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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법
박상륭 지음 / 현대문학 / 2005년 5월
평점 :
품절
읽으면서 '내편'과 '외편', '잡편'으로 되어 있는 구성에 대해 의문을 느꼈었는데, (특히 그것이 장자와 마찬가지의 구성을 따르고 있다니 더욱더 그랬었다), 작품 말미에 달려 있는 김윤식 교수의 해설에서, 그것이 해소됐다. 내편에서는 자신의 핵심적인 사상을 전하고, 외편은 그것에 대한 주석이며, 잡편은 다시 거기에 대한 더 친절한 주석이라고. 개인적으로 내편의 세 편 중에서, 가장 살 떨리게 읽었던 것이, 역증가, 그러니까 아담과 카인의 대화였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 '말씀의 우주가 개벽했다'는 문장을 이해하게 된 것은, 바로 그 역증가逆增加에서였다.
객관적으로야 그것이 박상륭의 진화론이 (아직 잡설품을 보지 않았으니, 이런 말은 참아두어야겠지만, 적어도 잡설품에는 아직 이르지 못한 여정에서 말해두자면) 찍은 어떤 정점으로까지 보이기 때문이고, 주관적으로야 카인과 아벨에 대한 주제(특히 창세기 3장)에 대한 애착이 매우 컸기 때문이었다. 전자야 더 말할 것이 없고, 후자로 인해 연정을 토해 놓자면 (이건 어쩌면 실로 구역질 날 만한 것인지도 모르니까) 내가 지금껏 만난 카인 중, 단연, 비교 불가능하도록, 스스로를 구원해놓고 있는, 카인이었다는 점이다. (카인을 구하기 위해 달려든 작가의 족보가 어딘가에 있기는 있다. 그것들 찾아보기도 한 재미는 한 재미일 듯. 그러나 아담 앞에 와 앉은 이 놈 카인 때문에, 그 재미가 다 증발해버렸다면, 이건 연정 고백의 연장선일까, 연정 고백의 뒷담화일까?)
내편內篇
무소유無所有는, 뒤에 달린 주석에도 나와 있듯이, '소유한 것이 없다'의 의미가 아니라, (not being born is said to mean not having any abode) '존재하지 않는다 not exiting'의 의미라고 한다. 하여 훌쩍 뛰어넘어 떠들어본다면, 무소의 무소는 (역시 뒤에 달린 주석에도 나와 있듯이) 시간에 있어 시중(時中, 자정, 미래가 현재가 되고 현재가 다시 과거가 되며 과거가 다시 -모래시계적 상상력에 의해- 미래로 변모하는, 그래서 미래도, 현재도, 과거도 아닌, 시간이 아닌 시간, 그 일점)에 해당할, 공간에 대한 명칭(所中)이라고 해야할 것 같다. 시중이 시간의 태胎인 것처럼, 무소도 공간의 태이다. not being born is said to mean not having any 'abode'에 있어, abode에 해당할 것이, 그래서, 공간의 태, 무소일 것도 같다.
어부왕(은 현재 시중에 들어 있다고, 주석에 일러 두었음을 들어, 그)를 위해, 불사조를 찾으러 떠났던 시동이, 처한 곳이, 바로 그 무소이고, 그가 그 무소에서, 연금해 낸 것이 바로, 현자의 돌에 비견될, 뼈로 만들어진 만다라, 그것일 것도 같다. 그렇거나 어쨌거나, 어부왕을 위해 떠났던 시동이는, 실로 떠났었는지 어쨌었는지 모르겠지만, 돌아오지는 못하고, 하나의 이정표 (모든길은그러나시작에물려있음을, 걸음을 멈추면, 길은 생겨나지 않는다) 같은 것이 되어 버린 것은 아닐지. 시동은 시동으로서 좋은 돌을 하나 연금해 낸 것 같은데도, 어쩐지 그것을 따라가는 (이) 눈은, 거기까지 다다르지를 못한다.
(주석에 따라) 파르치발이 몸의 우주(카투린드리야)에서 시작해 말씀의 우주(판켄드리야)의 조금 더 된 곳까지 나아간 인물이라고 상정할 때, 그러면 우리의 시동이는, 말씀의 우주에서 시작해 마음의 우주로 나아가는, 그래서 파르치발과 비슷하되 비슷하지만은 않은, 그런 인물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해 볼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가 도달하는 어떤 이정표도 마음의 우주스러운 데가 있는 것은 아닌지?
소설법小說法
기起 운명의 기호 1, 잠자는 공주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그 공주의 원형이 되는 얘기다. 패관이 그 얘기를 데리고 온 것은, 그녜가 자면서 낳았다는, 그 자식에 대한 얘기를 하기 위해서인 듯도 싶은데, 공주의 잠이, 말의 바르도와 같이 보여서인 것도 같으다. 말의 바르도에서 태어난 자식은, 그 이름이 판타지라고 이른다. 판타지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고전적古典的인 판타지(로서, 사람의 마음의 풍경을 그리고 있거나, 자연에 모태를 두고 일어난 신들이나 요정들에 대한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신전적新典的인 판타지(는 인공적인 것으로, 지옥적인 상상력으로부터 비롯된 것들일 것이다, 사람의 영혼을 갉아먹는, 사람을 좀비로 만드는, 그런 것)이다. 패관은 후자에 대해서 매우 염려스러운 시선을 던지고 있다.
판켄드리야가 그 자신의 우주(란 말씀의 우주)를 개벽하고 그 개발의 끝에서 쥐게 된 것이 사고력이라고 한다면, 그것의 최선의 결과물은 사고의 결과, 철학이라고 할 수 있겠다. 패관이 말하고 있는 상상력은 미적인 감각으로서 판켄드리야의 전단계인 카투린드리야의 종교라고 할 수 있을, (미적 감각의 발달된 결과물로서의) 예술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사고력은 인간을 (고통스러울지언정) 끌어올린다는 점에서, 발달을 바랄 만한 것이되, 후자는 그렇지 않다는 점에서, 패관에게는 (철학보다도) 한계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듯하다. 여기, 신전적 판타지라고, 해서, 문제를 삼고 있는 상상력은, 말의 바르도에 내려, 말을 어거해(조작화해) 내는 사고력(은 능동태)과 달리, 바르도 풍경에 어거되어 좀비(는 수동태)로서 기능하고 있는, 그런 것을 이르고 있는 듯하다.
신전적 판타지에 기반한 신인류를, 패관은 '네모사피엔스(Neo+Homo+Sapiens,Nemo Sapiens)'라고 이르고 있는데, 자아라는 고통스러운 씨앗으로 위쪽으로 오르려는 호모 사피엔스와 달리, 그것들은, TV를 비롯한 화려하고도 기백 넘치는 신전적 판타지 (영상)에 홀려, 카투린드리야에서 판켄드리야로 어기차게 올라오며 개척해 냈던, 자아 인식이라는, 유익한 수단을, 잊고, 지워버린다. 패관이 염려스러워하는 지점이, 아마도 이 지점인 듯 싶다. (패관이 고수해 온 진화론에 따르면) 커다란 위기가 닥친 것이다. 위로, 위로 향하던 그 (진화의) 방향이, 신전적 판타지로 인해, 아래로, 휘딱, 휘어들어가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만약 네모사피엔스가, 눈앞에 보이는 환영을 바탕으로, 이 세상이 그것과도 같이 알맹이 없는 환영이라는 것을 깨달아낼 수 있다면, 그것은 어쩌면, 호모사피엔스보다, 보다 진화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하고 있다.)
승承 운명의 기호 2, 개구리 왕자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그 개구리에 대한 얘기다. 공주와 뽀뽀해서, 인간이 됐다는, 그 개구리. 구렁이 왕자 얘기와도 같은 맥락의 얘기인데, 공주라는, 여성성에 의해, 수피獸皮를 벗기운, 얘기이기도 하다. 패관은 이런 류의 얘기를 맷돌 음사라고 이르고 있는데, 여성 상위의 얘기라는 뜻이다. 여성이 발휘하는 수용성으로 인해(어머니다움) 남성인 개구리가 짐승의 탈을 벗기움당하고 있다는 뜻에서 그렇게 이르고 있는 듯하다.
전轉 운명의 기호 3, 금당나귀는, 루시우스라는 놈이, 팜필레라는 마녀가 연고를 발라 주문 외운 뒤 부엉이로 둔갑하는 것을 보고, 저도 (독수라기 되고 싶었던 까닭에) 몸에 연고를 발라 (주문은 모르니까) 몸을 비틀어대던 후에, 당나귀로 전신轉身했는데, 어이쿠야, 이놈 하초가, (루시우스일 때의 자기와 달리) 무척이나 실해, 그중 위로를 삼았다는 얘기다. 그냥 읽어도 인간인 것이 짐승으로 전락한 (그래서 불거진 생식력에 뿌듯했을) 것에 대한 얘기라는 것은 알겠다. 패관은 루시우스가 선남자들의 전형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가 비상에 대한 꿈을 꾸면서도, 왕성한 생식력을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패관의 눈길을 끄는 것은, 여기에 드러나진, 당나귀라는 기호(루타)와 인간이라는 기의(아르타), 그러니까 루타와 아르타의 어긋남이다. 바르드에서 업력에 쫓겨(악테온) 눈에 보이는 '불 밝힌 혈'(은 암수 흘레붙기, 몸 가져 태어나기)에 뛰어들기(는, 그러니까 윤회)가 패관의 눈에는, 루타와 아르타의 어긋남으로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결結 운명의 기호 4, 아킬레스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그 아킬레스에 대한 얘기다. 뒤꿈치가 약점인 그 아킬레스. 앞서 패관은 여러 번, 인간의 수피가 뒤꿈치에 있다고 말해왔다. 그래서 이 지점에 이르러 읽게 되는 아킬레스에 대한 얘기는, 앞으로 하게 될 이야기를, 눈앞에 훤히 그려보여준다. 수피 벗기, 뒤꿈치 파내기, 스스로 고자되기. 이제 판켄드리야는 쉐쉬빈드리야(육관 유정)가 되기 위해서, 무거운 뒤꿈치를 벗어버리고, 날개를 돋와내야 한다는 것이다.
말씀이야 은혜롭지만. 이제 갓 사고력에 눈뜨고 있는 것 같은 자에게, (마음의 우주를 개벽하기 위해 필요하다는 그) 추상적 사고는, 여전히, 초식 동물 앞에 차려진, 육미肉味와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이 小說法을 통해서, 추상적 사고력이라는, 마음의 우주라는, 그것의 이물스러움이 조금은 옅어졌다는 점에서, 말씀이, 은혜로웠다고, 말해 놓을 수는 있다.
역증가逆增加에서 보이는 것은 창세기(와 욥기)이다. 창조된 에덴에 우뚝 선 생명 나무를 놓고 뱀이 그 혀를 날름거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욥기가 껴드는 자리는 여기이다. 욥을 두고, 여호와가 사탄이 벌이는 한 판의 노름) 우주적인 유혹이 시작되는 셈이다. 말씀되어진 대로 그들은 열매를 먹었고 지혜를 얻어, 그들 태어났던 에덴이, 가시덤불에 다름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우주적 비극이 시작되는 셈이다. 그러고도 그 비극은 끝이 아니다. 최초의 살해가 시작된다. (창세기 3장) 카인이 아벨을 쳐 죽이고, (카인은 저주를 받아 떠돈 후) 아홉 세기가 훌쩍 지나, 부자父子는 상봉한다. (어미는 바리데기가 되어 피살레물, 기살레꽃 구하려, 에덴으로 가, 이 자리는 부재중.) 울며 정을 나눈 후, 그들은 한 법석法席을 펴고 앉는다.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제기될 의문을 아담이 하고 있고, 열세를 하고 온 것으로 설정돼 있는 카인이, 거기에서 답변되지 못할, 이야기를 꺼내든다. (이 이야기는 그리고 작가가 써내려가는 한 벌의 창세기-는 세상을 열어젖히기이기도 하고, 인간을 열어젖히기이기도 하다-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의 진화론이 상세하고도 친절하게 여기 펴늘어져 있다.) 그들의 이야기에 두통을 일으킨 '사람의 영상(은 신)'과 '짐승의 형상(은 사탄)'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통해, 카인이, 예수에 대한 유다의 역할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유다가 말씀의 우주에 대한 문열이 노릇을 했다면, 카인은, 여기 이 자리에서, 마음의 우주의 문열이 노릇을 하고 있는 듯도 보인다. 신이 창조하지 않은 마음을, 다른 고장에서의 배움을 통해, 열어보이고 있는 듯하다는 말이다.)
외편外篇
잡상雜想 둘에는 목련과 유토피아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데, (차별하여) 유토피아에 대한 얘기만 조금 게워 놓자면, 유토피아의 대척점에 있는 것이, 전쟁과 살상일 게다. 전쟁과 살상은 역易의 균형 잡기와도 관련이 있다. 그래서 그것은 반드시 '나쁜' 국면만을 갖는다고 하기 어렵다. 이런 주제 아래에서 왕왕 예로 들어지는 것이, 한 들판에 있는 초식 동물과 육식 동물에 관한 것인데, 초식 동물의 피흘림 없이는, 들판의 황폐화를 막을 수도 없고, 육식 동물의 굶주림도 면할 수 없어서 그렇다. 그것들의 피흘림은 그래서 들의 (잠깐 동안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한 수단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고통스러운 일이 되지 않으랴. 인세人世 역시 (몸을 지녔음으로 해서) 그와 같은 역의 자장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멈출 수 있는, 역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영역이 있으니, (말씀의 우주 얼마 정도까지에는 손길이 미친다는 얘기에 따라 함부로 추측하건데,) 말씀의 우주 위편 어디(는, 아마도 문화?)에서부터, 마음의 우주까지의 영역이다. 거기에 다다르는 사다리로서 제시되는 것은, 물론, 우주적 고행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한, 자기의 부정이다. 욕망으로부터의 해방. : 그러니 여기 어디에 지상적/일반적인 의미하고는 다른 (그래서 어쩌면 상태라고 일러야 할 것일지도 모르는), 또 다른 유토피아의 선언이 있는 것도 같다.
만상漫想 둘에서는 손과 갈매기/까마귀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전자에 대한 호서식 지혜란 손=남근=눈=창조력=말씀이겠고, 호동식 지혜란 구지의 손가락 때로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하여 공空이라고. 갈매기와 까마귀에 대해서 (마음대로) 훌쩍 뛰어넘어보자면, 그것들은 인지의 개발에 시차를 두고 있는 생물들로 보인다 한다. 갈매기는 홍합을 붙들고 반나절을 씨름해야 짭쪼롬한 맛을 본다면, 까마귀는 그것을 들고 아스팔트나 바위에 내던져 홀랑홀랑 (껍질) 벳겨 먹는다는 말씀. 이 인지의 개발차는, 패관으로 하여금, 몸의 우주에 속한 밭을 일구는 농부와 마음의 우주에 속한 밭을 일구는 농부 사이에 놓여 있는 개발차로, 쓸쓸하게 눈돌리게 한다.
위상爲想 둘에서는 '유위有爲/무위無爲'와 '수위受爲/수위授爲'가 논해지는데. 일단 '유위/무위'에서는 중원의 유위/무위에 대해 천축의 상스크리타/아상스크리타를 대비시켜, 것들의 의미를 밝히고 있다. 전자들이야 냅두고서라도, 후자들을 들여다보면, 무위와 아상스크리타는 비슷하면서도 사뭇 달라 대극적이지 않나 하고, (패관은) 말하고 있다. 아상스크리타가 고도의 문화화를 성취하고 있는 반면에 무위는 자연으로 퇴조전이를 치르고 있어 보이기 때문이라고. 하여 이어지는 것은, 어째 무위가 자연으로의 퇴조전이인가, 하는 점이겠다. (살짝 끼어든 것은, 무위를 날것으로, 아상스크리타를 익힌것으로 말하느라고 그랬을 테지만, 레비 스트로스의 '날것과 익힌것' 사이에, 패관은 반쯤 익은 것을 끼워 넣는다. 이 반쯤 익은 것이, (무위의) 도道와 (아상스크리타의) 불佛 사이에서 -달마를 통해 분만된- 선禪이라고 한단다.) 패관은 진화론자이고, 그 진화론은 몸-말씀-마음을 축으로 삼고 있다. 몸이 속한 곳이 자연이고, 축생도이며, 그곳은 인간이 자아라는 문화의 씨앗을 통해, 막 벗어난, 그곳이다. 하여 인간을 배부르고 등따숴 머릿속이 텅 빈 축생으로 돌려 놓기로, 그 치세의 도를 삼은 무위라는 것이, 패관께는, 퇴조전이로 보이게 되는 것이다. '수위/수위'에는 유마힐과 그를 문병한 문수사리 사이에 주거니받거니 한 말의 타래가 담겨 있다. 패관의 세계관이 선문의 그것과 어느 정도 빗겨 있는가를 눈치껏 살펴볼 수 있다.
오상誤想 둘에서는 '꽃을 든 남자(를 웃지 않고 읽어낼 수 있는 심정이 얼마나 부러운지! 빌어먹을 '샴푸 브랜드' 때문에, 가섭이가 나올 때마다, 가섭이마냥 파안대소하게 된다, 젠장, 꽃을 꺾어버릴!)'와 '칼을 든 여자'의 얘기가 담겨 있다. 전자의 길고 긴 (선문) 미로를 확 밝혀주는 것은 패관이 마지막에 들어주는 고금소총판 '內病在吾내병재오'라는 얘기가 아닐까 한다, '홀연영오'. 그래서 이제는 가섭이가 나설 때마다, (빌어먹을 파안대소와 함께) 홀연영오하게 만들어준, '손바닥'이 떠오를 듯하다. 칼을 든 여자는 임제록에 담겨 있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등등 '죽이기' 시리즈에 대한 패관의 해석이다. 죽이기 시리즈에서 문제가 머리를 쳐드는 지점은 '주와 객'이다. 언제나 나가떨어지는 것은 객이라는 것. 여기에 대해 패관이 꺼내놓은 얘기가 며칠을 '꿍꿍 밭(心田)'에서 굴렀다. 배껴놓으면 이렇다.
'주객'에의 인식이 전제되어 있지 않은 법행, 그러니까 어느 상태에 이르른 한 수도자가, 주객의 차이를 잃어, 자기를 죽인다고 내닫는 짓이, 결과적으론 객을 해치고 덤빈 것과 같은 그런 살생, -말하는 구도적 살인과, '주객'에의 강한 인식을 저변한 법행, 예를 들면 봉조살조 같은 것은, 절대로 같은 것들이 아니다. (p319)
잡편雜篇
깃털이 성긴 늙은 백조白鳥/깃털이 성긴 어린 백조白鳥는 경계를 넘어 글쓰기에 실렸던 것이고, A RETURN TO THE HUMANET은 원광대에서 열렸던 세미나에서 발표됐던 내용이다.
말미에 붙어 있는 김윤식 교수의 극도 재미 있었다. 역증가가 상영되는 극장 앞에서 흥분하고 앉았던 것은, 그렇게, 한둘이 아니었던 모양이다.