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리 부는 여자들 - 여성 간의 생활·섹슈얼리티·친밀성
권사랑.서한나.이민경 지음 / BOSHU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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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와 여자, 그리고 여자. 라는 포스팅 제목처럼 이 책의 저자는 총 세 명입니다. 세 명의 저자는 각자 다른 주제의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요. 우리는 그 세 번의 이야기 속에서 '여자와 여자'를 만날 수 있습니다.  『피리 부는 여자들』은 "여성 간의 생활", "여성 간의 섹슈얼리티", "여성 간의 친밀성" 이렇게 총 세 파트로 나뉘어 있습니다. 그러니 이 책을 소개할 때 빼 먹을 수 없는 문구는 이것이죠. "여성과의 관계"

1) 소리가 나는 곳을 따라 / 권사랑

비혼 여성의 공동 주거

2) 끝나지 않는 춤을 추고 / 서한나

레즈비언 연애담

3) 긴 행렬을 부르는 그림 / 이민경

여성 간의 친밀성

피리 부는 여자들 목차

목차는 주제에 맞게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여성 간의 생활을 이야기하는 파트에서는 저자가 현재 비혼 여성과 살고 있는 경험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게 되고, 여성 간의 섹슈얼리티에서는 저자의 여성과의 연애담을, 여성 간의 친밀성에서는 저자가 지금껏 겪어온 관계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라이브 방송에서 항상 한숨에 읽어주시는 것이 좋다고 말씀하셔서, 저도 이 책을 한숨에 읽었는데 총 128페이지의 얇은 책이라, 아마 두 시간 정도를 투자하시면 금방 읽어나가실 수 있을 거예요.

처음  『피리 부는 여자들』을 읽고 나서 왜 이런 책이 이제서야 나왔지, 싶은 의문이 들었어요. 이런 관용구가 있죠. 한 번도 안 먹어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먹은 사람은 없다. 한 번도 이런 책을 만난 적이 없어서, 저는  『피리 부는 여자들』를 읽기 전까지 제가 이런 책을 갈망하고 있다는 욕구조차 알아채지 못했어요. 이건 정말 '터미네이터 :다크페이트'를 처음 봤을 때의 경험과 비슷했습니다.

그러자 이제는 도대체  『피리 부는 여자들』이 내가 지금껏 읽었던 책들과 다른 점이 뭘까를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에세이건 소설이건, 항상 내가 마주했던 이야기의 한편에는 '남자'가 있었고, 조그마한 비중이라도 '남자'에게 발언권을 주었고, 그렇지 않으면 화자는 '남자'를 위하거나 생각했습니다. 읽는 나는 계속해서 그 혐오를 견디어야 하는, 어쩌면 이제 제게 독서의 경험은 여성 혐오를 견디는 경험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이 책이 보여주는 서사란  완벽한 여성주의에 너무 익숙해진, 그러니 어쩌면 여성들 사이에서 여성들만을 사랑하며 살아온 이들이 풀어낼 수 있는 서술이라고 생각했어요. 그 서술에서 자연스럽게 남성 화자는 사라지고 그 이후에서야 우리는 우리의 삶을 조금 더 깊고, 현실적으로 고찰해 나갈 수 있는 경험이 생기는 거라고요.

첫 번째 목차인 '소리가 나는 곳을 따라'에서는 주거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성 둘이 함께 살 집을 구하면서, 월 백만 원 정도를 벌어도 둘이면 함께 살 수 있다,는 이야기는 상당히 현실적이고 희망적입니다. 비혼이 독신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함께 사는 삶과 같은 동네 안에서도  여러 다른 가구와 이어진 삶. 그 부분은 너무 부러웠습니다,,

이 이야기를 읽는데 한참 '메갈'과 '워마드'가 수면 위로 떠오르던 시절이 생각이 났습니다. 탈코르셋, 야망을 위해 분노를 원동력으로 삼던 시대가 지나가고 이제 같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조금 더 일상으로 들어왔구나, 하는 마음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제게는 여성 간의 생활이라는 첫 번째 이야기를 읽고 저임금 여성들이 어떤 방법으로 집을 구할 수 있는지, 또 그들이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떠올리자면  사고의 흐름이 이번 총선의 '여성의당' 발족까지 향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불편한 용기 시위 이후 얻은 것이 없었던 과거를 떠올리며, '바꿔줘'라는 구호에서 '바꾼다'라는 주체성을 가져오기까지 많은 여자들이 스스로를 드러내며 연대하며 공동체를 꾸려오기 시작한 것이 아닐까요. 이 이야기는 세 번째 목차로 이어집니다.

두 번째 목차 '끝나지 않는 춤을 추고'에서는 '섹슈얼리티'라는 주제로 '레즈비언 연애담'이 쓰여 있습니다. 태어나서 얼굴을 공개한 레즈비언의 에세이를 읽어본 적이 전무후무 이 목차가 너무 새로웠어요. '헤테로 여성은 없다! 모든 여자는 레즈다!'를 외치는 몇 시간 스트리밍 영상을 보고 나니, 이 부분을 읽으며 어쩌면 학창시절 나의 친구가, 관계의 이름을 붙이지 못했기 때문에 '친구'가 되어버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성들 간의 관계는 항상 해석의 틀이 부족하다는 이민경 작가님의 말을 들었을 때, 오히려 해석의 틀이 없기 때문에 더 친밀해질 수 있었던 반면 언어가 사라졌기 때문에 그대로 사라져버린 관계들도 있다는 생각에 참 가슴이 아프더라고요. 제가 이 책을, 그 스트리밍 방송을, (현재 구독하고 있는) 코로나 시대의 사랑(이라는 이민경 작가님의 메일링 프로젝트를) 조금만 더 어렸을 때 알았다면 내 세상이 얼마나 바뀌었을지 그 상실을 상상하게 되면 계속 마음이 쓰리고 눈물이 납니다.

세 번째 목차에서는 여성 간의 친밀성, 저자가 지금껏 여자들과 맺어온 관계에 대한 이야기인데요. 이 부분에서 '주파하는 여자들'에 대한 이미지가 생생하게 남아 있어요.

세 번째 목차인 '긴 행렬을 부르는 그림'은 제목을 따라 저자가 지금껏 그려온 여자들 사이에서의 그림과 남자를 만났을 때 애써 붙잡고 있던 그림을 이야기합니다. 마지막 목차의 글은 비유와 상징으로 뒤덮여서 꼭 수필이 아닌 시를 읽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내가 말한 대로라면 몸이 머리를 이기는 점을 찾고, 정신이 몸 안에 한 올도 남지 않고 눈을 타서 몸을 이룬 경계 너머로 빠져나가면, 내면을 인식하는 데 몰리던 신경이 그렇게 이윽고 나를 상실하면.

때를 맞은 여자들은, 달린다.

피리 부는 여자들, p110

머리가 해석하는 감정보다  이끌리는 몸이 강렬하고, 그렇게 이성보다 직관이 앞서가면 여자들은 "자신이 이 순간을 오래 기다려 왔노라고 말하며"(피리 부는 여자들, p.110) 달려갑니다.

이때  이 책에서 말하는 "달리기란 시선이 주파하는 대로 몸을 움직이는 행위"(p.110)가 됩니다.

함께 살고, 서로 사랑하며 마지막에 서로를 향해 달리기로 마음먹은 이야기의 흐름이 이 책을 정말 한숨에 타고 흐르게 해줍니다.  그러고 보자면 마치 『피리 부는 여자들』이라는 책의 제목과 정말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이 책을 읽고 여자를 향해 달리기로 하는 여자들은 한 발자국만 멀어져 관망한다면, 피리에 홀려 어딘가로 사라져버리는, 그러니 이상하고 유해(트위터에서 피리 부는 여자들이 청소년에게 유해하다는 이유로 도서관에서 구매해 주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해 보이지만, 그러나 막상 달려가는 여자들은 "들판을 가로질러 바다를 향해 달리다 뒤돌아 다른 여자를 응시하며 자신이 이 순간을 오래 기다려 왔노라고 말하며" 달립니다.

왜 항상 여자들은 달리기를 할까요? 델마와 루이스》(1991)에서  델마와 루이스는 강간범을 죽이고 도로를 달리고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2015)에서는 임모탄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황야를 달립니다.  이 책의 '기획의 변'에서는 "피리 소리에 어린이들이 따랐고 그 후로 그들의 행방을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점에서 결말이 닮았다. 우리는 사람들이 모르는 곳에 와있다."( p.9)이라고 얘기합니다. 어쩌면 이들 모두 '정확히 알지 못하는 지점'으로 달려간다는 점 말고는 같은 것이 없습니다. 고민거리가 생길 때마다 목적을 정하지 않고 작은 원형 운동장을 따라 빙글빙글 달리기를 하던 저는 모두들 그러 했다는 점을 떠올리며 피리 부는 여자는 따라 다시 한번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이 책이 "피리 소리를 증폭하는 시도"(p.9) 라면, 제가 들은 피리 소리는 너무나 명확했고 완독한 이후  달리기를 할 준비를 마쳤기 때문에 저는 이제 여러분들에게 피리 소리를 들어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들은 소리는 스스로의 귓가에 어떤 방향을 속삭여주는지, 한숨에 흐른 이 책처럼 여러분도 한 물결 속에서 달릴 준비가 되었는지 또한 묻고 싶네요.

한 번씩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마다 꺼내 읽기 좋은 『피리 부는 여자들』 꼭 여러분들이 읽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후회하지 않으실 거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말한 대로라면 몸이 머리를 이기는 점을 찾고, 정신이 몸 안에 한 올도 남지 않고 눈을 타서 몸을 이룬 경계 너머로 빠져나가면, 내면을 인식하는 데 몰리던 신경이 그렇게 이윽고 나를 상실하면.

때를 맞은 여자들은, 달린다. -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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