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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터베리 이야기 - 상 ㅣ 을유세계문학전집 119
제프리 초서 지음, 최예정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6월
평점 :
모두가 가톨릭 신자였고 때문에 성지 순례가 보편적인 시즌 행사였던 중세의 순례길은 꽤 시끌벅적한 모습을 하고 있었던 듯싶다. 아무래도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시기에 같은 길을 갔던 만큼, 제법 많은 수의 사람들이 동행하는 일도 이상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바로 그런 모습이 『캔터베리 이야기』 서문에서 자세히 그려진다. 4월경, 영국 곳곳에서 캔터베리를 향해 길을 나선 무려 스물아홉 명의 순례자들이 동행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구성원은 정말로 다양해서 기사, 그의 아들인 수습 기사, 수녀원장, 수도사, 옥스퍼드 대학생, 변호사, 시골 유지, 상인, 목수, 직조업자, 염색업자, 태피스트리 제작자, 의사, 부인, 요리사, 방앗간 주인, 장원 감독관 등등 각양각색이다. 그야말로 영국 중세 사회의 구성원인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총출동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은 숙소 주인의 제안으로 순례 여행길 동안 돌아가면서 이야기를 하게 된다.
성별, 나이, 신분, 직업 등 무엇 하나 같은 것이 없는 사람들이 모였기 때문에 그들이 돌아가면서 꺼내 놓는 이야기는 아주 다양하다.
물론 그런 와중에도 남녀 애정담이 꽤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고도 자연스러운 부분이다. 기사의 입을 통해 이야기되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비극적인 삼각관계부터 대학생이 풀어놓은 살루초 후작 부인 그리셀다의 파란만장한 일생, 상인이 전한 기사 재뉴어리와 아내 메이와 수습기사 다미안의 이야기, 황제의 딸이자 독실한 기독교도인 콘스탄스의 고단한 생애…….
그밖에도 재미있어서 저절로 집중하게 되는 이야기들이 연이어 계속되는데,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고 유쾌했던 것은 바스에서 온 부인의 이야기였다. 특히 본격적인 이야기로 들어가기 전, 진솔하고 화통한 여성의 목소리로 풀어내는 자기 자신의 남편들 이야기가 재미있었다.
시대적 배경상 우연히 만나 같이 가는 순례자들 중에 여성이 많지 않은데, 초서가 이 부인을 통해 당시 여성의 자기진술을 배치한 것이 반가웠다.
이외에 여러 사람들이 풀어놓는 이야기 보따리가 무척 풍성해서 푹 빠져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야기 외적으로 각 화자의 캐릭터가 말투에 묻어나도록 세심하게 고려된 것이라든가, 그리스-로마 신화나 그리스 철학자들을 자연스럽게 인용하는 부분, 기독교적 세계관에 따른 미덕을 당연하게 이야기하는 대목 등에서 지금과는 확연히 다른 시대적 배경이 느껴져 읽는 내내 중세의 풍경 속에 함께 있는 듯했다.
또 하나 특기할 만한 부분은 이 작품이 운문체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초서의 원문에 충실한 번역이자 국내 최초의 운문체 번역이라고. 일반적인 산문과는 다른 형식이라 약간 걱정했는데, 생각과 달리 술술 잘 읽혀내려가서 560여 페이지의 두꺼운 책을 다 읽을 수 있었다. 어렵거나 지나치게 은유적이지 않고, 대체로 사람의 언술을 옮겨 놓은 형식이라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중세의 순례길 위, 사람들이 모여앉아 각자의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는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이색적이고 흥미롭다. 그들 사이에 끼어 한 자리 차지하고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다 보면 여름밤이 순식간에 지나가고 만다.
그리고 서양 문명 전반, 특히 중세 이전과 기독교에 대한 이해가 있을수록 더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이어서 그런 방면으로 관심이 많은 독자에게 추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