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틸라이프
가이 대븐포트 지음, 박상미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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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포스팅입니다*

안녕하세요, 오늘 N의 서재로 가져온 책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번역서가 출간되는 (미국 문화계에서 저명한) 작가 가이 대븐포트가 쓰고 박상미 번역가가 옮긴 《스틸라이프》입니다.

"이 책은 예술과 문학에 나타난 정물 전반에 대해 다루는데, 정물이라는 소재가 전달할 수 있는 가장 깊은 곳까지, 가장 넓게 탐색한다."(12쪽)라는 박상미 번역가의 말에 따라, 《스틸라이프》는 정물에 대하여 전방위적 예술 분야를 다루는 에세이입니다. 것도 가벼운 에세이가 아닌 저자의 가늠할 수 없는 지적 깊이를 느낄 수 있는 에세이고, 고대 그리스 철학자부터 인상주의 화가, 중세 시대의 지리학자까지 여러 인물과 그들의 저작들을 이용하여 저자가 집중하는 '정물'에 대해 이야기를 합니다.

처음 정물에 대한 책이라는 말만 듣고 사실 감이 잘 잡히지 않았는데, 책을 다 읽고 나니 왜 이 책을 그렇게 설명할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가 갑니다.

천으로 싸바리 된 양장본이지만 판형이 작고, 200쪽 내외 얇은 볼륨을 자랑합니다. 그렇다고 이 책이 쉽게 읽히느냐? 책의 볼륨과 텍스트의 무게는 절대 비례하지 않습니다. 한병철 책 이후로 항상 느낍니다.

《스틸라이프》는 다음과 같이 총 4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 여름 과일 광주리

2. 운명의 두상

3. 사과와 배

4. 토리노의 형이상학적 빛


1장 '여름 과일 광주리' 하면 보통 우리가 정물화하면 처음 생각나는 오브제이기도 할 텐데요. 대븐포트는 1장에서 정물의 기원과 의미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정물still life'라는 이름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는 대상"(25쪽)으로 "음식을 구하고 음식을 먹기까지의 시간", "음식이 어딘가에 놓이는 시간"(같은 쪽)을 2차원의 캔버스에 재현한 그림이 정물화라고 이해했습니다.

조리가 되지 않은 달걀, 바로 먹어도 되는 사과, 포도, 막 잡아온 물고기, 와인과 같이 식사 재료에서부터 재료를 가공한 식품이 우리의 식탁에 놓이고 '식사'라는 문명인으로서 의례를 거행하게 됩니다.

이러한 정물화의 시발점을 대븐포트는 이집트와 이스라엘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집트의 시발점은 무덤 벽화의 음식 그림이며, 이스라엘의 시발점은 선지자 아모스가 하나님에게 받은 계시 중 등장하는 '여름 과일 광주리'입니다. 이때 우리가 상상하는 여름 과일로 가득 찬 광주리로 풍요가 아닌 종말을 예고합니다. 계절이 돌아오면 풍성해지는 여름 과일 광주리는 언젠가 비워지며 동시에 언젠가는 다시 채워진다는 풍요와 종말의 의미를 동시에 띄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걸 이제 현실의 사물이 캔버스에 정물로 재현되며 새로운 의미를 얻게 되는 새로운 구조(체계가 더 맞는 표현일까요)가 생성되었다,라는 게 정물화의 기원이라고 이해했습니다. 이집트의 경우 사물을 재현한 회화에 고대인들이 제의적 의미를 부여하게 되었기 때문이고, 이스라엘의 경우에는 하나의 정물에 역설된 의미가 부여되었기 때문에, 재현 혹은 기록을 넘어선 예술의 분야로 넘어올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사실 1장에서 레비스트로스의 신화학과 휴 밀러라는 지리학자의 이야기가 흥미롭습니다.

레비스트로스는 '식사'라는 행위를 "야생에서 문명으로, 자연에서 문화로"(37-38쪽)의 이행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정물화는 문명이라는 기표를 보여주는 예술이란 이야기라고 이해했습니다.

모네의 <점심 식사>에서 포도와 와인, 어머니와 아들, 반짇고리와 옷과 같이 정물화 내부에 "파생의 관계"를 설정하였다는 해석이 정말 새로웠습니다. 예술작품을 이런 식으로 해석하는 방식은 저는 처음 접해보았습니다.

지리학자 휴 밀러가 배를 타고 선교를 위한 항해를 할 때, 밀러가 묘사한 선실의 오브제들로 당시 선박을 탄 선원들의 생각과 밀러가 강조하고자 하는 의미를 읽어내는 저자의 통찰에 일단은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홀다인의 그림에서처럼, 책과 지도와 과학 기구 들이 핵심적인 요소들이다. 헨리의 주석 성경과 칼뱅의 『기독교 강요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s』가 항해 지도와 망원경과 함께 놓인 것은 분명 밀러가 상징적으로 의도한 것이다.

(중략)

하나님을 찾아가는 영혼의 순례의 상징물과 거친 바다에서 섬을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파하는 여행자들을 연결시키고 싶었다면, 뒤러라도 상징물들을 그런 식으로 배열했을 것이다."

55쪽

이렇게 정물화를 너머 선 소설 속 묘사된 오브제의 배열을 정물로 인식하며 대븐포트는 오브제를 하나의 상징으로 해석합니다. 이 시선을 구조주의 비평으로 바라보아도 되는지, 잘 모르겠지만 궁금해졌습니다.

(사실 이 책을 아주 후하게 생각해도 20프로 정도 이해한 것 같습니다.)

대븐포트는 회화, 사진과 같은 이미지 중심 예술뿐 아니라 시나 소설같이 텍스트 중심의 예술같이 전혀 다른 매체를 이용한 예술작품의 오브제/소재/정물(사실 이 세 단어의 차이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같은 뜻으로 쓰는 건지, 써도 되는지, 혹은 전혀 다른 의미로 제가 오용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같이 해석하는데, 이를 번역가는 "콜라주적 에세이"라는 단어로 표현합니다. 대학교에서 강의를 하다가도 비누 이야기가 나오면 비누의 기원부터 고대, 중세 시대의 위생관념의 역사까지 술술 읊으며 수다(의 수준이 아니지만)를 떨다가 수업으로 돌아갔다는, 저자의 방대한 지식에 그저 압도당할 뿐입니다.


2장 '운명의 두상'에서는 도입으로 '셜록 홈즈'라는 도시 설화folklore를 이야기합니다. "텍스트에서 빠르게 분산(또는 확산)되어 다른 작가들도 이를 차용"(63쪽)하는 존재임과 동시에, 텍스트를 벗어나 "대중의 상상 속에 위치"(같은 쪽)하는 존재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 도입에서는 셜록 홈즈가 '아서 도일의 소설 속 주인공'에서 벗어났다, 텍스트 밖에 위치하게 되었다는 점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여기서 아서 도일의 소설은 '원천'이나 캐해를 위한 "고전적인 레퍼런스"가 됩니다. ㅋㅋㅋㅋ좀 너무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머릿속에 베이커 가 221번지 B호의 인테리어가 주는 이미지는 아마 비슷할 것입니다. 셜록 홈즈의 집이라고 했을 때 그 집을 구성하는 오브제들은 '과학 실험 도구가 놓인 탁자, 바이올린, 범죄 기사가 실린 스크랩북, 파이프' 그리고 2장의 주제가 되는 '홈즈 자신의 흉상'입니다.

대븐포트는 탁자에 놓인 흉상의 이미지를 통해, 우리를 셜록 홈즈에서부터 "피카소와 브라크의 전형적인 큐비즘 정물화의 구성"(65쪽)에서 "중세 전통의 성 제롬의 서재"(같은 쪽)까지도 갈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때부터 진짜 무서워졌습니다. 어디까지 가겠다는 것입니까.

사실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부서졌다'라는 특성입니다. "지난 백 년 동안 고대 미술은 박물관과 미술관에서 산산조각 부서진 모습"(67쪽)이었으며 "부서진 파편은 바로 과거라는 조건 자체"(같은 쪽)입니다. 고대의 토르소는 얼굴, 팔, 다리가 없는 몸통뿐입니다.

여기서는 '너무 흔해진 흉상'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는데, 너무 흔한 '나폴레옹 흉상'은 상징성이 고갈되며 의례의 장소에서 신성함을 주던 예술품에서 집안의 장식품으로 흉상을 부순 범인의 편집증적 성향을 나타내는 소설적 장치로 사용됩니다.

벤야민은 이에 대하여 "실내(그러니까 가구를 들여놓은 실내)는 우주일 뿐 아니라 사적인 개인이라는 사건이다. 거주한다는 것은 흔적을 남긴다는 것이다"라며 탐정 소설이 19세기 실내의 산물"(72쪽)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소설 속 인물의 특성을 드러내기 위하여 그 인물이 거주하는 실내의 사물을 하나하나 읊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어 2장에서는 에드거 엘런 포의 '몸이 없는 머리만 있는' 상태의 인물, 이어 참수당한 신화에서 몸과 머리를 드디어 동시에 갖춘 사람 레오포드 블룸(제임스 조이의 1922년 소설 『율리시스Ulysses』의 주인공)을 만들어냅니다.

참수의 신화를 "세례 요한의 컬트"(102쪽)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무척 신랄합니다.

"두상이 인류의 운명의 상징으로 출현한 것은 동물의 형상을 통해서"(103쪽)였는데, 이는 능력이 극대화되기를 원하는 신체 부위를 동물의 형태로 변환하는 것(머리가 새의 형상이라던가)으로 나타났습니다.

언제나 메멘토 모리를 떠오르게 하는 몸 없는 잘린 머리는 우리의 전통이며, 이 "정물이 지속되는 한, 두상이 우리의 운명"(107쪽)이라고 말합니다.


3장 '사과와 배'는 언제나 짝으로 등장하는 이 두 정물의 의미 즉, 사과는 추락fall이며 배는 구원redemption의 상징으로 활용되었다고 말합니다. 이는 성경에서 라틴어로 사과와 선악과의 스펠링이 유사하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그렇게 의미가 굳어진 정물은 세잔의 작품에 와서 에로스, 사랑, 평온함, 따스함의 의미를 함께 지니게 되었으며, 오히려 배는 정치인의 풍자화에 유사한 형태가 활용되는 작품을 소개합니다. 프랑스어 속어에서 "배poire는 잘 속는 얼간이나 멍청한 사람을 뜻한다"고(138쪽) 합니다.

3장에서 제일 재미있는 건 사과-배의 대립되는 도식, 정반대되는 의미를 얻은 기표이기도 하지만 사실 '양파'입니다.

'반 고흐의 정물과 상징' 꼭지에서 고흐의 <양파가 있는 정물>(1889)을 설명하는데, 여기서 양파라는 기표에 대한 해석이 무척 흥미롭습니다.

고흐는 정물화를 "일종의 시각적 일기"(153쪽)으로 사용했는데, <양파가 있는 정물>은 "질병과 건강의 기록"(같은 쪽)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대븐포트는 정물로 캔버스에 재현된 양파를 읽어내는 방법을 독자에게 묻습니다. "[양파가 환자에게 좋은 음식이기 때문에] 그 그림을 식단을 더 잘하겠다는 약속으로 읽을 것인가, 아니면 더 심오한 전환으로 읽을 것인가?"(155쪽)

"양파와 담배에는 날것부터 익힌 것까지라는 레비스트로스의 코드가 있"고 "담배와 배는 수확 후 익으며, 둘 다 부드럽게 숙성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고 "양파는 음식인 동시에 조미료이며, 이 그림에서는 약으로 기능"(같은 쪽) 한다고 합니다.

대븐포트는 사과-배 도식을 이용하여 양파의 어원이 결합union이라는 것에서 양파를 "구원의 의미를 가진 배의 유사체이자 사과와 배가 결합된 존재로서, 그림 속 모든 것을 하나의 복합적인 상징으로 엮은 역할"(157쪽)이라고 해석해 내고 맙니다.


4장 '토리노의 형이상학적 빛'은 니체와 데 키리코에 대한 장입니다.

니체는 토리노에서 생의 마지막을 보냈으며, 이곳에서 영원 회귀라는 주요 사상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 '되풀이되는 운명'은 "키리코의 회화 작업의 영감"(166쪽)이 되었습니다.

기욤 아폴리네르가 키리코의 작품을 발견하고 초현실주의라는 말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초현실주의 작품들은 사실 아주 익숙한 정물들은 새로운 구도와 배경에 배치하며 이성을 넘어선 무의식의 영역을 탐구하고자 한 사조라는 사실이 불현듯 떠올랐습니다.

여기서 에니그마(수수께끼)를 일으키게 하는 세계를 의도적으로 구성하여 '낯설게 하기'를 전개한다는 지점에서 저는 다시금 SF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큰 관련은 없어 보입니다. 일단을 서사를 표현하는 기법과 사물을 재구성하며 재현하는 이미지 매체를 이용한다는 점에서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되는 듯합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개념은 같은데,

"진실을 보는 한 가지 방법은 대상을 전에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처럼, 익숙한 것을 에니그마처럼 보는 것"(171쪽)입니다. 이러한 방법론을 정말 좋아합니다.

그리고 4장 후반부에 레비스트로스의 식사와 관련한 해석이 등장하는데, 이 부분도 눈여겨 읽었습니다.

종교적 세계관 속의 인간은 예측 불가능한 신들에게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라는 대가로 규칙성(이때 규칙성이란 낮과 밤, 달과 년, 수명, 임신과 월경 기간과 같은 주기성입니다) 을 얻게 되는데 레비스트로스는 이 시초를 식사로 봅니다.

음식을 하기 위하여 재료를 준비하고, 다듬고, 요리를 하고, 식탁에 차리고, 정해진 식기를 통해서 약속된 시간에 초대된 사람들과 함께 음식을 섭취하는 행위. 이 규칙성을 기록하는 것이 정물화다!


제가 《스틸라이프》를 읽으면서 집중했던 부분은 정물/정물화가 가지고 있는 역설입니다. 그래서 제목도 "변화하는 부동(不動) 움직이는 정물"로 정해보았습니다.

움직이지 않는다, 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는 단어인 정물은 고대에서 현대까지 역사 속에서 인간, 사회, 문명에 의해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동시에 정물은 깨지고 재구성되고, 수확되고 썩어가며 계속해서 자신의 속성을 바꿉니다.

하지만 중세의 정물화나 현대의 정물화나 다른 회화 기법이나 사조마다 작품 별로 큰 차이를 보이는 반면, 정물화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더욱이 우리는 정물을 변화하지 않는 것, 그대로인 것으로 여기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대븐포트는 4장의 마지막에서 이렇게 언급합니다.


샤르댕의 조화로움에서 세잔으로, 세잔에서 브라크와 피카소로, 그리고 그들에서 데 키리코의 기하학적 에니그마로 이동하듯, 아모스의 비전은 여름 과일 광주리에서 신이 다림줄로 벽을 만드는 비전으로 이동한다. 정물화는 이런 비전들 중 둘 중 하나의 상징일 듯하다. 하나는 가을의 수확을 꿈꾸고, 우리가 거기까지 관리해 가는 과정과 우리와 자연과의 관계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 다른 하나는 자연이라는 기반에 따른 건축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 시대에 따라 그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변한다는 사실에 관한 것이다

210쪽

그러므로 정물화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정물에 대한 변화 가능성을 이해하고, 그것을 끊임없이 좇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쉬운 책이 아니라는 것이고,

그러나 미학 비평에 대한 배경지식이 쌓이면 꼭 다시 읽어보고 싶다는 책이라는 사실입니다.

다음번에 읽을 때는, 어디까지 이해할 수 있을까 기대되는 마음을 품고,

오늘의 포스팅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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