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터베리 이야기 - 하 을유세계문학전집 120
제프리 초서 지음, 최예정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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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를 준비하면서 조금 걱정을 했다. 상권에서 연속되는 하권을 따로 리뷰하면서 상권 리뷰와 겹치지 않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가능할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걱정했던 것과 달리 하권만 가지고도 할 이야기가 적지 않게 생겼고, 즐거운 마음으로 리뷰를 쓰게 되었다.


우선 생각지 못했던 놀라운 점은 『캔터베리 이야기』는 온전히 완결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맨 처음에 숙소 주인이 제안했던 대로 ‘모두가 이야기를 하면서 캔터베리에 다녀온 뒤 가장 좋은 이야기를 한 사람을 뽑는’ 마무리는 볼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솔직하고 정곡을 찌르는 감상을 내놓던 숙소 주인의 최종 평가를 들을 수 없다는 점이 아쉽다. 숙소 주인의 코멘트가 내 생각과 비슷할 때가 많아서 마지막 심사평(?)이 궁금했는데. 

하지만 완결이 없는 책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싹 읽고 덮었더니 묘한 여운이 남기도 했다. 캔터베리 순례행의 이야기가 영원히 끝나지 않고 계속될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다음으로 하권에서 특기할 만한 점은 초서 본인이 이야기꾼으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화자 초서는 작가 초서와 동일인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별개의 인물도 아닌, 작가가 의도적으로 『캔터베리 이야기』 속으로 들여보낸 분신이다.

시작부터 다양한 인물들이 모여 이야기를 하는, 즉 ‘이야기’와 ‘이야기 속의 이야기’로 층위를 나누는 방식으로 구성되었던 『캔터베리 이야기』는 화자 초서가 전면에 나서면서 또다시 제3의 층위를 갖는다. 독자들은 작가 초서가 일부러 배치해 놓은 화자 초서를 주의 깊게 의식하고, 화자 초서가 하는 이야기 및 그의 이야기에 대한 인물들의 반응을 읽음으로써 작가 초서가 전하고자 하는 바를 받아들이게 되는 식이다.

이야기 전개 방식 자체가 무척 흥미로웠다.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이야기를 한다는 반복적인 구성이 약간 지루해질 때쯤 별안간 등장한 특별한 인물이 분위기를 환기한다. 물론 이는 작가의 의도적인 배치일 것이다. 이 작품이 단순히 설화 스타일의 이야기 선집을 넘어 영문학의 고전으로 불리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는데, 이와 같은 수준 높은 구성 방식도 중요한 요소가 아닐까 싶다.


마지막으로 상권에서도 그랬지만, 하권에서는 특히 종교적인 이야기가 많이 등장한다. 이야기를 하는 사람의 직업(신분)부터가 성직자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수녀원장과 신부, 수녀, 수도사 들이 경건한 어조로 카톨릭의 도덕관과 교훈을 전달한다. 14세기 영국 교회에서 전하는 가르침 중에서 오늘날에도 귀담아 듣고 동의하게 되는 것들이 있다는 점이 신기하기도 하고 감동적이기도 했다(전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한편 『캔터베리 이야기』 하권에는 역자의 해설과 판본 소개가 수록되어 작품의 심도 있는 이해에 도움을 주고 있다. 역자는 초서가 활동하던 당시의 역사적, 문화적, 언어적 환경을 소개하고 제프리 초서라는 작가의 생애를 그의 문학세계와 관련지어 간결하게 제시한다. 

그리고 을유문화사에서 출간한 『캔터베리 이야기』의 저본이 된 『리버사이드 초서』가 어떻게 이루어지게 되었는지, 또 그 판본 외에도 주요한 판본으로는 어떤 것이 있는지 소개한다. 손으로 직접 옮겨써서 새로운 책을 만들던 시절의 작품답게 먼지와 종이, 양피지 냄새를 상상하게 되는 이야깃거리가 있어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부분이었다.​


여러모로 한 번 읽기로는 충분하지 않고, 기회가 된다면 다시 한 번 정독해 보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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