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는 주제에 맞게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여성 간의 생활을 이야기하는 파트에서는 저자가 현재 비혼 여성과 살고 있는 경험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게 되고, 여성 간의 섹슈얼리티에서는 저자의 여성과의 연애담을, 여성 간의 친밀성에서는 저자가 지금껏 겪어온 관계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라이브 방송에서 항상 한숨에 읽어주시는 것이 좋다고 말씀하셔서, 저도 이 책을 한숨에 읽었는데 총 128페이지의 얇은 책이라, 아마 두 시간 정도를 투자하시면 금방 읽어나가실 수 있을 거예요.
처음 『피리 부는 여자들』을 읽고 나서 왜 이런 책이 이제서야 나왔지, 싶은 의문이 들었어요. 이런 관용구가 있죠. 한 번도 안 먹어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먹은 사람은 없다. 한 번도 이런 책을 만난 적이 없어서, 저는 『피리 부는 여자들』를 읽기 전까지 제가 이런 책을 갈망하고 있다는 욕구조차 알아채지 못했어요. 이건 정말 '터미네이터 :다크페이트'를 처음 봤을 때의 경험과 비슷했습니다.
그러자 이제는 도대체 『피리 부는 여자들』이 내가 지금껏 읽었던 책들과 다른 점이 뭘까를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에세이건 소설이건, 항상 내가 마주했던 이야기의 한편에는 '남자'가 있었고, 조그마한 비중이라도 '남자'에게 발언권을 주었고, 그렇지 않으면 화자는 '남자'를 위하거나 생각했습니다. 읽는 나는 계속해서 그 혐오를 견디어야 하는, 어쩌면 이제 제게 독서의 경험은 여성 혐오를 견디는 경험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이 책이 보여주는 서사란 완벽한 여성주의에 너무 익숙해진, 그러니 어쩌면 여성들 사이에서 여성들만을 사랑하며 살아온 이들이 풀어낼 수 있는 서술이라고 생각했어요. 그 서술에서 자연스럽게 남성 화자는 사라지고 그 이후에서야 우리는 우리의 삶을 조금 더 깊고, 현실적으로 고찰해 나갈 수 있는 경험이 생기는 거라고요.
첫 번째 목차인 '소리가 나는 곳을 따라'에서는 주거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성 둘이 함께 살 집을 구하면서, 월 백만 원 정도를 벌어도 둘이면 함께 살 수 있다,는 이야기는 상당히 현실적이고 희망적입니다. 비혼이 독신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함께 사는 삶과 같은 동네 안에서도 여러 다른 가구와 이어진 삶. 그 부분은 너무 부러웠습니다,,
이 이야기를 읽는데 한참 '메갈'과 '워마드'가 수면 위로 떠오르던 시절이 생각이 났습니다. 탈코르셋, 야망을 위해 분노를 원동력으로 삼던 시대가 지나가고 이제 같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조금 더 일상으로 들어왔구나, 하는 마음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제게는 여성 간의 생활이라는 첫 번째 이야기를 읽고 저임금 여성들이 어떤 방법으로 집을 구할 수 있는지, 또 그들이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떠올리자면 사고의 흐름이 이번 총선의 '여성의당' 발족까지 향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불편한 용기 시위 이후 얻은 것이 없었던 과거를 떠올리며, '바꿔줘'라는 구호에서 '바꾼다'라는 주체성을 가져오기까지 많은 여자들이 스스로를 드러내며 연대하며 공동체를 꾸려오기 시작한 것이 아닐까요. 이 이야기는 세 번째 목차로 이어집니다.
두 번째 목차 '끝나지 않는 춤을 추고'에서는 '섹슈얼리티'라는 주제로 '레즈비언 연애담'이 쓰여 있습니다. 태어나서 얼굴을 공개한 레즈비언의 에세이를 읽어본 적이 전무후무 이 목차가 너무 새로웠어요. '헤테로 여성은 없다! 모든 여자는 레즈다!'를 외치는 몇 시간 스트리밍 영상을 보고 나니, 이 부분을 읽으며 어쩌면 학창시절 나의 친구가, 관계의 이름을 붙이지 못했기 때문에 '친구'가 되어버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성들 간의 관계는 항상 해석의 틀이 부족하다는 이민경 작가님의 말을 들었을 때, 오히려 해석의 틀이 없기 때문에 더 친밀해질 수 있었던 반면 언어가 사라졌기 때문에 그대로 사라져버린 관계들도 있다는 생각에 참 가슴이 아프더라고요. 제가 이 책을, 그 스트리밍 방송을, (현재 구독하고 있는) 코로나 시대의 사랑(이라는 이민경 작가님의 메일링 프로젝트를) 조금만 더 어렸을 때 알았다면 내 세상이 얼마나 바뀌었을지 그 상실을 상상하게 되면 계속 마음이 쓰리고 눈물이 납니다.
세 번째 목차에서는 여성 간의 친밀성, 저자가 지금껏 여자들과 맺어온 관계에 대한 이야기인데요. 이 부분에서 '주파하는 여자들'에 대한 이미지가 생생하게 남아 있어요.
세 번째 목차인 '긴 행렬을 부르는 그림'은 제목을 따라 저자가 지금껏 그려온 여자들 사이에서의 그림과 남자를 만났을 때 애써 붙잡고 있던 그림을 이야기합니다. 마지막 목차의 글은 비유와 상징으로 뒤덮여서 꼭 수필이 아닌 시를 읽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