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팬 컴플렉스 - 5집 O[ou]
피터팬 컴플렉스 (Peterpan Complex) 노래 / 미러볼뮤직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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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괴상하게 꼬이는 것 같은 아스트랄한 기분. 피컴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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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귀에 도청장치 - 4집 Observation
내 귀에 도청장치 노래 / (주)와이디씨티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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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지는 곡 하나 없이 잘 빠진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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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요법의 기본문제 Grundwerk C.G.Jung 융 기본 저작집 1
칼 구스타프 융 지음, 한국융연구원 C.G. 융 저작 번역위원회 옮김 / 솔출판사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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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지금은 망해버린) 서점에서 사서 쟁여뒀던 책.

십여년 만에 꺼내서 읽고 있습니다만. 왜 십여 년이나 묵혀 놨을까 싶네요.


일단 이부영 교수가 쓴 분석 심리학을 시작으로 융이 직접 쓴 개론서라고 할 수 있는 인간과 (무의식의) 상징, 한길사에서 나온 분석심리학 입문서 그림자, 아니마와 아니무스, 자기 실현을 비롯해 융의 자서전까지 여러 번 읽고 나서 그런지, 기본 저작집 1권은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기본저작집의 도입부로서 적절한 것 같다고나 할까요. (뭐래~)


어디에서 검색해 보기로는 발표된 순서대로 읽으면 좋다고 나와 있길래 처음에는 그렇게 읽었었어요. 그렇게 읽는 게 낫다는 생각이 타당해 보였으니까요. 문제는 이 책이 크게 정신 치료와 꿈과 심리학적 유형론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거였습니다. 발표된 순서대로 읽다보니 정신치료에 관한 글과 꿈에 관한 글을 정신 없이 섞어 읽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나중에는 게재되어 있는 순서대로 읽었습니다. 크게 정신치료에 대해 다루고 있는 글들과 꿈에 대해 다루고 있는 것들, 유형론은 하나이지만 양이 많아서 쭉 읽고, 정신분열증을 읽어 마무리 했습니다. 여러 번 읽어서 충분히 익숙해진 사람에게는 발표 순서대로 읽는 것이 유의미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희미하게 남아 있기는 합니다만. 1권 안에서 입장 표명이 크게 변화된 부분이 있는지에 대해서 좀 회의적이라 저런 식으로 읽는 것이 얼마나 효과적일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1권에서 다루고 있는 부분 중 심리학적 유형은 전집 내용에서 한 챕터만 수록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분량은 1권에서 가장 많습니다. 분량이 너무 많아서 다 수록할 수가 없으니 필요한 사람은 독일어본이나 영역본을 구해서 읽으면 될 거라고 해요. 저는 이미 이부영 선생님의 입문서를 통해서 이 부분은 충분히 읽었던 터라 더 구해보지는 않기로 했습니다. (딱히 더 땡기는 주제가 아니라서요.) 한 챕터만 읽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이부영 선생님이 심리학적 유형론에 대해서 정리해 놓으신 게 엄청 체계적이고 알기 쉽게 잘 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걸로 목이 마른 분이시라면 이부영 선생님의 분석 심리학을 읽어보시거나 독일어본, 영역본을 읽으시면 되겠습니다.




추신> 곁가지로 아쉽다고 생각했던 것.


'피에르 자네'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번역자들끼리 '자네'와 '쟈네'가 통일되지 않은 것은 그래도 이해할 만 하지만. 같은 페이지 안에서 한 번역자가 '자네'라고 쓴 다음 몇 글자 뒤에 '쟈네'라고 쓰고 있는 것은 교열을 보는 과정에서 충분히 잡아낼 수 있었을 거 같은데 안 잡혀 있어서 아쉬웠습니다. 약간의 오타가 있지만, 뭐. 거슬리지는 않아요. 사실 뭐 자네나 쟈네나 딱히 신경 쓰일 것도 없긴 하지만. 만듦새가 그렇다는 거죠.


기본저작집이 아니라 전집이 나왔으면 더 좋았을 거 같지만. 그랬으면 비용도 후덜덜하고 번역 기간도 훨씬 더 길었겠죠? 여튼 번역위원회 덕분에 기본저작들 편하게 (번역본으로) 읽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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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조어론 4
박상륭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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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단 칠조어론 1권을 읽으며 꺼내 놓았던 말을 주워볼까 합니다. 그 때 그걸 읽고 나서 문학은 인간이 구원을 성취해 가는 그 한 과정을 그리고 있는 것 같다고 했었는데요. 마지막 권을 덮으면서는, 그것을 말머리 삼아, 그 말에 대한 의견을 마무리 지어보는 게 좋겠다 싶었어요.

 

   박상륭 선생이 말하는 구원은 위로부터 은혜롭게 주어지는 어떤 것이 아니라 아래로부터 인간 스스로가 성취해 가는 어떤 것이라고는 이미 말해 놓았던 거 같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 한 문장이 박상륭 선생이 칠조어론을 통해 했던 모든 말들을 꿰고 드는 (똥꼬를 찔러 정수리로 꿰어져 나오는) 한 문장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습니다. 그 근거로는 칠조인 촛불중이 죽어 가는 그 장에서 꺼내 들었던 그 도면을 들어 보려고 해요.

 

   도면의 가장 아래에는 비척(屄蜴)이 놓여 있었고 그 위로는 몸의 우주와 말씀의 우주와 마음의 우주가 두 개의 양극을 갖는 타원형이 겹쳐 있는 모양으로 그려져 있었죠. (, , 움 비슷한 한 단어의 말소리를 흑, , 적에 겹쳐 넣었어도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달라지지 않는다고 봐요.) 다시 말해 이 그림은 양극을 갖는 두 개의 겹쳐진 타원형이 똥꼬에 비척을 꽂은 채로 우뚝 서 있는 모양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이 그림을 해석하는 두 개의 팁은 첨언된 문장 하나와 비척을 삼은 엄지손가락이 촛불중의 입에 꽂혀 들어간다는 다른 하나일 것 같습니다.

 

   일단 그 첨언은 아마도 이랬을 겁니다. 비척을 선목(禪木)의 뿌리로 삼아 흑으로부터 적으로 꿰뚫어 오르는 우주적 말씀이요. 덧붙여지는 괄호 안 문장에서는 이것의 귀환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던 것 같은데 이것이 어쩌면 인간 재림에 대한 힌트가 아닐까 하고 잠깐 상상해 보기도 했어요. : 이 내용과 그 비척이 촛불중의 입(은 목 언저리이고, 목은 인간의 꿈과 말이 쏟겨 나오는 곳이니까, 거기)에 꽂혀 들어간다는 내용을 조합해 보면, 대충 이런 한 문장을 빚어낼 수 있을 것 같아요.

 

   “말씀을 뿌리(도구) 삼아 삼세(몸과 말과 마음의 우주)를 꿰뚫어 오르기

 

   이것이 바로 아까 위에서 말했던 아래로부터 인간이 스스로 성취해 가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 말씀은 선, 자아, 사유 등 다양한 얼굴을 갖습니다. 선은 니르바나로 솟구치기 위한 그 방편으로 언어를 사용합니다. (좋은 도구이지만 말의 유사구덩이라는 함정이 도사리고 있지요.) 자아는 사유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데, 인간이 몸의 우주로부터 벗어나 불순한 존재가 되는 데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이 바로 이것이지요. 이것은 문화, 언어, 예술, 이런 것들과 밀접한 관련을 갖습니다. (이것 역시 좋은 도구이지만, 그것이 너무 좋아서 인간이 버리려 하지 않는다는 점과 극복하기 어려운 이원론을 뿌리로 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말씀은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면서 인간을 보다 높은 무엇으로 끌어가려는 것들을 아우르는 무엇이라고 봐야 할 것 같아요. - 그러자니 결론은 인간으로서 주어진 삶, 인간으로서 열심히, 열심히 살 것이라고 밖에 더 말할 게 없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어디를 뒤져보니, 다른 데에서 쓰려고 그려놓았던, 양극을 갖는 두 개의 타원형이 겹쳐져 있는 이미지를 찾았습니다.





   추신1>


   부록 삼아 도형에 대한 이야기를 거칠게 풀어 놓습니다. 여기 그려 놓은 것은 그 안에 적혀 있는 내용은 칠조가 죽으며 그려 놓았던 것과 다르지만 그 내용은 다르지 않다고 봐서 데려 오는 데에 별 부담이 없었어요. 그리고 그 밑에 비척을 꽂아 넣었습니다. (귀찮아 대충 그린 탓에 양극을 갖지 않은 타원형입니다만, 마음을 넓게 열어, 양극을 갖는다고 보아주시길.)


 

   상사라는 몸의 우주, 흑의 국면입니다. 애밴 여자는 일단 말씀의 우주이고 흑과 적에 걸쳐 있으면서 백을 담당하는 국면입니다. 니르바나는 마음의 우주, 적의 국면입니다. 이게 대체 뭔가 싶지만 이것은 선목, 즉 요가나무라고 불리는 것이면서 동시에 인간을 나타내고 있는 그림입니다.


   (동시에 시간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지요. 유리장에서 최초로 이 그림이 나오기 시작했을 때, 그것은 도마뱀에 대한 연구였습니다. 도마뱀은 역()이고, 역은 시간이지요. 시간에 대한 탐구로부터 이 그림이 비롯되었습니다. 시간은 그런데 인간의 의식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지요. 인간은 극소의 시간과 극대의 시간이 교접하는 바로 그 시중時中에 존재하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다시 저 그림으로 돌아가면 인간은 상사라, 즉 몸의 우주이면서, 쉼 없이 갈아드는 공간, 프라브리티에 뿌리를 두고서 니르바나로 솟아오르고 있는 존재입니다. 상사라와 니르바나 사이에 끼어 있는 애 밴 여자로 나타나는 것이지요. 긴 말을 줄이기 위해 세 가지 국면의 여러 이름을 좀 몰아보아야겠어요.

 

   니르바나 = 어린 양이 붉은 용에 대해 거두는 승리.

   애 밴 여자 = 진흙에 몸을 묻은 채 고개를 들고 있는 모양.

   상사라 = 붉은 용, 옛 뱀, 자연, 하향적.

 

   인간이 상사라와 니르바나에 끼어 있는 존재라는 것이 애 밴 여자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여자의 뱃속에 들어 있는 것이 바로 어린 양입니다. 그런데 그 여자가 출산을 하는 즉시 그 여자가 낳는 어린 양을 잡아먹기 위해 붉은 용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상황이 인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붉은 용은, 상사라 국면으로서, 인간을 몸의 우주로 끌어 내리기 위해 벼르고 있는 존재입니다. 여자는 뱃속에 어린 양을 품고 있는데 이 어린 양은 인간을 상향적으로 이끌어주지다. 자연에 반하는 문화라고도 할 수 있고, 인식이라고도 할 수 있고, 말씀이라고도 할 수 있지요. 이 대치 상태가 인간이 처해 있는 상황인 것입니다. 팽팽한 긴장 관계 속에, 그러니까 어린 양으로 솟구칠 수도 있고 붉은 용으로 전락할 수도 있는 이 위기 속에, 인간 존재가 놓여 있는 것이지요

 

   어린 양은 그런데 아비가 입을 벌리고 기다리고 있는 와중에 어느 샌가 태어나 저 높은 곳에서 이 모든 것을 내려다보고 있다고 합니다. 읽다 보면 아주 환장할 노릇이에요. 고민고민하다 얻게 된 마음 편한 결론은, 이 어린 양을 논리나 논리적 난점을 단숨에 뛰어 넘어 버리는 역동적인 무엇이라고 이해해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애밴 여자와 붉은 용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은 코끼리는 코끼리고, 사자는 사자인, 그런 상황이라면, 어린 양은 코끼리 몸뚱이에 사자 대가리를 한, 그런 괴물 같은 무엇, 그런 역동성, 같은 게 아닐까요.


   추신2> 


   지금까지 촛불중이 중이었다면 4권에서는 요가에 도통한 요기로서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 같습니다. 명상으로 몸을 벗어나 주유하는 모습을 보면 말이죠. 그게 좀 허황되게 보일 수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저는 그게 요가에 대한 사유의 연장선으로 보여서 별로 이상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자유롭고 재미 있었습니다. 바르도가 무엇인지 (안과 밖이 뒤집혀 기호가 의미가 되고 의미가 기호가 되는 곳이 바로 그곳이라는 걸) 알아, 그곳의 자유를 누리고 있는 한 염태念態를 보는 것 같아서였습니다.


   추신3>


   지금껏 칠조어론을 대하며 '언젠가는 한자를 한글로 바꿔 괄호 속에 한자를 넣어준 칠조어론이 나올지도 몰라'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요. 이제는 그런 생각을 깨끗하게 접었습니다. 읽기에 불편하다고 여겨지는 그 한자와 온갖 조어들은 언어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 작가가 의도적으로 시도한 실험이고 모험이라는 것을 알게 돼서 그렇습니다. 그러고 나니 그깟 한자 적응하는 게 뭐가 그리 어렵나, 기꺼이 그 모험에 동참하겠다, 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게다가 포털 사전이 많이 발전해서 마우스로 빼뚤삐뚤 그려 넣으면 그게 무슨 자인지 다 알려주는 세상 아닙니까.


   칠조어론 참 읽기 편하게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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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조어론 3
박상륭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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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단으로 주어진 것을 목적으로 여기기 시작하면 수단이 목적이 되어 목적은 그동안 끝없이 유예된다고 합니다. 박상륭 선생에 의하면 인간은, 인간의 육신은, 인간으로 태어난 것은, 니르바나로까지 진화를 성취해 내기 위해 주어진 것인데, 인간이, 마음이야말로 실다운 것이네 아니네, 육신이야말로 실다운 것이네 아니네, 삶이야말로, 죽음이야말로, 하는 시답잖은 말로, 수단을 목적으로 삼아, 집착하고 있으면, 그 원래의 목적은, 윤회의 윤회를 거듭하기까지 유예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빌어먹을 윤회를 멈추기 위해서, 인간이 해야 하는 것은 뭣이라는 걸까요.

   세 번째 책의 소제목(진화론)이 거기에 대한 대답을 해줍니다. '진화'해야 한다는 거지요. 어디까지? 차안에서 피안까지. 피안까지 가서도 더 멀리. 다시 묻지 않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그걸 어떻게 해야 한다는 거라? 이번에도 답변은 시원시원하게 돌아옵니다.


   것. 것? 것!


   저 세 가지의 '것'은 산은 산, 물은 물의 세 가지 버전입니다. 주절주절 타이핑하기도 귀찮으니 대강 정리하면,


   몸의 우주 = 축생도 = 짐승스러움 = 인간이 육신에 푹 잠가져 있음 = 자아가 깨지 않아 삶의 이면을 보지 못하고 있음 = 산은 산, 물은 물.


   말씀의 우주 = 인세 = 문화적 = 인간이 그 머리를 쳐들기 시작함 = 자아가 눈을 떠 세상이 이원론적으로 또렷해짐 = (주체와 객체의 분리로 인해) 산이 산이 아님, 물이 물이 아님.


   마음의 우주 = ??? = ??? = 자기부정, 아집 여의기(란 다시 말해 인간이라는 의미가 입은, 몸을 비롯한 외부, 즉 무의식 깨우기)로 인해 이원론이 설 곳이 없어짐 = (그 자신의 무의식이던 객체를 깨워낸 주체는 곧 그 자신이 객체와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되어) 산은 산, 물은 물.


   다시 말해, 1) 아무 의문이 일지 못하던 마침표에 2) 자아라는 '원초적 질료'를 깨워내 물음표를 일군 다음, 3) 원초적 질료인 자아의 죽음을 통해 느낌표에 다다르기(는 깨닫기), 라는 겁니다.


   어깨가 절로 으쓱 으쓱.

   즐거워서 그런 것인지, 그래서 대체 뭘 어쩌라굽쇼? 싶어서 그런 것인지.

   도무지 당최 모르겠어서, 으쓱, 으쓱, 또 으쓱?





   세 번째 책을 읽어내기는 두 번째 책 읽어내기보다 조금 더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았어요. 첫 번째 책과 두 번째 책을 잘못 읽어도 크게 잘못 읽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나니 두 다리(라고 하면 두 눈동자와 두 손 정도 안 될까요마는 어쨌거나 얘기로 돌아가면 두 다리)에 힘이 빠져 주저앉을 밖에 달리 더 나아갈 수가 없었던 거지요.


   한참 같은 장소에서 맴돌 듯 나자빠져 있다가는 '뭐 첫 걸음에 나동그라질 수도 있지, 제까짓 게 뭐나 된다고, 한 번 디뎌본 적 없는 다리로, 일곱 걸음을 척척 걸어낼 줄 알았음?' 싶어, 까짓 것, 툴툴 털고 일어났습니다. 첫 번째 책으로 가기에는 걸어온 길이 길기도 기니 (이번 읽기는 망했음!) 가던 대로 내딛어 가보자고 했어요.


   바르도에 처한 염태는 한 번 깨닫기로 니르바나에 도달할 수 있는 순간이 매순간 순간순간 주어진다고 하는데 (바르도와 역바르도는 뫼비우스의 띠 같은 것이니 거기에서 되어가는 대로 여기에서도 되어간다고 치면) 실컷 디뎌 놓은 이번 책 읽기 어디에도 제대로 이해하기라는 '숨겨진 돌'이 있으리라고 크게 착각해 보렵니다.


   훕합!



뭣 좀 뒤틀린 심사가 있어서 그런가 툴툴거리는 투로 적어 놓았는데 말이죠. 사실로 말해 이야기는 점점 더 재미있어 집니다. 


1권이 끝나면서는 그저 촛불중이라는 육신이 이물스러워졌고 2권이 끝나면서는 그 이물스러운 육신을 벗기가 겁이 날만큼 막막하게 느껴졌었는데 3권이 끝나면서는 속박감이 좀 덜어지면서 그 몸(이라 하면 촛불중이면서 동시에 촛불중이라는 이야기 속에 떨궈놓은 독자의 눈)이 가볍게 느껴지는 것도 같습니다. 

티벳 사자의 서는 바르도에 처한 한 염태를 니르바나로 인도하기 위한 책이지만 결국 그가 깨닫지 못하게 되면 좋은 자궁(이란 다른 것도 말고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으로 인도하며 끝이 나고 있어서, 쭈루룩 따라 읽으면서 한 죽음(바르도)을 겪는 것처럼 여겨보게 만듭니다. 저한테는 칠조어론도 슬슬 그런 느낌이 들고 있어요. 작가가 의도적으로 육도의 문 닫기 순서에 의한 색깔로서 책의 소제목들을 정해놓았으니만큼 이 책은 아주 친절하게 풀어진 티벳 사자의 서라고 생각하고 싶기까지 합니다.

네, 근래에 이르러서는, 파드마삼바바라는 '기호(체)'를 만난 한 '의미(밀의, 용)'가 바르도 퇴돌(티벳 사자의 서)로 화현된 것처럼, 박상륭이라는 '기호'를 만난 '(별로 다르잖은 그) 의미'가 칠조어론(을 비롯한 선생의 잡설)로 화현된 것이 아닌가, 그래서 두 책은 한 언어의 서로 다른 방언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되고 그럽니다. - 이런 비슷한 까닭으로 암만 많은 조사들이 나서 들고 떠뜰어싸도 한 마디 말도 더 보태지지 않았다고 하는 게 아닌가, 한 세상 저물도록 떠들어대고도 한 마디 말도 안 했다고 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그러니까 여기가 바고, 실껏 떠들고 지친 시치미들이 몸을 누이는 곳이 아닌가, 하고, 상상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  읽어 놓은 게 티벳 사자의 서 뿐이라 그것만 알아듣는다는 게 함정!! 쿠힛쿠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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