이라고 사는데, 작가가 문장으로 설명하지는 않지만 "70대 노인만이 등장하는 소설에서 그가 보관하고 있는 배냇저고리를 통해, 그에게 아이가 있었음을 추측" 하는 독자가 상상하고 유추하는 세계라고 해요.

《캣피싱》의 텍스트 지시세계란, 외적으로 판단되는 모든 요소로부터의 자유로움을 긍정하는 체험을 계속했던 것 같아요. 스테프와 레이첼의 우정과 연대가 이어 사랑으로 읽히고, 성 지향성에 대한 고민을 묻는다면 "부모님과 상의하세요"라고 답변하는 로봇을 해킹하려 하고, 게다가 '태어나지 않은' 존재를 친구로 내리는 모습을 보며, 친구 없는 외톨이로 지칭되는 이들의 우정의 경계는 도대체 어디 가서야 멈출 수 있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저 아이들의 세계에서 지낸다면 적어도 혐오와 차별에서는 자유로울 수 있지 않을까(물론, 엄마를 죽이려 쫓아오는 미친 남자가 있지만).

부정적인 고뇌 없이 당연히 얻어지는 경험을 《캣피싱》의 세계 안에서만 누렸던 점이 참 아쉽네요.

사실 정말 잘 짜인 SF 스릴러였다고 생각해요. 빠른 속도와 긴장감을 동시에 누리고 싶다면, 추천드립니다.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책이니까 한 번씩 찾아보셔도 좋을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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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명소녀 투쟁기 - 1회 박지리문학상 수상작
현호정 지음 / 사계절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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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목 빠져라 기다려온, 바로 제1회 박지리문학상 수상작 소설 《단명소녀 투쟁기》를 가져왔습니다!!!

출간 전 서평단 신청해서, 먼저 전자책으로 받아서 읽었고 오늘에서야 드디어 종이책을 받았습니다!!!

진짜, '박지리문학상' 개최한다고 했을 때부터 기다려왔던 수상작을! 출간 전에 먼저 읽을 수 있어서 정말 너무 행복했고요. 아직도 딱! 첫 문장 읽고 느꼈던 감정이 생각나요. 이거다, 이거 된다.

심사평 중에 "첫 장을 읽기 시작했으면 끝을 봐야 하는 소설"이라는 문장이 있었는데, 첫 문장 읽자마자 무슨 말인지 완벽하게 이해했습니다.

일단, 여러 문학상 중에 굳이 '박지리문학상'을 기대하고 기다렸던 이유가, 개인적으로 박지리 작가의 작품들을 너무너무너무너무 사랑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박지리 작가가 가진 독특함을 가진 소설을 너무나도 읽고 싶어서도 컸던 것 같아요.

그리고 무언가 박지리문학상 수상작이라면 저의 그러한 니즈를 완벽히 충족시켜줄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1회, 2회를 지나면 이제 박지리 작가의 신작을 보고 싶어서 이따금 돌아버릴 때가 있는 제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경장편 분량이라 미리 받은 전자책으로 금방 읽었는데, 종이책으로 먼저 읽었으면 더 좋았겠다고 생각할 만큼 종이책을 정말 잘 만들었더라고요.



사실 처음에는 저 얼굴 일러스트와 낯가렸는데, 계속 보다 보니 익숙해졌어요.

이게 150쪽 정도 되는 짧은 편인 분량에, 가로를 줄이고 세로를 늘린 사륙변형판에, 커버 없는 반양장이더라고요! 경장편 분량이라 사실 무선제본인 줄 알았습니다. 커버 없는 반양장은 요즘 많이들 나와서 익숙한데도 이 책이 너무너무 특이한 제본 형식이라고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러고 보니까 싸바리 한 표지가 완전 반짝번쩍유광이어서 그런 거 같더라고요!!!

유광이 유행인 거는 확실,, 게다가 표지 한가운데 아주 크게 놓인 일러스트도 한몫한 거 같구요. 이게 책등은 글씨를 그냥 인쇄해서 유광코팅 입힌 거 같던데, 이게 앞표지에 있는 글자는 또!!!!! 뭘 한 건가요!!!!!!

이게 같이 인쇄를 하고 그 부분만 빼고 유광을 입히면 이렇게 나오는 건지, 아니면 따로 표지에서 뭘 파낸(?)건지! 어떤 후가공인가, 너무 예쁘다진짜,,이게 위에 뭘 입힌 거 같진 않고 음각으로 패어 있는데 이 후가공처리 때문에 일러스트가 엄청 강렬한데도 제목이 안 밀리더라고요.

게다가 띠지! 이렇게 디자인된 띠지는 저는 처음 봐요. 잘라서 책갈피로 사용하라고 쓰여있는데 아까워서 이걸 어떻게 자르나요.

'연명담'을 주제로 하는 책이니 만큼 책 안에 디자인적으로 물결선, 직선 같은 선이 많이 사용되더라고요. 그걸 어떻게 띠지에 넣을 생각을 했을까,,정말 너무 예쁘다. 그리고 띠지 왼편에 있는 저 일러스트가 너무 너무너무 예뻐요, 사실 띠지부터 너무 예뻐서 놀랐어요. 개인적으로 선 많이 쓰는 디자인을 좋아해서 표지, 내지 디자인 정말 마음에 들어요. 서평단 안 됐어도 소장용으로 샀을 것 같아요. 사실 글씨도 작은 글씨 좋아하는데 여기는 원고 본문 빼고 다 작은 글씨라 진심으로 (일러스트에 낯가렸을 때부터) 책에 모든 부분이 너무 취향이었어요.

그리고 희한하게 볼륨이 크지 않은 책인데 가름끈이 두 개 더라고요. 것도 흰색이랑 검은색 가름끈을 넣어 주셔서 뭔가 괜히 수정이랑 이안이 생각나고, 그들의 수명이 생각나고, 연명설화를 모티브로 한다니까 온갖 선에게 괜히 감정이입중

책 만듦새에 대한 얘기는 여기까지 하고 이제 책 내용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저는 워낙 한국 설화나 신화에 무지해서 몰랐는데, 소설《단명소녀 투쟁기》는 흔히 전해지는 수명 연명설화 중 〈북두칠성과 단명소년〉설화를 모티브로 하는 소설이라고 해요. 보통 이러한 설화들은 주인공이 '미성년 남성'이며 신을 찾아가 수명을 늘려달라고 부탁하는 반면, 《단명소녀 투쟁기》는 설화가 지니는 가부장적인 신화를 해체하고 새로운 신화를 구성했다고 출판사 서평에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저도 최근에 신화 모티브로 단편을 썼었는데, 그러면서 제일 고민이 되는 게 수백 년 전의 이야기에서 현재의 시공간에 유의미한 요소들이 뭐가 있을까 하는 점들이더라고요. 신화는 이데올로기의 언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 신화로 나는 현재에서 어떤 이데올로기를 긍정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제일 많이 했던 거 같아요. 어느 부분을 고치고 어느 부분을 차용할지 고르는 것부터 일이어서 《단명소녀 투쟁기》가 더 궁금했고, 그만큼 더 좋았어요.

처음에 열아홉 구수정은 입시 상담을 하려고 북두라는 무당을 찾아가는데, 뜬금없이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죽는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남동쪽으로 가면 "지평선에서부터 먹구름과 비가 솨아아 달려오는 모양으로" (단명소녀 투쟁기, 12쪽) 다가오는 죽음을 늦출 수 있다는 답변을 듣고 수정은 일단 남동쪽으로 갑니다.

여기서 우리가 발 디딘 현실과 그려지지 않는 환상의 공간으로 움직이는데 이 공간의 변화가 너무 자연스러워서 그 부분만 돌려서 두 번은 더 읽었어요.

환상의 공간으로 옮겨진 수정의 투쟁기는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일들의 연속인데도, 오히려 이 모든 인물들과 사건들을 담담하게 설명하듯 풀어내고 있어서 읽는 독자가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고 계속해서 이들의 상상할 수 없는 서사를 따라가도록 해요. 갑자기 설명되지 않은 시공간으로 쫓겨났음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독자를 너무 자연스럽게, 이상해서 뒤돌아볼 틈도 주지 않은 채 끌고 갑니다.

설화의 공간은 죽기 위해 이곳을 찾은 이안을 만나며 시작됩니다. 일곱 명의 아이, 일곱 명의 노인으로 시작해서 허리에 가마를 얹은 '저승 신'을 협박하여 수정은 살기 위해, 이안은 죽기 위해 그들이 죽여야 하는 자들이 적힌 명부를 받아들고 여정을 계속합니다.

그들은 악사와, 마을의 모든 물건을 제자리에 두어야 하는 청소부, 눈-인간, 모기-인간, 허수아비-인간과 같은 존재들을 죽입니다. 서사에 인물들이 등장하는 방식이나 특성이 정말 옛날 설화같이 개성을 지닌 고유한 인간으로 그려지지 않고 하나의 역할 그 자체로 읽히더라고요. 이게 유난히도 이 글이 판타지적으로 느껴진 요소 중 하나였던 거 같아요. 게다가 각각의 특성이 너무 독창적이고 글의 분위기와 완벽하게 어우러져서, 전혀 당위성이 없음에도 오히려 그게 자연스러워 보이더라고요. 제가 처음으로 신화를 읽었을 때 느꼈던 '냉택없음'과 비슷한 느낌이었어요ㅋㅋㅋㅋ 이 부분을 작품해설 파트에서는 서사의 특성을 "장소마다 인물이 특정 과제를 수행하고, 과제를 성공적으로 완료할 때마다 생명-시간이 연장되고, 다음 장소로 이행하여 다른 임무의 수행을 반복하는 단선적 구조"(144쪽)라고 설명하면서 이게 "스테이지 공략형 게임의 스토리텔링 기법"(144쪽)이라고 설명합니다. 제일 간단한 스토리텔링 구조라서 글의 특성이랑 잘 어우러지는 거 같아요.

결국 이안은 이곳을 꿈이라 규정하고 꿈에서 깨기 위해 수정에게 칼을 휘두르지고 수정을 계속해서 피하기만 하지만.

살고자 하는 수정이 죽고자 하는 이안의 가슴을 베었고, 저승의 감옥을 풀어 저승을 "깨끗이 쓸어버"(108쪽)립니다. 저승 신은 '깨끗이'라는 말은 없고 그곳에는 잔해만이, 폐허와 몰락만이 남는다고 말하지만,

수정은 "폐허를 쉼터로, 몰락을 휴식으로… 영원히…."(109쪽)라고 답하며 평생 이어진 착각은 더 이상 착각이 아니게 된다고 답합니다.

"나는 나의 죽음을 죽일 수 있다."(125쪽)라는 문구만큼이나 책을 읽으면서 와닿았던 문구였는데 이게 결국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소설을 관통하는 시각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이미 살아낸 시간은 깨끗이 쓸어낼 수 없으며 그 모든 일들은 우리에게 어떠한 "잔해"를 남기며 삶에 상흔을 내는데, 우리가 그 잔해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그것은 폐허가 될 수도 있고, 쉼터가 될 수도 있다.

"나는 죽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오늘은 아니다."(21쪽)라는 수정의 다짐은 '내일'이라는 이름을 가진 개에 의해서 환상의 공간으로 옮겨져 죽음을 피하고 수명을 늘리기 위한 투쟁기를 이어가다 현실로 돌아와 할머니에게서 받은 "오늘 낳았어. 그래서 이름이 오늘이."(120쪽)라는 개를 만나고 오늘의 일기를 쓰며 끝납니다.

작가의 말에서 "우리는 다 단명을 타고난 것"(127쪽)이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구름의 이동속도로 우리 뒤를 쫓는 죽음을 내일로 피하고, 결국은 꿈에서 깨 오늘을 살기로 한, 그러니 "나는 나의 죽음을 죽일 수 있다"(125쪽)는 현실에서의 수정의 다짐이 그럼에도 살아야 하는, 다짐이자 격려로 느껴졌어요.

그렇게 생각해 보니 이 소설은 수많은 죽음을 보여주면서, 죽음으로써 삶을 영위하는 위로를 건네고 있더라고요.

이 독특하고 새로운 시각과 서술이! 바로! 제가 원하던! 박지리문학상 수상작!

죽음이라는 단어를 2번이나 쓴 6어절 문장이, 오히려 인물의 삶의 의지를 보여줄 수가 있나? 정말 최고다,,, 개인적으로는 '투쟁'이라는 이야기를 끌어와서 주체성을 부여한 것도 정말 좋았어요. 이미 새로움을 잃은 설화가 지금 다시 내보여질 수 있게 만드는 최고의 포장지 같은 느낌?

이 소설을 끝까지 읽다 보면, 소설 구성이랑 내용이 너무 잘 어우러지더라고요. ㅠㅠㅠㅠ

이러니까 이제 제2회 박지리문학상 수상작을 기대할 수밖에 없잖아요. 게다가 현호정 작가님의 다음 신간을,,벌써,,기대를 해봅니다!!!!!!!!!!!!!!

"모든 게 거짓으로 이루어진 곳에서는 무너지는 것들만이 진실"(97쪽)이라는 세상에서, 우리는 단명을 피해서 어디까지 걸어갈 수 있을까요.

《단명소녀 투쟁기》진짜 오래 기다렸는데, 정말 그 이상의 기대를 충족시켜주는 소설이었어요.

꼭 한 권씩 사서 빨리 2쇄 찍었으면 좋겠네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럼 포스팅은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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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가 내려온다
오정연 지음 / 허블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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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허블에서 나온 제2회 한국과학문학상 중단편 부분 가작을 수상하신 오정연 작가님의 7개의 단편이 묶인 단편집 《단어가 내려온다》를 가져왔습니다.

허블에서 신작 서평단 신청해서! 책을 받았어요. 개인적으로 오랜만에 읽는 소설이자 SF여서 엄청 기대했습니다..!

일단 표지에서 제목에 찍힌 박이,,은박이 너무 예쁘더라고요. 그래서 책 실물이 사진보다 훨씬 예뻐요. 요즘 양장도 양장인데 뭔가 유광코팅하는 유행이 돌아온거 같아요. 최근에 황금가지에서 올해 나온 책들도 무선제본에 맨들반짝 유광이더라고요. 어쨌든, 박이 너무 예쁘다,,,그리고 표지랑 맨들번쩍 유광이랑 되게 잘어울리는 거 같아요,, 게다가 책등까지 박 찍어서 대박ㅋㅋㅋ박성애자라 너무 예뻐요. 그리고 개인적으로 책 제목 빼고 표지의 모든 글씨체가 고딕인데, 누군가 고딕을 좋아하시는지ㅋㅋㅋ궁금하네요.

그리고 책 자체도 꽤 가벼워요 내지를 중량 가벼운 걸로 한 건가 싶네요. 본문 종이가 좀 다른 거 같은데, 어떤 거 쓰셨는지 궁금궁금 가벼워서 오며 가며 출퇴근길에 읽기 좋더라고요.

그럼 《단어가 내려온다》에 대해서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총 7개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 단편집 《단어가 내려온다》는 지구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이 2편 밖에 없어요. 처음에는 우주를 주제로 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다 읽고 나니 이 단편집을 관통하는 주제는 ' 낯섬과 낯익음', 그것의 경계를 계속해서 그려내고 있어요. 그러면서 스스로의 기반, 시작을 잃지 않겠다는 다짐도 함께 느껴져요.

특히, 〈분향〉이나 〈미지의 우주〉같은 단편의 경우에 화성이라는 낯선 삶의 배경으로 보여주면서 그 안에서 '한국 여성'이라면 느끼거나 겪을 법한 일들을 이야기하는데, SF 장르의 엄청난 새로움! 독창성!이라는 특성을 보여준다기 보다 일상을 툭툭 던져내는 글들이 많이 실려 있어요.

〈분향〉같은 경우는 화성에서 지구와 원격으로 마련한 분향소에서 일어나는 (어처구니없는) 지구-화성 간 원격 차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요. 다른 행성에 이주해서 살고 있는 한국인들의 '어떤 정신'이 지구에서 떠나지 못하는 이들과 한국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유교의 정신이 이어지는 그 아득함이,,

낯익은, 익숙한 지구와 그 가족들을 떠올리게 하고 그들을 이어주는 매개라는 사실과는 별개로, 제게는 엄청난 무게의 압박으로 읽히더라고요. 이 단편은 그저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건네줄 뿐이라, 과연 작가는 어떤 방향을 제시해 주고자 했을까 궁금하기는 해요. 저는 '뿌리'로 해석되는 내가 선택하지 않았으나 끊을 수 없는 정체성에 옥죄어 들어가더라고요.

저는 그러한 방향성에서 '한국' 특유의 삶의 방향을 그리는 것이 〈미지의 우주〉와도 연관되어 있다고 느꼈어요. 남편을 따라온ㅠ 기혼여성들의 커뮤니티 안의 미지와 우주. 화성 이주 2세대인 미지가 딸 우주와 함께 한국으로 가게 되는데, 아이의 유치원 등록을 통해 본인들이 한국에서 '특별한 가정'에 속하며, 계속해서 기존의 정상이라는 범주에서 튕겨져 나오는 경험을 하게 되죠.

배경을 우주로 확장시키면서도, 우리 사회의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를 부각시킴으로써 그 허구성이 여실히 드러나게 돼요. 이러한 기준은 이제 '가족'이라는 사회를 구성하는 최소의 단위에서부터 시작되어 사회 속의 '개인'이 어떻게 '정상성'의 범주에 갇히게 되는지, 애초에 그 범주의 기준은 무엇인지까지 뻗쳐가더라고요.

제가 이 단편집에서 제일 좋았던 단편은 표제작인 〈단어가 내려온다〉, 와 〈행성 사파리〉였는데요.

〈단어가 내려온다〉는 지학이라는 새로운 현상이 벌어지는 세계를 배경으로 해요. 인간에게 단어가 내린다,라는 간단한 세계일 수도 있지만 여기서 '단어'라는 것은 무엇이고, 사어가 되어버린 단어가 내릴 수 있는가, 사용자가 주로 사용하는 언어가 내리게 되는가, 2개국어를 사용하는 아이들에게는 어떤 언어가 내릴 것인가 등등 언어의 의의를 꿰뚫어가는 주제 확장이 너무 재밌었어요. 이걸 국어학 SF라고 하더라고요ㅋㅋㅋ

바꿔 말하면 지학에 참여한 말만이 단어로 인정된다. 현대 한국어에서는 명사와 동사, 형용사와 부사, 감탄사와 심지어 조사까지 모든 품사가 내리지만, 어미만 내리지 않는다.

〈단어가 내려온다〉, 60쪽

지학이 내리기 시작하는 것은 인간 공동체가 공유하는 언어체계가 확립한 이후여야 하는데, 이런 지적인 공동체를 구성한 것은 인간밖에 없으니 지구에서 지학은 인간에게서밖에 관찰되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깨달음을 얘기하는데, 이 개념에서 '지학'을 연결해 읽어낼 수도 있더라고요. 이 연결도 되게 신기했고요.

받은 단어로 인생이 결정된다고 믿기도 하고, 그러므로 좋은 단어를 받게 해주는 코디네이터까지 등장하는 시대의 '나'는 화성으로 향하는 이주 우주선에 탑승해있습니다.

열다섯이 되면 내려오는 단어는 '나'에게는 아직 내려오지 않고, 언어학자가 되고 싶었던 '나'는 화성으로 향하는 우주 한가운데에서 최초로 관측된 산개성단을 마주하면서 주격조사 '-이'를 받습니다.

언어라는 것이 결국 상징이 부여된 체계인데, 이건 상호 공유되는 약속이기도 하죠. 언어의 큰 특징은 각 부여된 언어들에는 당위성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 인 것 같아요. 사과의 이름이 사과일 필요가 없다.

지학의 개념으로 내가 관찰하는 아직 인간이 이해하지 못한 우주의 커다란 존재가 있고, 내가 그것을 마주하는 순간 '주격조사'를 받는다면,

어쩌면 언어는 인간들만이 공유하는 수단이 아니라, 그 상징성은 온 우주에 퍼져 '나'만이 아니라 '나'가 실존해있는 세계까지 이어져 그들이 주체성을 띨 수 있게 한다고 생각해요. 시각으로 인지된 존재와 세상에 실존하는 신체가 일치되는 순간, 어쩌면 '정상'이라는 이데올로기는 해체할 수 있는 방식도 되지 않을까..?

화성의 언어는 지구 각국의 사람들이 모여 있기 때문에 내용을 중심으로, 아주 간단한 조사나 어미 없는 명사, 동사, 형용사들의 나열이게 되는데.

그곳으로 향하는 '나'는 내 앞에 주체를 빈칸으로 두면서 모두를 포용할 수 있는 존재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소설집에서 나오는 화성 언어의 특성들도 되게 새로워요. 그래서 국어학 SF 인가,, 그렇다면 저는 국어학 SF를 좋아하나 봐요..!

저는 언어체계를 사용할 수 없는 지적 수준을 지닌 장애 아동들에게는 어떤 단어가 내릴 수 있는가, 이게 궁금해지더라고요.

언어를 학문적인 영역을 넘겨, 실용적인 측면에서 바라본다면, 언어는 결국 사용해야 하는 도구이자 사용되어야지만 생명력을 얻는 의사소통의 수단인데. 낮은 지적 능력을 지닌 장애 아동들에게는 의사소통 수단으로 언어를 제시하지 않는 경우도 있어요. 보완대체의사소통 수단을 제공하면서, 그들이 최대한 사회 속에서 실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돕는 기구들이 많이 나와 있는데, 그렇다면 이들의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상징'이란 무엇일까? 만일 이들이 자신의 의사소통을 그림이 그려진 카드로 한다고 하면, 이들에게 내리는 지학은 '그림'이 되는 것일까?

궁금하네요..

〈행성 사파리〉는 다른 방식으로 너무 좋았는데요. 일단 쌍둥이 지구라는 개념 자체가 재밌었어요. 이걸 쌍둥이(복제인간?)로 치환시킨 관점도 그렇고.

지구의 시간을 그대로 걷는 쌍둥이 지구를 바라보는 여러 시각들을 배치시키면서, SF 장르 특유의 새로움까지 모두 잡은 소설이다! 〈러브, 데스, 로봇〉 에피소드가 생각나기도 하더라고요. 이 단편의 주제는 쉽게 꺼내지는데, 그럼에도 주제가 좋아서 끝까지 인상 깊은 단편이었어요.

오정연 작가님이 그려내는 세상은, 꽤나 담담한 것 같아요. 출판사의 서평처럼 '다정함'을 느끼기보다는 가야 할 길을 알려주는 방향성, 어딘가를 가리키는 손끝을 읽어낸 것 같은 느낌이 더 강하게 와요.

현실에서 끄집어 낸 일상을 우주에 풀어내는 구성을 띈 이야기들이 제일 재밌었고, 이제 이후에 작가님이 어떤 일상을 끄집어 낼지는 좀 더 기대해 봐야 할 것 같네요.

한국에서만 살아온 저는 한국이라는 뿌리를 저를 얽매이는 하나의 억압으로 이해하는 반면, 여러 국가와 여러 도시를 지나쳐 살아온 오정연 작가는 비슷하면서도 저와 정반대의 느낌의 '뿌리'를 느끼고 있다고 생각이 들어요.

전 제가 새로 내릴 뿌리를 찾아서, 뿌리를 내릴 땅을 밖으로 눈을 돌려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으로 단편집의 마지막 장을 넘겼습니다.

개인적으로 작가님이 다루는 언어의 개념이 너무너무너무 재밌어요.. 다음에 국어학 SF 단편집을 내주신다면!!! 바로 살 것 같네요ㅋㅋㅋ

그럼 오랜만에 읽은 SF 소설집인 《단어가 내려온다》의 포스팅은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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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리 부는 여자들 - 여성 간의 생활·섹슈얼리티·친밀성
권사랑.서한나.이민경 지음 / BOSHU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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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와 여자, 그리고 여자. 라는 포스팅 제목처럼 이 책의 저자는 총 세 명입니다. 세 명의 저자는 각자 다른 주제의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요. 우리는 그 세 번의 이야기 속에서 '여자와 여자'를 만날 수 있습니다.  『피리 부는 여자들』은 "여성 간의 생활", "여성 간의 섹슈얼리티", "여성 간의 친밀성" 이렇게 총 세 파트로 나뉘어 있습니다. 그러니 이 책을 소개할 때 빼 먹을 수 없는 문구는 이것이죠. "여성과의 관계"

1) 소리가 나는 곳을 따라 / 권사랑

비혼 여성의 공동 주거

2) 끝나지 않는 춤을 추고 / 서한나

레즈비언 연애담

3) 긴 행렬을 부르는 그림 / 이민경

여성 간의 친밀성

피리 부는 여자들 목차

목차는 주제에 맞게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여성 간의 생활을 이야기하는 파트에서는 저자가 현재 비혼 여성과 살고 있는 경험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게 되고, 여성 간의 섹슈얼리티에서는 저자의 여성과의 연애담을, 여성 간의 친밀성에서는 저자가 지금껏 겪어온 관계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라이브 방송에서 항상 한숨에 읽어주시는 것이 좋다고 말씀하셔서, 저도 이 책을 한숨에 읽었는데 총 128페이지의 얇은 책이라, 아마 두 시간 정도를 투자하시면 금방 읽어나가실 수 있을 거예요.

처음  『피리 부는 여자들』을 읽고 나서 왜 이런 책이 이제서야 나왔지, 싶은 의문이 들었어요. 이런 관용구가 있죠. 한 번도 안 먹어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먹은 사람은 없다. 한 번도 이런 책을 만난 적이 없어서, 저는  『피리 부는 여자들』를 읽기 전까지 제가 이런 책을 갈망하고 있다는 욕구조차 알아채지 못했어요. 이건 정말 '터미네이터 :다크페이트'를 처음 봤을 때의 경험과 비슷했습니다.

그러자 이제는 도대체  『피리 부는 여자들』이 내가 지금껏 읽었던 책들과 다른 점이 뭘까를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에세이건 소설이건, 항상 내가 마주했던 이야기의 한편에는 '남자'가 있었고, 조그마한 비중이라도 '남자'에게 발언권을 주었고, 그렇지 않으면 화자는 '남자'를 위하거나 생각했습니다. 읽는 나는 계속해서 그 혐오를 견디어야 하는, 어쩌면 이제 제게 독서의 경험은 여성 혐오를 견디는 경험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이 책이 보여주는 서사란  완벽한 여성주의에 너무 익숙해진, 그러니 어쩌면 여성들 사이에서 여성들만을 사랑하며 살아온 이들이 풀어낼 수 있는 서술이라고 생각했어요. 그 서술에서 자연스럽게 남성 화자는 사라지고 그 이후에서야 우리는 우리의 삶을 조금 더 깊고, 현실적으로 고찰해 나갈 수 있는 경험이 생기는 거라고요.

첫 번째 목차인 '소리가 나는 곳을 따라'에서는 주거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성 둘이 함께 살 집을 구하면서, 월 백만 원 정도를 벌어도 둘이면 함께 살 수 있다,는 이야기는 상당히 현실적이고 희망적입니다. 비혼이 독신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함께 사는 삶과 같은 동네 안에서도  여러 다른 가구와 이어진 삶. 그 부분은 너무 부러웠습니다,,

이 이야기를 읽는데 한참 '메갈'과 '워마드'가 수면 위로 떠오르던 시절이 생각이 났습니다. 탈코르셋, 야망을 위해 분노를 원동력으로 삼던 시대가 지나가고 이제 같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조금 더 일상으로 들어왔구나, 하는 마음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제게는 여성 간의 생활이라는 첫 번째 이야기를 읽고 저임금 여성들이 어떤 방법으로 집을 구할 수 있는지, 또 그들이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떠올리자면  사고의 흐름이 이번 총선의 '여성의당' 발족까지 향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불편한 용기 시위 이후 얻은 것이 없었던 과거를 떠올리며, '바꿔줘'라는 구호에서 '바꾼다'라는 주체성을 가져오기까지 많은 여자들이 스스로를 드러내며 연대하며 공동체를 꾸려오기 시작한 것이 아닐까요. 이 이야기는 세 번째 목차로 이어집니다.

두 번째 목차 '끝나지 않는 춤을 추고'에서는 '섹슈얼리티'라는 주제로 '레즈비언 연애담'이 쓰여 있습니다. 태어나서 얼굴을 공개한 레즈비언의 에세이를 읽어본 적이 전무후무 이 목차가 너무 새로웠어요. '헤테로 여성은 없다! 모든 여자는 레즈다!'를 외치는 몇 시간 스트리밍 영상을 보고 나니, 이 부분을 읽으며 어쩌면 학창시절 나의 친구가, 관계의 이름을 붙이지 못했기 때문에 '친구'가 되어버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성들 간의 관계는 항상 해석의 틀이 부족하다는 이민경 작가님의 말을 들었을 때, 오히려 해석의 틀이 없기 때문에 더 친밀해질 수 있었던 반면 언어가 사라졌기 때문에 그대로 사라져버린 관계들도 있다는 생각에 참 가슴이 아프더라고요. 제가 이 책을, 그 스트리밍 방송을, (현재 구독하고 있는) 코로나 시대의 사랑(이라는 이민경 작가님의 메일링 프로젝트를) 조금만 더 어렸을 때 알았다면 내 세상이 얼마나 바뀌었을지 그 상실을 상상하게 되면 계속 마음이 쓰리고 눈물이 납니다.

세 번째 목차에서는 여성 간의 친밀성, 저자가 지금껏 여자들과 맺어온 관계에 대한 이야기인데요. 이 부분에서 '주파하는 여자들'에 대한 이미지가 생생하게 남아 있어요.

세 번째 목차인 '긴 행렬을 부르는 그림'은 제목을 따라 저자가 지금껏 그려온 여자들 사이에서의 그림과 남자를 만났을 때 애써 붙잡고 있던 그림을 이야기합니다. 마지막 목차의 글은 비유와 상징으로 뒤덮여서 꼭 수필이 아닌 시를 읽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내가 말한 대로라면 몸이 머리를 이기는 점을 찾고, 정신이 몸 안에 한 올도 남지 않고 눈을 타서 몸을 이룬 경계 너머로 빠져나가면, 내면을 인식하는 데 몰리던 신경이 그렇게 이윽고 나를 상실하면.

때를 맞은 여자들은, 달린다.

피리 부는 여자들, p110

머리가 해석하는 감정보다  이끌리는 몸이 강렬하고, 그렇게 이성보다 직관이 앞서가면 여자들은 "자신이 이 순간을 오래 기다려 왔노라고 말하며"(피리 부는 여자들, p.110) 달려갑니다.

이때  이 책에서 말하는 "달리기란 시선이 주파하는 대로 몸을 움직이는 행위"(p.110)가 됩니다.

함께 살고, 서로 사랑하며 마지막에 서로를 향해 달리기로 마음먹은 이야기의 흐름이 이 책을 정말 한숨에 타고 흐르게 해줍니다.  그러고 보자면 마치 『피리 부는 여자들』이라는 책의 제목과 정말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이 책을 읽고 여자를 향해 달리기로 하는 여자들은 한 발자국만 멀어져 관망한다면, 피리에 홀려 어딘가로 사라져버리는, 그러니 이상하고 유해(트위터에서 피리 부는 여자들이 청소년에게 유해하다는 이유로 도서관에서 구매해 주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해 보이지만, 그러나 막상 달려가는 여자들은 "들판을 가로질러 바다를 향해 달리다 뒤돌아 다른 여자를 응시하며 자신이 이 순간을 오래 기다려 왔노라고 말하며" 달립니다.

왜 항상 여자들은 달리기를 할까요? 델마와 루이스》(1991)에서  델마와 루이스는 강간범을 죽이고 도로를 달리고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2015)에서는 임모탄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황야를 달립니다.  이 책의 '기획의 변'에서는 "피리 소리에 어린이들이 따랐고 그 후로 그들의 행방을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점에서 결말이 닮았다. 우리는 사람들이 모르는 곳에 와있다."( p.9)이라고 얘기합니다. 어쩌면 이들 모두 '정확히 알지 못하는 지점'으로 달려간다는 점 말고는 같은 것이 없습니다. 고민거리가 생길 때마다 목적을 정하지 않고 작은 원형 운동장을 따라 빙글빙글 달리기를 하던 저는 모두들 그러 했다는 점을 떠올리며 피리 부는 여자는 따라 다시 한번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이 책이 "피리 소리를 증폭하는 시도"(p.9) 라면, 제가 들은 피리 소리는 너무나 명확했고 완독한 이후  달리기를 할 준비를 마쳤기 때문에 저는 이제 여러분들에게 피리 소리를 들어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들은 소리는 스스로의 귓가에 어떤 방향을 속삭여주는지, 한숨에 흐른 이 책처럼 여러분도 한 물결 속에서 달릴 준비가 되었는지 또한 묻고 싶네요.

한 번씩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마다 꺼내 읽기 좋은 『피리 부는 여자들』 꼭 여러분들이 읽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후회하지 않으실 거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말한 대로라면 몸이 머리를 이기는 점을 찾고, 정신이 몸 안에 한 올도 남지 않고 눈을 타서 몸을 이룬 경계 너머로 빠져나가면, 내면을 인식하는 데 몰리던 신경이 그렇게 이윽고 나를 상실하면.

때를 맞은 여자들은, 달린다. -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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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세계
톰 스웨터리치 지음, 장호연 옮김 / 허블 / 2020년 2월
평점 :
절판


오늘은 오랜만의 SF! 것도 잘 읽지 않는 외국 SF소설을 가져왔습니다. 허블에서 출간된 톰 스웨터리치의 『사라진 세계』 입니다. 



출판사의 간략한 소개에서, "'시간 여행 허가'를 받은 최고의 여성 수사관"이라는 문구에 꽂혀서 서평단 신청을 해보았습니다. 작가를 착각했는데도 뽑아주셨더라고요,,ㅎ



"시간 여행"이라는 주제는 항상 기대감을 불러 일으켜요. 하지만 그에 반해서 실망했던 경우도 정말 많고, 차라리 정말 마음에 들었던 적이 손에 꼽을 정도였는데 이 소설은 그 기대감을 절반 이상 부합했던, 소설이었습니다. 



오히려 너무 어려워서 이해 안가는 SF 소설을 좋아하는 제게는, 어쩌면 거의 완벽했던! 클리셰의 클리셰를 벗어나고 싶은 욕구가 있으신 분들은 저처럼 아마 재밌게 읽으실 수 있을 거예요.



저는 항상 모든 책을 읽을 때면 느끼는 것이지만, 시간의 흐름으로 서사는 이해하는 데 너무 익숙한 인간이라 이런 식의 시간여행을 이해하는 걸 영 어려워합니다. 하지만 어렵기 때문에 제가 생각해내지 못하는 서사가 만들어지는데 쾌감을 느끼는 인간이라, 이번 소설을 정말 기대를 많이 하고 집어 들었는데요. 


이 소설이 다른 소설과 다른 두 가지 점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제게 가장 크게 와 닿았던 것은 『사라진 세계』가 택한 새로운 시간관념과, 작가가 정한 주인공 '섀넌 모스'입니다. 


보통 제 기준에서 상상 가능한 시간여행이란, (1)현재와 (2)현재에서 주인공이 향하게 된 과거, 그리고 그 (3)과거의 영향을 받은 현재

. 이렇게 세 가지 시간대에서 벌어지는 일인데요. 『사라진 세계』에서 취하고 있는 세계는 '양자역학의 다중우주 해석론' 토대로 구축되어 있습니다. 초반에 세계관을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겠죠. 


인공인 섀넌이 향하게 되는 미래는 (소설에서 '굳건한 대지'라 불리는) 현재에서 실재가능한 무수한 우주입니다. 시간여행을 한 존재가 도달한 미래는 존재가 사라지면 세계도 함께 사라지게 됩니다. 그것을 가능성의 차이, 라고 읽던 저는 해석했습니다. 


"아직 확정되지 않은 미래 시간대의 우주가 무한히 존재하며, 그 우주들은 시간 여행자의 관측이 이뤄질 때만 존재하는, 즉, 관측이 끝나면 다시 ‘존재하지 않던’ 상태로 돌아가는 세계로 전제한다." 


인터넷 교보문고에서 소개하는 책 소개에는 위와 같이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미묘한 이 차이로 소설은 세계관안에서 다른 시간여행물들과 다른 독특한 설정들을 사용합니다. 시간여행자들을 돌아가지 못하게 잡아놓는 세력이 존재하는가 하면, 섀넌이 도달한 미래에서 그가 사람을 죽인다면 그것을 살인죄로 처벌해야 하는지, 도달한 미래에서 데려온 사람을 굳건한 대지, 그러니 현재에서 죽인다면 그것이 살인죄가 되는지에 대한 논의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소설 안에서는 큰 부분을 할애하지는 않는 부분이지만, 새로운 세계관을 만난 독자들은 그 부분을 계속 곱씹게 됩니다. 이런 구체적인 세계관이 SF 처돌이들이 이 소설에 열광하게 되는 부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시간을 이런 식으로 풀어가는 소설은 처음이라 정말 새로웠습니다. 목차 자체도 년도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가장 미래의 이야기가 프롤로그로 들어가 있고, 책을 다 읽고 나서 마지막에 다시 프롤로그를 읽어야 무언가 소설을 완독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구성 자체도 잘 짜여진 시간여행물이라는 생각이 계속 들더라고요. 



두 번째로는 작가가 설정한 주인공 '섀넌 모스'입니다. 보통 이러한 수사물, 세계를 구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띄는 인물을 남성으로 설정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최근 흐름에 맞게 여성인 수사관이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그 뿐 아니라, 책의 초반부에서 섀넌은 한 쪽 다리를 잃고 의족을 착용하게 됩니다. 그러니 저는 최초로 장애인 여성이 세계를 구하는 소설을 접하게 된 겁니다. 


작가가 설정한 이런 특성들은 당위성을 가지고 약 600쪽의 이야기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섀넌의 특성이 눈에 띄거나, 차별을 받는 대신 일상 속에 당연히 존재하는 인물로 그려진 다는 것이 대단했습니다. 


섀넌의 실재적인 어려움은 자연스럽게 나타나며 이를 바라보는 시선은 어떤 동정심도 깃들어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섀넌의 삶은 아주 배제하지도 않은 중심을 잡은 서술이 무척 좋았습니다. 


섀넌 모스를 사회 구성원의 일부로 자연스럽게 녹아낸 서술. 제가 이런 책을 얼마나 기다려 왔는 지 모르겠습니다. 



『사라진 세계』는 장엄한 소개글과는 다르게 초반, 섀넌이 일가족 살인 사건의 범인을 쫒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이러한 수사의 일상이 어떻게 그를 마지막까지 데려가게 하는지 아마 중반까지도 전혀 상상하지 못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확실한 결말을 떠올리기보다, 작가가 써나가는 새로운 세계를, 그리고 새로운 인물을 만나는 재미로 『사라진 세계』를 펼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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