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장류,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 - 자연의 재발명 Philos Feminism 4
도나 J. 해러웨이 지음, 황희선.임옥희 옮김 / arte(아르테)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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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부수는 해러웨이, 《영장류,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


오늘의 책은 도나 J. 해러웨이의 《영장류,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입니다. 


이 책은 해러웨이의 1978년에서 1989년까지 쓴 논문 10편을 모은 책입니다. 해러웨이의 가장 유명한 글인 <사이보그 선언문> 또한 이 책의 3부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해러웨이는 사이보그라는 개념을 여성의 정체성에 대한 은유로 사용합니다. 특히 해러웨이가 집중하는 부분은 '경계'인데, 기존 이분법적으로 나뉘어 위계 관계를 해체하자는 주장이 주를 이룹니다. 


1부에 수록된 논문은 "원숭이와 유인원을 연구하는 과학에 내포된 생명정치적 서사에 주목"(11쪽)하고 있습니다. 이때 기존의 생물학, 동물사회학의 이론을 살피고 이때의 과학이 

어떻게 부계를 계승하며 이 과학 연구들과 당시의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만날 수 있는 지점에 대한 깊은 고찰이 담겨 있습니다. 


2부에서는 본격적으로 페미니즘 서사를 통하여 남성 중심적인 생물학에서 어떻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가에 관한 글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해러웨이는 여성들의 '이종어(heteroglossia)'에 대하여 말하는데, 


"인간에게 언어는 실재를 생성하는 데 주요한 기능"을 하며 "권력의 맥락 속에서 실재를 생성"(142쪽)한다고 말합니다. 이름짓기는 언제나 권력의 특권이었기에, 이에 반대하는 페미니스트들은 이름짓기로 권력을 행사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그렇다면 세상을 전혀 인식할 수 없겠죠. 


저는 개인적으로 '4장.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생물학 이론의 창세기'가 재밌었는데, 이 논문의 도입부에 해러웨이 특유의 여러 학문을 꿰뚫어 사회주의 페미니즘적 입장을 주창하는 논리구조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고 느꼈습니다. 


특히 길버트와 구바의 《다락방의 미친 여자》의 '밀턴의 딸들'(에밀리 브론테와 메리 셸리)을 가져와서 '밀턴의 과학적 딸들, 밀턴의 페미니스트 딸들'이라고 풍자해서 쓰는데, 유쾌함에 웃음이 났습니다. 


"발화의 조건(terms of speech)을 설정하고자 경합하는 수사학적인 전략은 자연과학 분야의 페미니스트 투쟁의 핵심이다"(130쪽)라는 주제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여성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 "아버지에게 받은 언어"를 사용해야 하는데, 우리의 시작은 이 언어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라는 점, 솔직히 여성주의적으로 글을 쓰려고 노력하는 처지에서 깊이 공감했씁니다. 


3부에서는 '타자'의 존재를 정의하고 그들을 재현하려는 논문들이 실려 있습니다. "나선의 춤에 갇혀 있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지만, 나는 여신보다는 사이보그가 되겠다."(328쪽)는, 해러웨이 이름만큼이나 유명한 문장으로 끝나는 <사이보그 선언문>이 이 3부에 해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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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러웨이를 읽기 전과 후의 글쓰기에 스스로는 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해러웨이가 끊임없이 말한 '사이보그, 키메라가 사용하는 이종어'라는 개념으로 왜 내가 사회에 대해 말하려고 하면, 사용할 언어가 없는지를 이해했고, 저는 이제 해러웨이의 단어와 문장, 논리를 인용하지 않고서는 글을 쓰지 못하는 인간이 되었습니다. 


특히, 이분법의 경계를 사이보그라는 은유로 해체하고, 그 개념을 '느슨한 그물망'으로 엮어내 타자의 존재를 포용하는 하나의 단어로 만들었다는 점과, 이런 이론의 기반이 해러웨이가 가진 생물학, 영장류학과 같은 언제나 남성중심적이던 생물학계(특히 진화 이론에 있어서 남성 중심 시각이 주류라고 생각하는데)의 사실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점이 벼락 맞은 것처럼 눈을 뜨게 해줍니다. 특히 일원론적 합일이 아닌, 해체 자체를 긍정하는 시각도 제게는 큰 새로움으로 다가왔습니다. 이질적인 이종어의 집합으로서의 사회. 상상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해러웨이가 새로운 사이보그의 신화로 제시하는 페미니즘 SF들도, 계보와 신화의 필요성을 절절히 느꼈던 저한테 정말 새로운 세상을 열어 준 열쇠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은 해러웨이가 많이 인용한 마지 피어시 《시간의 경계에 선 여자》를 읽고 있습니다. (솔직히 러스, 《여성인간》 번역 아직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2023년의 세상은 SF 앞에 성큼 다가왔습니다. 그렇다면 사이보그로서의 내가 이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하기 위해서는 해러웨이가 필수적이지 않을까, 이미 모두가 사이보그가 되어버린 현재에 계보 없는 이종어를 사용하는 사이보그이자 키메라이자 잡종이자 지구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바로 《영장류,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다! 해러웨이다! 라고! 주장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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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틸라이프
가이 대븐포트 지음, 박상미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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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포스팅입니다*

안녕하세요, 오늘 N의 서재로 가져온 책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번역서가 출간되는 (미국 문화계에서 저명한) 작가 가이 대븐포트가 쓰고 박상미 번역가가 옮긴 《스틸라이프》입니다.

"이 책은 예술과 문학에 나타난 정물 전반에 대해 다루는데, 정물이라는 소재가 전달할 수 있는 가장 깊은 곳까지, 가장 넓게 탐색한다."(12쪽)라는 박상미 번역가의 말에 따라, 《스틸라이프》는 정물에 대하여 전방위적 예술 분야를 다루는 에세이입니다. 것도 가벼운 에세이가 아닌 저자의 가늠할 수 없는 지적 깊이를 느낄 수 있는 에세이고, 고대 그리스 철학자부터 인상주의 화가, 중세 시대의 지리학자까지 여러 인물과 그들의 저작들을 이용하여 저자가 집중하는 '정물'에 대해 이야기를 합니다.

처음 정물에 대한 책이라는 말만 듣고 사실 감이 잘 잡히지 않았는데, 책을 다 읽고 나니 왜 이 책을 그렇게 설명할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가 갑니다.

천으로 싸바리 된 양장본이지만 판형이 작고, 200쪽 내외 얇은 볼륨을 자랑합니다. 그렇다고 이 책이 쉽게 읽히느냐? 책의 볼륨과 텍스트의 무게는 절대 비례하지 않습니다. 한병철 책 이후로 항상 느낍니다.

《스틸라이프》는 다음과 같이 총 4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 여름 과일 광주리

2. 운명의 두상

3. 사과와 배

4. 토리노의 형이상학적 빛


1장 '여름 과일 광주리' 하면 보통 우리가 정물화하면 처음 생각나는 오브제이기도 할 텐데요. 대븐포트는 1장에서 정물의 기원과 의미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정물still life'라는 이름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는 대상"(25쪽)으로 "음식을 구하고 음식을 먹기까지의 시간", "음식이 어딘가에 놓이는 시간"(같은 쪽)을 2차원의 캔버스에 재현한 그림이 정물화라고 이해했습니다.

조리가 되지 않은 달걀, 바로 먹어도 되는 사과, 포도, 막 잡아온 물고기, 와인과 같이 식사 재료에서부터 재료를 가공한 식품이 우리의 식탁에 놓이고 '식사'라는 문명인으로서 의례를 거행하게 됩니다.

이러한 정물화의 시발점을 대븐포트는 이집트와 이스라엘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집트의 시발점은 무덤 벽화의 음식 그림이며, 이스라엘의 시발점은 선지자 아모스가 하나님에게 받은 계시 중 등장하는 '여름 과일 광주리'입니다. 이때 우리가 상상하는 여름 과일로 가득 찬 광주리로 풍요가 아닌 종말을 예고합니다. 계절이 돌아오면 풍성해지는 여름 과일 광주리는 언젠가 비워지며 동시에 언젠가는 다시 채워진다는 풍요와 종말의 의미를 동시에 띄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걸 이제 현실의 사물이 캔버스에 정물로 재현되며 새로운 의미를 얻게 되는 새로운 구조(체계가 더 맞는 표현일까요)가 생성되었다,라는 게 정물화의 기원이라고 이해했습니다. 이집트의 경우 사물을 재현한 회화에 고대인들이 제의적 의미를 부여하게 되었기 때문이고, 이스라엘의 경우에는 하나의 정물에 역설된 의미가 부여되었기 때문에, 재현 혹은 기록을 넘어선 예술의 분야로 넘어올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사실 1장에서 레비스트로스의 신화학과 휴 밀러라는 지리학자의 이야기가 흥미롭습니다.

레비스트로스는 '식사'라는 행위를 "야생에서 문명으로, 자연에서 문화로"(37-38쪽)의 이행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정물화는 문명이라는 기표를 보여주는 예술이란 이야기라고 이해했습니다.

모네의 <점심 식사>에서 포도와 와인, 어머니와 아들, 반짇고리와 옷과 같이 정물화 내부에 "파생의 관계"를 설정하였다는 해석이 정말 새로웠습니다. 예술작품을 이런 식으로 해석하는 방식은 저는 처음 접해보았습니다.

지리학자 휴 밀러가 배를 타고 선교를 위한 항해를 할 때, 밀러가 묘사한 선실의 오브제들로 당시 선박을 탄 선원들의 생각과 밀러가 강조하고자 하는 의미를 읽어내는 저자의 통찰에 일단은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홀다인의 그림에서처럼, 책과 지도와 과학 기구 들이 핵심적인 요소들이다. 헨리의 주석 성경과 칼뱅의 『기독교 강요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s』가 항해 지도와 망원경과 함께 놓인 것은 분명 밀러가 상징적으로 의도한 것이다.

(중략)

하나님을 찾아가는 영혼의 순례의 상징물과 거친 바다에서 섬을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파하는 여행자들을 연결시키고 싶었다면, 뒤러라도 상징물들을 그런 식으로 배열했을 것이다."

55쪽

이렇게 정물화를 너머 선 소설 속 묘사된 오브제의 배열을 정물로 인식하며 대븐포트는 오브제를 하나의 상징으로 해석합니다. 이 시선을 구조주의 비평으로 바라보아도 되는지, 잘 모르겠지만 궁금해졌습니다.

(사실 이 책을 아주 후하게 생각해도 20프로 정도 이해한 것 같습니다.)

대븐포트는 회화, 사진과 같은 이미지 중심 예술뿐 아니라 시나 소설같이 텍스트 중심의 예술같이 전혀 다른 매체를 이용한 예술작품의 오브제/소재/정물(사실 이 세 단어의 차이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같은 뜻으로 쓰는 건지, 써도 되는지, 혹은 전혀 다른 의미로 제가 오용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같이 해석하는데, 이를 번역가는 "콜라주적 에세이"라는 단어로 표현합니다. 대학교에서 강의를 하다가도 비누 이야기가 나오면 비누의 기원부터 고대, 중세 시대의 위생관념의 역사까지 술술 읊으며 수다(의 수준이 아니지만)를 떨다가 수업으로 돌아갔다는, 저자의 방대한 지식에 그저 압도당할 뿐입니다.


2장 '운명의 두상'에서는 도입으로 '셜록 홈즈'라는 도시 설화folklore를 이야기합니다. "텍스트에서 빠르게 분산(또는 확산)되어 다른 작가들도 이를 차용"(63쪽)하는 존재임과 동시에, 텍스트를 벗어나 "대중의 상상 속에 위치"(같은 쪽)하는 존재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 도입에서는 셜록 홈즈가 '아서 도일의 소설 속 주인공'에서 벗어났다, 텍스트 밖에 위치하게 되었다는 점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여기서 아서 도일의 소설은 '원천'이나 캐해를 위한 "고전적인 레퍼런스"가 됩니다. ㅋㅋㅋㅋ좀 너무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머릿속에 베이커 가 221번지 B호의 인테리어가 주는 이미지는 아마 비슷할 것입니다. 셜록 홈즈의 집이라고 했을 때 그 집을 구성하는 오브제들은 '과학 실험 도구가 놓인 탁자, 바이올린, 범죄 기사가 실린 스크랩북, 파이프' 그리고 2장의 주제가 되는 '홈즈 자신의 흉상'입니다.

대븐포트는 탁자에 놓인 흉상의 이미지를 통해, 우리를 셜록 홈즈에서부터 "피카소와 브라크의 전형적인 큐비즘 정물화의 구성"(65쪽)에서 "중세 전통의 성 제롬의 서재"(같은 쪽)까지도 갈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때부터 진짜 무서워졌습니다. 어디까지 가겠다는 것입니까.

사실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부서졌다'라는 특성입니다. "지난 백 년 동안 고대 미술은 박물관과 미술관에서 산산조각 부서진 모습"(67쪽)이었으며 "부서진 파편은 바로 과거라는 조건 자체"(같은 쪽)입니다. 고대의 토르소는 얼굴, 팔, 다리가 없는 몸통뿐입니다.

여기서는 '너무 흔해진 흉상'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는데, 너무 흔한 '나폴레옹 흉상'은 상징성이 고갈되며 의례의 장소에서 신성함을 주던 예술품에서 집안의 장식품으로 흉상을 부순 범인의 편집증적 성향을 나타내는 소설적 장치로 사용됩니다.

벤야민은 이에 대하여 "실내(그러니까 가구를 들여놓은 실내)는 우주일 뿐 아니라 사적인 개인이라는 사건이다. 거주한다는 것은 흔적을 남긴다는 것이다"라며 탐정 소설이 19세기 실내의 산물"(72쪽)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소설 속 인물의 특성을 드러내기 위하여 그 인물이 거주하는 실내의 사물을 하나하나 읊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어 2장에서는 에드거 엘런 포의 '몸이 없는 머리만 있는' 상태의 인물, 이어 참수당한 신화에서 몸과 머리를 드디어 동시에 갖춘 사람 레오포드 블룸(제임스 조이의 1922년 소설 『율리시스Ulysses』의 주인공)을 만들어냅니다.

참수의 신화를 "세례 요한의 컬트"(102쪽)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무척 신랄합니다.

"두상이 인류의 운명의 상징으로 출현한 것은 동물의 형상을 통해서"(103쪽)였는데, 이는 능력이 극대화되기를 원하는 신체 부위를 동물의 형태로 변환하는 것(머리가 새의 형상이라던가)으로 나타났습니다.

언제나 메멘토 모리를 떠오르게 하는 몸 없는 잘린 머리는 우리의 전통이며, 이 "정물이 지속되는 한, 두상이 우리의 운명"(107쪽)이라고 말합니다.


3장 '사과와 배'는 언제나 짝으로 등장하는 이 두 정물의 의미 즉, 사과는 추락fall이며 배는 구원redemption의 상징으로 활용되었다고 말합니다. 이는 성경에서 라틴어로 사과와 선악과의 스펠링이 유사하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그렇게 의미가 굳어진 정물은 세잔의 작품에 와서 에로스, 사랑, 평온함, 따스함의 의미를 함께 지니게 되었으며, 오히려 배는 정치인의 풍자화에 유사한 형태가 활용되는 작품을 소개합니다. 프랑스어 속어에서 "배poire는 잘 속는 얼간이나 멍청한 사람을 뜻한다"고(138쪽) 합니다.

3장에서 제일 재미있는 건 사과-배의 대립되는 도식, 정반대되는 의미를 얻은 기표이기도 하지만 사실 '양파'입니다.

'반 고흐의 정물과 상징' 꼭지에서 고흐의 <양파가 있는 정물>(1889)을 설명하는데, 여기서 양파라는 기표에 대한 해석이 무척 흥미롭습니다.

고흐는 정물화를 "일종의 시각적 일기"(153쪽)으로 사용했는데, <양파가 있는 정물>은 "질병과 건강의 기록"(같은 쪽)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대븐포트는 정물로 캔버스에 재현된 양파를 읽어내는 방법을 독자에게 묻습니다. "[양파가 환자에게 좋은 음식이기 때문에] 그 그림을 식단을 더 잘하겠다는 약속으로 읽을 것인가, 아니면 더 심오한 전환으로 읽을 것인가?"(155쪽)

"양파와 담배에는 날것부터 익힌 것까지라는 레비스트로스의 코드가 있"고 "담배와 배는 수확 후 익으며, 둘 다 부드럽게 숙성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고 "양파는 음식인 동시에 조미료이며, 이 그림에서는 약으로 기능"(같은 쪽) 한다고 합니다.

대븐포트는 사과-배 도식을 이용하여 양파의 어원이 결합union이라는 것에서 양파를 "구원의 의미를 가진 배의 유사체이자 사과와 배가 결합된 존재로서, 그림 속 모든 것을 하나의 복합적인 상징으로 엮은 역할"(157쪽)이라고 해석해 내고 맙니다.


4장 '토리노의 형이상학적 빛'은 니체와 데 키리코에 대한 장입니다.

니체는 토리노에서 생의 마지막을 보냈으며, 이곳에서 영원 회귀라는 주요 사상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 '되풀이되는 운명'은 "키리코의 회화 작업의 영감"(166쪽)이 되었습니다.

기욤 아폴리네르가 키리코의 작품을 발견하고 초현실주의라는 말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초현실주의 작품들은 사실 아주 익숙한 정물들은 새로운 구도와 배경에 배치하며 이성을 넘어선 무의식의 영역을 탐구하고자 한 사조라는 사실이 불현듯 떠올랐습니다.

여기서 에니그마(수수께끼)를 일으키게 하는 세계를 의도적으로 구성하여 '낯설게 하기'를 전개한다는 지점에서 저는 다시금 SF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큰 관련은 없어 보입니다. 일단을 서사를 표현하는 기법과 사물을 재구성하며 재현하는 이미지 매체를 이용한다는 점에서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되는 듯합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개념은 같은데,

"진실을 보는 한 가지 방법은 대상을 전에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처럼, 익숙한 것을 에니그마처럼 보는 것"(171쪽)입니다. 이러한 방법론을 정말 좋아합니다.

그리고 4장 후반부에 레비스트로스의 식사와 관련한 해석이 등장하는데, 이 부분도 눈여겨 읽었습니다.

종교적 세계관 속의 인간은 예측 불가능한 신들에게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라는 대가로 규칙성(이때 규칙성이란 낮과 밤, 달과 년, 수명, 임신과 월경 기간과 같은 주기성입니다) 을 얻게 되는데 레비스트로스는 이 시초를 식사로 봅니다.

음식을 하기 위하여 재료를 준비하고, 다듬고, 요리를 하고, 식탁에 차리고, 정해진 식기를 통해서 약속된 시간에 초대된 사람들과 함께 음식을 섭취하는 행위. 이 규칙성을 기록하는 것이 정물화다!


제가 《스틸라이프》를 읽으면서 집중했던 부분은 정물/정물화가 가지고 있는 역설입니다. 그래서 제목도 "변화하는 부동(不動) 움직이는 정물"로 정해보았습니다.

움직이지 않는다, 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는 단어인 정물은 고대에서 현대까지 역사 속에서 인간, 사회, 문명에 의해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동시에 정물은 깨지고 재구성되고, 수확되고 썩어가며 계속해서 자신의 속성을 바꿉니다.

하지만 중세의 정물화나 현대의 정물화나 다른 회화 기법이나 사조마다 작품 별로 큰 차이를 보이는 반면, 정물화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더욱이 우리는 정물을 변화하지 않는 것, 그대로인 것으로 여기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대븐포트는 4장의 마지막에서 이렇게 언급합니다.


샤르댕의 조화로움에서 세잔으로, 세잔에서 브라크와 피카소로, 그리고 그들에서 데 키리코의 기하학적 에니그마로 이동하듯, 아모스의 비전은 여름 과일 광주리에서 신이 다림줄로 벽을 만드는 비전으로 이동한다. 정물화는 이런 비전들 중 둘 중 하나의 상징일 듯하다. 하나는 가을의 수확을 꿈꾸고, 우리가 거기까지 관리해 가는 과정과 우리와 자연과의 관계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 다른 하나는 자연이라는 기반에 따른 건축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 시대에 따라 그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변한다는 사실에 관한 것이다

210쪽

그러므로 정물화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정물에 대한 변화 가능성을 이해하고, 그것을 끊임없이 좇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쉬운 책이 아니라는 것이고,

그러나 미학 비평에 대한 배경지식이 쌓이면 꼭 다시 읽어보고 싶다는 책이라는 사실입니다.

다음번에 읽을 때는, 어디까지 이해할 수 있을까 기대되는 마음을 품고,

오늘의 포스팅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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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7
조지 오웰 지음, 김승욱 옮김 / 문예출판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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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의 《1984》는 아주 오래전부터 누군가 좋아하는 소설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항상 답하던 소설 중 하나였다.

다시 들춰본 지는 오래되었으나, 이 책이 지닌 철학, 디스토피아는 이렇게 만들어야 한다는 근간은 항상 되새김질하고 있다고 자부했건만 역시 책을 다시 정독하는 일은 느낌이 많이 다르다.

이번 문예출판사에서 새로 번역판을 출간한다는 소식에 급히 서평단을 신청했고, 20대 초반 한창 좋아하던 이 소설은 새로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었다.

조지 오웰이 버마에서 식민지 경찰로 근무한 약 5년의 기간이 《버마 시절》으로 이어져 이후 그의 정치적 함의가 가득한 글쓰기를 시작하게 한다.

이번 문예출판사의 《1984》에는 서문으로 <1944년 노엘 윌멧에게 보낸 편지>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는 오웰이 장편소설로써 드러내려 했던 파시즘화에 대한 두려움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2 더하기 2는 5다.

이 명제는 사상범으로 사랑부에 잡혀 간 윈스턴은 끝까지 이해할 수 없다고 믿었다. 진실은, 사실은 2 더하기 2는 4이지 5가 될 수 없다.

오웰은 이러한 객관적인 명제가 전체주의의 압박 속에 어떻게 무너지는지, 진실을 좇는 이는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 자체를 바꿔버리는 권력의 억압을 암시하며 반복적으로 경고한다.

서문의 편지글에서부터 소설 후반부까지 반복하여 등장하는 "2 + 2 =5"라는 명제를 윈스턴에게 납득시키는 과정은 지극히 폭력적이다. 그를 꽉 묶은 채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가하고 흐려지는 의식을 붙잡고는 반복해서 묻는다.

이렇게 제3자의 입장에서 어린아이가 보아도 지적할 수 있을만한 커다란 논리 구멍은 절대적으로 옳은 위치의 빅브라더, 즉 당의 입장은 온몸의 척추가 끊길 것만 같은 고통 아래 점차 없었던 것이 되어간다.

이는 신어로 '이중사고'라고 일컬어진다. 빅브라더의 연설에 맞게 과거를 고치는 일을 하는 윈스턴이 속해있는 진실부. 이 외부 당원들은 일하는 내내 당의 거짓을 목격하지만 모두 잊고는 당이 하는 말을 전적으로 믿는다.

상반되는 두 가지 진실을 동시에 믿는 것, 그리고 아주 의식적으로 각각의 진실을 필요한 순간만 꺼내 다시 무의식 속으로 집어넣는 것.

전쟁은 평화, 무지는 힘, 자유는 예속.

윈스턴의 동료는 신어를 편찬하는 일을 맡았다. 좋다의 반대말을 '안좋다'로, 강조는 '플러스안좋다' 더욱더 강조하려면 '이중플러스안좋다'.

신어를 사용하는 이들은 '자유'라는 단어를 알지 못해 애초에 반역 자체가 불가할 것이라는 상상. 유일하게 단어의 수를 줄이는 편찬 과정을 겪는 신어는 언어로 인간의 사고까지 장악할 수 있다는, 오브라이언의 "우리가 모든 기억을 통제합니다"(p.328)의 말과 일맥상통한다.

밖으로 보이는 행동이 아닌 생각을, 상상을, 의식을 넘어선 무의식을 우리도 모르는 새에 통제당할까 두려워한 오웰이 지금의 시대를 보면 무어라 말할까?

전체주의 독재체제 대신, 치솟는 능력주의를 삼킨 신자유주의가 마치 인간은 인간이 아닌 하나의 물질, 상품화하는 시대를.

스탈린 체제하처럼 밤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는 사람들이 아닌, SNS에서 끌려와 모든 사람들에게 신상이 공개되고 악플과 사이버불링에 시달리며 결국 목숨을 끊게 되는 사람들을.

투표권이 박탈당해 스스로 지도자를 뽑지 못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손으로 차별과 혐오를 가중시키는 지도자를 선택하고 '자신을 차별하는 정치인'의 지지자임을 선언하는 모습.

그가 그린 《1984》의 모습과 얼마나 다르다고 말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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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하고 무해하게, 팔리는 콘텐츠를 만듭니다
옥성아.채한얼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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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위즈덤 하우스에서 나온 《다정하고 무해하게, 팔리는 콘텐츠를 만듭니다》라는 책을 가져왔습니다. 알라딘에서 경제경영으로 분류되어 있는데, 읽으면서 에세이에 더 가까운 책이라고 생각했어요.

표지에 '취향의 시대가 선택한 콘텐츠 성공의 비밀'이라는 문구도 보고, 콘텐츠 기획 및 제작에 관한 전문적인 이야기를 하는 책인가 하고 읽었는데, 전문적인 내용보다는 제작자의 개인적인 경험들을 엮어 쓴 부분이 더 많더라고요. 그래서 더 에세이 같고, 그만큼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제외하고 총 6개의 큰 목차로 구성되어 있고, 이 목차에서 저자들이 <고막 메이트>라는 디지털 콘텐츠를 기획하고 제작하며 어떤 철학을 중점으로 잡았는지 키워드를 뽑아 설명을 합니다.

"진정성, 관계성, 공감, 협동"이라는 네 가지 제작 이론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콘텐츠 <고막 메이트>는 "시청자와의 끈끈한 유대감을 바탕으로 위로와 공감의 세계관을 확장해나가는 '빛이나'는 콘텐츠로 성장"(p.203)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고막 메이트>는 SBS 디지털 미디어 스튜디오 '모비딕'과 KT의 OTT 서비스 'seezn'의 오리지널 콘텐츠로, 공동 작업으로 제작되어 유튜브와 seezn에 스트리밍 되고 있는 디지털 웹 예능입니다. '뮤직 토크쇼'라는 형식으로 시청자들의 사연을 받아 네 명의 MC와 게스트가 위로와 공감을 건네고, 그에 맞는 노래를 불러주는 새로운 형식의 예능인데, 이 책을 읽고 찾아보니까 캡처 본으로 SNS에서 유명했던 짤의 출처가 <고막 메이트>이더라고요.

개인적으로 옥 피디님이 이러한 콘텐츠를 제작하게 된 계기가 엄청 눈에 들어왔어요. 요즘, 검경 수사권 때문에 살짝 이슈에서는 벗어났지만 장애인 이동권 보장에 관한 이슈가 떠오르는 현실을 떠오르게도 해줬고요. 대중교통 이용이 불편해 부모님의 차를 타고 등하교 하던 한예종 동기와, 2001년 오이도역 장애인 리프트 추락 사고를 떠올린 그는 다큐멘터리 수업에서 장애인 이동권에 관한 다큐를 만들기로 하고 휠체어를 타고 신이문역 종각역까지 가기로 합니다. 이러한 경험으로 "내가 피디가 된다면,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이해하며 위로와 공감을 전하는 콘텐츠"를 만들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개인적인 경험이 진하게 와닿았던 글이었던 것 같아요.

원래 유튜브나 디지털 플랫폼에서 성공 요인을 떠올리라고 하면, 일단 '자극적'이며 '흥미 위주'의 '짧은' 콘텐츠를 이야기하잖아요. 그러나 현재는 고자극과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콘텐츠에 대한 피로도가 상승하고 있을 시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요즘 인스타, 페이스북 같은 실시간으로 소통하며 소식을 듣는 사진 기반 SNS에서 네이버 블로그 같은 조금은 느리게 흘러가는 글자 기반 SNS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는 기사를 봤습니다.

그 틈을 잘 겨냥한 콘텐츠인가? 했는데, 제작 전부터 콘텐츠에 대한 철학이 확실하게 정해진 채로 들어갔다는 점에서 꽤 놀라웠어요.

그리고 첫 번째 챕터에서 올레 5G를 광고하기 위한 콘텐츠로 기술적인 측면만 강조하는 콘텐츠 기획은 아예 들어 엎고 나서야 <고막 메이트>를 만들게 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시청자가 보고 싶어 할까?"라는 기본적인 질문을 제작자가 어떻게 잊을 수 있느냐, 저는 사실 처음에 이렇게 생각했는데 사실 기획 단계에서 가장 잊히기 쉬운 문제더라고요. 가장 근본적이기 때문인가 봐요.

이 책에서도 기획 단계에서 아주 세부적으로 특정 지은 가상의 소비자를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웹 예능 <고막 메이트>의 가상의 시청자는 "입사 3년 차 27세 직장인 여성"(p.55)입니다.

출판 기획에 관한 강의를 들었을 때, 편집자 선생님들도 항상 기획 단계에서 아주 구체적인 타깃층을 정하고 한 명의 가상 인물을 창조해서 그 인물의 취향에 맞게 만들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런 인물이 기획 의도가 끝까지 흐트러지지 않게 도와준다고 하더라고요.

이번 책으로 교차 검증된 이야기라 고개를 한 번 더 끄덕여 봅니다.

저자들이 <고막 메이트>라는 프로그램으로 쟁취하고자 하는 가치가 구체적으로 존재했기에, 이들은 자극의 대명사인 '연애, 섹스, 술'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프로그램의 지향점을 잃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런 부분을 읽었을 때, 저는 사실 어느 정도 이러한 소재를 제외하는 것도 가치를 관통시키는 방법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예를 들어 SNS에서 한참 '섹스로봇을 소재로 하는 SF소설은 더 이상 쓰지 말자'라는 명제로 여러 의견이 등장했을 때. 저는 당연히 '이제 그 짓거리 좀 그만하자'라는 생각을 했는데, 그 반대의 의견들을 들어보니 무조건적으로 소재를 제한하는 것이 과연 옳다고 말할 수 있는 일인가?라는 생각을 처음 해봤어요.

순한 맛, 자극적이지 않고 무해한 콘텐츠이므로 '자극적인 소재'를 아예 다루지 않겠다.

라는 주장에도 당연히 동조를 하지만, 그럼에도 다뤄지는 '방법'에 대해 논의가 급선무가 아닌가라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해주었습니다.

예를 들어 SF 소설에서 등장하는 섹스 로봇이라는 소재는 일단 자극적이며, 대부분의 작가들은 혐오를 표현하기 위해 이 소재를 사용하고, 혐오적으로 이용되며 독자에게 불쾌감만을 불러 일으킬 방식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자체적으로 금지하는 것이 맞지 않느냐라고 주장합니다. 혐오 없이 다룰 수 있느냐의 문제는 이제 각각 작가들의 역량 문제가 되겠죠.

이 소재로 다뤄질 수 있는 가치가 존재하는가? (제 의견은 이곳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사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지점은 소재의 사용여부보다는, 그 소재를 다루는 방향의 문제잖아요. 사실은 그 지점을 전혀 관과하게 된 논쟁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무해한 위로와 공감의 콘텐츠에서 다루는 자극적인 소재는 다루는 방식을 수정하며 성공적으로 다룰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어두운 주제는 어떻게 될까?

웹예능에서 다루지 않는 어렵고 무거운 소재를 꺼리지 않고 끄집는 이 제작자들은 무슨 생각이었을까. 라는 생각으로 두 번째 챕터를 읽었습니다.

[이 거대한 위로 퍼레이드 앞에서]에서는 '친족 성폭행'에 관한 이야기를 다룹니다. 웹예능, 그것도 뮤직 토크쇼에서 전혀 다루지 않을 듯한 이 주제를 다루는 방식은?

저자들은 광범위한 대중들에게 와닿는 콘텐츠인 만큼 다양한 대중들로부터 쏟아지는 유대를 기반으로 한 '위로'와 '공감'에 초점을 맞춥니다. 아마도 실시간으로 사연을 보낸 시청자도 대중 반응을 확인할 수 있는 현실인만큼 제작자들도 걱정을 안고 공개했다고 하는 에피소드인데, 그럼에도 사실 이 반응은 시청자 개개인에게 내제된 윤리의식만 믿어야 하는 일이잖아요.

인터넷상에서 퍼져가는 속도와 방향성을 생각한다면, 저는 무언가 아직도 무섭다고 생각될 거 같기는 하더라고요. 아무리 제작자, 편집자들이 프로그램 가치에 맞는 편집방향으로 콘텐츠를 생산해 제공했다고 해도, 그 영상 자체가 다시 조작되어 유포되기 너무 쉬운 세상이니까요..

그럼에도 저자들은 이 '위로 퍼레이드'를 아주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 이후 세 번째 챕터에서는 이제 가장 중요한, 소비자층을 중심으로 하는 이야기를 합니다. 흔히 말하는 '팬덤 형성'의 3단계를 이야기합니다.

1. 이름 부르기

2. 유대감 쌓기

3. 선순환 커뮤니티 만들기

이렇게 세 단계로 구성되는대요. 역시 이름의 힘이 중요하죠. 개인들에게 소속감을 줄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

이렇게 긍정적인 방향으로 유대감을 형성하게 되면, 당연히 그들이 점유한 커뮤니티 속의 관계들도 선순환이 되겠죠? 게다가 충성도 높은 팬덤은 자발적으로 마케터의 역할, 확성기의 역할을 해주니, 제작에서 팬덤형성이 아무래도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또한 다음 챕터에서 공동 제작사들과의 협력과 협동을 중시해야한다는, 기본적인 이야기를 이어 합니다.

콘텐츠 제작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얻기 보다는, <고막 메이트>라는 프로그램의 기획 의도와 이를 실현하기 위한 실무자들의 노력과 철학들을 엿볼 수 있는 책이었어요.

어렵지 않기에, 콘텐츠 제작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분들이 처음 읽기 좋은 책이고, 또 마지막 챕터의 마지막 꼭지에 실질적인 콘텐츠 제작 팁도 포함되어 있기에 한 번 읽기 좋은 책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또 이 책을 읽고 <고막 메이트>를 찾아 보기도 했고요.

참, 콘텐츠 만들기도 어려운데

성공하기는 더더욱 어려운 이 시대에 나는 또 어떤 콘텐츠들을 골라서 보는지 조금 되짚어 보는 책이었던 거 같아요.

오늘 포스팅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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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연대기 - 시간 여행자를 위한 SF 랜드마크
셰릴 빈트.마크 볼드 지음, 송경아 옮김 / 허블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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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작년 서울국제도서전에서, 허블 매대 앞에서 들었다 놨다 몇 번을 고심하다 결국 내려놓고 나왔던 바로 그 책, 《SF 연대기》를 가져왔습니다. 사실 그때 구매했으면 인포그래픽 포스터 받을 수 있었는데, 지금 돌이켜 보면 왜 안 샀는지 스스로도 의문입니다. 다시 포스터를 보니까 미친 듯이 가지고 싶어졌습니다. 제 방 벽에 붙여 놓으면 아주 완벽할 거 같아요.



책 표지에 대표적 일만 한 소설을 '랜드마크'로 만들어서 바둑판으로 진열을 해놨어요. 2015년도에 제미신 <부서진 대지> 3부작이 있더라고요! 그리고 각 장 도비라도 일러스트로 표현된, 출판사 소개에서 '랜드마크'라고 부르는 그림들이 실려 있어요. 보고 소설 찾는 재미도 있고요.

책이 거의 500쪽이고 양장본임에도 불구하고 내지 중량이 가벼워서 (제본 방식과 쪽수에 비해) 크게 무겁지 않았어요. 사실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들어보고 무거우면 E-book으로 구매하거나 빌리는 편인데, 이 정도는 가방에 넣어서 다닐만하다. 그리고 책의 컨셉이, '시간 여행자를 위한 SF 랜드마크'인데 표지도 보드게임 판처럼 되어 있고, 굿즈인 포스터도 놀이공원 일러스트같이 되어 있는데, 컨셉이랑 정말 잘 어울리는 거 같아요.

컨셉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SF 장르를 통틀어 역사와 정의를 설명하는 종류의 책을 몇 권 찾아봤었어요. 그런데 보통 시간의 흐름에 따라 구체적으로 정리된 책은 없더라고요. SF라는 장르의 정의가 아주 독특하다 보니 시간의 순서에 구애받기보다는 장르적 특성에 대해 구조화해서 설명하는 책이나, 혹은 전체적인 장르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SF소설, SF영화와 같이 매체에 국한시킨 책이 대부분이었는데, 이 책은 목차 자체도 연도별로 구분되어 있고 소설에 국한되지 않고 영화나 장르 자체의 시대별 특징에 대해 서술하는 책이어서, 아마도 SF에 조금 관심이 있고 조금 찾아봤다. 그런데 옛날 SF소설들은 어땠는지 궁금하네? 하시는 분들이 입문서로 읽기 좋은 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형식적인 측면으로도 정말 친절한 책인데, 장이 끝날 때마다 한 꼭지로 '결론'을 넣어서 다시 그 장의 내용을 정리해 줍니다. 장 시작할 때에도 제목 하단에 장에 대한 짧은 설명이 들어가 있고요. 이렇게 개론적으로 흐름을 훑거나 예시를 많이 드는 책들의 경우 읽다 보면 앞의 내용이 휘발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책은 이 두 장치로 지식을 최대한 머릿속에 오래 보존할 수 있게 해준답니다! 그래서 시대의 흐름을 한눈에 훑고 싶다 하시는 분들께도 강력하게 추천드립니다.

2019년도에 아르테에서 나온 《에스에프 에스프리》가 'SF 입문서'라는 이름을 가지고 나왔는데, 저는 아무래도 입문서라면 《SF 연대기》 쪽이 더 가깝지 않나 싶습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이제 조금 더 SF가 가진, 소설 속에서 특징적으로 사용되는 기법들을 알고 싶다 하시는 분들이 두 번째로 《에스에프 에스프리》를 읽으면 완벽하지 않을까!

책의 목차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습니다.

서문

1장. SF의 정의

2장. 건스백 이전의 과학소설

3장. 확산: 1930년대

4장. 캠벨의 문맥 ‘혁명’: 1940년대

5장. 냉전, 소비지상주의, 사이버네틱스: 1950년대

6장. 새로운 현실, 새로운 소설: 1960년대와 1970년대

7장. 새로운 목소리, 새로운 관심: 1960년대와 1970년대

8장. 새로운 정치, 새로운 기술: 1980년대와 1990년대

9장. 제국과 확장: 1980년대와 1990년대

10장. 여러 가지 미래가 가능하다

SF의 정의에서 제가 제일 애용하는 문장은. "SF는 SF라고 불리는 것들의 총칭이다."인데, 이 말은 즉 장르의 정의가 생겨나는 것보다 장르로 명명되는 것이 먼저이며 이후에 장르로 명명되는 작품들을 갈무리하였을 때 정의가 만들어진다는, 방향성을 강조합니다. 또 장르 자체를 기본 SF장르 팬층을 끌어들이기 위한 마케팅적인 측면으로 접근하기도 하고요. 그런데 왜인지 SF라는 장르의 정의 기준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미꾸라지처럼 장르의 틈을 빠져나가는 작품들이 꼭 존재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결국은 SF는 느슨한 그물망 같은 범주가 되어야 하는 것 같아요.

SF의 정통성을 찾는다면 미국 잡지와 페이퍼백으로 돌아가기도 하고, "SF의 기원을 고딕소설 속에서"찾기도 합니다. SF이냐 아니냐의 투쟁은 사실 과학소설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고 나서 지금까지, 학자들이 얼마나 SF의 학문적이고 고정된 정의를 가지고 싶어하였는지의 열망의 크기에 관계없이, 여전히! 여전한! 논쟁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원래 다른 장르소설도 이런지, 이제는 궁금해집니다. 고딕소설은 무언가 추리소설의 원형에 더 가깝거나, 오히려 호러와 비슷할 것 같기도 하고요.

유난히도 정의에 관해 논쟁이 많으니만큼 그 이유가 현재 시공간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어서,라는 생각이 들어요.

게다가 과학소설. 사이언스 픽션은 다른 장르들보다 더욱더! 시대의 변화에 민감한 장르이잖아요. 주제가 과학이니만큼, 기술의 발전이라는 측면만으로도 소설의 흐름이나 경향성이 변하는 것은 물론, '사변 소설'또한 SF 장르 중 하나로 포함되니만큼 과학기술보다 기술로 인한 사회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는 장르가 속해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전에 《멋진 신세계》가 SF이다 아니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는데, 저는 사변소설도 SF니까 멋진 신세계도 SF에 포함된다고 주장한 반면, 상대방은 그건 SF가 아니라 문학이라고 이야기를 해서 상당히 황당했었어요. 그러나 이 책에서는 《멋진 신세계》를 '"1930년대 가장 유명한 비非펄프픽션"(p.145)이라고 소개를 하고 있어서 속이 뻥 뚫렸습니다.

사실 SF소설이냐 아니냐, 질문을 가장 많이 받는 유형이 3장 '확산:1930년대'의 '과학과 사회 비판'이 아닐까 싶었어요, "펄프픽션 바깥에서도 작가들은 인종주의, 우생학과 파시즘의 발흥과 함께 기술적 변화가 일으킬 사회적·문화적 결과에 관심을 가졌"(p,144)으며 아마도 이 부분에서 고전적인 하드 SF만을 인정하느냐 아니느냐의 길이 갈리지 않았나 싶습니다.

사실 저는 이 책에서 연도의 흐름에 따른 장르를 설명하는 것도 좋았는데, 이 시대의 사회문화적 배경을 토대로 소설의 경향성을 짚어주는 부분들이 가장 재밌었어요. 그리고 그 파트가 이 책만의 차별점이라고도 생각했고요.

'5장 냉전, 소비지상주의, 사이버네틱스 : 1950년대'와 ''8장 새로운 정치, 새로운 기술 : 1980년대와 1990년대'를 비교하자면,

5장에서는 냉전, 핵, 공산주의, 대기업과 같은 주제에 대한 불안감이 사회를 강타했으며 새로운 로봇공학 기술이 인간 사회 조직에 사용될 수 있음을 시사하면서 "사회를 통제하는 사이버네틱스 시스템에 대한 불안"(p.244)과 가능성을 함께 고려한 소설들이 등장했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8장에서는 소련이 붕괴하며 냉전이 종식되고 신자유주의의 대두로 우익 세력 중심에서 보수주의적 하드 SF가 유행하기 시작했다고 당시 사회의 변화에 맞춰 소설의 특성을 설명합니다. 또한 이 시기에 유전공학 관련 기술들이 연구되고 발표되었고, 과학기술의 발전이 급속화되며 SF가 일부 마니아층이 향유하는 문화에서 대중적으로 유행하였으며, 광범위한 소비자층이 유입됨에 따라 상업적 추동력을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상업적 추동력은 사실 현재까지 쭉 이어지고 있는 것 같죠.

이러한 사회 변화에 아주 빠르게 움직이는 SF는 시대의 부름을 받고 페미니즘 제2의 물결이 흐르던 1960년대부터 SF소설이라는 매체로 페미니즘적 유토피아 통찰을 이루기도 합니다. 이 파트에서 조애나 러스, 마거릿 애트우드 등의 여러 여성 작가들의 작품들도 함께 소개합니다.

작년에 조에나 러스가 1970~80년대에 쓴 비평문을 엮은 《SF는 어떻게 여자들의 놀이터가 되었나》를 정말 재밌게 읽었어요. 이 파트 재밌게 읽은 분들, 유토피아/디스토피아 파트 재밌게 읽으신 분들은 저 책도 꼭꼭 읽어보시면 좋겠어요.

조애나 러스의 소설을 읽고 싶은데, 한국에서 번역된 책이 없더라고요? 제가 못 찾는 건지, 정말 한 권도 없는 건지. 그래서 가장 유명하고 인용이 많이 된 조애나 러스의 《여성 인간》의 줄거리를 거의 논문에서만 확인할 수 있었는데, 원문으로라도 나중에 꼭 읽고 싶습니다.

그리고 마거릿 애트우드 《시녀 이야기》에 대한 언급도 있는데, 마거릿 애트우드는 본인 에세이에서 자신은 SF를 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사변소설은 아직도 SF장르에 속하는가 아닌가에 대해서 다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애트우드는 사변소설을 SF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구요

그 외로도 환경, 인종, 다문화 공동체, 젠더 등과 같은 당시 사회적으로 논의되는 가치들을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당시 소설들을 보여줍니다. 특히 건스백, 켐밸 시절 SF들은 백인남성우월주의와 제국주의의 사상을 정당화하는 소설들이 주류라는 비판도 받아왔잖아요. 그러나 사회의 변화에 따라 장르는 시대가 원하는 소수자들을 위한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어 10장에서 시대적 변화를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다양한 주제의 SF를 소개합니다.

"SF가 동시대 문화에 녹아들고, SF를 순수하고 독립된 것으로 지키던 경계들이 무너지고" 있다는 비평가들의 의견이 있으나, 역시 현재의 SF를 정의 내리거나 분류하는 것 또한 불완전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동시대 SF에서 관할할 수 있는 경향의 윤곽"을 그리는 작품들을 소개하며 책을 마무리합니다.

여기에는 과학적 특이점을 지난 소설, 양자물리학을 반영한 소설, 대체 역사물, 더 이상 백인 중심적이지 않은 '지구화된 SF'소설들이 포함됩니다.

이렇게 현재까지 이어지는 경향성을 주욱 읽으니, 꼭 한국 SF의 흐름에 대해서도 고찰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전에 <창작과 비평>에서 배명훈 작가님이 인터뷰 한 글을 봤는데, "SF는 나와 세계가 관계 맺는 이야기"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저는 지금까지 들은 정의 중에 사실 이 이야기가 가장 마음에 들어요. 그리고 판타지와 구분할 때 SF는 돌이킬 수 없는 이야기이고, 판타지는 일상에서 비일상의 스토리가 생겨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려는 이야기라고요.

제가 여러 책들을 읽고 항상 하는 생각은,

SF라는 것은 사실 '앞으로 향하고자 하는 움직임' 그 자체에 큰 무게를 두고 있지 않나? 그 작품이 나아가는 방향성도, 그리고 앞을 향해 달려가는 속도 또한 작품마다 각기 다르지만, '앞으로 가고 있다'라는 모양새 자체를 공유하는 장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그 동작성을 절대 돌이킬 수 없다는 명제를 포함해서요.

움직임의 속도, 움직이는 정도, 움직여온 기간, 결국 향하는 방향성이 제멋대로인 장르라서 언제나 새롭고 다른 것이 매력이고, 현재 한국 SF들은 저 여러 가지 변수들 중 몇몇의 변수를 공유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고요. 역행할 수 없는 움직임이기에 항상 새로움을 좇고, 그렇기에 현실을 사는 나의 피부에 맞닿아 변화하는 이 장르를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사실 현재 한국 SF, 혹은 한국 장르소설은 일차적으로 IP 활용도가 높은 소설들이 잘 팔리고 유행하는 것 같기도 하구요. 날이 선 혐오의 시대이니 만큼 따뜻한 연대와 아가페적 사랑을 가진 이야기들이 사랑받는 것 같기도 하고, 이 책의 저자들이 한국 SF의 경향성을 어떻게 설명할지 궁금합니다.

언급한 다른 책들도 꼭! 한 번씩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SF를 좋아하신다면 후회하지 않을 《SF연대기 : 시간 여행자를 위한 SF 랜드마크》 꼭 읽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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