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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조어론 4
박상륭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4년 11월
평점 :
일단 칠조어론 1권을 읽으며 꺼내 놓았던 말을 주워볼까 합니다. 그 때 그걸 읽고 나서 ‘문학은 인간이 구원을 성취해 가는 그 한 과정’을 그리고 있는 것 같다고 했었는데요. 마지막 권을 덮으면서는, 그것을 말머리 삼아, 그 말에 대한 의견을 마무리 지어보는 게 좋겠다 싶었어요.
박상륭 선생이 말하는 구원은 ‘위로부터 은혜롭게 주어지는 어떤 것’이 아니라 ‘아래로부터 인간 스스로가 성취해 가는 어떤 것’이라고는 이미 말해 놓았던 거 같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 한 문장이 박상륭 선생이 칠조어론을 통해 했던 모든 말들을 꿰고 드는 (똥꼬를 찔러 정수리로 꿰어져 나오는) 한 문장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습니다. 그 근거로는 칠조인 촛불중이 죽어 가는 그 장에서 꺼내 들었던 그 도면을 들어 보려고 해요.
도면의 가장 아래에는 비척(屄蜴)이 놓여 있었고 그 위로는 몸의 우주와 말씀의 우주와 마음의 우주가 두 개의 양극을 갖는 타원형이 겹쳐 있는 모양으로 그려져 있었죠. (아, 우, 움 비슷한 한 단어의 말소리를 흑, 백, 적에 겹쳐 넣었어도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달라지지 않는다고 봐요.) 다시 말해 이 그림은 양극을 갖는 두 개의 겹쳐진 타원형이 똥꼬에 비척을 꽂은 채로 우뚝 서 있는 모양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이 그림을 해석하는 두 개의 팁은 첨언된 문장 하나와 비척을 삼은 엄지손가락이 촛불중의 입에 꽂혀 들어간다는 다른 하나일 것 같습니다.
일단 그 첨언은 아마도 이랬을 겁니다. 비척을 선목(禪木)의 뿌리로 삼아 흑으로부터 적으로 꿰뚫어 오르는 우주적 말씀이요. 덧붙여지는 괄호 안 문장에서는 이것의 귀환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던 것 같은데 이것이 어쩌면 ‘인간 재림’에 대한 힌트가 아닐까 하고 잠깐 상상해 보기도 했어요. : 이 내용과 그 비척이 촛불중의 입(은 목 언저리이고, 목은 인간의 꿈과 말이 쏟겨 나오는 곳이니까, 거기)에 꽂혀 들어간다는 내용을 조합해 보면, 대충 이런 한 문장을 빚어낼 수 있을 것 같아요.
“말씀을 뿌리(도구) 삼아 삼세(몸과 말과 마음의 우주)를 꿰뚫어 오르기”
이것이 바로 아까 위에서 말했던 ‘아래로부터 인간이 스스로 성취해 가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 말씀은 선禪, 자아, 사유 등 다양한 얼굴을 갖습니다. 선은 니르바나로 솟구치기 위한 그 방편으로 언어를 사용합니다. (좋은 도구이지만 말의 유사구덩이라는 함정이 도사리고 있지요.) 자아는 사유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데, 인간이 몸의 우주로부터 벗어나 불순한 존재가 되는 데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이 바로 이것이지요. 이것은 문화, 언어, 예술, 이런 것들과 밀접한 관련을 갖습니다. (이것 역시 좋은 도구이지만, 그것이 너무 좋아서 인간이 버리려 하지 않는다는 점과 극복하기 어려운 이원론을 뿌리로 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말씀은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면서 인간을 보다 높은 무엇으로 끌어가려는 것들을 아우르는 무엇이라고 봐야 할 것 같아요. - 그러자니 결론은 ‘인간으로서 주어진 삶, 인간으로서 열심히, 열심히 살 것’이라고 밖에 더 말할 게 없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어디를 뒤져보니, 다른 데에서 쓰려고 그려놓았던, 양극을 갖는 두 개의 타원형이 겹쳐져 있는 이미지를 찾았습니다.
추신1>
부록 삼아 도형에 대한 이야기를 거칠게 풀어 놓습니다. 여기 그려 놓은 것은 그 안에 적혀 있는 내용은 칠조가 죽으며 그려 놓았던 것과 다르지만 그 내용은 다르지 않다고 봐서 데려 오는 데에 별 부담이 없었어요. 그리고 그 밑에 비척을 꽂아 넣었습니다. (귀찮아 대충 그린 탓에 양극을 갖지 않은 타원형입니다만, 마음을 넓게 열어, 양극을 갖는다고 보아주시길.)
상사라는 몸의 우주, 흑의 국면입니다. 애밴 여자는 일단 말씀의 우주이고 흑과 적에 걸쳐 있으면서 백을 담당하는 국면입니다. 니르바나는 마음의 우주, 적의 국면입니다. 이게 대체 뭔가 싶지만 이것은 선목, 즉 요가나무라고 불리는 것이면서 동시에 인간을 나타내고 있는 그림입니다.
(동시에 시간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지요. 유리장에서 최초로 이 그림이 나오기 시작했을 때, 그것은 도마뱀에 대한 연구였습니다. 도마뱀은 역(易)이고, 역은 시간이지요. 시간에 대한 탐구로부터 이 그림이 비롯되었습니다. 시간은 그런데 인간의 의식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지요. 인간은 극소의 시간과 극대의 시간이 교접하는 바로 그 시중時中에 존재하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다시 저 그림으로 돌아가면 인간은 상사라, 즉 몸의 우주이면서, 쉼 없이 갈아드는 공간, 프라브리티에 뿌리를 두고서 니르바나로 솟아오르고 있는 존재입니다. 상사라와 니르바나 사이에 끼어 있는 애 밴 여자로 나타나는 것이지요. 긴 말을 줄이기 위해 세 가지 국면의 여러 이름을 좀 몰아보아야겠어요.
니르바나 = 어린 양이 붉은 용에 대해 거두는 승리.
애 밴 여자 = 진흙에 몸을 묻은 채 고개를 들고 있는 모양.
상사라 = 붉은 용, 옛 뱀, 자연, 하향적.
인간이 상사라와 니르바나에 끼어 있는 존재라는 것이 ‘애 밴 여자’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여자의 뱃속에 들어 있는 것이 바로 어린 양입니다. 그런데 그 여자가 출산을 하는 즉시 그 여자가 낳는 어린 양을 잡아먹기 위해 붉은 용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상황이 인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붉은 용은, 상사라 국면으로서, 인간을 몸의 우주로 끌어 내리기 위해 벼르고 있는 존재입니다. 여자는 뱃속에 어린 양을 품고 있는데 이 어린 양은 인간을 상향적으로 이끌어주지다. 자연에 반하는 문화라고도 할 수 있고, 인식이라고도 할 수 있고, 말씀이라고도 할 수 있지요. 이 대치 상태가 인간이 처해 있는 상황인 것입니다. 팽팽한 긴장 관계 속에, 그러니까 어린 양으로 솟구칠 수도 있고 붉은 용으로 전락할 수도 있는 이 위기 속에, 인간 존재가 놓여 있는 것이지요.
어린 양은 그런데 아비가 입을 벌리고 기다리고 있는 와중에 어느 샌가 태어나 저 높은 곳에서 이 모든 것을 내려다보고 있다고 합니다. 읽다 보면 아주 환장할 노릇이에요. 고민고민하다 얻게 된 마음 편한 결론은, 이 어린 양을 논리나 논리적 난점을 단숨에 뛰어 넘어 버리는 역동적인 무엇이라고 이해해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애밴 여자와 붉은 용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은 코끼리는 코끼리고, 사자는 사자인, 그런 상황이라면, 어린 양은 코끼리 몸뚱이에 사자 대가리를 한, 그런 괴물 같은 무엇, 그런 역동성, 같은 게 아닐까요.
추신2>
지금까지 촛불중이 중이었다면 4권에서는 요가에 도통한 요기로서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 같습니다. 명상으로 몸을 벗어나 주유하는 모습을 보면 말이죠. 그게 좀 허황되게 보일 수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저는 그게 요가에 대한 사유의 연장선으로 보여서 별로 이상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자유롭고 재미 있었습니다. 바르도가 무엇인지 (안과 밖이 뒤집혀 기호가 의미가 되고 의미가 기호가 되는 곳이 바로 그곳이라는 걸) 알아, 그곳의 자유를 누리고 있는 한 염태念態를 보는 것 같아서였습니다.
추신3>
지금껏 칠조어론을 대하며 '언젠가는 한자를 한글로 바꿔 괄호 속에 한자를 넣어준 칠조어론이 나올지도 몰라'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요. 이제는 그런 생각을 깨끗하게 접었습니다. 읽기에 불편하다고 여겨지는 그 한자와 온갖 조어들은 언어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 작가가 의도적으로 시도한 실험이고 모험이라는 것을 알게 돼서 그렇습니다. 그러고 나니 그깟 한자 적응하는 게 뭐가 그리 어렵나, 기꺼이 그 모험에 동참하겠다, 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게다가 포털 사전이 많이 발전해서 마우스로 빼뚤삐뚤 그려 넣으면 그게 무슨 자인지 다 알려주는 세상 아닙니까.
칠조어론 참 읽기 편하게 되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