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스트 킬조이 - 쉽게 웃어넘기지 않는 이들을 위한 서바이벌 가이드 Philos Feminism 9
사라 아메드 지음, 김다봄 옮김 / arte(아르테)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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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서퍼로 받게 된 마지막 도서는 사라 아메드의《페미니스트 킬조이》 입니다.이 책은 실물로 보았을 때 표지의 홀로그램 덕분에 엄청 눈이 가는 책이기도 합니다.

안 그래도 아메드의 《감정의 문화정치》를 읽고 싶어 하던 와중, 같은 저자의 책이라는 사실을 알고 반가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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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이 책을 '핸드북'이라고 묘사하고 책의 목차 또한 '페미니스트 킬조이로 살아남기', '페미니스트 킬조이 문화비평가/철학자/시인/활동가'와 같이 구성되어 있어 언뜻 보면 정말 쉽게 읽히리라 예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 문장 한 문장을 읽고 나면, 그 문장이 나의 삶에 끼워지는 순간을 받아들이는 시간이 굉장히 필요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내가 나의 삶에 구멍을 낸 채로, 언젠가 이 구멍을 틀어막아 줄 문장을, 단어를, 언어를 찾고 싶다는 열망으로 책을 읽어 왔던 경험이 차르륵, 눈앞을 스치고 지나갑니다.

'핸드북'이라는 게 학문 분과 중 하나의 '여성학/페미니즘'의 고찰과 분석 그리고 비평이 아니라 우리가 여성으로 살아가면서 마주쳐야 할 일상의 순간들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또 이렇게 일상에서 '반사적으로 사용해야 할 기제'들이 무엇이 있는지,그리고 보이지 않던 이들이 사실을 다른 곳에 존재한다는 걸 아는 일의 중요성을 다시 깨닫게 합니다.

'페미니스트 킬조이'란 단어를 역자는 번역하지 않고 원어 그대로 옮겨두었습니다. 한국어로 '킬조이'를 번역하자면, '산통 깨는 사람' 요즘 말로 하면 '갑분싸', 혐오 표현을 곁들이자면 '선비충'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이제 이 앞에 '페미니스트'가 붙는다면, 한국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무슨 의미가 더해질지 말 안 해도 아시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메드는 이렇게 페미니스트 킬조이로 살아남기 위한, 격언, 진실, 다짐, 등식을 정말 실용서처럼 정리해 두었습니다.

🗨️" 당신도 겪을 수 있는 일이다. 여전히 '콧물이 흐르는' 상태에서, 당신은 그렇게 느끼도록 조종당했음을 깨닫게 된다. 메임에 따르면 '부인의 순간'은 이전의 수용을 취소하는 것이 아니라 수용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이 긴밀한 연관성은 양가감정의 원천이 된다. 양가감정은 당신을 서로 다른 방향으로 이끈다. 감동했으면서 그 사실에 간담이 서늘해지는 느낌이 한 사람 안에 공전하는 것이다. 페미니스트 킬조이는 복잡함 그 자체이자 복잡한 느낌으로도 나타날 수 있다."(127)

최근 사회·문화 비평-칼럼을 작성하면서, 과연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현재 사회에 유효한가라는 질문을 스스로 수천 번을 던졌습니다. 그리고 콘텐츠를 바라보는 나의 감상과 감정, 그리고 글을 쓰기 위해 '콘텐츠를 바라보는 나'를 바라보는 '나'라는 새로운 서술자를 상정하면서 나의 감정이 도무지 정확히 하나로 정리되지 않더라고요. 그런데 아메드의 묘사처럼 '감동했으면서 그 사실에 간담이 서늘해지는 느낌', 이 느낌이 지금껏 내가 느꼈던 감상의 원천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앞서 말한 커다란 빈칸이 채워지는 기분을 느꼈습니다.

읽는 순간, 아마 독자가 100명이라면 100개의 인생 문장이 생겨나는 책이라고 생각하고,

연대감을 잃어서 힘들었거나, '왜 나만 이렇게 예민하지?'라는 생각이 들었던 분들이라면 정말 꼭 한번 읽어보시길

추천합니다.

《페미니스트 킬조이》로 북서퍼 마무리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았습니다,, 양질의 책을 읽으면 너무 행복합니다.

❓[북서퍼 질문]

저자는 페미니스트 킬조이가 되는 경험이 자원이라고 묘사합니다. 여러분은 그런 경험이 있으신가요? 그 과정 속에서 무엇을 배웠는지도 궁금합니다.

🏄‍♀️

저는 항상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난 후에, 집에 돌아가는 길에서야 '아 그때는 내가 이렇게 말했어야 하지 않았을까?'를 고민하는데, 언제나 킬조이처럼 생각만 하고 실제로 페미니스트 킬조이가 돼 본 적이 많지 않다는 생각을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 했습니다. 제가 페미니스트 킬조이가 되는 순간은 언제나 글을 쓸 때뿐이구나, 하는 자책과 함께... 저번에 다 썼지만 차마 게재하지 못한 원고도 이와 같은 이유인데, 그때 한 걸음 더 나가보면 좋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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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러리
사라 스트리스베리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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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에서 서평단을 모집한다는 게시글을 보고 신청해서 받았습니다. 저는 제목과 표지만 보고 처음에는 '밸러리 솔래너스의 삶에 대한 전기나 여성학 도서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스트리츠베리의 소설이었습니다.

밸러리 솔래너스는 길버트와 구바의 《여전히 미쳐있는》에서 처음 알게 된 인물입니다.

솔래너스는 앤디 워홀에게 총을 쏜 사건으로도 이름을 날렸지만, 그의 〈스컴SCUM 선언문>으로도, 그리고 그의 고된 어린 시절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솔래너스의 <스컴 선언문>은 페미니즘 제2물결이 시작되고 있던 1960년대 미국을 강타합니다. 이 선언문과 솔래너스의 등장은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를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에게서 분리시키며 선동적이고 과격한 여성 단체의 등장과 활동을 이끌어냅니다.


장편소설 《밸러리》는 사라 스트리츠베리는 이 책의 앞 부분에 이 책은 밸러리의 "(...) 전기가 아니며, 지금 세상을 떠난 미국인 밸러니 솔래너스의 삶과 저작에 기반을 둔 환상문학"이라고 언급합니다.

스트리츠베리는 왜 밸러리를 '환상 문학' 속의 인물로 되살리고 싶어 할까요? 소설을 읽는 내내 그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궁금증은 저자가 택한 독특한 서술 방식으로 이어집니다. 소설 속에서 '너'와 인터뷰를 기술한 듯한 대사 자체로만 존재하는 밸러리는 스스로를 완결된 지문이나 잘 다듬어진 문장으로 묘사하거나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도 밝혀진 것이 많지 않은 그의 삶을, 저자조차도 '나'로 뛰어들지 않고 관찰자 입장으로 남기로 한 결정, 그 결정의 이유가 무엇일까. 스트리츠베리 안에서 재조립되어 완성된 인물 '밸러리'는 누구일까. 그리고 왜 그였어야 하는가.

🗨️ 옳은 질문은 이거죠. 그 여자는 왜 총을 쏘지 않지? 도대체 왜 총을 쏘지 않지? 그 여자의 모든 권리가 공격받고 있어요. 강간당한 여자 아기나 강간당한 여자 동물과 같은 상태. 그런대 왜 그들은 총을 쏘지 않나요? 난 정말이지 모르겠어요, 닥터 쿠퍼. (127)

장이 되지 못하는 단어의 나열, 서사가 부재한 비명 같은 발화, 논리정연하지 못하고 두서없이 쏟아지는 감상, 질문에 걸맞지 않은 답변.

​그가 한 번씩 제기하는 문제점들은 소설 밖까지 터져 나오는 힘이, 벼려진 날렵함이 존재합니다.

🗨️ 당신이 내리는 이른바 진단은 대중 정신병의 체계 안에서 여성의 위치를 정확히 묘사합니다. 조현병, 편집증, 우울증, 파괴적 행동 가능성. 가부장제 안에서 모든 여자는 조현병, 편집증, 우울증이 단연코 개인의 의학적 상태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요. 그건 인구 절반의 두뇌 능력에 대한 상시적 모욕에 기반을 두고 강간 위에 구축된 사회구조와 정부 형태에 대한 최종적 진단입니다.(146)

그러나 그런 밸러리의 직접적인 발화, 작가를 거의 거치지 않는다고 느껴지는 구술 인터뷰 형식의 서술 방식으로 꼬집어지는 현실은 더 두렵습니다.

왜 저자가 밸러리의 입을 빌려야 했을까, '서술자'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너'로 밸러리를 묘사하는 화자일 뿐 아니라 밸러리를 이제서야 돌아보게 된 저자이자, 독자인 우리가 아닐까?

이 소설을 끝까지 읽고 나면, 내가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읽었는가?라는 혼돈과 함께 밸러리의 생각을 멈출 수 없습니다. 실제와 허구를 교묘히 교차시킨 채로 '환상 문학'이라는 단언 속에 묶어 두었지만, 그 속에서 말하지 못하는, 말해서는 안 되는 밸러리의 입으로 낱낱이 파헤쳐지는 현실. 그리고 밸러리의 발화이기 때문에 정확히 그 방식 그대로 무시당하는 실재.

밸러리이지만 밸러리가 아니고,
부재한 '나'를 가진 '너'의 소설,

소설이라는 장르에 갇히지 않는 저자의 실험적인 서술과 그 안에서 흐릿하게 보이는 밸러리를 찾아가면,
도대체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그리고 이 소설을 끝마친 저자는 무엇을 얻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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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서사를 기대한다면 실망할 것이고,
읽는 동안 경험할 수 있는 원초적으로 불쾌한 감정들이 나에게 왜 발현하는 것인지, 그리고 실제의 그의 삶과 그의 선언이 세계에 가져온 흐름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다 보면, 결코 실망할 일 없는 작품입니다.

서사가 부재한 여성의 파편화된 발화를 읽고 싶다면, 그 파편 속에서 세계의 단면을 찾아낼 때의 쾌감을 느끼고 싶다면,

꼭 한 번 들춰 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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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티언스 - 의식의 발명 Philos 시리즈 22
니컬러스 험프리 지음, 박한선 옮김 / arte(아르테)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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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자유입니다. 



오늘 가져온 책은 니컬러스 험프리의 《센티언스》입니다. '의식의 발명'이라는 부재가 붙어 있습니다. 표지의 색감과 가름끈의 색상이 잘 어우러지는 책입니다. 



포스팅 제목을 도발적으로 지어보았습니다. 



인간-비인간, 포스트휴머니즘 논의가 대두되는 와중 완전히 인간을 중심에 두고 지각이 있는지에 따라 종을 가르는 책이 있다? 


당당하게 문어보다 개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책이 있다?



물론 험프리는 "윤리에 관해 과학은 할 말이 없다. 과학은 다만 제안할 뿐이다. 사려 깊은 개인으로서 각자 결정을 내려야 한다"(307)라고 말합니다. 



인간이 문어보다 개를 더 신경 써야 하는 이유는 "개는 문어와 다른 방식으로 개 자신에게 중요하기 때문"(306)입니다. 개는 '현상적 자아'를 가지고 있고, 문어는 '현상적 자아'를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고 다시 반복하자면, 개는 지각 동물로 감각 자극을 현상적 깊이를 가지고 고유한 형태로 표상 가능하며 인간처럼 자아를 가지고 있는 자기 자신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며 문어는 감각 자극을 인식하고 의식이 필요한 지능적 행동은 가능하지만, 상대에게 자아성을 부여하지 못하는 서브센티엔트, 즉 하위 지각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라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나'와 '나'가 나라는 것을 아는 '나'는 다른가? 



의식에 관한 질문은 고대 철학에서부터 유구히 이어진 질문입니다. 근대 이후 '자아'에 대한 탐구에 몰두하며 데카르트의 '의심하는 나' 존재 증명에서부터 진화생물학까지, 험프리는 철학과 과학을 넘나들며 '의식' 그러니까 내가 느끼는 것을 남들도 같이 느끼며, 남들도 같이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서부터 시작되는, 뇌의 생물학적 단위를 뛰어넘은 의식적 창발성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지각, 의식, 자극, 감각, 인식, 현상"과 같은 얼추 비슷한 범주처럼 보이는 단어 각각을 모두 구분하여 사용하기 때문에, 《센티언스》에서 길을 잃고 싶지 않은 분들은 이 각 단어가 등장할 때마다 개념을 정리하여 두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험프리는 감각을 "주체의 감각기관에서 발생하는 것과 관련된 정신 상태"(89)로 인식은 "외부 세계 대상의 존재와 관련된"(89) 것으로 봅니다. 



그리고 이 둘이 우리 의식에 독립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말합니다.  자극→감각 →인식의 선후관계가 아니라, 독립적인 영향이라는 점이 직관적으로 전혀 이해 가지 않습니다. 



험프리는 주장에 대한 근거로 감각 없는 인식인 '맹시'와 '한 치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내 엄지손가락이 어디에 있는지 알기'를 제시하고, 인식 없는 감각으로는 '오르가즘'을 제시합니다. 



아! 우리는 감각과 인식이 동시에 발휘되기 때문에 지금까지 이 둘이 함께여야 한다고 착각하고 있던 것입니다. 



특히, 맹시 개념이 무척이나 흥미롭습니다. 시각이 없지만, 뇌의 오른쪽 시각피질을 제거한 상태임에도 어떻게 환자는 빛이 나타난 곳을 알 수 있을까요? 맹시는 "무감각 시각 능력"입니다. 



험프리는 이어 "만약 주체가 이러한 자극을 다르게 평가한다면 이것은 인식이 아닌 감각 때문"(89)이라 말합니다.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뇌는 두 가지 별도 표상"(120), 즉 감각 표상과 인식 표상을 만들어내는데,



감각 표상은 "달콤한 맛을 느끼면 기분이 좋아지고 날카로운 소리를 들으면 불쾌해"지는 것이며, 인식 표상은 "달콤함을 느끼며 꿀이라는 것을 알고 날카로운 소리를 들으며 아기가 운다는 것을 안다"라는 것입니다. 



감각은 내적 속성이며 험프리는 "뇌의 감각 표상에 관한 표상 매체가 사실은 은폐된 신체 표상의 한 형태"(120)라고 하며, 이는 반복하자면 "일어난 일에 관한 인식과 달리, 자신에게 비춰지는 감각을 스스로 느끼면서 이를 통해 그러한 일이 가지는 의미를 스스로 읽어 낸다고 주장"(121)하는 것이며 "즉 자신이 느끼는 감각은 일어난 이에 관해서 자신을 향해 말하는 내적 언어라는 것"입니다. 



이게 단번에 이해된다면, 의식에 대한 책을 찾아볼 것이 아니라 당장 의식 분야에 뛰어들어 연구를 해야 합니다. 



자, '빨간' 사과가 있습니다. 여가서 사과는 물리적으로 존재하고, 우리가 볼 수 있고 머리로 표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빨갛다'라는 속성은 어떨까요? 



'빨갛다'라는 감각은 물리적 공간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내가 무엇을 보고 빨갛다고 할 때, 도대체 그 '00가 빨갛다'의 '빨갛다'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나의 '빨강'이 당신의 '빨강'과 같을 수 있을까요? 내가 '빨강'을 보고 얻는 감각 표상과 당신이 '빨강'을 보고 얻는 감각 표상이 일치할까요? 그렇다면 이 '빨간 감각'은 도대체 우리의 내부에 있는 것일까요? 외부에 있는 것일까요?


"감각은 우리의 감각기관에서 발생하는 일과 그에 대한 감정을 대표하는 개념이다. 이는 뇌에서 자극에 의해 유발되는 운동 반응을 추적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이것은 숨겨진, 실현되지 않은 신체적 표현 행태로 존재한다. 그다음 단계로서 이는 현상적 속성을 얻게 된다. 이 속성은 환상이 아니다. 그것들은 '어떤 것이 있는지'에 관한 느낌의 진실한 특성이다.


《센티언스》, 156쪽


험프리는 "감각은 항상 기본적으로 개인적인 경험"(164)이라는 전제에서 시작합니다.  감각에 대한 반사행동을 일으키기 위하여 참조 가능한 여러 정보를 저장하는 과정에서, 점차 복잡한 환경에 적응하게 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자기의 반응을 모니터링하여 자극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스스로 파악"(158)하는데, 이러한 피드백 과정의 신호를 "원심성 사본"이라고 하고 이를 역으로 읽어 자신이 어떻게 반응하고 느끼는지를 표상할 수 있다고 합니다. 



자, 슬슬 이해가 안 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자기 모니터링 행위를 역으로 읽어내 스스로 반응과 감정에 대한 표상을 얻어내는 과정에서, 자아가 형성되지 않았을까라고 저자는 슬그머니 자신의 주장을 제기합니다. 



생물은 자극에 적응합니다. (빨간빛은 위험함-뒤로 물러서는 행동)


그러나 환경은 변화합니다. (빨간빛이 안 위험함)


기존의 적응한 신체 행동이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빨간빛이 안 위험하니까 뒤로 물러서는 행동이 딱히 도움이 되지 않음)


문제가 생깁니다.  (그런데 빨간빛이 자신에게 감각된다는 사실과 이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아야 함)


그렇다면 "반응을 내부화하거나 사적화"합니다. (감각 신호를 신체 지도를 대상으로로 대응하는 것입니다. 빨간빛이 감각되었을 때, '나'는 뒤로 물러서는 행동으로 대응해야겠다'라는 계획을 세움. 그러면 빨간빛이 자신에게 감각된다는 사실과 이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계속 알 수 있음)


풀어 이야기하면 "내 몸의 이 부분을 이용해서 나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응한다"라는 도상 계획으로 대응합니다.



자 여기서 갑자기 '피드백'이 생깁니다.



대뇌수준에서 나가는 운동 신호와 들어오는 감각 신호의 순환이 일어납니다. 



들어오는 감각 신호와, 신체 지도를 대상으로 대응하는 운동신호가 끊임없이 반복하여 루프를 형성합니다. 



이 변화는 루프에서 안정화되고  '끌개attractor' 상태가 됩니다. 



이를 입선드럼ipsundrum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현상적 감각의 매개체입니다. 



다시 풀어 반복합니다.



이 일련의 상황에서 입선드럼이 생성되면, "감각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적 느낌으로, 즉 고유한 양식 특이적질modality-specific qualities로 물들게 된다. 주관적 현재의 두꺼운 시간에 뿌리를 둔, 비물질적이며 정신적인 것들immaterial mind stuff로 이루어진 것처럼 경험된다. 간단히 말해서 현상적인 경험"(163)이 시작됩니다.



자 이제 중요합니다. 



이렇게 입선드럼을 통해 우리는 "감각이 자아 감각에 기여하는 방식의 변화"를 예상할 수 있습니다.



이 한 문장을 위해 달려왔습니다.


"나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을 표상하는 행위에서 '나는 무엇인가'라는 감각을 채워 나가게 된다는 것이다."


《센티언스》, 164쪽


이러한 입선드럼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험프리는 뜨거운 피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온혈동물은 신체 유지 비용은 증가하지만 뇌의 유지 비용은 감소합니다. "포유류와 조류가 상대적으로 적은 수준의 에너지 추가 지출을 통해 더 크고 복잡한 뇌를 지탱해 낸다는 뜻"(215)입니다. 



'나'의 존재를 아는 것, 그리고 '나'의 지속성을 이해하는 것,  그리고 상대에게도 자아 감각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상대에게도 자아 감각이 있기 때문에 나와 같이 느낄 것이라는 것. 



이렇게 어떻게 의식이 탄생했고 지각 동물이 만들어졌는지를 아주 광범위한 과학적 사실들로 설명하는 책입니다. 



23장에서 기계도 감각을 가질 수 있을까라는 SF적 상상력이 발휘된 질문을 던지는데, 이는 엔지니어의 설계, 즉 지각 동물이 가지고 있는 "의식을 가진 동물의 두뇌가 자극을 느낄 때 하는 일을 똑같이 해내는 로봇 뇌를 설계하는 것"(295)에 성공 여부가 달려 있다고 합니다. 게다가 그 로봇이 의식이 있는지 없는지를 우리가 알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남습니다. 



옮긴이의 말에서  



"노벨상을 받고 더 이상 쟁취할 것이 없어진 과학자는 종종 두 길 중 하나를 택한다. 세계 평화와 기후 위기 해결을 위한 강연회를 다니거나 혹은 의식 연구에 빠지는 것이다"(333)라는 문장을 보고 진짜 웃음을 터트린 것처럼, 



의식 연구는 여전히 그 누구도 알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지만 어마어마한 매력으로 과학자들을 수렁에 빠트리는 분야라는 것만은 확실하게 알 수 있겠습니다. 



웃음을 터트릴, 가벼운 마음으로 책을 읽다 보면 어느 장에서는 여러분이 기대한 것 이상의 지식과 흥미를 얻게 될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도대체 의식은, 내가 나임을 나는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인지. 


전혀 해결되지 않는 물음에 다시 뛰어들어 보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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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만든 가난 - 가장 부유한 국가에 존재하는 빈곤의 진실 Philos 시리즈 25
매슈 데즈먼드 지음, 성원 옮김, 조문영 해제 / arte(아르테)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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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자유입니다.



오늘 가져온 책은 아르테에서 11월에 발간한 《미국이 만든 가난》입니다.



특별히 해제가 앞에 붙어 있어서, 사실 난도가 있는 책인가 두려워했지만 서술은 꽤나 평이하고 예시를 많이 들어주는 친절한 책이었습니다.



빈곤 문제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 읽으면 재밌으실 것 같은데, 



 《미국이 만든 가난》은 부유한 국가라는 미국에서조차 왜 빈곤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가난으로부터 이득을 얻고 있는 우리'를 제시하는 책입니다. 



두루뭉술한 사회 구조, 신자유주의 경제체제, 정부, 기업 등이 아닌 바로 '우리'입니다. 



이 지점에서 왜 갑자기 빈곤 문제가 '나' 때문이래?라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면, 이제 이 책을 펼치면 되겠습니다. 




저자 데즈먼드는 가난에 대해서 다루지만 '가난한 자'에만 초점을 맞춰서는 빈곤 문제를 정확히 바라볼 수 없다고 말합니다.



데즈먼드는 가난이란, "통증"(49), "인공항문 수술 뒤에 차는 배변 주머니와 휠체어", "사람을 불구로 만들어 놓은 뒤에도 교활한 고통을 안기는 심야의 테러와 총알(50)", "트라우마(51)", "불안정"(51), "상황이 점점 더 나빠질 거라는 끊임없는 두려움"(53)이자 "자유의 상실"(55)이며 "정부가 당신의 편이 아니라 당신의 적이라는 느낌"(56)이고 "당혹감과 수치심을"(58) 불러일으키며 "쪼그라든 삶과 인성"(59)들이 "겹겹이 누적된 형태"(62)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가난은 직선이 아니다. 사회적 병폐들이 단단하게 엉킨 매듭"(62)입니다.



데즈먼드의 비판적 어조가 여실히 드러나는 비유적 표현들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이러한 문체가 이 책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읽다 보면 헛웃음이 터질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뇌에 여유 공간이 있고 목소리가 큰 일부 대중은 빈곤에서 벗어나려면 당사자들이 행동을 바꿔야 한다고 믿는 듯하다."(117-118) 이 있습니다. 



잡설은 차치하고, 



가난이란 한 개인의 경제적 결핍 상태를 지칭한다기보다는, 개인의 삶 모든 영역에 침투하는 것으로 이 가난은 인종에 따라 다른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가난은 절대 공평하지 않으며, "인종적 약점 때문에 심해지거나 인종적 특권 때문에 약화될 수도 있다"(60)고 말합니다. 



저는 여기서 저자의 질문이 인상 깊었습니다.  "그러면 인종과 계급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어느 것이 사회적 불평등의 근원이고 어느 것이 곁가지인가? 어느 기원이 당신에게, 당신의 심장이나 두뇌에 더 중요한가?"(60)



이 질문은 괄호 안에 들어 있는 부연 설명이었는데도, 이 질문에 답을 정하느라 꽤나 고심했습니다. 인종과 계급. 어느 것이 근원이고 어느 것이 곁가지일까요? 미국만큼의 다인종성이 없는 한국에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어떻게 내려야 할까요? 인종 대신 이 빈칸에 들어갈 수 있는 단어가 무엇이 될지, 한국의 빈곤 문제의 교차성의 지점은 어디일지, 잠시 고민이 됩니다. 




이 책은 우리가 기본적으로 '빈곤 문제', 혹은 '저소득 계층'같은 특정 계층에게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복지 제도, 노동조합 등등에 대한 우리의 기본적인 고정관념을 무너뜨립니다. 



가난은 개인의 문제라던가, "사회적 원인의 부산물"(89)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이 재난을 의도하지 않았고, 사실상 그 누구도 여기서 이익을 얻지 않는다"(90)라는 진리와도 같은 생각에 저자는 답합니다.


사람들은 가난에서 온갖 방식으로 이익을 얻는다.

《미국이 만든 가난》, 90쪽


이러한 주장을 원로 학자가 '마르크스주의자의 길에 빠져들고 있다'라는 코멘트를 남겼다는 것도 뼈아픈 블랙 코미디이지만, 우리는 왜 이러한 주장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어려워하는지는 고민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아무래도 가난의 이유를 나와 너와 우리라고 이야기하는 주장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노조가 경제 성장을 막는다', '실업급여는 사람들을 복지제도에 의존하게 만든다'와 같은 한국 정치권에서도 심심찮게 등장하는 여러 슬로건들을 여러 연구 자료들로 반박합니다. 



노조를 와해한다고 해서 기업의 성장하지 않았으며, 실업 수당 때문에 노동자들이 집에 지낸다고 말할 수 있는 증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최근 "실업급여를 받은 여자들이 샤넬 선글라스를 사며 즐긴다"와 같은 서울지방노동청 실업급여 담당 공무원의 모든 혐오의 온상과도 같은 발언과도 맥이 이어집니다. 실제로 실업급여의 부정수급자 3명 중 2명은 남성이며 여성보다 2배가 많고, 연령대는 50대(33.4%)가 가장 높습니다. 



이와 유사하게 저자는 "많은 미국인이 여전히 흑인들은 노동윤리가 약하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155)고 하며 인종에 따른 부정적 편견과 "정부의 빈민 구호책이 오히려 부정적인 영향을 낳는다"(155)는 의견을 이야기합니다. 정부의 빈민 구호책이 부정적이라는 근거는 사실 아주 오랜 기간 동안 "개인적인 진술과 상식에만 의존"(155)해 있었으며, "증거가 필요 없는 주제"(156)라는 답변으로 갈음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와 다릅니다. 저소득층 가정일수록 정부 보조금을 생필품 구입에 지출한 비중이 높았고, 오히려 알코올음료와 마약류에 고소득층이 더 많은 비용을 지출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연구에서도 실업수당 때문에 노동자들이 집에서 지내는 거라는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중략)


어째서 우리는 다른 이유들을 찾을 수 있는데도 높은 실업률을 정부 원조 탓으로 돌리는 서사를 그렇게 순순히 받아들였던걸까? 어째서 우리는 사람들이 아프다가 죽고 싶지 않아서 일터로 안 돌아가는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걸까? 일자리가 처음부터 너무 형편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성추행과 학대에 신물이 났기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학교가(150) 문을 닫은 상황에서 자녀들을 믿고 맡길 데가 없기 때문일 수도 있는데. 많은 미국인이 일각에서 기대하는 것만큼 빠르게 일터로 복귀하지 않는 이유를 물었을 때 어째서 우리의 대답은 그 사람들이 주당 300달러를 더 받으니까였을까?

《미국이 만든 가난》, 151쪽



이러한 복지 의존성은 실제 데이터와 다른 상상 속에서 생성된 영향입니다. 저자는 오히려 이 지점에서 복지 수당을 받을 수 있지만 제도 등이 복잡하여 수급하지 않는 복지 회피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데즈먼드의 주장은 아무리 부자가 세금을 더 많이 낸다고 해도, 부자가 더 많은 복지 혜택을 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 정부는 도움이 가장 적게 필요한 사람들에게 가장 많은 도움을 준다. 이것은 우리 사회복지의 진정한 속성이며, 우리의 은행 잔고와 빈곤 수준뿐만 아니라, 우리의 심리 상태와 시민정신에도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다.


《미국이 만든 가난》, 166쪽



실제의 사실과 전혀 다른 거짓을 상식으로 믿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주당 300달러를 더 받으니까"라는 대답이었을까요?



가끔 사람들은 정말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은 것만 같습니다. 사람들은 사실 믿고만 싶어 합니다.



저자가 빈민 종식을 위해 주장하는 바는 '담장 허물기'입니다.



중산층 백인들은 자신들의 동네에 상징적인 담장(비싼 임대료, 높은 등록금의 사립학교 등)을 이용하여 저소득층 가정과 보이지 않는 담장을 쌓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경제적 불평등이 덜한 환경에서 자라난 저소득층 아이들이 더 높은 사회 진출률을 보인다는 통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는 "학교와 지역사회에서 한곳에 몰려 있는 빈곤층을 분산시켜 다른 계층과 통합을"(265) 이뤄야 합니다. 



분리주의에 반대하는 이러한 빈부 통합은 확실히 빈곤한 가정을 '덜 가난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저자는 "결핍 눈속임(scarcity diversion)"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부자들에게 세금 감세를 주지 않고 세금을 모두 걷는 대신, 우리에게는 빈민을 모두 구제할 예산이 없으며 지금이 최선이라고 주장하는 상황을 나타내는 용어입니다.



빈민들은 착취하는 빈민가의 임대업에서 우리나라의 쪽방촌이 떠오릅니다. 결국은 빈민들은 평당 더 높은 월세를 지출하고, 신용등급이 낮고 인종적 문제, 불안정한 직장 등을 이유로 대출을 승인해주지 않아 주택 매매도 남들보다 더 어렵습니다. 최저 임금을 주는 일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공간이 계급화되고 공공이 슬럼화되며, 가난은 그들에게 기회의 상품을 얻을 모든 수단을 박탈해나갑니다. 



 빈민과의 연대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금융 활동과 구매 활동을 한다는 것은 우리가 더 많은 돈을 내게 된다는 의미일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비용들을 인정함으로써 우리가 공모자였음을 인정한다. 우리가 서로를 등쳐 먹고 강탈할 때 우리 자신의 일부 역시 빼앗긴다. 바른 일을 하는 것은 종종 대단히 불편하고, 시간이 많이 걸리고, 심지어는 돈도 많이 드는 과정이다. 나는 시도하고, 실패하고, 다시 시도한다. 하지만 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해 그 정도 대가는 치러도 되지 않을까?


 《미국이 만든 가난》, 260-261쪽



결핍은 자연스러운 상태가 아닙니다. 그리고 빈곤을 해결하기 위해 "사회 안전망의 균형을 재조정" 하는 과정에서 분명 우리는 불편하고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이렇게 빈곤 종식의 해결책은 쉽고 따뜻하고 행복하지 않다고 반복해서 집어주는 점이 좋았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가난으로 이득을 취해온 우리가 그 불편함에 불평할 수 있을까요? 그 정도의 염치를 갖추고 살아야 하지 않나, 생각을 합니다. 물론 저자가 이러한 개인적 감정의 이야기를 하지는 않고 "사회 비용"에 대하여 논하긴 합니다. 



최근에 자신이 정의한 정상성이 당연한 것이라고 여기면서 정상성에 어긋하는 비정상성에 가해지는 제제가 정당하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을 본 적 있습니다. 그가 하는 주장은 이것입니다. "나는 정상이니까, 불편한 그들이 정상에 맞추어야 하지 않나? 왜 내가 그들을 배려해야 하나?"  이때 심장을 꽉 조이는 기분이, 데즈먼드의 "하지만 내가 그 논쟁에서 복장이 터지는 부분은 공정한 조세 집행이 얼마나 어려운지가 아니라, 터무니없는 조세의 허점을 막아서 빈곤을 타파할 수 있는 충분한 돈을 얼마나 쉽게 마련할 수 있는지다."(215)라는 문장을 읽으면서 다시 떠오릅니다.



그는 이 책을 읽고도 왜 내가 가난의 문제라는 거야, 가난한 사람들이 조금 더 노력해서 빈곤을 벗어나야지,라고 생각할 것임을 떠올려 봅니다. 



"부정의는 창궐하게 내버려두면 경계를 따라 기어다니며 시험해 보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자기 손아귀에 들어오지 않은 삶까지 위협한다."(290)



빈곤이 철폐된 삶에서 번영이란, 어떤 의미로 다가오게 될까요? 



단지 가난이 사라졌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존재할 것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Q. '빈곤을 종식시켜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대로 빈곤이 철폐된 사회를 상상해 보려고 합니다. 노조 파업, 노동자 산재 등의 뉴스가 등장하지 않는 세상을 상상해 볼까요? 그런 사회가 도래하게 됐을 때, 저녁 뉴스에서는 첫 번째 속보로 어떤 소식을 정하게 될까요?



A.

북서퍼 질문에 대한 답변을 고민해 보았는데, 어렵네요. 부정의가 창궐하지 않고 모두 빈곤에 잡아먹히지 않는 삶이라면, 반지하가 존재하지 않고 5평도 안 되는 작은 서울의 원룸 월세가 70만 원이 아닌 세상이겠죠? 



빈곤 철폐가 만인의 풍요를 의미하지 않기에, 빈곤 철폐라고 하면 일단은 르 귄의 《빼앗긴 자들》 공산주의 공동체 행성 아나레스가 생각나기도 하고, 마지 피어시의 《시간의 경계에 선 여자》 로시엔테의 2137년 미래 공동체가 떠오릅니다. (이때 코니는 이 책에서 말하는 빈곤층 라틴계 여성으로, 받을 수 있는 모든 억압을 당하는 인물입니다. 책을 읽으면서 코니 생각이 참 많이 납니다.) 계속해서 유토피아 공동체가 생각나네요. 길먼의 《허랜드》, 러스 <우리 떠난 자들이 돌아올 때>와 같은,,,



솔직히 지금과 크게 달라질 것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전히 빈곤층이 "열심히 노력하는 노동자의 세금을 빼앗아 간다"라고 주장하는 야당의 주장이 허구한 날 속보를 장식하게 되지 않을까, 싶네요. 진보는 언제나 뒷걸음질 칠 수 있다는 것,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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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덱스 - 지성사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 색인의 역사 Philos 시리즈 24
데니스 덩컨 지음, 배동근 옮김 / arte(아르테)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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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덱스'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때는, 저는 책을 읽을 때 가끔 붙이는 스티커 인덱스가 떠올랐고, "지성사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 색인의 역사"라는 문안을 보고서야 아! 찾아보기! 를 떠올렸습니다. 


사실 처음 책을 받아들고 든 생각은 "색인에 대해서 할 말이 이렇게도 많은가?"였는데, 이 책은 장장 488쪽의 볼륨을 자랑합니다. 저자 덩킨을 따라 고대의 석판에서부터 구글 검색창까지 이르다 보면 생각보다 방대한 색인의 역사와 현재의 우리가 가진 문제점들이 맞닿아 있다는 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인덱스》는 사실 표지가 귀여운데, 보통 3단으로 색인을 구성하기 때문에 삼단의 밑줄이 있고, 한 쪽 방향을 가리키는 손이 하나 있습니다. 옆에 두면 당장이라도 옆의 책장을 열라는 압박으로도 느껴지는데요, 일단 표지 은색 홀로그램 박이 눈길을 끌어 잡습니다. 



고백하자면, 사실 저는 책에서 색인을 눈여겨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책에서 등장하는 '주제 색인'이라는 개념이 무엇인지 원고 안에서 이해하는 데 시간을 많이 썼고,  주제 색인에 대한 비판점을 읽으면서 계속 용어 색인의 개념으로 읽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번역서 아닌 한국어로 쓰인 책에서 색인을 자주 찾아보진 못한 것 같습니다. 제가 안 찾아본 것일수도……)




초반에 용어 개념을 정리하는 데 시간을 들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용어 색인은 "빈틈 없이 원문에 충성스러운 색인"(26쪽)을 말하고


주제 색인은 "원문과 원문을 읽으려는 독자 사이에서 그 충성도를 적절히 배분하는 색인"(같은 쪽)입니다.



예시가 없으면 색인을 F3 찾기 기능과 같이 사용하는 저로서는, 주제 색인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저자도 이 사실을 잘 알았는지 바로 뒤에 "극단적인 주제 색인"(35쪽)의 예시를 들어줍니다. 



'원고 작성자인 프리먼 교수에게 노골적인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색인 작성자 라운드가 쓴 '프리먼 교수' 항목의 주제 색인'입니다.


프리먼 교수: 케임브리지 카운티의 토지심사과정(Inq. Com. Cant.)에 대해서 모르다 4쪽; 노샘프턴셔주 지세 명무 무시하다 149쪽; 지세 심사 과정 혼동하다 149쪽; 프리먼이 가한 경멸에 찬 비판 150, 337, 385, 434, 454쪽; 정작 프리먼 자신이 오류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151쪽; (《인덱스》, 33쪽)



용어 색인은 F3 기능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반면, 주제 색인은 이와 전혀 달리 색인 작성자가 원고를 읽고 그 내용에 대하여 자신의 언어로 쓴 요약이 첨부된다는 점, 그것으로 색인에 작성자의 개성이 돋보인다는 점을 가장 큰 차이로 생각하고 이 책을 시작하면 좋습니다. 이걸 전제로 하고 가야 이후에 색인에 대한 비판 지점을 매끄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책에 이런 악의적인 색인이 첨부된다고 생각하면, 


남일이니까 재밌지, 내 책이라면? 하는 상상을 참을 수 없습니다. (이는 이후 5장의 주제로 다뤄집니다)


-


《인덱스》는 총 9장으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이는 대략 시간 순서에 기반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선형적으로 풀어가는 책은 아닙니다.  ('옮긴이의 말'에서 시간 흐름에 맞춰 색인 역사를 간략히 요약해두니 헷갈린다면 그 부분을 먼저 읽는 것도 좋습니다. 하지만 각 장의 주제가 확실해서, 꼭 선형적인 흐름일 필요는 없다고 느껴지긴 합니다.)



1장 서열화의 취지 : 알파벳순 배열에서는 "만약 색인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이 신기하고도 불가사의한 알파벳 자모순 배열 방식의 의미를 진정 알고 싶다면 우리는 선사시대까지 파고들어야 한다"(43쪽)는 저자의 무시무시한 발언이 등장합니다. 우리가 색인을 떠올렸을 때 누구나 ㄱㄴㄷ순으로 배열된 단어의 목록을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중세는 알파벳순 배열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것을 이성에 반하는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47쪽)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ㄱ 혹은 a로 시작하는 단어가 앞에 올 것이라고 기대하지만, 사실 이러한 배열은 "이미 배열되어 있는 것의 본질적인 특성을 무시하고 내용보다는 형태에, 의미보다는 철자에 초점을 맞추어 완전히 임의적인 우연에 내맡기는 것"(52쪽)입니다. 



현대인에게 너무 익숙하고 효율적으로 여겨지는 정렬이 사실은 우연과 임의성을 기반으로 한 탈맥락화된 무의미한 배열이라는 시각이 상당히 새로웠습니다 



특히 이러한 배열(답관체, 애너그렘 등등의 언어 제약적 글쓰기 방식)을 낮잡아 보는 시각이 이따금 존재했다고도 합니다. 



2장 색인의 탄생 : 설교와 교육은 13세기 이미 코텍스와 알파벳이 상용화된 시기를 설명합니다. 이 시기는 대학교육기관이 신설되며 "강의와 설교의 능력을 요구하는 세태"(86쪽)을 맞이하여, "새롭고 효율적인 -책을 이용하는-독서법에 대한 요구가 증가"(87쪽)합니다. 



이때 그들이 사용하는 책은 성경이었고, 그로스테스트는 성경에 대한 주제 색인 작성을 시도합니다. "개념에 대한 색인이므로, 필요하다면 동의어가 쓰일 여지도 충분"(87쪽)한 것입니다. 



저자는 '노아의 방주'에 대한 예시를 들며, 이 에피소드(?)를 용어 색인이라면 "단지 분석 대상인 텍스트에 등장하는 단어"(88쪽)으로 파악하며 '노아의 방주'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색인을 작성하겠지만, 주제 색인이라면 이는 "용서, 분노 혹은 홍수에 관한 것"(88쪽)에 대한 항목에 '노아의 방주'가 포함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때 용어 색인-주제 색인의 대표주자는 셍셰르의 휴와 그로스테스트입니다. 그리고 이들의 색인 작성의 목표는 '풍부한 인용으로 비로소 만들어지는 멋진 설교와 강의'입니다. 



2장에서 재밌는 개념은 '디스팅티오'였는데 이는 "기억을 돕는 상기물"(106쪽)이며  설교에서 옆길로 새지 않고 "내용의 정연함과 해박함을 보장해 줄 뿐 아니라 설교자가 즉석에서 임기응변을 발휘할 제공(109쪽)합니다. 이러한 디스팅티오를 개별적으로 작성하여 사용했다는 지점도 흥미롭지만, 이제 이 '디스팅티오'가 당시의 독서법에 끼친 영향을 분석하는 부분도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그러나 디스팅티오는 독서에 관해 더 많은 어떤 것을 암묵적으로 말해 준다. 그것은 우리가 다른 책들도 또한 발췌된 형태로 읽을 것을 요구한다. 평생을 끈기 있게 성경을 파고들면서 읽고 또 읽고 하던 수도원식 읽기의 의도적인 단조로움과는 도무지 다른 차원에서 생겨난, 각각의 디스팅티오는 그것의 사용자들로 하여금 근거가 되는 자료를 찾아 일련의 탐색-시편의 한 구절 또는 복음서 중 어떤 비유 또는 창세기의 한 순간 등등-을 하도록 만든다. (《인덱스》, 109쪽) 



자 이제 색인에 대한 비판점이 어떤 형식으로 제시될지 조금은 감이 오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러한 시각은 무언가 익숙합니다. 어떠한 책을 읽지 않고, 누군가가 길게 작성한 요약 및 서평을 읽었다면, 과연 그것을 책을 읽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도 비슷한 결을 공유하는 듯합니다. 


이어 3장 그것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쪽 번호가 만든 기적에서는, 쪽 번호 등장 이전의 색인의 위치 표시자에 대하여 이야기를 합니다. 


"중세의 색인 작성자들은 (...) 검색하기에도 좋고 작가나 편집자가 미리 책을 분할했거나 말았거나 상관없이 기능할 수 있는 것"(142-143쪽)을 찾아 나서는데, 장이나 문장의 첫 부분을 적어 두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필사자들이 베껴 쓰는 동안 쪽 번호까지 동일하게 베껴 쓰지 못한 까닭에 필사본의 경우 엉터리 색인이 등장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러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의 발명으로 책이 동일한 형태로 대량생산되고 나서야, 필사본에 따라 단어가 수록된 쪽수가 달라지지 않게 되자 드디어 색인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이때의 색인은 "수고를 통해 부가가치를 보탠 것"(162쪽)라는 마케팅적 가치까지 얻습니다. ㅋㅋㅋㅋ



4장 지도냐 실제 영토냐 : 시험대에 오른 색인에서는 위에 은근히 등장했던 당시 색인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에 대하여 다룹니다. 


말하자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내려가는 데 걸리는 시간과 책 속에서 어떤 것을 검색하는 데 걸리는 시간의 상대적인 차이와 그런 두 가지 행위 사이에 존재하는 위계성이 보여주는 부조화에 관한 이야기다. 책을 읽기도 전에 색인을 들춰 보면 바람직하지 않은가? 정말 그런가? (《인덱스》, 182쪽)



현재는 색인이 원고의 맨 뒤에 수록되는 것과는 달리 예전에 색인은 책의 앞쪽에 위치했다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색인은 "상기를 위한 것인가 시식을 위한 것인가."(197쪽) 그리고 어떻게 색인을 사용하는 것이 더 좋은 방식인가?라는 질문이 등장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장과 8장을 가장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예전에는 색인을 책의 앞부분에 실었다고 합니다. 게스너는 "지나치게 색인에 의존하는 (...) 그리고 책 저자가 의도한 순서대로 철저하게 텍스트 전체를 읽지 않는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170, 게스너 재인용)이 "(...) 책이 오용되면서 그것의 가치와 유용성이 불가피하게 훼손되고 쪼그라"(171, 게스너 재인용)들게 되지 않을까 하며 게으르게 색인을 이용하는 이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봅니다. 


그러나 여기서 색인은 "우리가 이미 숙지하고 있는 것에 대한 기억을 돕는 상기물(aidememoire)이라기보다는 책 속으로 진입하기 위한 한 가지 방편으로 사용될 가능성"(194쪽)이라고 이야기하며, 이 색인을 먼저 찾아보는 행위를 우리가 구글에 책을 검색해 보는 행위와 등치시킵니다. 그러므로 색인을 먼저 보는 것은 "시식"이며 좋거나 나쁜 방식이라기 보다 색인을 사용하는 새로운 독서 방식이 됩니다.


이러한 종류의 비판의 시작점을 고대 그리스로 거슬러 올라가 찾을 수 있는데, "고대 그리스에서는 문자가 사람들의 기억력을 녹슬게 하고 우리의 주목하는 힘을 무력화하여 망각 증세를 일으킨다고 비판"(206쪽)하며 "문자는 구체화하지 못한 지식의 전시물"(같은 쪽)이라며 사람들이 문자를 사용하는 것을 비판적으로 바라봅니다. 



결국 이런 새로운 도구를 이용할 때 드는 두려움은 인간 보편의 정서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말은 오히려 가벼운 것이고, 글이 깊게 남을 만큼 밀도 높은 것이라고 항상 생각해왔는데, 말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은 결국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요즘 와서야 조금씩 느끼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장에서 색인만 찾아보는 '몰지각한 사람'들에 아마도 책들을 발췌독 하는 내가 포함될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대해 요즘 고민이 참 많은데, 다시금 고민에 무게를 얹어주는 게스너의 글입니다.



5장 “토리당 녀석에게는 절대 내 『영국사』 색인을 맡기지 마오!” : 색인을 둘러싼 논쟁은 색인이 이렇게까지 활용될 수 있구나,라는 다른 의미의 감탄을 이끌어내는 일화들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영국의 토리당과 휘그당이 서로의 저작에, 서로를 비난하며 풍자하는 색인을 달아 이른바 색인 전투를 벌입니다. 



6장 소설에 색인 달기 : 작명은 늘 그렇듯 어려운 기술이다에서는 소설에 색인을 다는 새로운 시도를 한 작품들을 소개하고 7장 모든 지식으로 향하는 열쇠 : 보편 색인에서는 모든 영역에 대한 색인, "모든 지식에 대한 포괄적인 해답"(329쪽)을 만들고자 한 색인 협회와 실제로 정기간행물의 주제와 목록을 정리하여 발간한 어느 가난한 사서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알파벳순으로 분류해 놓기만 하면 가치 있는 자료가 됩니다. 보편 색인이 목표로 하는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서로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곳에 배열할 수 있고, 쓸모없었을 많은 것들이 그 순간 안식처를 구하게 도비니다. 영원히 증식하면서도 결코 완성되지는 못할 운명임에도 불구하고 색인은 모두에게 유용할 것입니다"(334, 휘틀리 재인용)라고 색인 협회장 휘틀리는 말합니다.



영원히 증식하면서도 결코 완성되지는 못할 운명, 보편 색인, 뭔가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그리고 어쩌면 빅데이터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인공지능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완성'이라는 목표 없이 끊임없이 증식만 한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8장 루드밀라와 로타리아 : 검색 시대의 책 색인에는 더 이상 책을 읽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감에 대하여 "소크라테스가 파이드로스에게 쓰기는 부주의함과 '참된 지혜가 아니라 지혜처럼 보이는 것'을 부를 뿐이라며 던진 경고와도 궤를 같이한다."(354-355쪽)이라고 말합니다. 



기계식 읽기[로타리아가 컴퓨터 프로그램에 소설을 넣으면 사용빈도 순대로 일련의 단어 목록이 산출되며, 로타리아는 이 목록을 보는 것이 독서라고 한다] 방식을 독서라고 하지 않으려면, 우리는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까요?



저자는 "기계-혹은 알파벳순 단어 목록-가 책의 내용에 대해서 아무것도 말해 줄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게 독서 경험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354쪽)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인터넷 검색창에 단어를 검색하면 검색 엔진의 수많은 색인 목록에서 읽어 드려 배열하여 결과물을 내보이는 시대에서 색인은 어떤 형태를 띠게 될까요?



여기서 저자는 트위터(현 X)의 해시태그(#)에 대하여 말합니다. 해시태그는 "즉석에서 마련된(ad hoc) 언어적 이정표"(386쪽)로 "태그를 다는 사람은 (...) 생각을 정리하고 그런 생각을 반영하는 개념을 다변하는 최선의 표제어를 선택"(388쪽) 한다는 점에서 색인 작성자를 닮았다고 말합니다. 


-


고대 그리스부터 해시태그까지 이어지는 색인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문자와 코덱스 형식으로 제본된 현대 책의 형태, 물성, 그리고 독서 행위까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현재 제가 발췌독을 하면서, 글에 여러 저작들을 인용하는 경우가 많아 출간된 책의 색인을 잘 활용(게스너의 말에 따르면 '상기') 하는데, 항상 책을 제대로 읽은 건지, 내가 일부를 오독하고 인용하는 것은 아닌지 고민할 때가 많은데, 이 책에서 주요 주제로 등장하지는 않지만 그 의문점을 다시 상기시키게 하는 지점이 꽤 많았습니다.


색인만 읽고 책을 읽었다고 하는 이들은, 왕궁의 화장실만 가보고 왕궁 전체를 설명해 주겠다고 나서는 꼴이라는 문장을 읽고, 아 이것은 나에게 하는 말일까…



예전의 지식인들이 색인에 대해서 말했다면, 최근에는 '요약본'에 대해서 비슷한 논지의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약 글을 읽었을 때, 우리는 책은 아예 읽지 않은 것보다는 더 많이 알고, 그렇다고 책을 읽은 것에 비해서는 모르는 이 애매한 상태. 



그러나 이 상태 자체를 고정적인 '결말'로 생각하지 않는 태도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그러한 '시식'을 통해서 실제 책을 접할 동기를 얻게 되기도 하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한 답을 '맞다 틀리다'가 아니라, 맞지도 틀리지도 않다고 답변해야 하지 않은가, 생각이 듭니다.



주제가 새로웠고, 후반부로 갈수록 저자의 글쓰기에 조금 익숙해지는 감이 들어서 더 쉽게 읽히는 책이라


조금 두께가 있긴 하지만 다들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니, 


관심있으시면 한 번 시도 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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