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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조어론 1 - 제1부 중도(관)론 1
박상륭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6월
평점 :
"조금 들여다보면 적응하게 되어 있는 한자는 두고서라도, 이 책을 읽기 정말 어렵게 만드는 그 큰 장애는, '더럽게 읽기 어렵더라'는 풍문이 아닐까" -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 경전을 아우르다 보니 어떤 경전보다 크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실로 말하자면 이 책은 그 어떤 경전보다도 친절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왜 문학을 읊는 데다 대고 경전을 이야기 하느냐"고 묻는다면 "문학은 구원을 그 큰 주제로 삼는 경우가 빈번(하고 또 그것은 참 바랄만)한데 구원은 결국 (제도적인 것이 아니라 구도적인) 종교를 통해서 이루어질 테니 그러하겠다."고 대충 둘러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쨌거나 깜냥도 안 되는 이야기를 주섬주섬 주워섬기는 것은, 대충 비슷하게, 이 말을 (전)하고 싶어서입니다.
"경전은 설법이고 문학은 인간이 구원을 성취해 가는 과정을 그리는 것이다. 경전에는 자유가 없지만 문학은 여러 경전을 아우르는 (포용과) 자유가 있다. 경전에는 없는 깨달음의 과정이 바로 문학 속에 자리하는 것이다."
하성란 씨가 진행한 <책을 삼킨 TV>에서 박상륭 선생이 하신 말씀이 저러 했었습니다. 이 말을 여기다가 꺼내 놓는 것은 제가 읽은 칠조어론 1권이, (눈썹을 제화에 향목으로 삼을 만큼 잃어가면서까지) 경전에서 볼 수 없는 구원의 과정을 친절하게 보여주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이라는 것은, 인간을 바르도(저승)에서 역바르도(이승)로 의미없이 내달리게 만드는 욕망(이란 다른 데에서도 말고 마음으로부터 비롯된다고 하니 결국은 마음)을 길들여, 그것으로 도약대를 삼아 진화를 성취해 가는 것을 말합니다.
구원을 말하는 자리에다가 진화를 틀어박아 놓은 것은, 그것이 상호 교환 가능한 것으로 보여서입니다. 고통에서부터 건져(구하여)진다는 것이 구원이라면 그 고통이 무엇이고 어디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는 탓입니다. 박상륭 선생은 그러한 고통을 '들쑤셔짐', '용천병'과 같은 말로 표현하고 있는데, 그것은 저에게 '방향성을 잃어버린 에너지, 목숨'으로 보였습니다. 삶이 어디로 나아갈지 몰라서 좌충우돌 하게 되는 바로 그 충돌지점에 영문도 모르고 당하는 통증이 있게 되고 그것이 바로 고통일 것 같다는 생각에서입니다. 그러자니 구원이란 방향을 잃은 목숨이 스스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찾(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시 하던 말로 돌아가면,
소주와 저육 냄새를 풍기며 시작한 이야기는, 여차히 저차히, 인간이 구원을 성취하기 위해 고통 당하며 치르는 우주적 한 전쟁의 한복판으로, 끌려들어갑니다. 그리고는 피와 죽음이 끓어오르는 한창의 전쟁통 속에서 그것의 의미를 밝혀 보여줍니다. 한 단계, 두 단계, 세 단계에 이르는 치열한 싸움이 무엇을 위해 어떻게 치러지고 있는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고 인간이라는 집단이 그리고 인간이라는 단 한 사람이 진화를 위해 치러내야 하는 한 전쟁일 것이고 그것은 한 사람이 고통과 사랑(은 보살심)으로 꾸려가야 하는 한 삶(경지) 이외에 다른 것은 아닌 걸로 보입니다.
이쯤되어서는 그래서 (어쩌면) 우리가 앞서 잘 알지도 못하는 말들을 고통스럽게 주워섬겼어야 했던 것은 결국 이 장면을 (이해하기 위한 룰을 몸에 익혀)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아니었을까 하는 의혹도 갖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다고 해놓고 보면, (이것은 뒷걸음질로 얻은 한 마리의 쥐 같은 것일 텐데) 이 책을 듣는 한 귀의 처지와 한 죽음을 잘 죽기 위해 (진화는 육신을 갖고 있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므로) 그것보다 한참은 더 길기도 긴 삶을 잘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처지는 퍽 닮아 있는 것도 같지 않겠습니까.
이 책의 전작인 <죽음의 한 연구>가 뫼비우스의 띠 같은 내용을, 뫼비우스의 띠 같은 모양에다가 담아냈었다는 점을 떠올려 본다면, 이 이야기가 아주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결국은 다 터무니없는 이야기예요. 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