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학이 내리기 시작하는 것은 인간 공동체가 공유하는 언어체계가 확립한 이후여야 하는데, 이런 지적인 공동체를 구성한 것은 인간밖에 없으니 지구에서 지학은 인간에게서밖에 관찰되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깨달음을 얘기하는데, 이 개념에서 '지학'을 연결해 읽어낼 수도 있더라고요. 이 연결도 되게 신기했고요.
받은 단어로 인생이 결정된다고 믿기도 하고, 그러므로 좋은 단어를 받게 해주는 코디네이터까지 등장하는 시대의 '나'는 화성으로 향하는 이주 우주선에 탑승해있습니다.
열다섯이 되면 내려오는 단어는 '나'에게는 아직 내려오지 않고, 언어학자가 되고 싶었던 '나'는 화성으로 향하는 우주 한가운데에서 최초로 관측된 산개성단을 마주하면서 주격조사 '-이'를 받습니다.
언어라는 것이 결국 상징이 부여된 체계인데, 이건 상호 공유되는 약속이기도 하죠. 언어의 큰 특징은 각 부여된 언어들에는 당위성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 인 것 같아요. 사과의 이름이 사과일 필요가 없다.
지학의 개념으로 내가 관찰하는 아직 인간이 이해하지 못한 우주의 커다란 존재가 있고, 내가 그것을 마주하는 순간 '주격조사'를 받는다면,
어쩌면 언어는 인간들만이 공유하는 수단이 아니라, 그 상징성은 온 우주에 퍼져 '나'만이 아니라 '나'가 실존해있는 세계까지 이어져 그들이 주체성을 띨 수 있게 한다고 생각해요. 시각으로 인지된 존재와 세상에 실존하는 신체가 일치되는 순간, 어쩌면 '정상'이라는 이데올로기는 해체할 수 있는 방식도 되지 않을까..?
화성의 언어는 지구 각국의 사람들이 모여 있기 때문에 내용을 중심으로, 아주 간단한 조사나 어미 없는 명사, 동사, 형용사들의 나열이게 되는데.
그곳으로 향하는 '나'는 내 앞에 주체를 빈칸으로 두면서 모두를 포용할 수 있는 존재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소설집에서 나오는 화성 언어의 특성들도 되게 새로워요. 그래서 국어학 SF 인가,, 그렇다면 저는 국어학 SF를 좋아하나 봐요..!
저는 언어체계를 사용할 수 없는 지적 수준을 지닌 장애 아동들에게는 어떤 단어가 내릴 수 있는가, 이게 궁금해지더라고요.
언어를 학문적인 영역을 넘겨, 실용적인 측면에서 바라본다면, 언어는 결국 사용해야 하는 도구이자 사용되어야지만 생명력을 얻는 의사소통의 수단인데. 낮은 지적 능력을 지닌 장애 아동들에게는 의사소통 수단으로 언어를 제시하지 않는 경우도 있어요. 보완대체의사소통 수단을 제공하면서, 그들이 최대한 사회 속에서 실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돕는 기구들이 많이 나와 있는데, 그렇다면 이들의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상징'이란 무엇일까? 만일 이들이 자신의 의사소통을 그림이 그려진 카드로 한다고 하면, 이들에게 내리는 지학은 '그림'이 되는 것일까?
궁금하네요..
〈행성 사파리〉는 다른 방식으로 너무 좋았는데요. 일단 쌍둥이 지구라는 개념 자체가 재밌었어요. 이걸 쌍둥이(복제인간?)로 치환시킨 관점도 그렇고.
지구의 시간을 그대로 걷는 쌍둥이 지구를 바라보는 여러 시각들을 배치시키면서, SF 장르 특유의 새로움까지 모두 잡은 소설이다! 〈러브, 데스, 로봇〉 에피소드가 생각나기도 하더라고요. 이 단편의 주제는 쉽게 꺼내지는데, 그럼에도 주제가 좋아서 끝까지 인상 깊은 단편이었어요.
오정연 작가님이 그려내는 세상은, 꽤나 담담한 것 같아요. 출판사의 서평처럼 '다정함'을 느끼기보다는 가야 할 길을 알려주는 방향성, 어딘가를 가리키는 손끝을 읽어낸 것 같은 느낌이 더 강하게 와요.
현실에서 끄집어 낸 일상을 우주에 풀어내는 구성을 띈 이야기들이 제일 재밌었고, 이제 이후에 작가님이 어떤 일상을 끄집어 낼지는 좀 더 기대해 봐야 할 것 같네요.
한국에서만 살아온 저는 한국이라는 뿌리를 저를 얽매이는 하나의 억압으로 이해하는 반면, 여러 국가와 여러 도시를 지나쳐 살아온 오정연 작가는 비슷하면서도 저와 정반대의 느낌의 '뿌리'를 느끼고 있다고 생각이 들어요.
전 제가 새로 내릴 뿌리를 찾아서, 뿌리를 내릴 땅을 밖으로 눈을 돌려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으로 단편집의 마지막 장을 넘겼습니다.
개인적으로 작가님이 다루는 언어의 개념이 너무너무너무 재밌어요.. 다음에 국어학 SF 단편집을 내주신다면!!! 바로 살 것 같네요ㅋㅋㅋ
그럼 오랜만에 읽은 SF 소설집인 《단어가 내려온다》의 포스팅은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