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조어론 3
박상륭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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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단으로 주어진 것을 목적으로 여기기 시작하면 수단이 목적이 되어 목적은 그동안 끝없이 유예된다고 합니다. 박상륭 선생에 의하면 인간은, 인간의 육신은, 인간으로 태어난 것은, 니르바나로까지 진화를 성취해 내기 위해 주어진 것인데, 인간이, 마음이야말로 실다운 것이네 아니네, 육신이야말로 실다운 것이네 아니네, 삶이야말로, 죽음이야말로, 하는 시답잖은 말로, 수단을 목적으로 삼아, 집착하고 있으면, 그 원래의 목적은, 윤회의 윤회를 거듭하기까지 유예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빌어먹을 윤회를 멈추기 위해서, 인간이 해야 하는 것은 뭣이라는 걸까요.

   세 번째 책의 소제목(진화론)이 거기에 대한 대답을 해줍니다. '진화'해야 한다는 거지요. 어디까지? 차안에서 피안까지. 피안까지 가서도 더 멀리. 다시 묻지 않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그걸 어떻게 해야 한다는 거라? 이번에도 답변은 시원시원하게 돌아옵니다.


   것. 것? 것!


   저 세 가지의 '것'은 산은 산, 물은 물의 세 가지 버전입니다. 주절주절 타이핑하기도 귀찮으니 대강 정리하면,


   몸의 우주 = 축생도 = 짐승스러움 = 인간이 육신에 푹 잠가져 있음 = 자아가 깨지 않아 삶의 이면을 보지 못하고 있음 = 산은 산, 물은 물.


   말씀의 우주 = 인세 = 문화적 = 인간이 그 머리를 쳐들기 시작함 = 자아가 눈을 떠 세상이 이원론적으로 또렷해짐 = (주체와 객체의 분리로 인해) 산이 산이 아님, 물이 물이 아님.


   마음의 우주 = ??? = ??? = 자기부정, 아집 여의기(란 다시 말해 인간이라는 의미가 입은, 몸을 비롯한 외부, 즉 무의식 깨우기)로 인해 이원론이 설 곳이 없어짐 = (그 자신의 무의식이던 객체를 깨워낸 주체는 곧 그 자신이 객체와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되어) 산은 산, 물은 물.


   다시 말해, 1) 아무 의문이 일지 못하던 마침표에 2) 자아라는 '원초적 질료'를 깨워내 물음표를 일군 다음, 3) 원초적 질료인 자아의 죽음을 통해 느낌표에 다다르기(는 깨닫기), 라는 겁니다.


   어깨가 절로 으쓱 으쓱.

   즐거워서 그런 것인지, 그래서 대체 뭘 어쩌라굽쇼? 싶어서 그런 것인지.

   도무지 당최 모르겠어서, 으쓱, 으쓱, 또 으쓱?





   세 번째 책을 읽어내기는 두 번째 책 읽어내기보다 조금 더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았어요. 첫 번째 책과 두 번째 책을 잘못 읽어도 크게 잘못 읽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나니 두 다리(라고 하면 두 눈동자와 두 손 정도 안 될까요마는 어쨌거나 얘기로 돌아가면 두 다리)에 힘이 빠져 주저앉을 밖에 달리 더 나아갈 수가 없었던 거지요.


   한참 같은 장소에서 맴돌 듯 나자빠져 있다가는 '뭐 첫 걸음에 나동그라질 수도 있지, 제까짓 게 뭐나 된다고, 한 번 디뎌본 적 없는 다리로, 일곱 걸음을 척척 걸어낼 줄 알았음?' 싶어, 까짓 것, 툴툴 털고 일어났습니다. 첫 번째 책으로 가기에는 걸어온 길이 길기도 기니 (이번 읽기는 망했음!) 가던 대로 내딛어 가보자고 했어요.


   바르도에 처한 염태는 한 번 깨닫기로 니르바나에 도달할 수 있는 순간이 매순간 순간순간 주어진다고 하는데 (바르도와 역바르도는 뫼비우스의 띠 같은 것이니 거기에서 되어가는 대로 여기에서도 되어간다고 치면) 실컷 디뎌 놓은 이번 책 읽기 어디에도 제대로 이해하기라는 '숨겨진 돌'이 있으리라고 크게 착각해 보렵니다.


   훕합!



뭣 좀 뒤틀린 심사가 있어서 그런가 툴툴거리는 투로 적어 놓았는데 말이죠. 사실로 말해 이야기는 점점 더 재미있어 집니다. 


1권이 끝나면서는 그저 촛불중이라는 육신이 이물스러워졌고 2권이 끝나면서는 그 이물스러운 육신을 벗기가 겁이 날만큼 막막하게 느껴졌었는데 3권이 끝나면서는 속박감이 좀 덜어지면서 그 몸(이라 하면 촛불중이면서 동시에 촛불중이라는 이야기 속에 떨궈놓은 독자의 눈)이 가볍게 느껴지는 것도 같습니다. 

티벳 사자의 서는 바르도에 처한 한 염태를 니르바나로 인도하기 위한 책이지만 결국 그가 깨닫지 못하게 되면 좋은 자궁(이란 다른 것도 말고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으로 인도하며 끝이 나고 있어서, 쭈루룩 따라 읽으면서 한 죽음(바르도)을 겪는 것처럼 여겨보게 만듭니다. 저한테는 칠조어론도 슬슬 그런 느낌이 들고 있어요. 작가가 의도적으로 육도의 문 닫기 순서에 의한 색깔로서 책의 소제목들을 정해놓았으니만큼 이 책은 아주 친절하게 풀어진 티벳 사자의 서라고 생각하고 싶기까지 합니다.

네, 근래에 이르러서는, 파드마삼바바라는 '기호(체)'를 만난 한 '의미(밀의, 용)'가 바르도 퇴돌(티벳 사자의 서)로 화현된 것처럼, 박상륭이라는 '기호'를 만난 '(별로 다르잖은 그) 의미'가 칠조어론(을 비롯한 선생의 잡설)로 화현된 것이 아닌가, 그래서 두 책은 한 언어의 서로 다른 방언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되고 그럽니다. - 이런 비슷한 까닭으로 암만 많은 조사들이 나서 들고 떠뜰어싸도 한 마디 말도 더 보태지지 않았다고 하는 게 아닌가, 한 세상 저물도록 떠들어대고도 한 마디 말도 안 했다고 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그러니까 여기가 바고, 실껏 떠들고 지친 시치미들이 몸을 누이는 곳이 아닌가, 하고, 상상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  읽어 놓은 게 티벳 사자의 서 뿐이라 그것만 알아듣는다는 게 함정!! 쿠힛쿠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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